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1월 3일 주일 예배
이혼에 대하여 (마태19:1-10)
오늘 저는 매우 매우 민감한 문제인 이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이혼을 거부해 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러한 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교리는 그렇지만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보면 이혼의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작년 통계를 보면 이혼율은 결혼건수의 1/3에 달합니다. 물론 제 말은 결혼한 그 부부가 이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해에 결혼은 30만쌍이 하면 이혼은 10만쌍이 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기간의 차이만 있지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둘 사이에는 엄연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그 차이를 말씀드릴려는 것이 아니고 저는 다른데 주목하고자 합니다.
뭐냐 하면 우리 교회안의 이혼문제는 어떻게 할거냐는 거지요.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는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이 교회의 허락을 얻어야 이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이혼이 성해도 교회의 책임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구 이혼하는 것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막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세상의 이혼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막아 치우자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기독교 가정에서도 이혼이 이제는 상당히 많아 졌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재혼가정도 많아 졌습니다. 사별의 경우가 아니라 이혼하고 재혼한 가정도 많아 졌습니다. 이게 뭐가 문제냐고요?
그래요? 사실 이건 상당히 큰 문제입니다. 나중에 나옵니다만 이건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겁니다.
교회는 결코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안의 성도가 바깥에 나가면 시민이 되어서 그들의 영향을 세게 받습니다. 나쁜 영향은 좋은 것보다 훨씬 빨리 받아 들입니다.
그건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성이 몸에 착착 감깁니다.
자, 그런데 이 교회내의 이혼을 어떻게 할겁니까? 재혼부부들은 어떻게 할겁니까?
이혼은 어때요? 교회는 오늘날 과연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을까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이혼 한가지로 박사 논문을 쓴 분들도 있던데 저는 여기서 논문을 쓰고 싶지는 않고 그냥 단순히 주님의 말씀을 상고해 봄으로 이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이 몰라서, 정말 이혼을 해도 되는지 아니면 안되는지를 예수님에게 물어 보려고 예수께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확고한 이혼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왜 와서 물어 봅니까?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다시 말해서 말꼬투리를 잡아서 그를 비난하고 고소하려고 이런 교묘하고도 민감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1.모든 죄로 이혼이 가능하다
먼저 여기서 “연고”란 말은 ‘이유’란 말로 ‘법정에 고소할 죄목’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나와서 아무 죄목이라도 가지고 여자하고 이혼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무슨 죄를 짓든지 이혼할 수 있습니까?’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여성분들이 거슬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사람들 정말 한심합니다. 여자를 마치 자기의 부속물처럼 여깁니다. 요즘 관념하고는 참 동떨어진 이야기이지만 당시 유대의 남자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두 이처럼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힐렐 학파는 자유주의 율법해석 학파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죄목’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죄목은 정하기 나름이므로 남자가 이혼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이혼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거지요. 요리가 맛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여자가 침을 질 흘리며 자고 있더라, 자녀를 잘 못 키운다. 온갖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심지어는 통제할 수 없는 생리현상을 가지고도 이혼사유로 삼았습니다. 이 인간들은 완전히 독재자들입니다.
그것도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이 이 모양입니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와 정반대로 율법을 엄격히 해석하는 ‘샴마이’ 학파가 있는데 이들은 간음 외에는 결코 이혼 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께 질문하는 이 질문은 ‘당신은 힐렐 학파를 지지하오 아니면 샴마이 학파가 맞다고 생각하오?’ 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한쪽의 편을 들어 주면 당연히 상대편에서는 야유를 하고 공격을 할 것입니다.
곤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곤란의 유무를 떠나서 예수님의 답은 무엇일까요?
이게 정치적으로도 곤란한게 당시 유대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가 걸려 있습니다. 이 사람은 헤롯의 아들로 이유없이 전처와 이혼하고 ‘헤로디아’하고 결혼을 했는데 ‘헤로디아’역시 남의 유부녀였다는 거지요. 이것을 공격했다가 세례 요한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잘못 말하면 헤롯에게 잡혀가서 죽을 수도 있는 아주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이러한 민감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보다 범위가 넓어 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기사를 인용합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 말은 단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조금 의미를 엄격히 하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은 동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이시고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는 존귀와 비천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겁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가지고 아담이 만든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어 버리네 어쩌네 하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도 하나님이 만드신 귀한 사람이므로 결코 너희의 밑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여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시작은 여자에게 불리한 이혼 조항이 말이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이어서 예수님은 ‘결혼이란 무엇인가?’하는 본질에 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결혼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는 걸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뭐 별 내용은 없고......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한글로 백날 읽어봐야 별다른게 없습니다. 혹시 결혼하면 부모와 분가를 반드시 하라는 말인가?
여러분, 주님의 ‘떠나라’는 말은 그 말이 아닙니다. 이건 창세기에서 설명드렸지만 이제 부모와 떠날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을 떠나 보낼 준비를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럼 언제 완전히 떠납니까? 그건 부모님이 돌아 가셨을 때 완전히 부모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떠나는 것은 분가한다는 말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결혼하면서 독립준비하면 너무 늦습니까?
글쎄, 이것도 다음에 보기로 하고 일단 넘어 갑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떠나서’와 ‘합하여’입니다. 여기의 ‘떠나다’는 말은 능동형으로 쓰였고 ‘합하여’라는 말은 수동형으로 쓰였습니다. 즉 떠나는 것은 남자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합하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합하여진다는 말입니다.
누가 합하게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합하게 합니다.
이 말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아도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합하여 진다, 즉 결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결혼이란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합하게 하셨으므로 인간의 마음대로 헤어지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합하여”라는 말은 원래 아교풀을 의미해서 아교풀로 붙여 놓은 것처럼 굳게 결합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교풀로 붙여도 떨어 질수도 있기는 한데 그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하.
여기에는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합하여 져서는 안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동성애자들이 성적소수자라는 말로 은근슬쩍 묻어 들어오려 하는 풍조를 매우 경계합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든 창조목적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자 다시 본문을 따라 갑시다.
여기에 “아내에게” 합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뭡니까?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와 합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내에게 합하라!
이 말은 아내야 말로 그 사람이 합해야 할 상대방이라는 뜻입니다. 즉 아내가 아닌 다른 이와는 결코 합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바로 결혼의 신성한 불문율인 것이지요.
또 본문에 ‘그의’와 ‘아내’ 역시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이 하나님이 정하신 진정한 “합하여”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부일처와 성적 질서까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앞으로 반드시 합하라는 말입니다. 즉 결혼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입각하여 반드시 해야 되는 필수사항이라는 말입니다.
이혼뿐만 아니라 지금 이땅의 또 다른 문제는 미혼이 너무 많다는 거지요. 이혼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결혼자체를 안하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 미혼남녀의 적어도 1/3에서 많으면 절반까지 결혼을 반드시 해야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여기에는 문화적, 사상적인 문제, 육체적, 경제적인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제가 미혼의 노총각 노처녀에게 뭐라고 강압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그냥 결혼이라는게 우리 하나님의 명령사항이라고만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것은 또 다음에.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둘이 합하여 두 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사실은 결혼하지 않았을 때는 불완전한 한 쪼가리에 불과합니다. 둘로 나뉜 것 중의 한 쪽, 이 두 쪼가리들이 합하여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부부가 한 운명 공동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몸이기 때문에 ‘네가 잘 안되어도 상관없어, 나만 잘되면 돼’ 이런게 안통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옛 말에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예수도 몰랐고 성경도 몰랐는데 성경적인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데요.
그리고는 주님은 “읽지 못하였느냐”는 말로 주님의 말씀이 사실은 성경에 다 나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그렇게나 율법을 좋아하는데 이게 다 창세기 2장에 나와 있는데 너희는 도데체 뭘 읽었느냐는 힐난인 것이지요.
3.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주님은 이제껏 결혼의 근본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이란 뭔가?
그래서 이제부터는 결론을 향해 달려 가는데요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이 말은 5절에서 한번 했던 말씀이므로 중복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십니까? 그건 이 말을 여전히 남자들이 깨닫지 못하므로 제발 깨달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라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함께 멍에를 메게 하다’란 말입니다. 보통 함께 멍에를 메고 밭을 갈려고 하면 반드시 동일한 종류의 동물을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우리가 동일한 부류임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결혼하여 한몸이 된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째요?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어때요?
우리 주님은 너희의 결혼이 하나님이 성사시킨 것이므로 결코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고 나자 이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 하나가 물어 봅니다.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사실 이 말은 신명기24:1에 나와 있는 말입니다. 신약을 반박하기 위해 구약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말이 틀립니까?
아버지는 이혼해라 하고 아들은 하지마라?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다시 답변을 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바리새인의 말이 사실이기는 한데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깊은 뜻이 있는 모양입니다.
일단 원문을 다시 재해석해 볼까요. 원문에는 한역에는 생략된 ‘너희’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 즉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너희 아내 내어 버림을 너희에게 허락하였거니와” 보시다시피 너희라는 말이 자꾸 사용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 즉 구약성경을 들어 예수의 가르침을 반박하려는 소위 선민이라는 너희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렇게나 알기 쉽게 풀어 해석해 주었음에도 이혼이 하고 싶어서 끝까지 시비를 거는 너 이 악한 유대인들아! 바리새인이라는게 성경의 본뜻을 알지도 못하고 자구에만 매달려 이를 악용하려고 하다니!
이런 뜻으로 너희를 세 번이나 사용하신 겁니다.
‘마음의 완악함’이란 말은 완고하고 냉담하며 잔혹한 마음이지요.
원래 이혼증서를 써 준 이유는 아무런 생계대책도 세워주지 않고 아내를 내어 쫓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여성을 보호하려고, 이혼을 하려면 적어도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이혼을 어렵게 하고 여자를 보호하려고 한 취지라는 것입니다.
남자들 너희들 좋으라고 적어 놓은 규정이 아니라는 거지요.
남자들의 일방적인 횡포를 규제하고 이혼당한 여자도 다시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도록 이혼증서를 써 주는 법을 마련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시려고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 이혼에서 남자는 보호를 못받나요?
당시 대부분의 이혼이 남자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여자에게는 경제권이 없었으므로 이런 식의 보호책이 여자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또 다른 말씀을 하시겠지요.
자, 본래는 어떻는데요.
여기서 ‘본래’는 ‘창조시부터’란 말입니다. 창조 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뭔데요?
그때는 이혼이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나중에 한 몸을 깰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인간이 악해졌기 때문에 이혼이라는게 생겼고 그래서 여자를 최소한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증서를 주도록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증서가 이혼을 합법화하고 쉽게 하려고 만든게 아니라 여자를 최소한도로 보호하고 이혼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만들려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좀 조심스러운데 이걸 성경에 적용해도 될는지...헌법을 공부하면 헌법이 모두 똑같은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즉 헌법에는 근본원리를 말하고 있는 헌법핵과 법률과 같은 사항이 있습니다. 하도 법이 자주 바뀌니까 바꾸지 못하도록 헌법이라는 형식으로 넣어 놓았지만 실제로는 법률정도의 사항을 헌법률이라고 합니다. 이 ‘헌법률’은 ‘헌법 핵’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신명기의 이혼 규정은 창조시의 하나님의 근본원리에 비추어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말이 좀 되는 것 같습니까? 신명기의 법은 이스라엘 국가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주신 최소한의 규정입니다, 악한 인간을 도덕적으로 교화하려고 하는 도덕규범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최소한 이것만은 지키라고 하는 국가의 존속과 구성원들의 안정에 필요한 최저선, 법조항을 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인간들이 모두 법을 어기게 되면 그 법을 실효성이 없기에 법을 바꾸거나 아니면 모든 사람을 범법자로 감옥에 집어 넣어야 합니다. 법이라고 정해놓았는데 아무도 안지키고 모두 어기면 법의 권위가 땅에 떨어 지기 때문에 법은 현실성을 가집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너희들이 너무 악하니까 모세의 법이 그렇게 된 것이지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 하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이혼문제에 단호한 결론을 내리십니다. 먼저 주님은 이혼에 한가지 예외규정을 두십니다. 음행.
이것 말고는 결코 이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술 더 뜹니다. 음행으로 이혼한 연고외에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하면 그건 간음이다.
도입부에 제가 재혼부부가 문제가 된다고 말씀드렸죠? 바로 이겁니다.
와우, 엄청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주님은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 학파의 손을 들어 준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엄격한 규정을 말씀하시지요. 게다가 왜 이혼해서는 안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결혼한 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고 너희는 이혼하고서는 결코 한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쪼가리에 불과한 불완전한 존재이다.
주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혼이 주로 남자들의 다른 여자에 대한 성적 욕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지요. 더 젊거나, 더 아름답거나, 더 부유하거나...다른 여인을 취하려고 하니까 지금의 아내가 걸리적 거립니다. 그러면 여러명의 여자하고 같이 살면 되겠네요? 하하, 이것도 다음에 봅시다.
여자의 질투, 수많은 여자를 어떻게 먹여 살리냐? 쟤는 늙고 못생겨서 아예 꼴보기가 싫어....등등 인간의 이기적이고 비뚤어진 욕망은 온갖 핑계를 갖다 붙입니다. 그래서 갖은 핑계를 대어서는 여자를 내어 쫓으려는 간악한 속셈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더 범위가 넓어 집니다.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성경에서 간음은 처녀가 아닌 다른이의 아내,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애초에 이혼이 안된 여자와 합했기 때문에 그건 결혼이 아니라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뭐든 단호하고 시원시원합니다.
어때요, 음행외의 연고로 인한 이혼은 여러 가지 범죄를 계속해서 만들어 냅니다. 이말을 듣고 있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제자들이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하하, 이걸 우리는 어깃장이라고 합니까?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 여자에게 평생 충성해야하고 이혼도 못한다면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게 낫겠다고 항변하는 겁니다. 이혼금지를 구속이고 속박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모양이니까 당시 유대사회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회였는지 아시겠지요?
독신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보기로 하고 우리가 결론적으로 오늘날 이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보면 뭡니까?
우리 주님은 이혼을 원칙적으로 불허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외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음행.
바울서신을 보면 여기에 몇가지가 더 나옵니다만 그건 그때 봅시다.
우리는 주님이 왜 이혼하지 말도록 하는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본적으로 성경은 명문으로 몇가지 예외적인 경우에 이혼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를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결혼의 약자. 마찬가지의 사유로 우리는 교인들이 개개의 사정 때문에 이혼하는 것에 대해서 원칙적으로는 반대하지만 몇가지 예외조항을 첨가할까 합니다.
상대방의 불륜, 음행이지요. 이때도 상대방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한번 기회를 주는게 어떻습니까?
또 하나는 아내가 남편의 폭력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사실 이건 예수님이 드신 이혼사유보다 더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럼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은 하시지 않았을까요?
남편이 아내를 , 아내가 남편을 죽인다는 것을 당시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거나 입에 담기조차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하나는 바울서신에서처럼 서로 신앙이 달라서 도저히 핍박 때문에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때. 아마 이때는 육체적인 핍박도 겸할 것이므로 두 번째하고 비슷하겠습니다만. 요즘은 정신적인 핍박도 극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이혼사유로 이 세가지를 정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음, 남편이 직장에서 짤리고 돈을 못벌어다 준다고 이혼하는 일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남편이 못생겨서 , 남편이 불구가 되어서, 남편이 마음에 안들어서 이건 안됩니다.
사실 요즘은 주님 당시의 이스라엘과 반대가 되어서 여자들이 주로 이혼을 요구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혼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이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되어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이 얼마나 약한자를 보호하려 하시는 지를 잘 알고 상대방에게 억울한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성경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게 겸손과 사랑이지요. 겸손은 남의 아랫자리에 위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말로 “니가 내 입장이 되어봐라”좋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배우자의 입장이 한번 되어 봅시다. 그리고 상대방을 사랑하면 존중해야 합니다. 제발 그렇게 삽시다.
내가 맞아 죽을 것 같다.
아니면 배우자가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도저히 나에게로 돌아 오지 않는다. 이러면 모르지만 다른 때는 한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은 결코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닙니다. 노총각 노처녀들은 좀 거슬리겠지만 독신은 특별히 은사를 받은 사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에 결혼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합은 내가 한때 눈이 헤까닥 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것입니다.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결합이라! 너무 굉장하고 멋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조금 부족하고 아쉬운 것은 서로 붙들어가며 채워가며 그렇게 삽시다.
부부사이에 누가 더 이익이고 누가 더 유리하고 같은 웃기는 짓은 그만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짝지워서 한몸이 되게 하신 부부입니다.
우리는 결합이 풀려서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며 제대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운명공동체입니다. 배우자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고 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
사랑과 겸손은 기독교인의 이대 덕목입니다.
결혼에는 사랑과 겸손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된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되는 겁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혼하고 재혼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시비할 수 없는 깊은 이유와 아픔이 그곳에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지옥같은 고통이 있었기에 그런 불가피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비난만 하지는 말고 따뜻하게 감싸고 위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벌어진 현상 때문에 사람을 정죄하고 내어 쫓는 분이 아니라 죄인의 친구였다는 사실도 기억합시다. 참 주님의 뜻대로 살기 어렵지요? 깊게 생각하지 말고 한가지만 생각합시다. 사랑. 약자에 대한 배려. 그거면 됩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성도들의 가정에 사랑으로 하나되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1월 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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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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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이혼이라는 것이 일종의 질서유지 (화목) 를 위한 금지체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경우 제한 속도 규정이 있습니다. 100내지 120킬로미터를 넘기면 안 된다는 규정입니다. 이러한 규칙들로 인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고속도로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한 속도나 신호 체계도 간혹 무시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달리는 구급차는, 신호위반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어떤 체제와 규칙을 갖든지 간에,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 의견입니다만, 내가 죽기 직전인 위급한 상황에서는 이혼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더 좋은 조건, 매력적인 조건의 상대방이 나타나서, 불륜을 저지르거나, 이혼을 검토한다면, 그건 이기적인 발상일 수 있다고,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버려지는 배우자를 경제적으로 충분히 배려한다고 하더라도, "내 만족을 위한 이혼"이라는 것, 그 자체가 타인을 망가뜨릴 수 있는 비인간적 행위라고 판단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담을 좀 더 덧붙이면, 미국에서는 남녀간의 사랑을 신성히 여겼기에, 이에 관한 직접적인 심리학 연구가 오래도록 지탄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수십년 동안 드디어 불문율이 깨지며,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이며, 설레임은 최대한 길어봐야 3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별로 현실은 신성하지 못했던 게지요. 하하. 그런데 의문스럽게도,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경우, 놀라운 안정감을 얻는다는 이야기도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상대를 할퀴는 심한 말 대신에, 상대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말을 5배 더 많이 하면, 부부관계가 깨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표현을 정말 쉼없이 해야 합니다. 잘못을 여러 번 해놓고, 좋은 일 한 번으로 퉁치려는 이기심에 대해서, 심리학 연구결과는 정통으로 철퇴를 날립니다. 그래선 안 돼! 한 번 잘못을 했으면,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최선을 다해서 극진히 잘해주려고 노력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이 참 경이로웠습니다.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풀어서 정의한다면, 항상 다섯 배는 더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사이라고 풀어써도 좋겠지요.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면, 세상 전부를 줘도 바꾸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받을까를 계산하지 말고, 무엇을 더 잘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행동해보면 한결 삶이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잘해줄 생각은 없고, 그저 내 욕망을 채워서 즐기다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런 설레고 짜릿한 방황의 삶은 얼핏 즐거워 보이겠지만, 그 자극이 때로는 자신의 안정감을 집어삼켜버리고, 더욱 문란한 길로 접어들게 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설교의 결론대로, 결국 기독교인은 사랑,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로 단단히 무장하고 살아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행복과 평안은 분명 거기, 사랑과 배려 속에 있는게 아닐까 합니다. / 2013.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