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8일 주일 예배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 (마태6:1-)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한가지 큰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도라는 특권이 없었다면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서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살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기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까?
아니면 기도에 한번도 응답받은 경험이 없습니까?
그래서 기도는 그냥 형식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안들어 주겠지만 혹시라도 모르니까 그냥 기도합니까? 그냥 보험 들듯이.
저는 아직도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산으로 기도하러 많이 다녔던 것 같습니다.
도봉산, 북한산, 소요산, 청계산, 수락산, 불암산, 설악산, 마니산, 금정산, 윤산, 배산, 천성산, 백운산, 매암산 등등 참으로 수많은 산으로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눈위에서 매트를 깔고 침낭 속에서 떨면 기도한적도 참 많습니다.
그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사실 추운 겨울 산위에서 기도하는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새벽녘에는 결코 다시는 밤에 산에 기도하러 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드냐는 듯이 다시금 기도하러 갑니다.
그건 기도의 재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재미는 어떨 때 느끼느냐면 응답을 받을 때 느끼는 겁니다. 내 기도가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내 주위를 하나님의 은혜가 감싸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간절히 소원한 것들이 너무 놀랍게 응답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기도의 응답의 재미를 잊지 못해서 그 추운날 산위에 올라 기도합니다.
물론 산위에서만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들에서 집에서 예배당에서 기도해도 됩니다. 심지어 걸어가면서 일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의 장소나 방법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외식하는 자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외식이란게 결국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니까 남에게 보이려고 거룩한 척, 큰소리로 괜히 울먹이면서 하는 기도?
글쎄요.
그런데 ‘기도하다’는 말에는 상당히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 말은 ‘~을 향하여’란 말과 ‘원하다’란 말이 합하여진 단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을 향하여’라고 할 때 그 방향은 오직 한 방향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소원을 아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보이려고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 중에는 기도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거룩하다. 내가 이만큼 영성이 있다. 뭐 그런거지요.
유대인들은 오전9시, 정오, 그리고 오후3시에 기도했습니다. 이게 공식적인 기도시간입니다. 사람많은 시장이나 광장에서 서서 기도하면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의 신앙심을 나타내려는 외식하는 자의 방법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 이미 상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야, 저사람 정말 신앙심이 좋네!’라고 감탄하거나 칭찬하는 것이 그 사람의 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어서 하나님의 응답대신에 사람의 경탄이나 칭찬이 목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하나님이 응답을 원한다면 그렇게 기도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 자세히 한번 보면 이 본문에서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는 말이 있는데 마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따라서 상을 주시는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래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도 하나님의 상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상품이지요.
그러니까 기도하면 상을 주시는데 그 상품의 종류가 한가지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대로 해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기도하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외식하는 자와 같이 남에게 뻐기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틀림없이 상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6절부터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기도하는 방법을 예를들어 설명합니다. 뭡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고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본문의 골방은 침실이나 내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고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창고는 음식을 숨겨놓던 창고를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항상 궁핍에 시달렸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창고를 마련해 놓고 여기에 식량을 숨겨 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알까봐서 음식을 꺼낼 때는 아무도 모르게 몇 번이나 주위를 살피고 조심해서 꺼낸 곳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그 정도로 은밀한 장소에서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기도의 은밀성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주께서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것은 알겠는데 ‘갚으시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이미 상을 받은 외식하는 자들에 비해 아직 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갚으신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은밀하게 기도함으로 남들에게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신실한 자로 여겨지지 못하고 추앙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상이야 말로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우리네 삶에 대한 보호와 인도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하여 기도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하지말라는 것을 예로 듭니다.
뭡니까?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중언부언하는 것은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방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시대에 갈멜 산상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이 자기 옷을 찢고 칼로 몸을 상하게 하며 뛰놀며 소리 질렀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실상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외출하시는 분도 아니시기에 우리가 아무리 작은 소리로 기도해도 알아 듣고 응답하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기도를 한다면 아무리 울면서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도 결코 들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기도입니까? 내 욕심만을 채우려는 기도입니다. 나혼자 잘먹고 잘살겠다고 아등바등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오히려 벌을 내리십니다. 정신상태를 고치겠다고 ...........
그런 기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여야 듣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들어 주십니다. 다만 그는 때가 차기까지 잠잠한 듯이 보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우리에게 가장 효과적인 때를 기다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응답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노라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놀라운 역사를 머지않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은밀한 중에 지금도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시며 내가 간구하려고 하면 이미 그 내용을 아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아뢸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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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홍 목사님께서 이번 설교는 2개로 나누다보니 분량이 적으므로, 코멘트를 잘 써보라고 등을 떠미셨는데, 정작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기도 응답 같은 간증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후에 일어난 일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합리화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 90대이신 할머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할머니는 제가 어릴 때부터, 저만 만나면 이 이야기를 참 자주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만큼은 잊지 않고 하고 있단다. 어려울 때라도 기도만 하면, 뭐든지 잘 되게 되어 있어.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도 이렇게 권사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고 있는데, 걱정하지 말아." 나이가 제법 들어서는, 할머니에 대한 감사함도 물론 컸지만, 한편으로는 "믿음의 긍정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다보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실망스러운 경험을 누구나 하게 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계획은 매번 산산조각이 나고, 답답함이 안으로부터 차올라서, 막막한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저는 가끔 할머니의 말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봐" 라고 말하는 그 믿음이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걱정을 가불부터 해서 미리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과연 미래에도 잘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다가올 일들이 어려워 보이기만 합니다. 그런데 가끔씩 놀라운 것은, 정작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어려운 일들을 점차 익숙하게 해내곤 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홍 목사님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해보고 싶다고 바란다면, 이미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 또한 그가 갖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간구한다는 것은, 결코 세상을 만만하거나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미래가 어떠하든지,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가 올바름을 추구하는 삶, 그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매일 다가가는 삶, 그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라는 말의 어원에는, 관심, 그리고 연결 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언젠가 읽었습니다. 저는 그 말이 꽤 무서웠는데,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무관심한 개인, 홀로 살아가는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풀어쓴다면, "종교가 필요없는 사회, 혹은 타인이 필요없는 사회"로 다가가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물론, 타인이 곧 공포이고, 또는 사르트르의 표현처럼, 타인이 곧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날 좀 내버려둬!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역시 "관계되어 있는 삶"이 더 행복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할머니를 생각해 볼 때면, 가슴 한 켠이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그토록 오래도록 도와주시고, 아껴주시는 분들을 생각해 볼 때면, 나약하고 나태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맡은 바를 그래도 걸어갈 수 있도록", "누가 뭐래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기를", 저는 그렇게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기를 다만 바랄 뿐입니다. / 2013. 1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