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근대의 학교 - 원산학사, 육영공원, 그리고 오산학교와 대성학교

시북(허지수) 2014. 3. 31. 23:57

 근대 문화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번 문서도 어렵지 않게, 보조자료적 성격으로서 접근해 보려합니다.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들로 인해, 우리의 삶과 생각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대표적인 근대적 문물이라면, 기차를 들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기차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영향력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까요.

 

 첫 번째 기차만의 중요한 특징은 정시에 출발한다는 거에요. 그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일반적 시간관념은 그다지 철저하지는 않았어요. 예컨대, 아침에 갈께, 점심 무렵에 놀러갈께 뭐 그 정도였지요. 그런데, 근대 문물인 기차는 시간을 봐주는 법이 없잖아요. 시간이 되면 그야말로 "정확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드디어 시간을 정밀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근대가 되면 몇 분, 몇 초까지도 정확하게, 라는 시간관념의 중요성이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합니다. 근대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발전이 확 진행되었던 것은 분명하다지만, 생각해보면 그만큼 기계가 인간을 통제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대목입니다.

 

 에이, 진짜로요? 시간이 인간을 통제한다고요? 좋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시계 위치는 어디쯤인가요? 저는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무척 당황했었는데, 많은 경우 시계는 시선보다 높은 곳에 있을 때가 제법 있습니다. 멀리갈 필요도 없이 학교 시계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시계가, 또한 기계가 인간을 내려보다는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21세기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가끔 해봅니다. 하하. 어떤가요? 서론부터 재밌고 즐겁지 않나요! 아, 서론이 너무 길다고요? 자뻑은 이쯤하고... >.<; 계속해서 기차를 생각해보면,

 

 둘째, 기차만의 특징은 표를 판다는 것인데요. 여기에도 중요한 통찰이 숨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차표를 구입한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양반줄 따로, 상민줄 따로가 아니에요. 누구나 동등하게 표를 사게 되고, 또 정확한 시간에 맞춰서 출발합니다.

 

 한 발만 더 들어가보면요! 조선 초기에 인기있는 물건을 산다고 상상해 봅시다. 양반이 먼저 사겠다고 나서면, 상민이나 천민은 움찔하며 양보해주는 것이 미덕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기차까지 도입이 되자, 내 바로 뒤에서 아무리 높은 사람이 표를 사려고 기다린다고 해도, 먼저 양보하고 비켜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평등 의식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이라는 자각도 생겨나고요. 이런 측면은 기차가 가지는 근대적 장점이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럼 부정적인 반대쪽 측면도 봐야겠지요. 기차가 주는 세 번째 의미! 기차 철길 노선을 쭉 따라가다보면 부산에서부터 서울을 거쳐서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사람들의 편리한 생활 수단이나 이동 도구로서만 기차가 달렸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차는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전쟁 등을 치르기 위해 물자 수송의 편의가 담겨 있다는 것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고보니까, 양면성이 있네요.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다는 것. 네, 이번 문서의 키워드 이기도 하겠습니다. 양면성! 이제 본격적으로 즐겁게 근대사를 즐겨보아요~ (여기까지가 서론;;;)

 

 오늘의 문서는 제목 그대로 학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제목이 곧 내용. "제곧내!" 요즘 간단히 줄이는게 유행이기도 한데, 이렇게 내용을 늘려서 쓰다니, 그래도 꼼꼼이 들여다봅시다. 우선 근대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1880년대로 떠나는게 좋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정국을 잠시 언급하고 갈께요. 우편업무를 담당하던 우정국은,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다시 재개되는가요? 1895년 을미개혁 때, 우체사를 통해서 우편업무가 재개됩니다. 그리고 1900년대가 되어서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을 했습니다. 세계와 교류를 하고, 국제적인 교류도 가능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요즘은 뭐 편의점에서도 물품해외배송이 가능한 세상이라고도 하지요...)

 

 이제 본론. 근대의 학교를 살펴보도록 해요. 먼저 사립학교부터! 188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 "원산학사"가 만들어집니다. 장소를 살펴보면, 원산이라는 곳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개항장 중 하나 입니다. 원산은, 부산 다음으로 개항이 된 곳이기도 하고요. 그러면 개항이라는 건 뭘까요? 항구가 열렸으니 어떻게 될까요? 맞아요. 개항장에서는 다양한 서구 문물들을, 상대적으로 훨씬 일찍 접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원산에 있는 유지들이 서양식 교육을 전해 듣고선, 오, 이런 방식이 있구나! 우리 아이들에게도 저렇게 교육을 시켜야 겠구나! 라고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학교를 세우고자 나선 것입니다. 최초의 근대식 학교가 어디 있다고요? 개항장! 그 중에서 원산이라는 것. 원산학사 잘 체크해 둡시다. 여기에선 무술도 가르치고요, 근대적 학문들을 종합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같은 해 1883년에 국가에서도 동문학이라는 학교를 세웁니다. 그런데 동문학에서는, 근대식 교육을 가르치기 보다는, 뭐랄까 외국어 습득기관에 가까웠습니다.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습득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에, 근대식 학교라면 아무래도 원산학사가 더 비중있게 다뤄지는 편입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사립학교의 흐름을 봅시다. 1880년대는 사립학교의 붐(!)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880년대 조선이 미국과 수교하고, 프랑스와 수교하고, 그러다보니 외국선교사들도 상당히 많이 들어왔습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목적 (가르치고, 알리고, 전하고 등등) 을 위해서 학교를 많이 짓습니다. 유명한 학교들로는 배재학당(85), 이화학당(86)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학교다 라는 점을 체크해 두면 충분하겠습니다. 이화학당은 오늘날 이화여고, 이화여대로 이어지고 있고요. 실제로 이화여대 홈페이지에 가보면 그 역사가 1886년부터 시작되고 있어요. 진짜로요~

 

 자, 그런데! 구한말, 막판으로 쭉 가면~ 조금 성격이 다른 학교들이 등장합니다. 1907년 쯤되면 오산학교, 곧이어 대성학교(1908)가 나옵니다. 중요한 대목이 있는데, 이 학교들은 1880년대의 사립학교들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걸까요.

 

 구체적으로, 배경부터 먼저 접근해본다면, 1904년에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 되어가고, 조선에서는 이에 맞서며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데요. 이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학교를 세운 것이 바로 오산학교와 대성학교 입니다. 즉, 이 두 학교는 이승훈, 안창호 처럼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들이 세웠고, 애국계몽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해 두는게 중요합니다. 또한 국외 북간도 지역에서는 서전서숙, 명동학교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시기적으로 세세하게 정리한다면, 1880년대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배제,이화)가 있고, 1904년 러일전쟁 이후엔, 애국계몽운동의 교육적 노선으로 세워진 학교(오산,대성)가 있다 라는 것. 근대사 쉽죠, 하하 ^-^)v

 

 다음은 공립학교 쪽을 볼께요. 1880년대에 국가주도의 본격적인 근대적 학교가 등장해요. 바로 육영공원입니다. "국가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적 학교 육영공원(1886)이 있다라는 것, 기억해 두세요. 당시 육영공원의 교사로는 헐버트 같은 멋진 인물도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훗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 밀서를 들고 미국까지 가기도 했던 중요한 인물이고요. 구한말에 한국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의 베델, 육영공원의 헐버트 같은 사람들이 참 대단하고 멋진 사람들이었지요. 어쩌면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한국을 아끼고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육영공원에서는 영어도 가르치고 다양한 신학문을 가르치고 했다지만, 흥미로운 점은 생각보다 이 학교가 잘 안 돌아갔다는 점! 왜냐하면, 당시 명문가 등 고위급의 자제들을 주로 학생으로 받아서 가르쳤는데요. 그러다보니, 학생들은 잘 나가는 집안의 애들입니다. 반면 육영공원의 쌤들은 인정사정 없는 합리적 외국인! 따라서 학생들 평가를 어떻게 했을까요.

 

 봐주는 법 없이,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너 공부 왜 안했니! 라면서 돌직구 직언도 날리고 말이지요. 높으신 분들의 아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바닥부터 똑바로 하라고 제 점수는요 15점, 이렇게 칼같이 채점해 버립니다. 다시 말해, 일반적 조선 학교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많이 달랐습니다.

 

 영의정 아들이라고 전혀 대우해주지도 않고, 육영학원이 이렇게 근대식으로 운영되자, "나 안 해! 존심 상해! 거기서 공부 못하겠어!" 라고 진상쇼(?)를 펼치는 애들도 자꾸자꾸 발생했습니다. 하다못해 고종이 직접 나서서, 육영공원에서 공부를 마치면 좋은 관직도 주고 혜택도 듬뿍 주겠다며 적극적으로 회유도 합니다만, 여전히 인기가 별로 없었어요. 이 점이 정말이지 재밌지 않나요?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체면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의식 간에 충돌이 쾅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육영공원처럼, 엄격한 최초의 근대적 국립학교는 실질적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서양과의 만남은 문화 면에서도 썩 자연스럽지 않았다는 것. 근대적 시설에 비해서,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격차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지는 않는다는 점. 이점은 곱씹어 볼수록 재밌고 흥미롭습니다. (*아, 혼자만 재밌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푸핫.)

 

 그리하여, 육영공원은 불과 10년도 못 가고, 1894년에 결국 문을 닫았고요. 여기서부터 중요한 것은 갑오개혁 때, 교육입국조서가 반포됩니다. 이제 슬슬 학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교육입국조서를 기준으로 해서, 1894-95년 이전의 학교들과 그 이후의 학교들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에도 잘 나오고요.

 

 교육입국조서 이후에는, 한성사범학교(교사양성), 외국어학교, 소학교 등 대대적으로 공립학교들이 만들어 집니다. 계속해서 1890년대 후반 대한제국시기에는, 기술학교들(철도,양잠 등)도 등장하고요. 1900년에는 최초의 중학교인 한성중학교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시험에서는, 교육입국조서의 내용들이 등장하고, 이 교육입국조서와 관련이 없는 학교를 찾으라는 게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 세워진 학교, 육영공원(국립)이나 원산학사(사립)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지요. 여기까지가 이번 문서의 내용이었습니다.

 

 계속해서, 근대 문화사 네 번째 문서인, 국어 역사 종교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오늘의 영감 - 저는 호기심 많던 시절에는 음악이라는 게 참 사랑스러워서, 소리를 내는 악기가 신비로워서, 통기타, 베이스기타, 드럼, 피아노 등등 다양한 악기로 음악에 맞춰보는 게 참 좋았습니다. 흥미라는 것은 대부분 그렇듯이 처음에는 강력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눈에 보일듯 말듯이 아주 조금씩 실력이 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달라지는 것은 계속해서 노력하는 그 부분만큼만,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이라는 멋진 기회가 생겼어요. 그런데도 가만히 있을꺼냐고요."

 반성했습니다. 이것저것 현실을 회피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가만히 멈춰 있는 것과 같은지도 모릅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밥을 먹을 때는 밥만을 생각하는 것이며, 밥을 먹고 하고 있는 것이, 나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잊고서 미친듯 쏟아부어 나갈 때, 인간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가진 저마다의 바람과 희망을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매순간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던, 김현정 선생님의 칼럼을 반사해 놓고 갑니다.

 "집과 사무실을 한곳에 합쳐 재택근무를 하게 된 어느 건축가가 있었다. 1층에 내려가면 집이고 2층에 올라가면 사무실, 그는 오랫동안 꿈꾸던 편한 생활이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기뻐했다. 한데 뚜껑을 열고 보니 막상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집과 일터의 구분이 모호해진 상황은 오히려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방법을 하나 궁리해냈다. 아침이면 일부러 가방을 둘러메고 1층 집을 나서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2층 사무실로 출근한다. 출근길 코스프레다. 그랬더니 살 것 같더라 한다. (중략) 삶이 아무리 고될지라도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침엔 일어나라. 세수하라. 그리고 밖으로 나가 세상에 용감하게 출근하라."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