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국권의 피탈과정 3부 - 1907년 한일신협약, 1910년 경술국치

시북(허지수) 2014. 5. 24. 02:03

 5월 23일이 어느덧 끝나고, 이제는 새벽 1시. 오늘도 힘내어서 무작정 글을 써보고 있습니다. 국권 피탈의 마지막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905년에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고종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맞춰서 특사를 파견합니다.

 

 멀리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특사들이 가게 되었는데, 주요 인물들로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미국 쪽에도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 헐버트가 파견됩니다. 음,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던 이유는 오래 전인 1882년에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거중 조정이라는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중 조정이 뭐냐하면, 조선이 곤란한 상황이 처해진다면, 미국이 도움을 주고 상황을 어느 정도 조정해 줄 것이라 믿었던 거지요. 그래서 (조선의 근대학교인 육영공원에서 활동했던) 믿을 만한 헐버트를 미국에도 보냈던 것입니다.

 

 자, 하지만, 미국은! 지난 문서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요? 이미 살펴봤듯이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이전부터,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일본과 맺어놓은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현재 이중적인 약속을 맺은 것과 다름 없겠지요. 1882년에는 조선의 상황을 우리가 조정해 주겠노라고 했다가, 1905년에는 일본과 밀약을 맺으며 조선 지배를 승인하겠다고 했으니... 정말 아리쏭텔레쏭 합니다! (요즘 이런 저질개그를 했다간 무진장 욕먹는군요... 죄송합니다. 하하;)

 

 이 당시 백보 양보해서 미국이 만약 자국의 국익을 우선시 한다고 봤을 때, 끝내 미국은 일본 편에 서게 되었고, 미국은 자기들 국익을 위해서 조선과의 약속을 져버립니다. 다시 말해, 헐버트가 와도 미국은 조선을 도와줄 수 없어요. 조선이 급하니까 좀 힘써달라고 했건만? 미국은 여기에 답하지도 않고,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은 참으로 서늘하고 씁쓸하네요.

 

 그러면 헤이그로 간 특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고 했는데,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헤이그특사들 역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고종이 밀사를 파견한 것을 눈치 채고, 특사들을 아예 회의장에 입장도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하고 막아버립니다.

 

 한마디로 헤이그까지 갔지만, 정작 회의에 참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게다가 일본은 이참에 건수 잡았다면서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이보시게 조선은 을사조약으로 이미 외교권도 없잖아. 그러니까 발언 안 하는게 당연한 거야. 자꾸 딴지를 걸려고 하다니, 일본이 이대로 있을 줄 아니?"

 

 헤이그 특사도 좌절되었고, 곧이어 1907년 일제는 거슬리는 고종까지 강제 퇴위시켜 버립니다. 그리고선, 고종의 아들 순종을 즉위시키고 있습니다. 덧붙여, 고종까지는 광무라는 연호를 쓰고요. 순종부터는 융희라는 연호를 씁니다. 그리고, 이 때 맺은 나쁜 조약이 하나 있습니다. 한일신협약 (다른 말로, 정미7조약) 입니다.

 

 한일신협약의 내용은 뭐냐하면, 첫째,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중앙이나 지방의 고위관료들이 일본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뭐 이쯤되면 아예 한 나라를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집어삼킨 모양입니다. 러일전쟁 이후, 여기까지의 흐름을 되짚어본다면, 민족자본이 활동하는 기반인 경제를 뒤흔들었고, 외교의 손발을 묶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막았으며, 고종을 억지로 끌어내리고, 국가 내정의 각 부처까지 완전히 일본 입맛대로 편성되고 있습니다. (한편, 통감정치는 1905~1910년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는 1907년 무렵 통감의 권한 역시 더욱 강화되어 입김이 세집니다.)

 

 아, 여기서 시험을 대비해 유의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통감"이라는 대목이 나왔을 때, 을사조약(05)인지, 한일신협약(07)인지를 잘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통감정치가 시작된 것은 분명 을사조약이고요, 통감의 권한이 강화되고 통감이 각부 차관을 임명한다는 내용이 있으면 = 이번 문서에서 배우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에요. 시험에서 특히 헛갈리기 쉬운 대목이니 주의해서 지문을 보셔야 합니다. 또한, 통감부라는 키워드도 시험에 잘 나오기 때문에, 통감부? 아!!! 1905~1910년 사이라는 점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습니다. 총독부라는 말이 있다면,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이후겠고요. 이번 문서에는 팁이 꽤 알차지요? 하하.

 

 한일신협약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군대가 해산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제가 경비를 아껴(?)주겠다며 조선군대까지 해산시켜버렸으니... 그야말로 이제 남은 건, 정말로 국가 몰락 밖에 없겠지요. (물론, 이 당시 거센 반발도 있었습니다. 정미의병도 들고 일어났고요, 이같은 일제의 막가는 조치들에 대한 반발도 분명했습니다!)

 

 1904년 이후, 슬프게도, 하나씩, 하나씩 무장해제 되어가던 조선. 그리하여, 1909년에는 기유각서가 체결되었습니다. 이로서 사법권이 박탈되었습니다.

 

 마지막이네요. 1910년 경술년이 되었고, 이 해를 끝으로 우리의 주권은 완전히 박탈되고 말았습니다. 대한제국은 막을 내렸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1910년을 우리는 "경술국치"라고 부릅니다. 1910년 경술년에 나라가 치욕을 당했다는 의미입니다. 1910년에 일본은 경찰권을 박탈시켰고, 8월 29일에 한일병합이 선언되면서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일제는 조선에 총독을 두었으며, 총독 정치가 실시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본격적인 일제강점기 이야기가 되겠네요. 다음 문서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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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영감 - 제 딴에는 조금 과격한 표현을 빌려올까 합니다. 환경에 순응해서 사는 것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합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난 돌이 되어서 사방에서 얻어 맞기 보다는, 자신의 발톱을 숨기고, 주변과 친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결 살아가기 편하다는 것은 진실에 아주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불편한 진실도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의 말입니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킨다. 반면 비합리적인 사람은 환경을 자신에게 맞게 적응시키려는 노력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 발전은 비합리적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거의 같은 문맥으로 신영복 선생님께서 강의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발전을 살펴본다면, 의외로 거친 인간들, 과감한 인간들이야 말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걸 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방식대로 표현한다면, NO 라고 생각해 보는 사람들이 어쩌면 희망이 될 수 있는게 아닐까요.

 

 한편 작가 알베르 카뮈는 "메마른 합리주의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비극적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라고 썼습니다. 비극을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비극을 겪었기에, 우리는 그 상실감과 고통으로 인해, 보다 더 따뜻하고 비합리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요. 무엇보다 사람을 제일 앞에 두는 멋진 인성을 꿈꿀 수 있지는 않을까요. 돈과 효율 대신에, 사람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우리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한 시대의 같은 시간을 보내고, 누구나 똑같이 먹고, 자고,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살아갔음에도, 우리의 모습은 서로 다르게 펼쳐집니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살아가더라도 충분히 괜찮은 것. 상처 입은 일 있고, 속상한 일 있고, 눈물 짓는 일 있었더라도 괜찮은 것. 지금 힘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인생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라고 격려를 보내고 싶은 밤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