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가서 내말로 그들에게 고하라(에스겔3: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9. 21. 06:56


가서 내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에스겔3:1-)


우리가 흔히 소명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 부르심을 받을 때 사실 걱정이 참 많습니다. 제가 말하는 소명은 단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교인들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여기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명, 특히 오늘 에스겔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 우리는 걱정합니다.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서부터 저들이 과연 내 말을 들을까하는 걱정, 앞으로 나의 삶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걱정까지 우리는 수많은 염려와 근심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그게 국내가 아니고 외국이라면 더 걱정이 많아 집니다. 에스겔 역시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사람들, 고국 땅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들이 아니라 포로지에 끌려온 동족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번부터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름받는 과정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가 첫째로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았고 두 번째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위해 자기 발로 일어서야 했으며 이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패역한 백성, 배반한 자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놓고 이제 오늘 하나님은 그에게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게 하셨습니다.

 

1.내 말로 고하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명자는 목적지로 떠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그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자,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을 잘 보시면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설교의 주제가 있습니다. 가서 전해야 할 말이 누구의 말도 아니고 너의 말도 아니고 바로 내가 너에게 준 말이라는 것입니다. ‘내 말로’ 여기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땅의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입에 넣어 주신 말씀이 아니라 나의 말, 나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교인들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아니라 교인들이 듣기를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좋아 하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책망해야 될 때에도 오히려 그들을 축복합니다. 이름하여 축복의 메시지. 얼핏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신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본문을 따라 가봅시다.
1절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네가 여기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으라’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발견한 음식은 없습니다. 에스겔이 발견한 먹거리는 바로 두루마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2.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에스겔에게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바벨론입니다. 에스겔이 서 있는 곳은 그 중에서도 갈대아의 그발 강가입니다. 주변에 이스라엘의 포로민들의 거류지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보내시고자 그를 연단시키고 묵상하게 하려고 이 두루마리를 먹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주신 말씀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대로 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분석하면 ‘가서 즉시 말하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서 말하라는 구절에는 이스라엘 족속 사이에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증거하라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의 경우처럼 갔다가 말씀만 전하고 돌아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살면서 말씀을 증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안가고 여기에서 말씀을 전하면 안될까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하나님, 가기는 가겠는데요 말씀만 전하고 다시 돌아오면 안될까요? 이게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사이에 거주하면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즉시 가라 그리고 가는 즉시 말씀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3.그가 내게 먹이시며
성경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입을 벌리라고 하시고 직접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를 씹어서 넘기는 일은 에스겔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입에 넣어 주실 수는 있지만 강제로 입을 오물거려 두루마리를 씹도록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순종하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이 말은 에스겔의 발로 일어서라고 하시면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위해 여호와의 영이 임하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죽어도 두루마리같은 것은 먹을 수 없다고 입을 닫거나 아니면 뱉어 낸다면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순종하는가 않는가를 시험하셨을 수도 있지만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결국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강제로 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더 주목합니다.

 

우리 속담에 소를 물가를 끌어 갈 수는 있지만 강제로 물을 마시게는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이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순종하시기를 원하시며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말씀을 먹어서 배와 창자에 채우라고 하셨는데 이는 말씀을 우리의 신체일부로 만들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받기는 하지만 받을때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예배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예배당에서 나감과 동시에 집에 들어감과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을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말씀을 먹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되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왜 하나님이 배와 창자를 채우라고 하셨는지 궁금하신 분이 계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유대인들은 배와 창자에 정신과 인격이 거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온 정신과 인격을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으로 채우라는 뜻인 것이지요.

 

4.달기가 꿀같더라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자 달기가 꿀같았다고 합니다. 두루마리는 아마 양피지였을 것입니다. 양가죽. 게다가 양피지위에는 잉크로 글이 씌어져 있습니다. 일단 먹는것도 곤란하지만 그 맛도 아주 쓸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일단 입안에 넣자 그 달기가 꿀같았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었더니 입에서는 달고 배에서는 쓰다고 말했는데 에스겔은 입에서 달다는 말씀만을 적고 있습니다. 배에서는 쓴지 단지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꿀처럼 달게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지켜 행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엄정하고 혹독해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기의 법을 제대로 지켜 행하는 자녀에게는 한없이 자애롭고 사랑스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죄를 범한 자에 대한 징계의 내용이 혹독해도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그 형벌이 적용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혹독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잠재적으로 죄를 범할 것을 가정했는지도 모릅니다.

 

5.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고하라
에스겔이 가서 고해야 하는 대상은 비록 이방 갈대아에 살지만 이민족이 아니라 바로 동족인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어가 달라서 자기의 말이 잘못 오해되거나 자기가 상대방의 말을 잘못 알아 들을 걱정이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스겔의 사역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만일 외국인들에게 서투른 외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그들 외국인이 여호와의 말을 들었겠지만 오히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히브리어로 말을 해도 전혀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들어 먹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웃기지 않습니까?
미국사람에게 떠듬 떠듬 영어로 전해도 저들이 알아듣고 하나님을 찾을 것이지만 오히려 한국인에게 한국어로 말해도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랍니다.

 

이 말을 자꾸 되풀이하시는 이유는 그 만큼 외국에 온 동족들을 전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도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외국인전도보다 동족을 전도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그러나 지금은 패역한 백성이며 배반한 자인 저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더 시급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방인이 땅에서 동족을 향한 선지자로 에스겔을 보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가 가서 큰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고 또 저들의 저항에 부딪혀도 그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포기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겸하여 주실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환상과 성령을 주셨는데 우리의 입에 아버지의 말씀을 받았는데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자신의 능력을 회의하고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것도 이미 다 아시고 내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나를 가장 적합한 곳에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말한다면 성경의 표현대로 혀가 둔하여 제대로 외국인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혀가 둔하다는 말은 화술이 둔하다, 더듬다는 말이 됩니다. 또 말을 하되 매우 힘들게 하다는 뜻도 됩니다. 이미 우리가 모국어를 발음하는 방식에 우리의 혀가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새롭게 외국어를 배운다고 해도  본국인과 같이 유창하게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갈대아에 거하기는 하지만 갈대안인들에게가 아니라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에게는 갈대아 사람을 불러서 사용하시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머뭇거리거나 회의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나를 부르시면서 이미 내가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하도록 주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이것저것을 더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께서 내 입에 넣어 주신 말씀만을 가지고도 충분합니다. 저들이 내말을 듣고도 조롱할 것이 걱정된다고요? 그래서 주께서 저들을 패역한 백성이요 배반한 자라고 부르셨답니다.

 

환상을 본 우리들은 일어서서 아버지의 명령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신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일어섭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씀을 받아 내 입으로 내가 씹어서 배로 창자로 넘겨서 채웁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역사하기를 즐겨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의 명령에 즐겨 순종하는지를 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건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낼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앞에 일어서서 입을 열어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씹어서 우리의 배와 창자를 채우면 됩니다.
그리고 주가 내 입에 넣어 주신 말씀만을 고하면 되는 겁니다. 그들 사이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말씀이 이 어두운 곳에서도 여전히 나를 인도하며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면 되는 겁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9월 2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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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홍 목사님께서는 이 구절, 저 구절 얽혀서 설교하는 것을 평소 경계하시고, 본문을 쭉 따라 내려 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시편을 1편부터 읽다가, 한 9편쯤 되었을 때, 9편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로부터 그런 가사들 있잖아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

 

이 점을 배경으로 놓고 봤을 때, 저는 이 설교 말씀이 무척이나 도전이자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도전이라고 함은, 우리가 어떤 환상이나 꿈을 꾸고 있다면, 그것을 도전하고 있는지, 열심히 살고 있는지 그 무게가 컸고, 위로라고 함은,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이 있습니다. 분명히 선한 일을 하는 것 같았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전혀 눈에 표시가 안 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실망스러울 때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국 주의 선한 뜻대로 다니게 되지 않을까 라는, 일종의 주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듭니다. 이렇듯 내가 약할 때는 의지가 되어주고, 내가 싸울 때는 방패가 되어주시는 주님이 있기에, 기독교인의 한 평생이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독특하게 보일지라도, 감사와 찬송으로 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덧붙임은 이 정도만. / 2014. 10. 09.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