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사도행전2:1-)
오늘날 이땅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건물도아니고 돈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성령의 강림입니다.
더 이상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 교회
더 이상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교회
세속화된 교회, 죄로 오염된 교회
분열과 시기와 음모가 판을 치며 거짓과 음란함과 우상숭배로 타락된 오늘날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하심입니다. 사실상 오늘날 수많은 이단들이 판을 치는 이유도 기성교회가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성교회의 비리와 추함을 빌미로 이 땅의 교회들에는 더 이상 구원이 없고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더러움에 물들어 더 이상 자정능력을 상실한 교회.
잘못을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욕하는 교회
본말이 전도된 이상한 교회로 변질된 이 마당에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강력하게 소망합니다. 그가 강림하시면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죄악으로 어두워진 마음들이 밝아지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인정받게 되며
분쟁과 시기대신에 평화가 우리마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가 일단 임하시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성령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냐구요? 당연하지요. 성령님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가 하시는 역사는 도깨비 방망이와 비교할게 아닙니다. 도깨비 방망이는 기껏해야 개인적으로 부유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천지만물에 미치며 인류를 구원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단 성령의 그 오묘하고 놀라운 신비에 취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하찮게 여기며 그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것이며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릴 것입니다. 무서워요? 목숨은 안버리면 좋겠습니까?
그래요. 우리 아버지는 게다가 윤리적이며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꼴이 좋은 물가으로 인도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심지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 안되는 것 같은데서도 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 그러므로 우리는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갈구합니다.
1.그리고 가득 채워졌을 때에
베드로의 발의로 맛디아가 12사도의 일원이 되고 난 다음에도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바깥에서는 아직도 나사렛 예수의 잔당을 찾는 무시무시한 움직임이 었었을 것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이라는 말은 50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칠칠이 49 다음날이 바로 50일이지요. 원래 이 절기는 광야에서 40년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연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서 첫 수확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유대의 삼대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맥추절이 바로 이 오순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날 보리로 첫 떡을 만들어 여호와께 첫 번째 소제를 드리는 날로 지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첫 번 보리를 수확하고 감사하는 날이며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에 주의 성령이 임하셨고 비로소 신약의 교회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어때요? 유대교의 일분파인 나사렛당이 아니라 기독교 교회가 독립적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오순절 날 절기를 지키기 위해 천하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우리 주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지 한 열흘정도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직 제자들의 뇌리에 주의 당부가 생생하게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께서 당부하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오실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시작하기를 1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원문으로 다시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그리고 가득 채워졌을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부터 축제를 시작해서 오순절 날까지 축제를 이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올해의 축제가 이제 끝이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 천하에서 축제를 위해 몰려온 유대인들은 각자 살고 있는 곳으로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축제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이 축제는 보통의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이 축제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셨다가 십자가에 잡혀서 돌아가시게 되고 다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40일을 보내셨지요. 그리고 제자들은 이제 주의 승천을 목도하고 그의 당부를 듣고 모여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뭔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며 누가의 이 표현은 ‘때가 차매’라는 표현과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정하신 때가 이제 차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위한 시간이 점점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하면 주의 성령은 주께서 정하신 때가 차야 임하시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주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2.다 같이 한곳에
이 말처럼 멋있는 말이 있을까요? 다 같이 한곳에.
그러나 일견 쉬워 보이는 이 말속에는 정말 이루기 어려운 까다로운 조건이 숨어 있습니다.
‘다같이’의 뜻은 ‘모든 이가 함께’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런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한마음을 품고’란 뜻이 있습니다. 그래요, 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다함께 모여 있어봐야 전혀 그림이 안 나옵니다. 각자 딴 궁리를 하며 겉으로는 웃으며 한자리에 있어봐야 주의 성령은 임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을 품고 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건 정말 어렵습니다. 현대의 교회들에서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임재를 맛보기가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주의 성령이 임하시기를 한마음으로 소원하며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웃기게도 성령의 임재가 별로 필요 없는 많은 교인들이 있습니다. 정말 말이 안되지만 성령의 역사는 옛날 옛날 끝이 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재하시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고대하며 모여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도 주의 성령을 고대하며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주의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어때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3.홀연히
그런데 주의 성령은 갑자기 임하십니다. ‘홀연히’란 말은 갑자기란 말이지요. 누구의 말처럼 주의 성령이 공개적으로 몇월 몇일날 오시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내가 내려 갈거니까 예비하고 있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갑자기 임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주께서 오순절 날에 내가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냥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성령을 사모하며 깨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 주의 성령이 임하실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4.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자 이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여기서 성령의 특징을 제일 처음 표현한 단어가 소리입니다. 바람 소리. 이 말로는 마치 성령의 모습이 바람처럼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한글 성경은 약간의 표현오류가 있습니다. 원문으로는 ‘강한 바람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은 소리를 강조합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소리를 말합니다. 바람이 아니라 소리를 강조하는 것이지요.
급하고 강하게 몰아치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네요.
성령의 특징은 소리입니다. 이 소리가 사람들이 앉은 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집은 마가의 다락방일수도 있고 성전의 부속건물일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정확하게 어디를 말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아주 사소한 것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소리가 울릴 때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지요.
앉아 있었다는 말은 이들이 성령이 임하실 때 누군가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는 서서 기도하고 설교를 들을 때는 앉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설교를 듣다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주여 저에게도 이런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5.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앞에서 바람이 아니라 소리가 강조되었듯이 여기서는 역시 ‘불’이 아니라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강조됩니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들 자신을 분배하는 불과 같은 혀들이’
그러니까 ‘불’이 아니라 ‘혀’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할 때 ‘불길같은 성신이여’라고 하는데 글쎄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구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불이 아니라 혀입니다.
그럼 왜 불이 아니라 혀를 강조하게 되었을까요?
그러니까 혀는 언어를 말합니다. 방언. 즉 복음전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실 3절의 ‘혀’와 4절의 ‘방언’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는 이 시간이 아직 오전9시가 되기 전 아마 거의 9시가 될 즈음 이었답니다.
성령은 방언을 각 사람들에게 내려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도록.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탄의 압제에서 시달릴 필요가 없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다는 소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묘사가 있습니다.
갈라지는
그래요, ‘갈라지는’ 이란 표현은 원문으로는 그‘들 자신을 분배하는’ 이란 뜻입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잘 상상해 보면 결국은 이 불길 같은 혀들은 한 개의 뿌리로부터 갈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은 각자에게 임하시지만 그 뿌리는 똑 같은 것입니다. 주의 성령은 여러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임하시지만 그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즉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분이지 두분입니까라고 질문하시면 할 말은 없는데 우리가 가진 성령의 은사가 각각 다르지만 결국은 한 성령의 역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임하신 것 역시 결국은 교회의 건덕,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결코 나를 돋보이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사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다만 그 기능에 따라 쓰임새가 따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혀들이 각 사람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방안에 있었던 사람 중에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각 사람’이란 표현은 원문으로는 ‘그들의 각각’ 이란 표현입니다. 뭐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체성과 개별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각각 성령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한 성령 안에 거하는 운명 공동체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남의 사역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역이 저 사역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고 나의 사역이 저 사람의 사역보다 더 못하게 보인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은 우리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로 임하셔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지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온 것 같이 결국 우리는 한 성령으로부터 은사를 받지만 각각 다른 상황에서 각각 다른 모습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결코 단순하게 비교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십만의 목숨이나 한사람의 목숨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한사람보다 열이, 백이 더 귀하고 무겁지만 우리 하나님의 셈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려고 아흔아홉마리 양을 다른 이에게 맡겨두고 그 양을 찾으러 가시지 않습니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은 이미 자체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우리 하나님의 계산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십니다.
6.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표현을 잘 보십시오.
‘성령을 받고’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하고 있네요.
이 충만함이란 표현은 성령이 우리 온몸과 마음에 가득하여 어떤 다른 생각이 전혀 침범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른 생각이 스며들어갈 틈도 남겨놓지 않고 주의 성령이 온전히 꽉차서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충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를 믿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받은 표시라는 것이지요.
주를 믿고 믿지 않고가 내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의 몸과 마음을 성령이 지배하셔야 만이 비로소 내가 주를 믿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주일날 교회에 갈려고 아무리 작심을 하고 있어도 막상 그날 가지 못할 여건이 만들어 질 수도 있습니다. 막상 그날이 되면 가기가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내 안에 주의 성령이 가득차지 않아서 사탄이 틈을 탄 것입니다.
솔직히 처녀가 애를 낳았다는 이상한 소리가 믿어진다면
저 하늘의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해괴한 소리가 믿어진다면
그 신이 전혀 본적도 없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죽으면서 흘린 피가 내 죄를 씻는다면
여러분, 맨정신으로 이런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성령으로는 우리는 그 모든 말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것은 이미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교회를 갈까 말까하다가 에이 한번 가보지뭐라고 하면서 내가 내 발로 걸어 나온 건데 무슨 소리?’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 한편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나를 교회에 가지 못하게 강하게 유혹하고 있습니다. ‘가지마, 그동네가 정말 무섭고 귀찮은 동네야. 일단 네가 한번만 교회에 나가면 넌 영원히 그들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네가 좋아하는 술과 담배, 여자와 돈을 다 뺏기면 넌 무슨 재미로 살아갈거냐?’
라고 교회 나가는 것을 못하게 막습니다.
내 몸과 마음 속에 주의 성령의 지배가 있기에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며
내 몸에 주의 성령이 임하시기에 그런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며
내 마음을 그가 감동하셨기에 그 이상한 소리들이 다 진실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희한하게도 그 모든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는 내가 이해하건 이해하지 않건 모두 다 진실입니다. 믿어 지십니까? 만일 믿어 진다면 여러분은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7.방언을 시작하다
이제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결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결코 배우지 못한 외국어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방언에 대해서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방언하고 지금 성경이 본문에서 말하는 방언하고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지금 어느 나라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천국의 언어?
그러나 여기서의 방언은 바울이 말하는 통역이 필요한 방언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다른 나라의 말, 방언입니다.
그래서인지 새롭게 개정된 성경은 오해할 수도 있는 ‘방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번역했습니다.
‘방언’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말’.
제가 여기서 방언에 대해서 말씀 드릴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걸 알아야 합니다. 바벨탑을 건설하던 현장에서 인류의 언어가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인류는 수많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원래 하나에서 갈라졌듯이 갈라진 언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역사가 바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결과입니다.
복음 전파에 가장 큰 장애는 언어입니다. 말이 안통하지요. 말이 다르면 가치관도 달라 집니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가치를 규율하는 도구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성령의 역사로 그러한 장애가 해결된 것입니다.
결국 주의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신 것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초능력자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기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시대가 다시 오기를 갈구합니다.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무슨 교회를 새로 세웁니까?
사실 이제까지 주님의 제자들이나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유대교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제사장의 권위에 순복하고 구약의 율법들과 장로의 유전을 새롭게 해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정하는 유대교의 개혁세력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유월절을 지켰고 여전히 성전을 순례하며 여전히 성전세를 내고 여전히 회당에서 기도하며 여전히 안식일을 지키고 여전히 유대교의 전통적 할례를 받는 그런 유대교를 새롭게 하여 부패를 일소하고 깨끗하게 하는 걸로 인식했습니다. 진정으로 이들은 유대교와 결별하고 새로운 기독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심으로 사람들은 비로소 유대교와 공식적으로 결별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실제로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성령의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의 보혜사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유해 질수록, 우리가 많이 배울수록, 우리가 편해질수록 우리의 몸과 이성은 성령의 실재적 임재를 거부합니다. 주의 성령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앙망하며 갈구하는 자에게 오시지 자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오히려 두려워하고 귀찮다고 여기는 이에게는 오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많은 문제들은 너무나 심각하기에 인간의 힘만으로 해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 이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아버지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만 해결이 가능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매 순간 순간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고 일어날 때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의 인도를 갈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잠자리에서 주의 성령께 이 밤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도 평안함을 주심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임재를 바라고 거창하게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천성산 꼭대기에서
소요산의 절벽위에서
도봉산의 바위봉우리위에서
세상과 단절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틈틈이 성령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바라고 기도합시다.
그 정도만 해도 우리의 삶이 훨씬 더 멋있어 질 겁니다.
왜냐면 주의 성령이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아득히 초월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저 사악한 것들을 태우시며
성령의 불길로 이 죄악된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것들을 사르시고
나를 정금같이 단련시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0월 2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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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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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실제로 모임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아침에 눈을 뜸과 저녁에 잠이 들 때 기도를 행하는 습관이, 우리의 삶을 보다 더 멋있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럼 오늘의 덧붙임은 여기까지.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