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정읍발언까지 살펴봤었지요. 그에 대한 대응으로 좌우 합작 운동이 전개됩니다. 자, 여기서 이 운동을 이끌었던 세력들은 당연히 극우나, 극좌가 아니었습니다.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세력들이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중도 좌로는 여운형, 중도 우로는 김규식이 있습니다. 극한적인 좌우 대립을 이제 멈추고,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정부 수립에 앞장서야 한다, 극심한 혼란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미군정이 초기에 좌우 합작 운동을 지지하거든요. 왜 미군정이 좌우 합작을 지지 했을까요? 나중에 미군정은 이승만 중심의 대한민국 수립을 도와주지 않나요? 라고 질문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왜 이승만 대신에 여운형 김규식을 지지했던 걸까요? 그것은 이 시점에서 이승만, 김구, 박헌영 같은 인물들은 너무 극과 극에 있다고 판단했던 거에요. 좌우의 대립과 혼란이 계속되는 것을 미군정도 원치 않았던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 세력이 중심이 되서 정부가 수립이 되면, 극우와 극좌를 잘 포섭함으로서 새롭고 안정된 정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미군정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초기에는 말이에요. 아직까지, 그러니까 1946년까지는 이승만을 지지하지는 않았던 거에요. 미군정이 좌우 합작 운동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네요. 이제부터 전반적인 좌우합작 운동의 흐름을 살펴볼꺼에요. 세부적인 것들이라 시험에 나올 가능성은 많이 없고, 그냥 읽어내려가는 느낌으로~! (시험에는 모스크바 3상 회의가 훨씬 더 잘 나온다는 것!)
좌우 합작 운동에는 7원칙이라는 것이 나와요. 이 7원칙을 살펴보도록 해요. 제일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역시 임시정부 수립하겠다 입니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내용까지는 좌나 우나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이 시점에서도 우익은 여전히 신탁통치에 대해서 만큼은 반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문제가 유엔으로까지 넘어가요.)
그리고 여기서부터, 좌우합작 7원칙 다음의 조항들에 대해서 입장이 달라집니다. 친일파 숙청에 대해서는 우익세력들이 상당히 애매한 입장,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익 진영안에 친일파들이 살아남고 부활했기 때문에, 우익진영에서는 친일파 숙청을 강력하게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우익은 나라가 혼란스러우니까, 우선 나라부터 세우자 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처리가 안 되고 있네요. 1945년 8월 광복되고 나서 크게 과제가 두가지 있어요. 일단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친일파에 대한 처단을 해야겠지요. 독립운동가 잡아들이고 했었던 나쁜 친일파들 벌받아야 하겠죠. 왜냐하면 그래야 나중에 혹시 우리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또 한 번 외세에 침탈을 받았을 때, 치사하게 그 외세에 빌붙어서 살아남는 사람들에게 역사로서 대답을 해줄 수 있어야 되거든요. 너희들 그렇게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비겁하게 산다면 역사를 봤더니 친일파들이 벌 받았거든, 너희들도 분명 또 그렇게 된다고 대답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의 과제는 토지개혁 문제였습니다. 일제 강점기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작을 지으면서 살았습니까, 이제 광복되었으니까, 농민들이 토지를 받는, 새로운 조국에서는 그 멋진 꿈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 경제적인 과제가 가장 큰 숙제였어요.
이 때 7원칙에서는, 유상매입, 무상분배의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무슨말이냐 하면, 토지를 정부에서 돈을 주고 매입을 해서 사 온 다음에, 돈을 안 받고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거에요. 이 방식에 대해서 좌익측은 찬성할 수 없었던 겁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사회주의적 입장) 가 되어야 한다고 좌익은 지향하고 있었으니까요. 유상매입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슬슬 세부조항에서도 입장이 나뉘기 시작하네요. 중도의 길이란 어려운 것 같아요.
또 하나 흥미로운 것, 좌우 합작 7원칙에서 만들어지는 게 뭐냐햐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이 만들어 집니다. 입법, 쉽게 말하면 국회 같은 조직이에요. 중요한 것은 법을 만든다고 해서, 그 법이 통과된게 아니에요. 법령은 미군정의 동의가 있어야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군정과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좌익은 이 대목에서도 찬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법을 만들어도 미군정이 NO 하면 통과되질 않으니까요.
결국 이런 결과 앞에서는,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했던 여운형은 탈퇴하게 되었고요. 중도 우익의 김규식 같은 경우는 의장으로 활약하기도 하고요. 물론 시험에서 자세히 나오진 않아요. 중요한 것은 좌우 합작 운동의 내용과 흐름을 참고로서 보는 거지요. 극좌나 극우나 전적으로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중도세력에 의한 좌우합작운동은 결국 극좌나 극우에서 동참하지 않았고, 김구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승만도 마찬가지, 박헌영도 마찬가지였어요. 남한 사회에서 영향력이 엄청난 사람들인데 참여하진 않았어요. 김구 같은 경우 찬성은 하지만, 직접 참여하지는 않아요. 물론, 김구는 임시정부 세력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이승만도 조건부 찬성이지만, 참여하지 않는 모습들이에요. 이래저래 좌우 합작 7원칙이라는 것이 결국엔 힘을 갖지 못했네요.
미군정은 좌우 합작 운동을 지지하고 밀어준다면, 이승만, 김구, 박헌영 같은 인물들이 들어와 줄 것이라 판단했는데, 해보니까 안 들어오는거에요. 따라서 이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해서 미군정은 지지를 철회하게 됩니다. 또한, 여운형은 1947년에 암살당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신만의 소신이 강했던 좌우 인사들은 불참한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고요.
그로 인해, 추진되는 동력은 상실하게 되더라 라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역사의 한 순간이 흘러갑니다. 이제 1947년으로 넘어갑니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립니다. 자, 그런데 이 해는 세계사 적으로는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는 시점입니다. 트루먼 독트린 - 다시 말해, 냉전의 선언 아니겠어요. 미국과 소련이 콜드워 를 하고 있는 그런 해란 말이지요. 전 세계적으로 대립구도를 정착시키고 있는 시점에서 (적대국가 사이인) 2차 미소공위는 잘 되지가 않아요.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한반도의 문제는 이제 유엔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이 때부터 또 꼬이게 되는 것이지요. ㅠ_ㅠ... 현대사 이야기, 대한민국 설립과정의 이야기는 또 계속되는 문서에서 이어갑니다.
오늘의 영감 - 고래 싸움에 애꿎은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 있는데, 한반도의 정세가 유사하게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외부탓을 하기에 앞서서, 스스로를 냉철하게 되돌아 볼 필요도 있겠지요.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를 올리기에 바빴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무시하기에 바빴기에,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할 수 없었고, 어딘가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한 국가의 역사만은 아닐 것입니다. 한 개인의 인생 역시도, 자기 목소리만 높이기 바쁘다면, 무엇인가 우리는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현대사를 정리하면서, 저는 스스로가 참 거품투성이었구나,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란, 작은 소시민의 행복이었구나 라는 것을 매우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곁에서 지나가고 있는데, 너무 고민만 하지 말기를. 지금 순간에 결단할 것을 미루지 않기를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