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한반도 정부 수립에 대하여, 유엔으로 문제가 이관되었습니다. 유엔에서 결정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남북이 총선거를 하자는 것이에요. 총선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요. 법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총선을 하고 국회의원을 뽑아서 헌법을 우선 만들어야 했어요. 총선의 방법은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 총선거를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하자 북한이 수용하질 않았어요. 북한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거든요. 인구가 적다보니까 인구에 비례해서 선거를 하게 되면 자연스레 국회의원은 남한이 많아질테고, 결국 정권은 남한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봤습니다. 북한은 이미 준정부적인 성격으로 안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엔이 제시한 방법을 따른다는 것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게 되는 형국이었어요. 따라서 북한은 아예 거부를 하는 것입니다.
1948년이 되면, 선거 문제가 유엔소총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총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해라. 이 말은 즉, 남한만이라도 총선을 하자는 것이지요. 이러면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됩니다. 5. 10 총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정말 역사적인 선거입니다. 남한만 열리게 되었던 반쪽짜리 라는 한계도 있겠지만, 5. 10 총선은 역사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대표해줄 수 있는 사람을 뽑는 첫 번째 시도거든요. 이런 적이 없었어요. 봉건 시대를 쭉 전개해오면서 신분제의 틀 속에서 갇혀서 살고 있었고, 상놈과 양반의 신분차이로 시키는대로 해야만 하는 시대도 길었지요. 그런 백성이었는데, 이제는 자기의 뜻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대표자를 뽑는, 민주주의의 첫 발을 내딛는, 역사적 순간이 5. 10 총선이라는 것. 엄청난 발전이죠~ 하하.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선거이면서 평등선거였습니다. (보통선거 = 누구나 참여한다는 의미, 평등선거 = 1인 1표를 행사한다는 의미. 법과 정치 시간이군요!)
잠시 선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거는 처음부터 누구나 보통선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혁명을 거치면서 돈 많은 사람들만 투표하기도 했고요. 고대에는 여자나 노예는 투표할 수 없었고요. 노동자는 투표권이 없기도 했어요. 여자가 투표를 할 수 있는 기회도 20세기가 지나서야, 조금씩 조금씩 선거라는 틀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서 확대되어 나갑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한 번에 바로 시행하는 것이지요. 이 말은 곧, 엄청나게 빠르지만, 부작용이 따를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세계사에서 몇 백년 동안 피흘리면서 얻어낸 것이 선거의 역사거든요. 우리는 운용하는 능력에 있어서 완벽하게 딱 세팅된 게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운영, 선거의 운영의 미숙한 모습들은 나타날 수 밖에 없었어요. 따라서 어느 정도 이 점을 감안하고 역사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 10 총선에서는, 의원의 임기는 2년으로 정했습니다. 여기서 참고해 둘 것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4년, 대통령의 임기도 4년이에요. 물론 현재의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경우 단임제 5년입니다만, 여하튼, 당시는 미군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시스템이 미국과 비슷한 경우가 많아요.
그럼 왜 4년이 아니라, 2년으로 정했을까요? 우선 법을 만들기 위해서 2년으로 했던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대선과 총선의 일정이 같이 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총선 여당 집권, 대선 여당 집권으로 함께 4년을 가버리면 거의 뭐 독재의 가능성이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5.10 총선에서는 의원 임기를 2년으로 해서, 대통령제 4년과는 엇박자로 가게 끔 (징검다리 형식으로 가게 끔), 미리 만들어 놓은 측면이 있습니다. 권력을 견제하는 측면에서 함께 4년, 4년 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두면 되겠습니다.
한편, 김구와 같은 남북 협상파는 불참한다는 특징 이 있습니다. 첫 총선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할지라도, 남한만의 선거로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는 것 때문에, 여기에는 도무지 참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김구에 대해서는 아래에 또 나와요.
5.10 총선이 모든 지역에서 평화롭게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전국 동시 실시도 되지 않았고요. 특징이 좀 있지요. 정리한다면, 최초의 보통 선거, 평등 선거였고요. 임기 2년이고요, 권력 견제의 특성이 있고요. 김구의 남북협상파는 불참, 전국 동시 실시 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상되었듯이 모든 사람이 이걸 찬성하진 않았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었어요. 정부 수립을 위한 출발을 지금 여기서 하게 된다면, 남북 분단이 고착화 되는 것인데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라는 사람들, 세력들이 존재했습니다. 좌익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익도 있었습니다.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반대하는 세력들, 첫째로, 유명하지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글을 쓴 김구 입니다. 민족지도자, 독립투사, 좋은 이미지를 가장 확고하게 보여줬던 내용이 이 김구의 글입니다.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나는 남북분단에 동참할 수 없다고 명문장을 남깁니다. 읍고, 그러니까 울면서라도 이야기 한다는 절절한 글이지요. 김구는 동학농민운동부터 출발했던 인물 아닙니까. 그 김구가 바로 근 현대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임시정부에서도 활동하며 한인애국단을 통해 임시정부를 끌어올리기도 했고, 한국광복군을 이끌어냈던 인물 아닙니까. 한편 또 해방공간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 시키면서 살아왔던 인물이고, 그 김구의 평생 꿈이라고 하면, 여기 한반도에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우는 것이 바로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지금 날아가는 순간 아닙니까. 자주적 독립 정부가 북한 따로, 남한 따로 된다면... 김구는 5. 10 총선에 도저히 참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익 진영의 반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좌익도 여기 저기 곳곳에서 저항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저항은, 특히 제주도민들과 결합되어서 나타났던 제주 4.3 사건이 있습니다. 제주도에 앞서서, 먼저 북한지역에서는 개혁을 단행하다보니, 지주들 혹은 친일파로 내몰린 사람들, 사회주의에는 이제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북한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증오를 갖고 있으면서 "빨갱이" 라는 단어만 들어도 열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제주도에 있는 좌익들을 색출하는 과정 속에서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또한 제주도에 있는 좌익 세력들 역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봉기를 일으킵니다,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고 말이에요. 이 과정 속에서 제주도민들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정작 좌익 세력들을 색출하고 진압하는 과정 속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되기도 했고요.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제삿날이 같은 지역이 있습니다. 한 날, 한 시에 이렇게 비극이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좌익세력들은 5.10 총선에 반대하였고요.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 속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어쩌면, 앞으로 전개될 현대사의 비극적인 모습의 서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부터는 사람보다는 이념을 앞세우고, 그 이념을 위해서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는 모습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직 우리는 민주주의를 연습을 많이 안 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특히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정립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비극적인 학살 같은 것이 계속 보여지게 되는 것이고, 그 절정이 6. 25 전쟁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야기로 돌아와 세 번째 저항은, 다시 김구로 돌아가,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 협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38선을 넘어서 김일성을 만나러 가는 것이지요. 담판을 짓고 오겠다는 목적하에 남북협상을 전개합니다. 일단 기억해 둘 것이 있는데, 이 대목이 시험에 잘 나오는 편이에요. 갑자기 맥이 끊긴다고요. 하하;;
남북협상의 주도세력 (김구, 김규식) 과, 지난 문서에 좌우 합작 운동 (여운형, 김규식) 과는 주도세력과 배경이 다르다는 것 시험에 잘 나옵니다. 김규식은 누구냐 하면, 신한청년당으로 활동하며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인물이기도 하고, 한국근현대사 자체이기도 하겠지요. 동일인물이고요. 또 임시정부의 부주석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후 나오는 것이고요. 이번 문서에서는, 5.10 총선으로 인해, [총선 전에]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 하러 넘어간다는 것 꼭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세는 총선으로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김구의 남북협상은 결렬되었고, 그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맙니다.
이제 5.10 총선의 결과 국회의원들이 뽑히게 되는데요. 그 결과 이승만 지지세력자들이 대거 당선되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드디어 국회에 의해 헌법이 만들어 집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2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7월 17일은 제헌절!
오늘의 영감 - 제주 4.3 사건은 55년이 지나서야 정부의 사과가 이루어졌습니다. 가슴 아픈 역사이면서도, 기억해야 할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우익도 반대하고, 좌익도 반대했지만, 소수의 목소리는 결국 대세 앞에서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소수의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을까? 라고 질문한다면, 오히려 소수의 목소리가 흥미로울 때가 있습니다.
오래 된 명작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재능 있는 사람이 소수의견을 낼 수 있다는 표현이 기억이 납니다. 다수에 따라가는 편이 안전하고 나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편안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시점에서 용기 내어서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공익광고 같지만, 그래도 진심은 꼭 표현하시길 바라며.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