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누가2:8-2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12. 21. 21:57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누가2:8-20)

 

이번주는 성탄주일입니다. 실제로는 이번주 목요일이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7절까지는 그때를 위하여 생략하고 오늘은 8절부터 살펴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기사를 보니까 명동의 상점주인들이 성탄절 대목이 실종되었다고 울상이라는 기사가 나왔고요 성탄트리니 캐롤이니 하는것도 예전에 비해서 안팔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기사가 같이 나왔습니다. 뒤를 이어 사람들이 지갑을 닫았다 하는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사실 성탄절은 흥청망청하는 그런 날은 아닙니다. 성탄절은 오히려 우리에게 절약과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날입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절약하고 그 남은 것으로 남을 생각하는 그런 날입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의 나심과 주님의 성탄을 기뻐한 사람들이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성탄이라고 하면 성탄트리 밑에 고급스럽게 포장이 되어있는 성탄선물을 떠올립니다. 청춘남녀들은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선물은 당연히 따르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성탄은 산타 클로스가 가져다 주는 선물에 대한 기대를 일깨웁니다. 부모님이나 어른들도 역시 아이들에게 선물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탄을 고대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탄절에 우리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성탄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 마굿간의 말구유에 계십니다. 성탄의 왕좌에는 산타 클로스가 있고 산타를 앞세워 대목을 노리는 유통업자들이 그 뒤를 따릅니다.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지고 이태리산 대리석위로 번쩍이고 부드러운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백화점 안이 아니라 여전히 주님은 찬바람 몰아치는 초라한 마굿간의 구유위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땅에 오셨지만 우리는 주님을 진심으로 맞이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성탄절!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날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성탄절, 그리스도의 탄생일이지만 그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짜를 산타데이로 바꿔야할 지경입니다. 물론 요즘은 산타도 조금 밀리는 추세이기는 합니다.

 

결국은 아무생각없이 그냥 쉬고 즐기는 공휴일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세태를 한탄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정녕 우리에게 이런 세태를 되돌릴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오늘 여기에 구주의 나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지만 화려한 대리석 궁전에서 나신 것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나셔서 구유에 계십니다. 그의 신민들은 아무도 그의 나심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방인 동방 박사들이 그의 나심을 축하하고 경배하기위해 먼 지역에서 길을 나섰을 따름입니다.

 

자, 동방박사들은 주가 나시는날 그를 경배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주께서 탄생하고 몇 개월이 지나고 그를 경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나심을 아무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린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목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밤에 들판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동네는 낮에는 찌는 듯이 덥다가도 밤에는 기온이 확 떨어집니다. 아마 불이라도 피워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이들은 자기들의 양떼를 지키고 있습니다. 즉 깨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의 천사가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춥니다. 목자들은 깜짝놀랐고 두려워합니다. 죄많은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니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신을 믿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면 당연히 기뻐하고 신비에 취해야 할 것이지만 이들은 제일 처음 보인 반응이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죄많은 인간이 순결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보면 돌진해서 쳐부숴 버릴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지상에 사는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자신들이 죽을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가 오신 것입니다. 주는 우리의 죄를 자기의 피로 사하실 것이고 그 이후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공로로 죄없다 칭함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또 한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주의 나심을 제일 처음 알게 된 이가 다름아닌 들판의 목자들이며 한밤중에 주의 천사들이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의 천사는 왕이나 제사장들에게, 서기관들에게 주의 나심을 제일처음 알리지  않고 그 지경의 목자들, 들판에서 한밤중까지 양을 지키는 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요, 주는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기의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의 나심을 소망하는 이들 중에서.
성탄은 기다리는 자에게 온다고 한다면 이제 성탄의 소식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한밤중이라도 자기의 맡은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첫 번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소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소망을 가지지 않는 이에게 주의 오심은 아무짝에도 필요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는 지금 힘겨운 삶과의 투쟁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벼운 멍에와 쉼과 평화를 주실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로마당국이나 로마의 괴뢰정권으로부터 압제를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레위인들 서기관들의 압제와 미혹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새로운 율법과 계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다시금 하나님과 합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의 무한하신 풍족함과 사랑을 공급받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은총 속에서 살 수 있게 되겠기에 복음인 것입니다.
경쟁과 효율, 부정과 부패가 아니라 사랑과 화합, 그리고 평화와 정의의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소식은 정녕 복음,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혜택은 주의 성도들로부터 시작되어 온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라고 불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백성에게 미치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는 오늘 다윗의 동네에 태어나신 이가 그리스도 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고 칠십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그 아기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더 놀라운 일입니다. 목자들은 놀랍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미가의 예언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요, 그는 메시야입니다. 현실에 불만이 있는 모든 이들
현실의 무게에 억눌려 죽지 못해 사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안식을 줄 것이며
빵과 포도주를 주고 웃음과 미래를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복음입니다.

 

천사는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가 그리스도 주라는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만물이 잠든 사막의 밤에 묵묵히 깨어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은 마치 우리 주님이 우리들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잠이 들었을 때 조차도 우리를 지키기 위해 깨어 계신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기 양떼를 버려두고 잠이 들었다면 주의 천사와 주의 영광이 비취는 것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깨어 있었기 때문에 구주를 제일먼저 경배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요?
제가 조금 다르게 얘기해 볼까요?

 

비록 현실이 힘들고 삶이 나를 괴롭혀도 그냥 좌절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내일의 꿈을 가지고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아닐까요?

두손 놓고 ‘에이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하며 현실에 눈감거나 안주해 버린다면 그들에게 주의 천사가 제일먼저 찾아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에 무관심하거나 오늘을 의미없이 헛되어 보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오늘 하루를 충실히 보낼 때 주의 천사가 우리를 찾아 오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가 제일 먼저 복된 소식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 장엄한 성탄의 신비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을 봅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우리는 주의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영광이요 온땅에는 평화가 넘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성경본문을 잘 보면 누구에게나 평화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식어가 있어서 이 땅에서 구주의 나심으로 평화를 입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하지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주께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돌아가서 조금 생각해 봅시다.
왜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나타났을까요?
아마 천사장 가브리엘과 다른 많은 천사들이 온 것 같은데 왜 그들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주의 나심을 알렸을까요?

 

이게 중요합니다.
다시 생각하면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지금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인 아기가 그리스도라고 알리고자 한다면 사회의 제일 낮은 계층인 목자가 아니라 헤롯의 왕궁이나 귀족들, 그리고 성전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성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때 나타나서 지금 베들레헴으로 가면 한 갓난 아이가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놓여 있을 터인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알려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순탄했겠습니까?
한 손에는 왕의 권능을 한손에는 신적 권능을 가지고 일을 처리한다면 주의 사역이 얼마나 쉽게 이루어 지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주를 따랐을 것이고 그 놀라운 기적에 감복해서 엎드렸을 것 같은데 주의 천사는 그러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들판의 목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주의 천사들은 캄캄한 밤중에 시골의 들판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그리스도요 주라는 것을 알리게 되었냐 말입니다.
일단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주의 천사가 복된 소식을 전했는데
천사들의 맨 마지막 말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이렇게 보면 목자들이 바로 하나님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왕공귀족들이나 제사장들이 아니라 목자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자라는 말이지요. 왜냐면 왕이나 귀족들에게 또 제사장들에게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왕이나 귀족들,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나심을 듣고 소동하고 놀랐을 뿐입니다.
믿지도 않았고 혹시라도 그리스도가 오셨다면 그를 죽이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의 나심은 평화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이들에게 주의 나심은 재앙이요 두려움이요 염려와 근심 걱정입니다.

 

오늘 목자들은 주의 나심에 관하여 천사가 전한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그 말이 참으로 이루어 졌는지 보러 베들레헴 성내로 들어가서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고 경배하며 천사를 만난 일을 전합니다.
이들은 아기께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이게 증인입니다. 우리가 주의 천사를 만났고
지금 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 주라는 말을 우리의 이 두귀로 똑똑히 들었고 주의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반면에 헤롯과 그 관리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온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나심을 듣고 놀라고 소동했지 동방박사들과 함께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베들레헴으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은 베들레헴의 남자 아기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지요. 그래서 그 속이 시커먼 사람들, 표리가 부동한 사람들
주님이 오시는것보다 안오시는 것이 더 좋은 가식쟁이들 에게는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리지 않는 것입니다. 경배는커녕 해꼬질하고 반대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한번 자문해 봅시다.
만일 오늘 주가 태어나시고 이 소식을 주의 천사가 전한다면 그가 나에게 와서 성탄소식을 전할까요?
아니면 나에게는 그 소식을 전하지 않을까요?
나는 과연 주의 나심 때문에 평화를 누릴까요 아니면 두려워하고 소동하게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람일까요?

 

성도 여러분
과연 하나님이 오늘 나를 기뻐하실거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만일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누리려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목자들? 그래요.

 

모두 다 잠든 밤에도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지키기위해 깨어 있었던 목자들.
목자는 요즘말로 하면 3d업종입니다.
더구나 사막의 기후는 결코 온화하지 않습니다. 낮에는 찌는듯한 더위를
밤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견뎌야하는 극한의 직업입니다.

 

뿐입니까?
양을 지키기 위해 신경을 곤두 새워야 하며 맹수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맹수들과 싸워야 하는 직업입니다. 물론 밤에도 안락하게 잠자리에 들지 못합니다. 몸을 기대고 불을 피우고 양들이 자는 것을 지켜야 합니다. 야행성 짐승들로부터 자기 양떼를 지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대우가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힘든 직업입니다.

 

가진 것 없고 삶이 힘들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일 자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
그래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그런 이들에게 성탄은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들을 자격이 있습니까?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이제 성탄절이 정말 몇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은 기다리지 않는이들에게는 그냥 연례행사로 지나갑니다. 성탄이 주는 기쁨과 감격과 신비는 그런이들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탄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성탄은 감격과 신비이며 장엄함이며 기쁨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려면 베들레헴들판의 목자들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심지어 대접받지 못하고 알아주지 못하는 곳에서도 맡겨진 일을 성심껏 수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말구유에서 나셔서 제일 처음 들판의 목자들에게서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곳에서 가장 높은곳에게까지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지만 구주를 경배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습니다.
겨우 10km떨어진 곳에서도 구주의 나심을 들은 왕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중 누구도 구주를 찾아서 베들레헴으로 간 사람은 없습니다.

 

낮은 곳으로 오셔서 낮은 자들에게 경배받으신 주님은 점점 높아 지셔서 하늘의 하나님우편까지 높아 지시는데 그 짧은 순간에 주님을 경배하고 그를 뵙고 그의 품에서 노니는 자는 정말 복될 것입니다.
성탄은 누구에게나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성탄은 기다리며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성탄을 사모하는 이가 됩시다.
우리모두 성탄의 기쁨에 참여하는 이가 됩시다.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힘써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성탄이 주는 평화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자녀들에게는 평화를 주러 오셨지만 세상에는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높이지 말고 이웃을 돌아 봅시다.
낮은 자리에서야만 보이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봅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됩시다. 그래서 구주가 주시는 평화를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2월 2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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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감동적인 성탄 설교 이야기 였습니다. 지나고 나면, 아 그것이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구나, 라고 느끼게 되는 많은 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실 매일 하나님의 도움과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순간 순간, 말하자면 오늘을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기뻐하고, 주어진 일 앞에서도 주눅들거나 힘겨워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감당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구나를 배워나갑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은 각자의 분량에 맞게 책임을 맡기시는 게 아닐까요.

 

나의 분량 앞에서 성실히 살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모습이 되어갈 때, 당연히 주님께서도 기뻐하시고 그 삶을 멋지게 인도해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장엄함과 그 아름다운 인생길을 기다리는 삶이 될 수 있을 테지요.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만큼을 다시 또 채워주실 것입니다. 힘들어도 지금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의 꿈은,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오늘부터이며, 그 미래는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니까요. / 2014. 12. 2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