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자유당 압승을 계기로 개헌을 또 시도합니다. 바로 사사오입 (1954) 개헌이었지요. 그 계기를 살펴보면, 이제 더 이상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없었습니다. 중임제니까 두 번 했으면 다 한거에요. 그런데, 이승만 정부의 생각은 달랐나 봅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또 되게 하라! 결국 이런 고집스러운 생각, 나 아니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이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나보다, 우리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정치를 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사오입 개헌의 가장 큰 특징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에 있습니다. 즉, 한 번 더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도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려버린 거에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만 이라는 단서를 붙여놓았을까요. 그러니까 이승만을 특별히 우대하는 법이라 볼 수 있겠네요.
개헌 작업을 이제 시작하는데요. 203석 중에서 2/3 이상 나와야 제2차 개헌이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계산해 보면 135.333...... 이렇게 나와요. 따라서 수학을 해보면 136표 이상이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135표가 나왔어요. 아, 현대사를 보면 정말 말이 안 되는 그런 일들도 벌어지곤 해요. 표가 모자랐으니, 이제 이 개헌안은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상식적이란 말이지요.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대로 안 되었으니, 참으로 당황스러운 순간, 어느 지식인 수학자가 등장해서 그럴싸한 주장을 내세웁니다. 0.333... 명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람은 늘 1명으로 봐야하며, 이 관점에 따르면 135표만 나와도 통과가 될 수 있다는 궤변을 내세웁니다. 이러면서 이 개헌안이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입니다. 이 개헌이 통과됨에 따라서, 1956년 대선이 치뤄지면서 이승만이 또 후보로 나옵니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정치의 현장이었지요. 약속, 원칙 같은 기본적인 가치들이 지켜지지 않았으니까요.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1950년대 당시에는 학생들이 서구의 민주주의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두 계층이 이러한 혜택을 입었는데, 그 첫째는 군인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약속, 원칙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받아들였고, 이를 중요시해야만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었을테니까요. 미군정의 질서 속에서 군대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엘리트 계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엘리트가 있다면, 바로 학생들이었습니다. 학교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은 1950년대의 말도 안 되는 정치의 장면들을 다 보고 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황당하게 전개되고 있는 정치. 어른들의 뻔뻔한 모습에 열받아 했겠죠. 그죠.
한편 사사오입 개헌에 저항하기 위해서, 이제 민주당 (1955년, 야당) 이 만들어집니다. 드디어 우리나라도 양당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51년 자유당, 55년 민주당의 모습이 등장하면서 이제 정당 정치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정치적으로는 아직 말도 안 되는 일들도 많았고, 걸음마 단계 같긴 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라는 그 싹들이 지금 보여지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사오입 개헌 같은 일들이 다만 후진적이고 웃긴 코미디 장면이다 라고만 보기 보다는, 우리가 빠르게 서구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아직은 정치의 모습들이 익숙하지 않고 부족한 모습들이 있었음을 어느정도 이해하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오점이 있지만, 또 한편에는 민주주의의 성장의 모습도 같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1956년 대선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았는데요. 자유당에선 후보로 이승만이, 부통령에는 이기붕이 등장합니다. 민주당인 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부통령 장면 후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무소속 대통령 후보도 있었어요. 조봉암 후보가 있습니다. 한편, 이상한 일인데, 이승만에게 대적하는 후보들은 명이 길지 않았어요. 이승만에 대적하는 신익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어버립니다. 따라서, 이승만이 상대적으로 쉽게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겠죠. 이승만이 500만표를 받았어요. 신익희가 185만표. 그리고 조봉암이 무려 200만표를 받았습니다.
이번에 대선 뚜껑을 열어보니, 이승만 입장에서는 서서히 압도적인 표 확보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4.19혁명이 일어나는 그 전조의 모습이 이미 1956년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부통령은 이기붕이 안 되고, 민주당인 야당에서 부통령 (장면 당선) 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였지요. 이 때 민주당에서 내건 구호는, 선거 역사 중에서 가장 히트를 친 구호가 있습니다. 들어봐야 겠지요. "못살겠다! 갈아보자!" 강렬하지요. 구호 속에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 이 작품! 민심을 반영하여 가장 명확하게 한 방을 날린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하도 히트를 치자 자유당에서도 방어한다면서 갈아봤자 별 것 없다 라고 맞받았지만 아, 이건 좀 약하군요. 하하. 하여튼, 부통령은 야당이 가져갔습니다.
대선 결과가 심각하다고 느낀 이승만 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합니다. 물론 북한이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반공이 필요했겠지요. 그러나 이승만은 이제 자신을 대적하거나 위협이 되는 세력들에게 있어서,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맘에 안 들면 잡아들일 수 있는 법이 있어야 겠지요. 그래서 등장합니다. 신 국가보안법(1958)을 제정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봉암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진보당 사건이라는 것을 일으킵니다. 1958년인데요. 진보당의 통일 정책이 평화통일이었습니다. 어? 당연한 말 아닌가요? 싶지만, 이것이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에 와서 당연해 진 것입니다. 당황스럽지만, 예전에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 당시 평화통일이라는 것은 북한의 논리다, 북괴의 논리다 라면서 진보당을 반공이라는 틀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통일이라면 북진통일을 이승만이 주장했었으니까, 이것만이 정답이고 맞다라고 우기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보당의 평화통일은 남한사회를 흔드는 행위라고 본 것입니다. 국가 체제를 전복하려고 한다면서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사형시킵니다. 1959년, 대선 후보에 나왔던 정치인을 형장의 이슬로 보내버린다...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반공 체제 구축이라는 목표하에 적들을 다 제거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사사건건 정부에 대해서 비판하는 언론, 경향신문을 폐간(1959) 해버립니다. 철저하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56년 대선 때, 성난 민심을 바라 본 정부의 행위였습니다. 정권 유지만 생각할 뿐, 민심의 마음을 그다지 읽지 못하고 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았고, 그래서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짧은 역사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목격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휘청거리면서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들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는 세력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휘청거리는 민주주의를 다시 원위치에 돌려놓는 그 가슴 뛰는 역사, 우리 다음 문서에서 계속 만나보도록 합시다.
오늘의 영감 - 30%의 지지를 얻었던 무소속 조봉암은 사실상 사법살인이 되었던 우리나라의 가슴아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2011년 대법원에 의해서 무죄로 복권되었고요. 또한 위키의 설명에 의하면, 조봉암의 사형을 전환점으로 미국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차기 정부 수립을 위한 전략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4·19 혁명 때는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권하게 된다는 내용도 있지요. 이럴 때는 늘 쓰이는 말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내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반 정도만 내 생각이 맞다 라는 그 여유를 갖추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타인의 이야기를 보다 더 들어볼 수 있으며, 타인을 내 기준에서 함부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만 유리하도록 계속해서 해석해나간다면, 사람들의 신뢰를 잃는 다는 것.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교훈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