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간음치 말라(마태복음5:21-)/홍종일 목사

시북(허지수) 2015. 11. 17. 22:13

간음치 말라 (마태복음5:21-)

 

일주일 전에 한국역사상 아주 중요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바로 간통죄가 위헌으로 판결난 것입니다. 이제 간통죄는 폐지되었습니다. 대법원에서 모두 9명의 판사 중에서 7명이 폐지에 찬성하고 2명만 간통죄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예견된 것이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도 간통죄가 위헌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심판이 있었는데 그때는 6:5로 아슬아슬하게 간통죄가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이 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에서는 뭐 60년만의 폐지니 뭐니 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역사상 간통죄가 폐지된 것은 사상 처음입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웠지만 고조선에는 팔조법금이라는 법률이 있었는데 지금은 세 개만 전해진답니다. 비록 명문에 전하지는 않지만 팔조법금에는 여자가 간음을 저지르면 처벌하는 조항이 있었을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고조선의 유풍을 간직한 부여나 고구려에 간음을 금지하거나 여인의 정절을 중시하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지요.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 심해져서 외간남자의 손을 잡은 여인이 스스로 정절을 더럽혔다고 배위에서 투신 자살한 기록도 있을 정도입니다. 왜 외간남자의 손을 잡았냐하면 임진 왜란때 피난을 가기위해 배위로 올라 가는데 뱃사공이 여인의 손을 잡아서 올렸거던요. 피난 갈 때는 몰랐는데 배위에서 곰곰이 생각하니 외간남자의 손을 잡아서 여인으로서의 정절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겁니다. 요즘 생각하면 너무 극단적이지요? 하지만 손만 잡혀도 정절을 더럽혔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환난 중에 위급한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간통죄를 폐지한 것은 어쩌면 가정 해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은 괜히 재산분할이니 배우자의 의무니 해서 피곤하고 힘들게만 하지 더 이상 배우자에 대한 독점적이며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실제로 프랑스에서는 결혼보다는 동거가 더 많답니다. 동거가 너무 많기 때문에 동거 커플에 대한 법률적인 보호까지 있답니다.
이제는 가정이 더 이상 배우자의 정절을 강조하는 울타리가 아니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간통죄의 위헌성에 대한 제청은 간통을 저지른 사람들이 처벌을 회피할 목적으로 궁리 해낸 것이지요.


글쎄요,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자기의 죄를 없게 하려고 법을 바꾸어 달라고 요청한다는 발상은 굉장합니다.
그것도 착한 일을 한게 아니라 악한 일을 하고서.
그럼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요?

 

오늘 본문은 외견상 일견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깊숙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합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러분, 성경의 표현은 단순히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 말은 십계명 중에서 제7계명을 일컫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드시 지켜야하는 계명인 것입니다.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헌법같은 위치를 가진 중요한 법입니다.


그러한 법이 있다는 것을 너희가 옛사람에게서 교육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법이라는 말입니다. 이번에 새로 생긴 법이 아닙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이제는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죄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가 안통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정말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간음을 저지르지 않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면 여기에 안 걸릴 사람이 몇 안될겁니다.“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굉장합니다. 행위적으로 간음은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기만 해도 이미 간음이랍니다. 요즘하고 정반대의 추세입니다. 요즘은 있던 간통죄도 폐지되는 판인데 우리 주님은 외형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동기, 즉 마음까지도 중히 여겨서 간통죄를 확대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아! 아름답다’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처녀 총각들이 서로 눈을 맞추고 썸을 타고 결혼을 할거 아닙니까.
그러나 ‘저 여자 진짜 섹시하다. 한번 어떻게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여자를 바라본다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한 구절로 정의 했는데 여자를 보고 ‘저걸 그냥 콱’
하하, 여자를 바라보면서 그런 식으로 생각만 해도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하고는 정 반대입니다.
요즘은 섹시하다가 칭찬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우리 주님이 경계하신 부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겁니다.

 

글쎄요, 어떤 눈길이 음흉한 눈길일까요?
애매합니다. 그런데 이건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이 말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표준원문을 보면 약간 해석이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그 여자의 음욕을 위하여 여자를 응시하는 모든 자마다’가 됩니다. 무슨 말인지 헷갈립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불러 일으키게 하기위해서 여자를 바라보는 자마다’ 란 뜻입니다.
이건 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여자를 쳐다보는데 어떻게 봤기에 여자가 음욕을 품을까요?
아니 남자가 여자를 보는데 여자가 음욕을 품는다?
글쎄요, 남자가 엄청 멋지게 생기거나 미남이라도 이건 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저같은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봐도 상대 여자로 하여금 전혀 음욕을 불러 일으키지 않으니까 상관없기는 하겠지만..........

어쨋건 우리 주님은 간음죄를 행위에서 더 나아가 마음으로까지 확대하신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도저히 동의가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생각까지도 깨끗할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간음죄에 대해서 원칙만을 설명하신게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까지 들고 계십니다.

 

이것도 현대인들은 황당할 정도입니다.
일단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으니까 눈이 먼저 나옵니다.
29절에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마르코 폴로는 실화라고 말합니다.
어때요? 너무 끔찍하지요?

 

여기서 ‘오른눈’은 문자적으로 오른쪽 눈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 몸 중에서 가장 유용하고 가치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오른쪽이냐?
그건 ‘오른’이란 말이 신뢰와 권능을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른’은 ‘옳은’이란 말입니다. 옳다 아니다 할 때의 옳은.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도 범죄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과감하게 희생시키겠다는 각오를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실족케 하다’란 말은 ‘걸림돌이 되게 하다, 범죄하게 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게다가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 버리게 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또 ‘오해하게 하다’란 뜻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치게 하다’라는 뜻으로 까지 확장됩니다.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이것 때문에 내가 범죄하게 되거나 다른 이들이 나를 믿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하라는 말입니다.
쉽지 않은 말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렇습니다. 단호합니다.

 

30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오른눈’대신에 ‘오른손’이 나옵니다.  손은 도둑질을 상징합니다. 간음이 성적인 도둑질이라는 거지요.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이므로 성적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조금 더 깊은 뜻이 완곡하게 있습니다. 손은 히브리어 야드인데 이 말은 성기를 나타낸답니다. 아마 주님이 말씀하실 때 이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모두 알아  들었을 것입니다.

 

29절과 30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는데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라는 부분입니다. 똑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르면 원치 않아도 지옥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또 다른 식으로는 죄를 짓는 것은 자발적으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자발적으로 지옥에 들어가실 분은 안계시겠지요?

 

다시 여자로 돌아가 봅시다.
31절에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어럽쇼!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유대인들도 이혼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이 이혼을 허용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신명기24:1-4의 규정을 자유롭게 해석했기에 생긴 오해입니다.
아마 유대인들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혼을 정말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세계2위입니다. 1위는 미국. 막장 국가로 유명한 미국 다음으로 이혼을 많이 하는 나라가 일본이나 유럽이 아니라 우리나라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그래서 율법을 자기네들 입맛에 맞게 해석해서 갔다 붙인 겁니다.
신명기의 구절은 여자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었던 당시에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이혼을 해도 다시 결혼을 해야 먹고 살 수가 있었기에 재혼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객관적인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이혼서류를 주도록 한 겁니다.
여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니까 먹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가장 강력한 구제책인 셈입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의 입장에서 남편있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범죄(간통죄)이므로 ‘이 여자는 남편이 없음을 보장함 ’ 이란 증서를 주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건 이혼을 장려하는게 아니라 미약하나마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거지만  힐렐 학파를 중심으로 이혼 증서를 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도록 변질된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남편에게는 “음행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그러니까 우리 주님의 해석은 그건 이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혼은 음행시에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리를 못해서, 못생겨서
아파서, 제대로 사람구실을 못해서
돈을 못벌어 와서, 성격차이로
기타 등등의 이유로는 이혼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는 아무리 이혼서류를 줘도 이혼이 아니라는 거지요.

 

다른 남자들에게는 (음행이 아닌 사유로)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의 이유, 배우자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외의 사유로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면 그것은 바로 간음이라고 결코 재혼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이혼을 어렵게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이혼해 봐야 다른 사람과 재혼이 안된다 그러니 참고 살자.
보세요.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를 간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래놓고는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면 사실상 이혼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요즘처럼 돌싱과의 결혼이 흔히 일어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되는 것은 이혼을 더 만연하게 만들뿐입니다. 더 이상 이혼이 흠이 되지 않고
한번의 의미있는 경험쯤으로 치부해 버리면 앞으로 더 쉽게 결혼하고 더 쉽게 이혼하게 될 것입니다.

 

툭하면 이혼하는 분위기가 되면 결혼은 앞으로 없어 질겁니다. 해봐야 결국 피곤하고 돈만 낭비가 되는 거니까 굳이 결혼을 할 것 없이 그냥 동거만 하다가 수틀리면 헤어지면 되는 정말 편리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이혼하게 되면 재산분할도 이뤄지고 양육비니 뭐니 하면서 골치아픈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되니까.

 

그런데요 개인적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분위기가 결국은 나라와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겁니다. 동거하다가 그냥 헤어지면 되니까 더 이상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개인들은 이제 어렸을 때부터 홀로 서기를 연습해야 하고 사회의 가치관을 학습할 필요도 없고 그냥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다가 아무의 간섭도 없지만 보호와 도움과 교제도 역시 없이 그냥 늙어지면 도태되는 것입니다. 마치 밀림의 짐승들 같습니다.

 

늙어서 이빨이 빠진 사자는 무리에서 추방되어 혼자서 사냥도 못하고 그렇게 굶어 죽는 겁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보호해 주고 키워주며 사랑해 주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낳아준 부모도 외면하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서 방치한다면 아이는 고아원에서 자랍니까?

 

아니면 탁아소?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사회에서 내돌려진 아이들의 마음속에 평화와 긍정이 자리 잡기를 바란다면 그거야 말로 난센스입니다. 말이 되지 않아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아이가 제대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그것이야 말로 도둑놈 심보입니다. 지금처럼 부모들이 금이야 옥이야 키워도 제대로 자라기가 어려운판에 어려서부터 방치되고 혹사된다면
눈칫밥이나 먹고 자란다면
이 아이들이 커서 어떻게 될 것이며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사회나 국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국가가 정말 힘있는 자들의 착취집단으로 변질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죄성을 억누르고 선성을 키우는 그런 가정이 사라진다면 인간의 문명은 점점 쇠하여지고 결국에는 없어질겁니다. 생존만 남게 될 것입니다.
사회는 물질과 정신의 두가지 날개로 유지됩니다. 물질과 이로 인한 쾌락만있고 정신적인 지주가 없는 사회는 오래지 않아 반드시 멸망합니다.

 

거대한 제국 로마는 서고트족의 침입으로 멸망했지만 멸망 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도저히 되살리지 못할만큼 썩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국교는 기독교였지요.

 

그러므로 교회가 썩게되면 국민들의 정신도 썩게 되고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겁니다. 당시 로마의 성적 타락이나 사치와 부패는 말로 못할 만큼 심각했다고 합니다. 공중목욕탕에서는 공공연히 매춘이 이루어졌고 집집마다 성병환자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면 말 다했습니다.

 

귀족들과 부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더 먹기위해 이미 먹었던 음식을 토하고 다시 먹기 시작한 반면 가난한자는 하루 한끼 먹기도 어려웠다면 이미 그것은 같은 나라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서원한 수녀원의 마루밑에서는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쏟아지고

 

사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특히 부자와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그들의 눈치를 더 살폈고 그들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에 관심을 더 기울인 겁니다.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다고 교회마저 타락하자 아무도 세상을 구원할 수 없어 결국 세상은 급속하게 어려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는 망했지요.

가정이 흔들리면
결국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위협받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나아가 개개인의 생존마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제일 먼저 만드시 제도가 바로 결혼입니다. 남녀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도록 하신거지요.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서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전통이 학습되고 보호받으며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가장 근본적인 제도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뭐 간통죄가 없는 나라에서도 가정은 여전히 존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결혼한다고요?
천만에요? 그러한 나라들에서 결혼은 점점 줄어 들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결혼은 말만 결혼이지 동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조금 웃기게 한번 말해 볼까요?
전전 남편의 아내의 자식은 나에게 어떤 관계일까요?
미국에서 흔했던 질낮은 농담이 있습니다.

 

미국의 여자들은 세 번 결혼하기를 원하는데
처음은 돈많은 사람
이 사람하고 이혼하면서 재산을 분할받아서
이번에는 잘생긴 사람
실컷 사랑을 속삭이고
그리고 늙게되면 장의사하고 결혼해서 제대로된 장례를 준비한답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았지만 제 주위에는 전부 기독교인들만 있어서 사실 이런 사람들은 제가 본적은 없는데 참말인지 농담인지........

미국 영화를 보면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부부가 헤어지면서 하는 말 “좋은 친구로 지내자”
하하,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웃찻사나 개콘은 폐지되겠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고독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 인간을 분리해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더불어서 인간들이 가진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려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왜요?
왜 해서는 안되지요?
‘나는 나, 내하고 싶은데로 한다’

 

그게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본능적인 행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풍조를 막는 마지막 족쇄가 가정입니다. 아버지의, 어머니의 사랑과 엄격한 훈육이 그런 개인적인 일탈을 막는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가장 마지막의 장치인데 이제 그런 것도 훨훨 벗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엄마 아빠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잘했니 잘못했니 간섭할 사람도 없습니다.

 

아기를 적게 낳아서 인구를 줄이는 것에서 나아가
형제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가정이 해체되어 더 이상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생물학적 부모는 남아도
기르고 사랑해 주는 정서적인 부모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너무 비약이 심하다고요?

 

그래요. 이혼해도 자식들은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저도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사랑을 배우고 착한 도덕과 윤리를 배웁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에 대해서 배웁니다. 아무리 악한 아빠라도 아이가 자라서 살인자와 도둑과 강간범이 되기를 원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제대로 착하게 자라기를 원하며 사람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혼도 내고 때로는 인생의 깊이있는 대화도 합니다.
그런 사적이고 정서적인 관계가 없어지면 이제는 법이 규정하지 못하는 모든 악한 일은 제대로 막아 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가정과 결혼을 중시하는 곳에서 출산율도 늘어납니다. 지금 우리는 초저 출산국입니다. 지금 추세로 가면 향후 50년 안에 이 나라는 존속할 수 없게 됩니다.
부자가 있는데 지킬 힘이 없다면 이웃의 강하고 가난하고 폭력적인 자가 빼앗으려 들겁니다.

제가 요즘 느끼는 건데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이혼을 잘합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당사자들이야 얼마나 싫었으면 이혼을 하겠습니까?
저는 충분히 이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개별적으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이혼은 보다 엄격한 가운데서만 행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음행. 본문에서는 이 한가지의 경우에서만 이혼을 허락합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는 이혼을 막으려고 하지
이미 이혼했고
이미 재혼한 가정을 깨거나 그들을 정죄하고 괴롭히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남을 비방하며 미워하고 괴롭히는 그자체로 또한 범죄이며 악한 일이기에 그렇지요.
개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한마디로 판단하기가 어렵지요.
당연합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로서 개인도 보지만 이 사회도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인지를 제대로 말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저의 동료 목사가 주일날 이혼하지 말라는 설교를 했다가 그 교회의 재혼부부가 그만 교회를 안 나온답니다.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인기가 없습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냥 참고 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대로 지키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어야 합니다.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 세상이 끝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미 간음이 행해졌는데 억지로 가정을 유지하는 것도 웃긴 것 같습니다.

 

간음하지 맙시다. 다른 여인을 볼 때는 정욕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봅시다.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제도입니다. 가정은 이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입니다. 근본이 흔들리면 결코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합시다. 이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선이 이루어 지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행하도록
그래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도록 기도합시다.

 

세상은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으려 하면 사탄은 흩으려 하고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게 하면 사탄은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게 하며
하나님이 인간을 살리려하면 사탄은 죽이려 합니다.
말세지말을 당한 이때 세상이 비록 요동하더라도 하나님의 법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키며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3월 15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무려 8개월만에 설교를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설교가 아마도 저와는 잘 맞지 않았나 봅니다. 예수님의 기준이라는 것이 사람이 지키기에는 어쩐지 높아보인다는 느낌도 예나 지금이나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실제 상황 하나만큼은 그래도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오래도록 많이 아프십니다. 정신건강의학과 관련으로 병원 입원 중인데, 회복 자체가 쉽지가 않습니다.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만들어서 병원으로 운반해 갑니다. 때로는 사과 과즙을 만들어 가고, 때로는 배로 과즙을 만들어 갑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침부터 일어나서 꾸준히 몇 십분씩 노동을 투입해야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어느 어여쁜 인턴 선생님께서 이 과즙을 나눠먹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고서는 가볍게 툭 한 마디 던집니다. "아버지가 세심하고 자상하시니까, 아들도 자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거군요." 그 한 마디가 40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말 또렷하게 조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글쎄... 가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서로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챙겨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아닐까? 그런 생각은 듭니다.

 

우리나라는 아플 때,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회관계망에서 OECD 꼴찌를 차지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어로 바꿔말한다면, 헬조선이니, 지옥불반도니, 그런 비극적인 말들이 회자되는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운이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느린 속도지만 서서히 회복 중이고, 그 천사 같던 인턴 선생님과도 불과 며칠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제 얼굴이 홍당무가 될 만큼, 신나게 속으로 많이 웃을 수 있었습니다. 헬조선 탈출을 위해서, 30대 중반, 할 수 있는 길들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그 열정만큼은 꼭 간직하렵니다. / 2015. 11. 리뷰어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