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마태5:38-)
우리는 지금 마태복음 5장을 보고 있습니다. 이 5장에는 우리 주님의 율법에 대한 재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주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우리는 앞에서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구체적으로 새롭게 해석된 율법을 하나씩 말씀하고 계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그리고 오늘 말씀인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
여기까지는 전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는 ‘~하라’가 나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니까 옛날 사람으로부터 너희가 이러이러하게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이 말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중근동의 고대사회에 아주 철저하게 지켜진 법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사람을 죽였으면 너도 죽는다.
남의 눈을 상하게 했으면 너의 눈도 상하게 한다
간단하면서도 섬뜩한 조항입니다.
실수로 했는지 고의로 했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결과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옛날에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몇주 전에 이란에서 남의 눈을 실명케 한 사람에게 똑같이 눈을 실명케 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답니다.
요즘 이슬람 사람들보면 성경, 특히 구약을 너무 철저하게 지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아랑곳 않고 구약의 자구만을 줄기차게 지킵니다.
간음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보통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것에서부터
한달 간의 단식에서부터 차도르까지 별별 관습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랑과 관용이란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 조항이 의미하는 바는 조금 다르게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는 말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상당한 그러니까 적당한 보복을 넘어서는 행위의 금지까지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자, 한 부자에 세력이 큰 사람의 아들이 어디서 싸워서 눈이 한쪽 다쳤습니다. 이 부자는 화가 나서 아들의 눈을 상하게 한 자를 잡아서 그의 눈 한쪽을 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너무 화가 나서 전신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다가 죽였다고 합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조항은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상대방은 너의 아들의 눈만 한쪽 상하게 했는데 왜 너는 그에게 과도한 폭력을 휘둘러서 그를 죽이느냐? 받은 피해보다 입힌 상처가 더 크므로 그건 정의에 어긋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이 동해보복법의 조항은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고대인들에게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안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이것은 동해 보복법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사람이 잘하는 소송을 걸어서 피해를 보상하라는 조치도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우리 주님의 말씀은 정말 지키기 어렵습니다. 세상에 자기를 위해하고 음해하는 세력에 대해서 그럼 묵묵히 당하고만 있어야 된다는 말일까요?
그러면 악당들만 살판 나는 것 아닐까요?
주님이 깊은 뜻이 있겠지만 일단은 충격적입니다.
사실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 손으로 뺨을 맞는 것은 더 큰 모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치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훨씬 심각합니다.
오른편 뺨을 치려면 어떻게 할까요?
일단 상대방과 마주한 상태에서는 손등으로 때리거나 아니면 왼손으로 때려야 오른편 뺨을 때릴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두배나 더 모욕적인 행동입니다. 이거 점점 더 점입가경입니다.
고대인들은 왼손이나 오른손의 사용처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지금도 인도같은 곳에서는 왼손은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만 사용하는 손이기 때문에 남이 대접한 음식을 왼손을 사용해서 먹게 되면 대접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모욕으로 받아 들여진다고 합니다. 유대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왼손으로 뺨을 맞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요?
만일 상대방과 마주한 상태가 아니라면 오른편 뺨을 때리기위해서는 상대방의 뒤편에서 때려야만 합니다. 즉 상대방이 전혀 모를 때 기습적으로 때리는 겁니다. 우리말로 뒷통수를 제대로 맞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상태와 비슷합니까?
우리 주님의 이 예는 모두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상대방에게 오른편 뺨을 맞은 것에 대항하지 말고 왼편 뺨도 돌려서 때려달라고 요청하라는 말입니다.
하하, 이쯤 되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킬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구체적인 예시는 계속됩니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여기서 송사는 반드시 재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비난하다, 헐뜯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속옷에 비해서 겉옷은 엄청나게 귀한 것입니다. 겉옷은 가난한자가 밤에 이불로도 덮고 자기 때문에 전당포에서도 밤새도록 잡아서는 안되는 물품입니다. 그런데 속옷을 달라고 시비를 거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랍니다.
그러면 시비거는 모든 이에게 줘야 한다면 예수 믿는 이는 도데체 겉옷이나 속옷이 몇벌이나 있어야 합니까? 또 돈은 얼마나 많이 필요할까요?
예수믿는 게 무슨 호구입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주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까요?
참고로 지금 말하는 속옷이 우리의 팬티나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겉옷 안에 입는 튜닉 같은 거, 음 우리식으로 말하면 좀 긴 티 같은 거?
우리의 속옷개념은 당시 이스라엘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는 우리의 고구려가 제대로 나라로서 기능하기도 전의 아득한 고대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속옷은 없던 시절입니다. ‘아유, 더러워, 속옷까지 달라고 하다니!’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여기서 하신 말씀.
무저항과 무한 희생.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예시는 노예근성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민감한 조항입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먼 길을 혼자 가니까 심심해서 같이 가자고 요구하는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조금 더 그리고 복잡한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억지로 가게하다’는 말은 원문으로는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페르샤에서 나왔는데 페르샤의 왕이 조서를 전달하여 사람들을 징발하여 짐을 지게 하거나 문서를 전달하게 한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에서도 당연히 이러한 규정은 존재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전시동원규정?
문제는 자기나라 백성이 아니라 피지배민족들에게 이러한 규정을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원수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는 상황입니다.
지금 본문의 말씀이 이걸 의미하는 겁니다. 자기들을 멸망시킨 국가의 왕이 명령하여 강제로 징발하고 짐을 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짐을 지는 길이가 ‘오리’라는 말이지요. 아마 징발이 한번에 오리 정도까지만 짐을 지는 부역을 과하게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에 앞장서지 않더라도 몇몇 매국노를 제외하고는 로마를 싫어했지요. 그래서 길가다가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한 사람을 지목해서 군대의 짐을 지게 하는 일이 매우 흔했습니다.
그럴 때에 반항하지 말고 기꺼이 로마군의 짐을 지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배 까지도 응해주라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친일파를 만드는 겁니다. 매국노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에 반항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민간인이 로마군인들에게 맞서봐야 죽거나 최소한 중상입니다. 괜히 개인이 혼자서 맞서다가 다치고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사실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기는 했는데 직접적으로 지배를 받기도 하고 또 로마와 백성들 사이에 분봉왕이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헤롯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을 쪼개가지고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로마가 임명한 왕들입니다. 당연히 로마는 가이사랴에 로마의 총독과 천인대를 주둔시켜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중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들도 모두 로마에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은 이들입니다. 자기들은 적 앞에서 굽신거리며 출세를 해놓고는 국민들에게는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해야 된다고 가르친 겁니다.
성전세라는 것도 보세요. 우리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는 이방의 돈을 드려서는 안된다고 해놓고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돈을 따로 만들어서 환전을 해줍니다. 그래놓고는 환전하면서 환율을 조작해서 부당이득을 취하는 겁니다. 정작 자기들은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로마에게서 대제사장직을 얻어 놓고는.
오늘날 우리나라 위정자들이나 재벌들하고 똑 같습니다.
나라로부터 가장 혜택을 많이 보는 자들은 정작 나라를 위해서 하는게 없습니다. 자기나 자녀들은 군대를 안가고 심지어 일가족이 미국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지고 정작 일반 국민들보고는 애국을 강조합니다. 웃기지요.
재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애국심으로 사준 물건들 덕분에 부자가 되어 놓고는 일단 부자가 되자 외국보다 국내에서 더 비싸게 물건을 팝니다. 애국 마케팅으로 물건을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정말 화나는 게 있었는데 그곳에서 현대차를 사면 한 대를 더 끼워줍니다. 게다가 현대차를 할부로 사고 미국인이 실업자가 되어서 할부를 낼 수 없으면 그 할부금을 현대차회사에서 대신 내준다고 광고를 합디다. 국민들에게 폭리를 취하고 혜택은 엉뚱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지요.
당시 유대사회도 소위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은 로마의 앞잡이들이지만 정작 유대인들에게는 애국을 강조하니 힘없는 서민들만 애국한다고 죽어나는 거지요.
우리 주님의 말씀에는 이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애국은 국가로부터 가장 혜택을 많이 받는 사람들부터,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부터 하는게 맞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요즘 우리네 관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들라고 하면 돈? 건강? 사랑?
여하튼 이런 순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귀한 돈을 막 빌려주라는 겁니다. 정말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다같이 가난할 때야 서로 빌려주기가 어려운걸 아니까 빌려달라는 말을 안하는데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부자가 한명 있으면 이 부자는 돈 빌려주고 떼이고를 거듭하다가 같이 죽으란 말이냐고 반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이게 없어서 불편한데 여기는 이게 두 개나 있네요. 한 개만 저에게 주세요.’ 하면 그걸 주라고 하는데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아프리카의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여기서 거절하지 말라는 말은 상대방의 도움 요청이 있을 때 거절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문의 뜻은 ‘상대방에게 호의를 보여야 할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묵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면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어려운줄 알아도 도와주기 싫어서 저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 좋게 거절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우리 주님은 네가 도움의 요청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제가 어려울 때는 먼저 가서 도와주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 어려운 이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내가 황금을 산처럼 쌓아놓고 사는 사람도 아닌데 그 수많은 이웃들을 다 돌봐야 합니까?
옛날 조선시대 구대진사와 십대 만석꾼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도 주변 백리안에서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가훈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아마 이 사람의 이웃은 사방 백리 안에 사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각종 인터넷이니 소식들이 잘 발달한 상황에서 우리의 이웃개념은 더 확장되고 있습니다. 백리가 뭡니까? 만리 밖의 사정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구촌의 한 번도 본적도 없고 앞으로 만나기도 어려운 이들의 소식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국제적인 구호단체들이 여럿 활동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를 다니면서 아니면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구호에 동참하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일일이 챙기다가는 자기 앞가림도 못해서 굶어 죽기 십상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제까지 총체적으로 본문을 다 살펴봤는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너무 어렵습니다. 심오해서 이해하기 어려운게 아니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실천하기가 너무 너무 어렵습니다. 인간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닙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성인의 반열에 올라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니 성인도 안됩니다.
퍼도 퍼도 돈이 무한정 쏟아져 나오는 요술주머니를 찬 성인은 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요?
우리 주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관용의 정신으로 세상과 싸워서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는데
그래서 상대방은 우리가 어느 정도는 반발할 것이고 그러한 반발은 이렇게 힘으로, 계략으로 찍어 누르겠다고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상대방의 의도와는 다르게 기꺼이 그 일을 감수하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더 봉사해 줄 것은 없는지를 묻는다면 아마 상대방은 자기의 악의에 상대가 선의로 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러한 선의를 이용하다가도 결국은 만일 그가 사람이라면 부끄러워하고 그러다가 뉘우치고 우리의 형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상대방도 사람이어야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만일 그가 전혀 깨닫지 못하고 뉘우치지 않는 짐승이면 어쩌지요?
그러한 경우에 주님은 우리에게 따로 더 크고 놀라운 보상을 직접적으로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사랑의 기적에 한번 걸어보세요.
상대방을 부끄럽게 해서 상대방을 개과천선 시킬 수 있을지 모르쟎아요?
전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계전도입니까?
전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행실로 본을 보이는 본보기 전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아,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그렇게 그렇게 이 불신과 미움과 증오가 가득찬 세상을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로마 제국을 정복한 기독교인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이미 우리의 눈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악해서 그게 안통할까요?
옛날 로마인들은 더 잔인한 사람들이었지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이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역시 주님의 이런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기에는 너무 불안하고 괴롭습니다.
그럼 이런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주님의 명령을 지켜서 사랑과 관용을 행할 사람이 열에 아홉이고 단 한사람만 도움을 요청한다면
더 해서 백에 99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하나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훨씬 더 기쁘게 그리고 부담없이 주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겠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라고 주문하신 겁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서 남에게 주기만 하려고 합니다.
도움은 별로 필요가 없어요.
물론 그들도 때로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지요.
이런 상태라면 어때요? 우리 주님의 명령을 충분히 이행 할 수 있지요?
결국 우리 주님의 명령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면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요구입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제자들
제자들에게 무얼 말씀하시고 있지요?
천국 백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있쟎습니까. 산상수훈에 나온 것들.
그리고는 하나씩 구체적인 삶에서의 예시를 들고 계시는 겁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이뤄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입니다.
완벽하게 성화가 이뤄진 저 세상에서의 삶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꿈같은 이야기라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그분의 말씀대로 한번 해봅시다. 그래서 세상이 어찌되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면 될수록 성도의 삶은 더 여유로워집니다.
한사람이 열을 구제하는 것은 어렵지만
열사람이 한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나아가 백명이 한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얼마나 힘이 덜 들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우리의 사랑으로 세상을 부끄럽게 합시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의 계명을 실천하려는 우리와 이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3월 2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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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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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한 편의 주옥같은 참 아름다운 설교를 이제서야 올립니다. 저는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올해는 오래도록 약을 먹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아프면 게을러지기도 쉽고, 자신의 처지를 의도적으로 비관해 버리기도 쉽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열심히 해내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임에도, 덜컥 겁부터 먹고 미루는 것을 습관화 해버리고, 그 다음에는 반드시 정당화, 합리화를 따라 붙입니다. 그런 나쁜 생활 습관이 한 주가 되고, 한 달, 두 달이 되고,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선생님의 조언을 빌려오자면, 머릿속에서, "최선, 열심히, 완벽" 을 지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제는 "웬만하면 정상,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 그게 그거" 라는 좀 더 넓은 스트라이크 존을 가지려고 합니다. 내가 그동안 무엇이 그토록 잘났기에, 좋은 글만, 멋진 글만 써내어 보려고 탐욕을 그토록 부려왔단 말입니까. 그런 일들 하나 하나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설교가 올릴 것이 있다면, 그냥 올리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뭐 어떻습니까.
이상형을 만나서 가슴 설레던 나날들이 있었다면, 예쁜 그림 동화처럼 소중하게 잘 정리해두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자꾸만 포장을 화려하고 찬란하게 하는 "스킬"만 궁리하니까, 결국 인성에도 맞지 않는 글을 써내려 가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밥만 잘 먹고, 잠만 잘 자더라도 70% 까지는 충분히 정상적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잘 먹고, 잘 잤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30%의 힘겨운 일들은 어쩌면 간혹 또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또 해나가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단지 사람답게 살아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평범한 일상을 열심히 채워넣어가는 것. 저는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사람답다는 가장 멋진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2015. 11. 늦은 밤.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