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마가1: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11. 30. 22:26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마가1:1-8)

 

우리는 모두 다 성공을 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돈을 많이 버는 것?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이름을 떨치는 것, 인기를 얻는 것? 글쎄요, 제가 생각하는 보통사람들의 성공은 이런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이 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몰라도 스스로는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기는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고 또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를 낮추어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현실을 분해하고 높아지려고 노력하지 남의 아래를 자처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정말 이상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인기도 얻고 수많은 이들이 그를 선지자로 따랐고 이름을 사해에 떨쳤지만 스스로 출세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를 주인공이라 하지 않고 자기가 남의 앞잡이라고 말하는 사람,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 세례 요한을 봅니다.
스스로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스스로를 종의 자리에까지 낮추는 사람 세례 요한을 봅니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가진 재물에는 만족하지 않아도 자기가 가진 재주에는 만족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는 이기적인 인간본성에도 위배되는 사람, 그렇다고 그 댓가로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서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남의 앞길을 닦는 이상한 사람 세례 요한을 오늘 살펴 보려 합니다.
참고로 우리 주님은 그런 세례 요한을 보고 “지상에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는 마태나 누가 요한과는 달리 복음서를 매우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도 무미건조하고 단도직입적입니다. 그것은 마가복음이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상당히 실용적이었기 때문에 미사여구를 쓸데없이 나열하는 것을 별로 좋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임을 밝히고 그의 복음의 시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문은 기술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원문에는 “복음의 시작”이란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예수님을 설명하는 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의 아들’이란 것과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은 황제나 영웅들 뛰어난 예술가들을 가리켜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혹시라도 로마교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오해할까봐 그리스도란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메시야란 말이지요.

 

그러므로 마가는 매우 간단한 서두에서 복음이란 곧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우리말로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이 말은 주로 로마인들이 황제의 즉위나 전쟁에서의 승리 때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말은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란 측면에서 사용합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가히 죄많은 인생들에겐 혁명적인 소식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땅의 착하고 힘없고 약하며 억울한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의 위협도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할 염려도 없으며, 수고한 댓가를 그대로 받을 수 있는 그런 나라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불의와 불법이 없이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려지는 ,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본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살아 숨쉬는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압제도 없으며, 쉼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 바로 그런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하기 시작했다면 이것이야 말로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쓰인 ‘시작’이란 단어는 구약 창세기에서 처음 나온 ‘태초’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단지 창세기는 히브리어로 마가복음은 헬라어로 쓰여졌다는 것이 다릅니다. 애초에 이 단어는 창세기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복에서 ‘태초’라는 말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좀 아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의 창조시작과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은 똑 같은 의미를 줍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에 갈음하는 재창조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위대하신 분의 제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정말 기쁘고 가슴 벅찬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2.네 길을 예비하리라
그런데 이 절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하나님이 한 사자를 예수의 앞서서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사야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예수님 당시의 회당에서 매 주마다 이사야서가 널리 읽혀졌기에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앞서’라는 단어는 원래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도시로 개선하기 전에 먼저 선발대를 보내어 승리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와 원로원은 이 승리의 소식을 듣고 개선식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은 독자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의 나심과 그의 사역이 있을 것임을 미리 전하는 그리고 그의 개선식을 준비하게끔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를 띤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다른 주인공을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하는 임무를 띤 것입니다.

사실 오늘 현대인은 이러한 사역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자기가 영광을 얻지 못하면 오히려 이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방해하는 것이 현대인의 관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예수의 사역을 위한 길을 예비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기쁘게 담당한 사람이 바로 요한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도 아니고 유대도 아니고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에서 사람들에게 듣도록 외친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에서 나온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친 지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비록 피폐해 보이지만 장차 주께서 오실 ,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있을 것으로 언급되는 지역입니다. 바로 여기서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결코 사치하지 않고 스스로를 절제해서 약대 털옷을 입고 석청과 메뚜기로 양식을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면서 아무런 댓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냥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그걸로 자기의 역할을 끝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의 인기는 예수님의 그것을 넘어 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미워함이 되었는데 희한하게도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도 세례 요한만은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세례 요한이 제사장의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당번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고위 제사장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즘말로 하면 명문가에서 탄생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도 세례 요한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상 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야로 인식되었고 적어도 ‘메시야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과 세례 요한으로부터 두명의 제자를 파송받아서 제자단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세례 요한의 인기와 영향력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의 들러리가 아니라 자기가 메시야라고 주장해도 충분히 먹혀 들어갈 분위기였습니다. 심지어 헤롯왕 조차도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오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스스로를 낮추고 본래의 목적에 맞게 처신합니다. “저는 단순히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그분의 종입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요즘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그 길을 걷다가 감옥에서 한 철부지 여아의 간청으로 목이 잘려지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거친 옷과 조악한 음식을 먹은 댓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었음에도 그는 결코 예수에 대한 자기의 본분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따지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 형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예수님보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라던 대로 인기도 얻었고 영향력을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말라기 이후에 400년 만에 이스라엘에 나타난 선지자의 인기는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조그만 인기를 믿고 스스로를 하나님과 예수님의 자리에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이단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이단들에는 다 교주가 있습니다. 종의 자리가 아니라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신이 되려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시도는 아담의 때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교만을 그렇게나 경계하신 것입니다. 스스로를 높여서 신의 반열에 두려고 하는 시도는 사탄이 인간을 조종하는 큰 수단이 되어왔습니다.
더구나 조금 능력있고 인기 있다고 하면 종국에는 그러한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폭발적인 대중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서 결코 예수님의 메시야 자리를 탐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감옥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조용히 끝내었습니다. 아무런 댓가도 요구하지 않고.

 

3.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다
세례 요한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러 와서 그가 한 일은 한마디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와 있는 세례 요한의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누가 내 앞에 가면서 나의 길을 예비하고 내가 인생길을 순적히 갈 수 있도록 나의 길을 평탄케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요? 우리는 누가 나의 길을 예비해 주기를 원하지 내가 남의 길을 예비하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이 기다려 지는 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고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누가 나의 비빌 언덕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누가 내 대신 앞서 가서 나의 앞길에 장애를 다 없에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한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를 잘 만나기 전에는. 그런데요 성경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첩경을 평탄케할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온 것을 봅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세례 요한이 한 일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입니다. 그는 먼저 사람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일단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야 만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쉽게 전파될 수 있겠거든요. 하나님은 죄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먼저 우리의 죄가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그는 주님보다 먼저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세례를 받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여전히 맺어야 합니다.
회개는 원문적으로 ‘다시 생각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단순히 마음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까지 바꾸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행동으로 돌이키지 못한다면 이것은 결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단지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로 이끄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 회개를 광야에서 외친 것은 처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장소인 출애굽 당시의 언약의 장소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진 에세네파나 쿰란공동체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집니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고 세상의 출세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오실 그리스도를 위한 첩경을 예비하는 사역만을 수행합니다. 그 방편의 일환으로 그가 준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가진 세례가 아니라 죄씻음의 표시인 세례였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 개종자를 물속에 담구는 회개와 개종 의식을 거행했고 쿰란 공동체는 종말론적 심판을 대비하기 위해 매일매일 죄를 고백하며 몸을 씻는 정결 의식을 행했다고 하는데 요한은 이를 자신의 회개의 세례에 응용한 것입니다.
그가 광야에서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4.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이 나아와
그런데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나아 온 순서를 적고 있습니다.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이건 성경의 단순한 관용적 표현이 아닙니다.
왜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장 나중에 나왔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당시 유대의 특권층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달리 수도는 항상 부유하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왜냐면 당시 예루살렘성내에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려면 상당한 금력이나 권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권력이나 금력이 없는 사람은 예루살렘성내에서 먹고 살길이 없습니다. 그곳은 원칙적으로 소비도시지 생산도시가 아니거든요.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권력 있는 예루살렘에서 맨 나중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왔다는 구절은 결코 그냥 보아 넘길 구절이 아닙니다.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뭔가 부족하고 하나님께 구할 것이 있어야 나옵니다. 물론 이러한 행태는 정말 나쁜 버릇이지만 그게 바로 사람입니다. 내 배가 부르면 하나님의 부름에 쉽게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쉽게 찾지도 않습니다. 부족한게 없는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지방 사람들이 나오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 사람이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 이란 말에서 계층과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든 지역에서 다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오죽했으면 그 콧대 높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까지 왔겠습니까?
이 구절로 보면 세례 요한의 세례는 당시 이스라엘에 굉장한 열풍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폭군 헤롯조차도 세례 요한의 눈치를 보았겠습니까?

 

이만하면 대제사장이 부럽지 않은 권력입니다. 모두가 그의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는데 그가 두려울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높여서 신의 반열에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메시야임을 부인하고 자기는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 아니 오히려 메시야의 종의 자격도 부족한 사람으로 자기를 낮춥니다. 그게 진정한 선지자요 목자입니다.

 

물론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세례 요한의 세례가 굉장한 반향을 일으키자 이를 지켜보러 온 것일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사람들이 사두개인들로 대표되는 기존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재야의 서기관, 율법가로부터 영적인 충족을 얻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실망했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열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과는 정말 사이가 나빴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물론이고 바리새인들도 주님을 비난하고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럼 왜 그랬겠습니까?
요한에게 한 행동과 예수님에게 한 행동은 정말 다릅니다. 요한의 세례를 지켜볼 때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전혀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에게 나아가는 사람들을 질투어린 눈으로 쳐다 보았을 뿐입니다. 성경어디에도 그들이 모여서 세례 요한을 죽일 모의를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의 모함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헤롯의 치기어린 변덕과 두려움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님에게 한 것은 다릅니다. 반응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출신이 제사장이 아니었고 레위인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이 볼 때 예수님은 단순히 이방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촌뜨기 , 평민, 하층민, 이방인에 가까운 ‘일종의 유대인’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것은 당시 나사렛에 로마군의 주둔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기지촌이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자국군대가 아니라 유대를 압제하던 침략자의 군사기지가 있던 곳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정통 유대인들의 관점으로는 결코 순혈의 유대인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습게 여기고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마침내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한 것입니다.

 

5.주인이 아닌 종의 신분으로
그런데요 출생의 신분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보통 처음에는 자기의 분수를 지키고 겸손을 유지하다가 조금만 인기를 끌게 되면 추종자들의 열광적 지지에 젖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높이려 합니다. 그래서 종종 교만에 빠져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습니다. 그래서 이단이 되는 것이지요. 사교집단을 만들어서 교주가 되기도 하고 마치 교주같은 제왕적 권력을 휘두릅니다.

 

이단이나 사교집단은 결국 사람들이 흩어지고 멸망하지만 사람들은 비교적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흩어지기 때문에 그 교주들은 한동안은 권력을 누리면서 추종자들의 단물을 빨아 먹습니다.
그런데 사교집단이나 이단들의 특징은 그 회에 속한 개인들의 미래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회원들의 권익과 안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심지어 회와 개인들이 같이 성장하는 것도 생각지 않고 개인을 희생시켜 집단을 강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거든요.

이단의 특징은 보통 피라미드식의 계층제 조직으로 구성되고 철저한 상명하복을 주장하며 비윤리적입니다. 즉 가족이나 인륜보다도 조직의 명령이 더 우선적입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배신은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조직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신천지에서의 탈퇴를 강제하는 자기 엄마를 납치혐의로 수사하지 않는다고 자기 엄마를 구속하라는 기자회견을 한 신천지 교도도 있지 않았습니까?

 

뭐 양심은 있었는지 딸의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가리고는 있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사교집단이 이렇게 무섭구나!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는 판에 자기 친엄마를 구속하라는 기자회견을 딸에게 시키는 집단이라면 이건 사회의 악이라고 규정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수사하라고 한 말이 사실은 구속하라는 말이거든요. 만일 그들이 기독교 계열의 집단임을 스스로 공표한다면 그래 엄마가 원수보다 더 못하다는 말입니까? 비록 딸이 철이 없어서 그런 기자회견을 하려고 해도 집단의 어른이나 지도자는 그런 행동을 제어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적 관용이고 그 관용, 즉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거든요.

 

사람들이 일단 종교적 집단적 광기에 빠진다면 그 안에서 이성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때는 어떤 말을 해도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사탄의 공작으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이 안나오면 다행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집단적 광기가 상당히 오랜기간 지속되는데 대개의 경우 인간에게는 전성기라고 부르는 시기가 매우 짧다는 것입니다.

 

가장 젊고 힘이 있을 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살지 못한다면 나중에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그때 자기가 아니라 집단을 위해서 청춘과 돈을 다 바치고 나면 결국 그에게는 허무만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집단에 빠진 사람들은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이 없이 사회의 낙오자로 부적응자로 인생의 실패자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진정한 목자의 자세는 아닙니다. 진정한 목자는 자기가 집단으로부터 가지게 될 권리나 이익보다 먼저 그 집단에 속한 개개인을 더 사랑합니다. 심지어 그 개개인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려 합니다.

자기를 위해 추종자들을 희생시키지도 않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어쩌면 그는 가짜 메시야가 되고 로마당국에 맞서는 영웅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존 종교와 정치 권력을 뒤엎는 혁명아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무수한 생명이 사라지겠지만 메시야의 영광을 위해 개인의 희생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는 메시야를 기다리다 지쳐서 자꾸 자기를 메시야로 착각하고 추종해도 그는 오히려 그러한 이들에게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정과 헌신의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했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를 자처해서 목자의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들로부터 금품을 징수하거나 그들을 조직화하여 군대나 호위대를 만들지도 않았고 독립된 세력을 이루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거친 옷과 조악한 음식, 그리고 척박한 거주지에서 묵묵히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하나님이 자신을 파송한 목적에 맞는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보통 이단의 특징이 교주나 우두머리들이 화려하게 산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수만명의 사람들이 내는 돈을 혼자만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의 교도들이 막노동을 해서 번 돈을 헌금하면 그것을 가지고 자기는 복음을 전합네 하면서 유럽의 최고급 호텔에서 자기를 선전하는 연회를 엽니다. 이것은 결코 목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솔직히 세례 요한은 명문가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천사가 그의 탄생을 예고한 위대한 탄생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고자 했다면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도 있다는 유혹에 쉽게 굴복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영광과 권력에의 유혹을 모두 떨치고 오로지 주의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떼를 맡기시면서 이들을 실족지 않게 하고 때를 따라 꼴을 주며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자기 양들을 살찌우고 보호하는 것이 바로 목자의 표상이지 양들의 상태는 어떻게 되든지 자기만 잘살고 보는 것은 결코 진정한 목자가 아닙니다. 그런 이는 삯꾼이며 강도인 것입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띠고 석청과 메뚜기로 식사를 대신했습니다. 극도의 청빈한 삶을 이어간 것입니다.
그렇게나 인기가 높고 그렇게나 영향력이 큰 , 게다가 고위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 더구나 그의 출생을 천사장 가브리엘이 예고한 위대한 인물인 그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사교집단의 교주쯤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 메시야의 자리까지도 모른척하고 꿰찰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사로이는 사촌동생을 위해서 크게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가까운 사촌이기 때문에 더 비교가 되고 그렇기 때문에 남이 아닌 사촌이 더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지요. 더구나 형도 아니고 동생인데..........

그러므로 주님은 나중에 요한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자라고 하셨지요.

 

어떻습니까?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자가 좋습니까? 아니면 배부른 강도가 좋습니까? 하나님의 양무리를 도적질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는 강도요 사기꾼이며 동시에 신성모독의 죄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는 결코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례 요한을 보면서 참 바보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이는 세례 요한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을 보고 실패한 삶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자요 진정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지상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제가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요한같은 사람이 되라고 감히 말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그런 사람 한둘정도는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남의 공도 자신의 것으로 도둑질하는 세상에 자기의 공도 남에게 돌리는 세례 요한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무리한 요구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땅에는 세례 요한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 나오리라 믿습니다.
 
그 옛날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주의 길을 예비했는데 오늘 이땅에 역시 회개를 선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예비하는 이땅의 세례 요한을 그려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3월 2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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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설교를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천천히 칸을 띄워가며 올리다보면 가끔 멈칫 하고서,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늘의 그 순간은 이 한 마디에 흔한 말로 꽂혀 있었습니다.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요즘 저는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자꾸 나오려고 합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부족한 사람이었구나, 그토록 열심을 내지 않고 편안하게만 누리며 살아왔구나를 매주 반성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바둑 용어로는 복기라고 합니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여정을 한 수, 한 수 되돌아 보면서 생각에 잠기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건강도 부실한 제가 10대 시절에 어린이 대공원에 소풍으로 놀러 갔다가, 그 넓은 공원에서 너무 많이 걸어서 그 부작용으로 초등 6학년 1학기를 통채로 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다리를 절뚝거리던 저를 밤 늦은 시간까지도 부축해 주던 친구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20년 전의 추억 하나 하나가, 돌아보면 기적과도 같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20대 시절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공부방을 연다는 소식에 겁도 없이 손을 들고, 나도 수업 한 두개 쯤은 교사를 해보겠다고 근거도 없는 자신감을 갖고 살았던 그 부끄러움이 자꾸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물론 수업을 잘해보려고 리허설(모의 수업 연습)도 스스로 해보고, 제 나름의 노력은 했습니다만... 하하.

 

쉽게 말해서, 10대 시절, 20대 시절, 30대 시절... 분명 시편 어딘가에 나오는 말씀인 것 같은데, 각각의 그 시절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셨음을 깨닫게 되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 쯤되면 중증의(?) 기독교 환자인 것 같습니다. 옛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예수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외사랑 하던 선생님한테 잠시 눈멀어 빠져 있어 가지고선, 작은 일에서도 놀라운 발견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 같이 커피나 한 잔 타드십시다. 라든지...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다정한 말을 건네보기도 합니다. 게다가 돌아오는 피드백은 놀랍게도 아들아, OK 입니다.

 

저의 34살. 올해에는 어느 해보다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명색이 공부방 교사였는데, 제자 녀석은 공무원 시험에 짠 하고 합격해 버렸는데, 10년이나 더 살고, 책도 많이 본 선생이라는 저는 미끄러져 탈락했으니,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집니다. 그래도요. 제자 녀석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자신감 넘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매일 매일 두근거립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혹시 벌어지는 게 아닐까. 내가 주어진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꾸만 의지하고, 매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음악을 듣기도 하고, 가끔은 CCM을 틀어놓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치의 딱 그만큼의 용기를 가지고, 잘 될 거라고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이문재 시인에 따르면, 미국 같은 강대국도 외적 풍요와 내적 공허로 복귀한 상황이라는 경고가 있습니다. 풍요로워 보이나 속이 비어있다는 강한 경고 메시지 입니다. 우리는 분명 다른 삶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은 건강이 회복중이긴 하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탐색하고, 고민하면서 살아야 겠지만, 적어도 내적으로는 튼튼하고 풍요로운 사람, 그래서 꾸준히 책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 사색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감히 제가 세례 요한 같은 성인의 백만 분의 1이라도 닮을 수 있겠느냐만은, 어떤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 명예 보다는 자신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 그것 하나 만큼이라도 분명히 이 설교를 통해서 전달할 수 있어서 저는 매우 기쁜 밤입니다. / 2015. 11. 30.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