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광야와 시험 그리고 인간(마태복음4: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12. 22. 15:39

 

광야와 시험 그리고 인간 (마태복음4:1-11)

 

오늘 저는 예수님의 기적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한번 살펴 보려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성력의 비밀?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 없이 능력을 행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즉 그는 원래 신이기 때문에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아무런 준비가 필요 없었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전에 준비를 하십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이 바로 40일간의 금식기도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입니다.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전에 금식기도로 무장하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 이런 전통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40일 금식기도하다가 잘못된 경우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40일의 금식기도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냥 예수님이 된게 아니라는 것을 바로 이 금식기도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광야에서의 금식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고 이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1.왜 사막인가


유대인들에게 사막은 우리나라사람들의 산과 똑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닦으러 산으로 갑니다. 계룡산이니 모악산이니 태백산이니 마니산이니 지리산이니 주왕산이니 한국에 각종 영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단군 역시 늙어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고서는 구월산에 들어가서 산신령이 되었다고 전해지겠습니까?
우리가 산을 도를 닦는 신령한 장소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사막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영적인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수도사들이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한 걸로 유명했습니다.
사실 예수님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막에서 기도하고 영성을 닦았습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도 산을 좋아하기는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나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들이 그러한 예입니다. 시내산이나 호렙이나 같은 산이겠지요? 더구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건 아마 예루살렘에서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산보다 사막이 인기를 끈 것은 사실 이스라엘에 우리나라처럼 수풀이 울창하고 높은 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호렙산은 시나이 반도쪽에 있고 헬몬산은 레바논에 있어서 이스라엘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사막 깊숙이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유행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40일의 금식기도를 마치고는 영적으로는 매우 충만한 상태였지만 반대로 육체적으로는 매우 시장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간 것은 자의로 간 것은 아니고 여기서 보니 성령에 이끌리어 갔답니다. 마귀에게 시험받기 위해.
그러니까 공생애를 준비하기위한 금식기도 무장은 한편으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이를 이기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습니다.

 

마귀는 40일 금식기도 후에 예수님이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였고 이제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귀신들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마귀의 압제에서 벗어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던지 예수님을 넘어뜨려 마귀의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그가 사막으로 가기 전에 주님은 먼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40일간의 금식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금식기도를 40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면 우리가 은혜를 구하려 산에 가서 기도하면 마귀의 시험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큰 곳에 역시 마귀의 시험도 클 수 있습니다.

 

왜냐면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큰일을 할 사람은 마귀의 나라에 위협적이기 때문에 제거를 해야 하거든요.
그는 40일간을 금식기도를 했는데 금식기도기간에는 기도에 너무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다가 금식기도가 끝나자 비로소 배고픔을 느낀 것입니다.

 

이때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를 시험합니다.
세가지 시험을 하는데 첫 번째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며 세 번째가 마귀에게 절하라는 것입니다.

 

2.돌로 떡이 되게하라


첫 번째 시험인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는 것이 왜 시험일까요? 사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고 해서 결코 죄가 아닙니다. 더구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을 첫 번째 시험으로 택했습니다. 왜일까요?

 

먼저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예수님에게 가정법을 사용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몰라서 그런 식으로 말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존재인 마귀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유치한 도발이지요.

 

조금 다른 식으로 보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굳이 40일간의 금식기도로 배고플 필요도 없겠지만, 배고플 때 너의 능력을 너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뭐하냐?’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인 신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서 죄지은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를 사하기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신적 능력을 사용하여 십자가에 달린다면 그것은 반칙입니다. ‘죄없는 인간’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죄가 있는 인간은 자기의 죄값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대속의 의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인간이 아니라 신이 십자가에 달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물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없는 완전한 인간’과 ‘남을 위한다’는 점입니다.

 

마귀는 ‘힘없는 인간처럼 십자가를 지는 바보같은 짓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너를 먼저 돌보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돌로 떡을 만든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시험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유혹의 대상은 먹을 것입니다. 배가 가장 고플 때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아마 돈이 가장 필요할 때였으면 돈으로, 여자가 가장 필요했으면 여자로 유혹했을 것입니다. 명예가 고픈이에겐 명예로.
마귀의 유혹은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을 파고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주의해야 합니다. 그가 나의 인간적인 약점을 파고 들지 못하도록.

 

사실상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을 위해서 인간이 되어서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들을 버려두고 다시 하늘로 가셔도 되고 인간 세상에 있더라도 그의 능력으로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온 목적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능력을 발휘하면 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유혹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이라고 하면 구약성경입니다.
즉 신약시대에서도 여전히 구약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의 주인이신 주님이 먼저 인정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신명기8:3을 인용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상당히 오묘합니다. 먼저 사람이 떡이 필요함을 인정하시고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있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코 떡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주님은 우리가 육과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떡과 하나님의 말씀이 동시에 필요한 존재임을 말씀하셨지만 그리고도 그는 먼저 자기를 위하여 떡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교회의 건덕이나 우리의 신앙을 더 굳세게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주신 것입니다. 결코 내가 돋보이거나 나의 이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위해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역시 그 능력을 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먼저 사용할 것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비롯하여 떡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적을 베푸셨지만 자기를 위하여 돌로 떡을 만드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이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자기의 욕망이나 굶주림을 면하기위해서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포도주를 먹고 싶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철저하게 살펴보면 주님은 한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적을 나타내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 남을 위해서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초장부터 깨려고 마귀는 주님의 신성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가장 알맞은 때에 육체의 약점을 가지고 시험한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시험으로 마귀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계획을 깨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첫 번째로 떡 시험을 제시한 것입니다.
참, 여기서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대답을 듣고 유혹을 포기한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 역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또 알아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말씀’에서 ‘말씀’은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라고 하는 사실인데
이것은 ‘로고스’가 말 그 자체보다는 말속에 숨어 있는 의미나 선포되는 진리 그 자체를 지칭하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레마’는 선포되는 말씀 그 자체를 일컫는 단어이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말씀’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공하거나 재해석하지 말고 선포되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3.성전에서 뛰어내리라

 

두 번째 시험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시험을 위해서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으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 성전꼭대기에 세우고는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참고로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시험은 세 번째 즉 마지막 시험입니다. 누가는 시간순으로 기록하고 마태는 주제별로 기록한 경향을 본다면 아마 이 시험은 마지막 시험이었을 것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방식대로 두 번째 시험으로 봅시다.
마귀는 이번에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자기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도발합니다. 여기서도 도입부는 첫 번째와 똑 같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마귀는 시편91:11,12절을 인용하여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에는 말씀으로 응수하는 마귀가 굉장히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나 순종하는 네가 충분히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시편 원문에는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말이 더 있지만 마귀는 고의적으로 이 말을 생략합니다. 마귀 역시 말씀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의도적으로 말씀을 약간씩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시편91의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를 신뢰하는 신실한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다면 뛰어내려서 네가 다치지 않는지 시험해 보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렇게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만듭니다.
굉장하지요? 그것도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도발합니다. 물론 말씀을 약간 왜곡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왜 시험이 됩니까?

 

만일 사람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 난다면 그 사실을 목도한 사람들이 신인의 강림이라고 환호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후로 신인으로, 메시야로 사람들에게 군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림으로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려는 하나님의 애초의 계획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도 없느니라”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이라는 시골 주막의 말구유가 아니라 예루살렘 왕궁의 왕자로 나셨겠지요. 또 내가 죽나 죽지 않나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 나에 대한 자신감의 결핍, 이것은 필연적으로 나를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시험인 것이지요.

 

고난의 메시야를 포기하고 영광의 메시야로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물 먹이려는 마귀의 계략인 것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주님은 신명기6:16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칩니다.

 

4.나에게 절하라

 

세 번째로 마귀는 주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해발 2814m의헬몬산일 수도 있고 뭐 환상적인 배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어쨌든 마귀는 마지막으로 주님에게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합니다. 간단하게 ‘인류를 구원한답시고 고생하지 말고 나에게 절하면 내가 이걸 다 주께’ 이 말입니다. 간단하지요.

 

여기서는 “네가 말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란 말은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마귀에게 절하고 권력을 구걸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이시므로 당연히 그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이번시험에서는 그 말이 빠진 겁니다.

마귀는 이렇게 말하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어쨌든 마귀는 이번에는 예수님에게 타협을 요구합니다. 앞의 두 번에서 마귀는 주님에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떡을 만들어 먹어라, 또는 뛰어내리라.
그러나 이번에는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해주께’라는 식의 타협을 제시합니다. 앞의 시험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마귀는 현실적인 거래를 제안합니다. 그런데 웃긴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당연히 마귀에게 절하지 않아도 천하만국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므로 예수님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 절할 필요가 없지요.

 

다만 마귀가 이렇게 제안한 것은 예수님이 영광의 보좌에 군림하는 왕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내부적인 제약 때문에 핍박받고 고난받는 메시야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배한다’는 말은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이 엎드려 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듣고 주님은 이제까지보다 더 강렬하게 대응합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당연히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시험이 주님에게 먹힐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렇기 때문에 먼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준 것입니다. 눈으로 보게하고는 이걸 가지고 싶지 않냐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항상 우리의 눈을 조심하라고 하셨쟎습니까?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사단은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욕심을 불러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5.욕망의 단계

 

이렇게 우리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을 기도하게 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당케하신 성령님의 사역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주님이 당하신 세가지 시험을 우리가 당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마귀의 세가지 유혹은 우리 인간을 마귀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본능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인 욕구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식욕입니다. 이건 생존과 직결되어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 역시 먹는 것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때도 알맞습니다. 40일 금식기도 후에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것은 정말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는데 자기를 위해서 떡하나 만들어 먹는게 결코 죄는 아닙니다. 그렇게 마귀의 유혹은 쉬운 것부터 시작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먼저 아주 작은 것에서 타협하게 합니다. 우리의 원칙과 신념으로부터 양보하게 합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우리는 명예를 추구하게 됩니다. 남이 알아 주기를 원하는 거지요. 그런데 남이 나를 특별하다고 알아 주려고 하면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시는 지를 먼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히 그 말을 그냥 하는 말로 흘려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남과 같이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필요할 때는 우리가 큰 위기에 처해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명예욕, 즉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한다면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큰 시험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성전꼭대기에서 떨어지면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도 상하지도 않고 안전하게 착지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환호하고 열광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리고 명예를 얻고 남이 알아 주게 되면 우리는 마침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자발적으로 다른 이들이 자기를 환영하고 연호하며 영광을 바치는 것에 익숙하게 되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강제로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고 싶어 집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는 정상적인 욕구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권력욕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그 권력의 맛을 먼저 보여 주는 것입니다.

 

6.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의심

 

마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에서 도입구가 똑같습니다. 뭡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험난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요 , 우리는 가끔가다 하나님이 진짜로 나를 사랑하고 지키고 계신지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명예욕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이야기는 하는데 내가 봐도 나는 특별할게 없습니다. 재주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권력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뭐 하나 특출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알아 주지도 않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그정도로 특별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지를 자꾸 시험해보고 싶어 집니다. 확인해 보고 싶어 지는 것이지요. 그것도 공개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권세는 사탄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사탄을 ‘이 세상 임금’이니 ‘이 세상 신’이니 ‘공중 권세 잡은 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사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잠시 동안 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사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한다고 해서 그 재산이 그의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통치권을 반납해야 할 때가 바로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때입니다.

사실상 사탄이 우리를 그렇게나 유혹하고 넘어뜨릴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이콘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이콘이 자기를 경배하는 것을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승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때가 이를 때까지 더 많은 아이콘들이 자기를 숭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마귀는 자기를 숭배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굴복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세상의 권력이나 부귀영화가 탐이 나도 그것을 궁극적으로 주실 수 있는 분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 우리를 보호하시는지,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어디에서 살까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불안 그리고 걱정은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차지하게 되어있는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왜곡해서 유혹하는 사탄의 장난에 넘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40일 동안 금식기도에 몰두했으며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다음에야 비로소 능력을 행하신 것입니다.

 

7.말씀과 기도

 

공격하는 마귀나 방어하는 주님이나 모두 무기로 사용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말씀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일각에서 구약성경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기위해서 인용하신 모든 구절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여전히 구약을 인정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말씀으로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도 성령의 조명이 필요한데 이 성령의 조명을 위해서도 역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외에는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기도와 말씀이라는 이상적인 두가지를 다 중요시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과 인간 욕망에 대한 진지한 고려, 그리고 신약과 구약의 연결, 기도와 말씀의 조화와 같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출세하고 싶은 분들도 그 출세를 위해서 자기의 양심을 팔고 세상에 아부하며 마귀의 백성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본디 세상은 마귀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것이기 때문에 그가 당연히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주님은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을 물리침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마귀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유혹하려 드는 존재입니다. 큰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에 마귀의 시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기도합시다. 우리의 욕망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게 기도합시다. 그리고 결코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마치 세상의 주인인양 행동하지만 이제부터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확장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주님과 더불어 임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법없이는 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요 그러나 이제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강한자, 권력이나 무력을 가진자, 돈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이런 자들에게 치여서 제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약한 자를 보호해야 만이 겨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회에 대한 책임까지도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가는 믿음의 용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40일 금식기도 후에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신 주님처럼 우리 역시 기도하며 말씀을 보고 그대로 행함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고 영적으로 민감해 지기위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기위해 항상 기도합시다.

 

실로 우리 성도의 삶 자체가 걸어다니는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모습이 나의 삶이 그 자체로 내 아버지의 앞에 노출되어 나를 그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때때로 산에서 비박을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는 것이지요. 산에서 나오는 그 좋은 공기와 기운들, 수목의 향기들, 바위와 흙이 주는 건강함들은 나에게 큰 힘을 줍니다. 그러나 산에서 기도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나를 세상과 분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산정에서 고독하며 때로는 무서울 때도 있지만 나는 그럴수록 하나님을 더 찾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산에서 기도하며 밤을 지내는 것입니다.

아마 내 주님도 그 옛날 산정에서 밤새워 기도하시면서 산 아래를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냥 담담히 그 옛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뿐입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은혜에 푹 잠긴 우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충만하게 역사하심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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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러한 신비와 체험과 은사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영적인 분별과 우리의 영적인 안전을 위해서 견고한 성벽을 제공하는 말씀으로 무장합시다.
복잡하고 신기하며 재미있는 세상에서 재미를 즐기다가도 가끔은 나를 구별하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집중하기도 합시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마귀의 유혹과 시험도 이길 것이며 천하가 놀라는 능력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리에서 바로 기도합시다. 잠자리에 들 때 자리에서 바로 기도합시다. 외출할 때 외출에서 돌아올 때 기도합시다. 길을 갈 때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전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우리의 삶의 전부가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의 역사는 기도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40일간의 기도가 능력의 봉인을 풀게 한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생활 가운데서 기도하십시오. 일이 생기면 기도하고 일이 없다면 감사해서 기도하고 기도합시다. 기도는 성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5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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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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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제가 옛 시절에 보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고작 7글자 입니다. "기도는 힘이 세다." 잊지 않는 이유는, 제가 어린 시절에 기도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복음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그런 가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이름 없이 살고 싶다는 복음송도 불렀습니다. 새벽 기도를 정말 가끔이지만, 가봅니다. 새벽부터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집사님들, 권사님들... 기도는 힘이 세다는 것을 알기에, 그 분들은 이른 아침부터 기도를 합니다. 아마 제 할머니도 권사님이셨기에, 제2영도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하셨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기도하는 습관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애시당초 신앙이라고는 정말로 부실한 제가, 식사 전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외출 전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하는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책에서 무엇인가 발견하는 근성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의사이신 박경철 선생님의 책에 보면, 먼저 나쁜 습관부터 버리라고 다소 엄격하게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시는 친척 고모는 딱 한 가지만이라도 부탁하는 것입니다. 매일 깨끗한 모습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자. 저는 그래서 정기 목욕권이 얼마인지를 알아보기도 했고, 그것도 조금 아끼고 싶어서, 감기 걸릴 각오를 하면서도 집에서 깨끗하게 단장을 하곤 합니다.

 

간단합니다. 성도가 바르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면, 그 자체로 멋진 모습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는 힘이 셉니다. 홍 목사님은 늘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 나와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것과 같다. 주일 예배를 소중하게 지키도록 해라. 저는 청개구리 같이, 목사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적 있었고, 불순종 전문가 였습니다만, 지금은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고 그렇습니다.

 

묵상하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라는 뜻도 있고, 또 소가 먹을 것을 되씹듯이 계속 곱씹어본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편 1편을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올바른 성도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이어리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도 부끄럽지 않게 오늘 노력해야 한다." 감사한 하루의 출발을 힘내보는 저만의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루가 특별한 사람은, 인생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해 나가면, 그 때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화이팅 입니다. / 2015. 1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