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하나되라 (빌립보서2:1-)
요즘 보면 교회들 가운데 다툼이 있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분쟁은 이제 교회 안에서부터 세상 법정으로 진출했습니다. 세상법정에서 교회의 치부를 까발립니다. 이것은 만천하에 예수님의 이름을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조금 우스개 소리로 우리들끼리 하는 말이지만 예수쟁이들은 술도 안마시고 욕도 안하고 주먹으로 싸우지도 않기 때문에 꽁해가지고 마음에 넣어두고 두고 두고 앙심을 품는답니다. 예수 안믿는 이들이야 술 먹고 서로 쌍욕하고 주먹질하고는 풀어 버리는데 오히려 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앙금이 오래 간다고 말합니다. 말이 되는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보 교회는 바울로부터 아주 많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1장에 보면 빌립보 교회에 대한 칭찬이 쭉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그런 좋은 면이 있는 동시에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있다는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복음을 위해 싸우는 자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 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싸울 대상은 세상의 악과 우상숭배자들이지 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성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 앞에서 분열하면 공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적전분열은 필패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끼리는 싸워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싸우면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슬퍼 하십니다. 자녀들의 싸움에서 아버지는 누구편을 들어야 하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분열과 다툼의 불씨를 항상 안고 있습니다. 천국의 모형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씨가 커져서 교회를 통째로 살라 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와중에 상처입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네가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교회가 분열의 불씨를 항상 안고 있기는 하지만 교회가 궁극적으로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될 수 밖에 없는 네가지 이유 말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권면의 원뜻은 ‘가까이 부름’입니다. 뭘 뭘 하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권면은 ‘가까이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내 옆에 와라.
성령님을 우리가 ‘보혜사’라고 부르지요. 그 보혜사란 말이 이와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이니까 그리스도의 가까이로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위로입니다.
위로는 권면보다 더 부드러운 말로 주로 권면과 짝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오게 해서 남이 듣지 못하게 욕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분열하지 않고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위로’는 문자적으로는 부드러운 격려나 용기를 돋우는 것을 말합니다. 둘 다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권면은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으로 격려하고 교훈하는 것을 말하고 위로는 그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일을 위해서 책망할 때도 그를 위하는 사랑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싸움과 분열이 일어날 때 주로 보면 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는 “내가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잘되라고 이러는 것이다.”
정말입니까? 진짜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말이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이미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성령 안에서 교제를 했느냐고요? 코이노니아. 우리는 지금 같은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까? 정관 영암교회라는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보편적인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를 코이노니아,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고 있는데요 사랑의 공동체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되지요. 사랑의 공동체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지체입니다. 그러니까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몸의 지체들이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공동체의 붕괴? 몸의 해체?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분열이 아니라 화합과 일치로 가게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긍휼은 원래 ‘내장’을 말합니다. 아마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은 내장에 마음이 있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여하튼 긍휼은 애정과 온유함, 친절을 의미합니다. 이와 함께 쓰인 ‘자비’는 긍휼과 거의 비슷한 뜻을 가지지만 특히 약한 자들에 대한 동정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바울은 지금 이 네가지가 분열과 다툼의 불씨를 가지고 있는 빌립보 교회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갑니다. 그래서 2절부터 다음의 세가지 일을 행함으로 기쁨이 충만케 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바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치와 화합을 해야 된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게 당연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가만 있어도 어차피 교회는 화합하고 일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이기는 하지만 그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바울이 권면하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한마음을 품어라.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라.
서로를 돌아보라.
첫 번째 ‘먼저 한마음을 품어라’를 봅시다. 무턱대고 한마음만 가지면 되는게 아닙니다. 한마음을 품기 위한 조건이 또 세가지가 더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같은 것을 생각하다, 같은 것을 생각하되 지성, 의지, 감정을 포함하여 같은 생각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서로 헌신하려는 생각으로 하는 사랑은 분열과 다툼을 없앱니다. 아가페 사랑은 조건없는 자기 희생적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품고 계신 사랑을 말합니다. 아무 조건없이, 자격도 없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아무 조건없이, 아무 댓가 없이 서로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뜻을 합하며.........한 호흡의, 같은 생각을 가지고
마치 듀엣가수가 한 호흡을 가지고 노래하듯이 그렇게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야 교회가 하나 될 수 있고 우리 가운데 있는 분열과 다툼의 불씨를 없앨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성도이기는 하지만 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모두 바라보는 곳이 다릅니다. 누구는 말씀의 효능을 주장하는가 하면 누구는 말씀을 단순한 교훈집으로 여기기도 하고
누구는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그런가하면 한편에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독교를 주창합니다.
누구는 사회구원을 주장하는가 하면 개인구원에만 집중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가 하면 심지어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마음을 품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뜻을 합해야 한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돼, 우리는 한마음을 품어야 돼’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쳐서 한곳을 보게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교회의 화합을 위해 우리가 정말 해야 되는데 하지 못하는 것을 권면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라”
참 좋은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정말 분열이나 다툼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을 보일 때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겸손이라는 아름다운 이름까지 같이 차지하고 싶어서 내숭을 떨 때 뿐입니다.
이런거 있쟎습니까?
우리애가 너무 너무 공부를 못해서 큰일이에요.
어머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래요, 너무 걱정이에요. 이 녀석이 이번에 시험에서 무려 한 개나 틀렸더라니까요.
세상에 겨우 다섯 과목을 쳤는데 그 중에서 한 개나 틀리면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걱정이에요
이거 겸손 맞습니까? 겸손을 가장한 ‘더 자랑’아닙니까?
우리는 아주 조그만 것에도 남보다 높아 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경쟁이 어려서부터 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의 공동체 내에서도 서로 화합하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높낮이를 따지고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 잘못된 세상의 유습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있어서 안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면 대부분의 분쟁이나 다툼도 사라질 것입니다.
야심과 허영과 교만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내가 높아 지고 내가 주목받고 내가 칭찬받으려고 하는 마음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네가 높냐 내가 높냐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툼을 초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툼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 천박한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은 조직을 분열시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나의’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합니다.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허영’은 잘못된 생각, 공허한 견해, 우상숭배의 허무함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런 허영 역시 남에게 자기를 잘 보일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결국 허영은 다툼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속성입니다. 남에게 잘보이려고 하지 않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사람은 허영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구함으로 자만심에 빠져 허황된 생각으로 분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자신의 도덕적 무가치성에 대한 깊은 인식, 겸손한 마음.
이것은 성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할 미덕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비추어 자기를 낮추는 행동이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는 행동입니다.
남을 낫게 여긴다고 해서 근거도 없이 저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저 사람이 나보다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판단하고 생각해서 저 사람이 나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해서 상대의 뛰어남을 보면 그것을 인정하고 높여주라는 의미입니다.
저 사람이 가르치는 은사가 나보다 더 하다고 판단되면 저 사람으로 교사를 시키고
저 사람이 나보다 노래를 더 잘한다고 생각되면 저 사람을 찬양을 시키고
저 사람이 회계를 나보다 더 잘본다면 저 사람에게 회계를 시키고 그렇게 하란 말입니다. 경쟁이 아니라 우리가 유기체처럼 서로 합력하여 몸의 유익을 구하는 지체로 생각한다면 저 지체의 적성에 맞는 기여가 우리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객관적으로 뛰어난 상대를 보고 경쟁심을 느끼거나 시기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하고 그의 장점이 곧 우리 공동체를 살찌우는 것이 됨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될 참된 겸손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즉 네 일에 신경 쓰는 것 만큼 남의 일에도 신경을 쓰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의 일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일에도 신경을 씁니다. 왜냐면 각각의 ‘나’가 모여서 ‘우리’가 되고 이것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각각 자기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을 먼저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는 남는 여력을 가지고 다른 이도 돌보아야 합니다. 다른 이의 일도 같이 거들어야 합니다.
예전에 신학교에서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에서 취직자리 알아 봐 주지 말고
여자도 소개시켜 주지 말고
오직 예수만 소개해라
지나고 나니까 이 말이 진리는 맞습니다. 오랜 목회 경험에서 나온 선배의 충고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요 우리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너희는 한 운명공동체다. 형제가 배곯고 있는데 너희만 배부를 수 없고
형제가 백수가 되어 있는데 너희만 직장에서 돈을 벌 수 없고
형제가 짝이 없다면 너희가 그에게 배필을 찾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하면 인간적으로 서운한 일이 많습니다. 보통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놓으면 배반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감사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지 말라’는 옛말이 있지만 그 옛말이 틀린거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내가 댓가 없이 받았으므로 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랑을 댓가 없이 주는 겁니다. 물론 그는 나에게 그 은혜와 사랑을 갚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사람에게 댓가를 받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 더 크고 놀라운 보상일겁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서운해도, 댓가가 없어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전하십시오. 하나님의 댓가와 보상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각각 자기의 일을 돌보고 또 각각 남의 일을 돌보는 것은 겸손의 능동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겸손한 성도들은 남의 이익을 위하여도 자기 일처럼 신경을 써야합니다. 더구나 그는 남이 아니라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 자매요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에 저들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되고 저들의 기쁨이 나의 즐거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자, 우리는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교회 안에 있는 다툼과 싸움의 불씨를 제거할 수 있는지 아니 일치와 화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원이 이런 마음을 가지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앞장서서 일하는 이들이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장로와 집사와 권사의 직에 있는 이들이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직은 하나님이 교회를 더 잘 섬기라고 주신 직분이지 대접받고 자랑하고,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회장과 총무는 봉사하라고 주신 직분이지 대접받고 군림하라고 주신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다른이들보다 더 높다고 더 낫다고 주신 직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 간다면
하나님의 교회가 문자 그대로 사랑의 공동체 코이노니아가 될 것이며
한 성령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입어서 사랑과 은총을 받은 자녀가 되고 또한 사람들의 칭송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 간다면 분열과 시기와 다툼은 사라지고 일치와 화합이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상식은 가지고 살 일입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살 일입니다. 무조건 은혜로 뭐로 하면서 뻔뻔하게 밀어 붙이지 말고 포기할건 좀 포기하고 살 일입니다. 내가 저걸 다 먹어야겠다고 욕심내지 말고 같이 할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5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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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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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단편 소설을 덧붙입니다. 신년기념 손바닥 소설입니다. 재미가 없더라도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제목 - 미라클. 부제목 - 그는 기뻐했을 뿐이고, 시간이 흐르고서야, 범사에 감사했을 뿐이었다.
편돌이. 사람들은 JS군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JS군은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일을 재치 있게 잘했고, 어딜 가나 환영받았습니다. "와라! 편의점 웹툰만화를 보니까, JS군 생각이 나더라!" 라면서, 편돌이 JS군을 응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급료는 뭐 말할 수 없이 소금처럼 짜고, 또 짰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Take Easy. 일하면서, 성실성을 인정 받은 뒤로는, 책도 봐도 좋다고 OK 사인을 받아서 기뻤습니다. (의외일지 모르나) 좋은 가게 주인분들이 많았습니다.
JS군. 그렇게 아르바이트 청년은 여러 편의점 가게에서 숙련도를 쌓아나갔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유혹 앞에서 JS군은 죄를 저지릅니다. 그는 게을렀고, 부지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하면서 목이 마를 때가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온수를 따뜻하게 받아먹으면 상관없었습니다. 여름에는 물을 챙겨가면 되는데, 그것도 하지 못할 만큼 JS군은 게으름뱅이 였습니다. 어느 바쁜 여름날이었습니다.
손님에게 증정(행사)품으로 나가는 작은 500ml 물이 한참 창고에 남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일하게 된 가게 주인은 손님에게 증정품을 잘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편의점 창고에 가면, 늘상 재고로 물이 많이 남아 있었고, 그걸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님이 행사품을 챙겨가지 않는 날이면, 그 물을 일주일에 두어개 정도씩 JS군이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전문용어로 500ml 물 절도 라고 합니다.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나쁜 짓이라고도 합니다.
이익에 밝고, 눈치 빠른 가게 주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알아차렸고, JS군은 정말 호되게 야단을 맞아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이른바 편돌이 JS군 최악의 날이라고 해두면 좋겠습니다. 최저임금은 지켜질리 없었고, 손님에게 제공되는 물을 임의로 마셨다는 이유로 월급까지 깎이고 나면서, JS군은 편돌이 생활을 접기로 결단했습니다. 권선징악을 믿는 JS군은 굳이 고발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슬픈 감정은 제법 오래 갔습니다. 사회라는 곳은 냉정하구나.
JS군의 방황. 몇 달간 신나게 방황하기로 했습니다. 꽃보다 청춘 20대 니까요. 다 읽지도 못하면서 주제 넘게도, 도서관에서 책을 막 5권씩 빌려서 보고, 혼자 노는 것은 누구보다 잘했습니다. 그러다가 C모 편의점에 다시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C모 편의점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호기심도 있었고, 그냥 이력서 한 번 냈을 뿐인데, 그 날 오후에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 답장이 옵니다. 오랜 편의점 경력에 지각과 결근을 하지 않겠다고 정성들여 써 낸 이력서 1통에 바로 통과가 되었습니다.
행운. 최고의 행운. 달랐습니다. JS군은 좋은 가게 주인을 만났습니다. 취미가 독서와 음악감상이라는 것이 비슷했습니다. 배고프면 언제라도 먹고 싶은 거 먹고, 업무전달노트에 적어놓으라고 했습니다. 배고파서 비싼 도시락을 먹었는데도, OK 였습니다. 다시 성실하게 아르바이트 하면서, 기쁨을 회복해 가서 JS군은 마냥 즐거웠습니다. 신뢰를 쌓고, 또 쌓아서 JS군은 대리 점장까지 경험해 볼 수 있었고, 꽤 두둑한 돈을 벌 기회도 만나게 됩니다. 힘들어도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덜컥 95년생, 당시 겨우 스무살의 교회 제자 P양 에게 연락이 옵니다. "쌤~ 나 알바 좀 시켜줘요." 사정 사정해서 P양이 여러 번 까똑까똑 하는데, 아르바이트를 한 번 시켜보기로 했습니다. 머리 회전이 빨라서 일은 잘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였고, 그래서 속상할 때는 담배 한 모금으로 괴로움을 달래던 아이였습니다. 그 정도야 뭐 모른 척 눈감아 주기로 했습니다. 뭐랄까, JS군은 "야 이 아가씨야, 힘들어도 기운내라" 옆에서 가만히 응원이나 하는 스타일에 가까웠습니다. 옆에서 괜히 설교나 잔소리 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P양이 편순이 생활에 익숙해져 갈 무렵.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갈 무렵, 사건 사고가 일어납니다. 담배 갯수가 계속 차이나기 시작합니다. 재고에는 20개인데, 실제 수량은 15개 밖에 없습니다. 내부자의 소행입니다. 이럴 때는 계속 CCTV를 돌려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끙끙 고민하면서 눈아프게 CCTV를 돌려봐서, 범인이 P양인 것을 발견합니다. 이번에는 P양의 담배 절도가 되겠습니다. 아! 믿었던 제자였는데! 똑똑한 아이였는데! 왜!!!
JS군은 기독교인, 그 점이 달랐습니다. 이웃이 7번 잘못해도 용서하라. 그 말이 떠오르고, 또 떠올랐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데려와, 앞으로 그러지 마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리고 비싼 피자 가게에 데리고 가서, 든든히 식사를 챙겨줬습니다. P양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 같으면 화나서 매로 때리고 싶을텐데, 왜 쌤은 저한테 이렇게 해주시는 거에요." JS군은 이것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다만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힘겨운 나날의 P양을 울리고 싶지 않았다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P양은 세 달 정도의 화려한(?) 편순이 생활을 접고, 법무사 사무실이 줄줄이 있는 법원 계통의 일을 배우러 사회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수 년의 시간이 걸렸지요. 고생하고, 또 고생해가면서, 마침내 P양은 당당히 대리 명함을 달게 되었습니다. JS군은, 여전히 P양을 응원했기에, 그 명함을 받아들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JS군과 P양은 지금도 재밌는 사제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까똑까똑. "엄빠랑 고기 먹어여~" 사진이 팡팡팡 찍혀서 전송되어 날아옵니다. 어려움을 딛고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월급타서 행복한 P대리를 보니 JS군은 저절로 배가 불렀습니다.
바보 같은 JS군은 그렇게 오늘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그가 준비하던지 간에, 하나에 집중해서, 제자들에게 지지 않고, 당당히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JS군. 그러므로 상처받고, 실패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름에도, 이겨나갈 수 있다고 힘을 낸다면 좋겠습니다. - fin -
.
마칩니다. 제가 너무 감동 받았던 목사님 설교를 재인용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놀라운 일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장은 손해라도.
사람에게 댓가를 받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 더 크고 놀라운 보상일겁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서운해도, 댓가가 없어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전하십시오. 하나님의 댓가와 보상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