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마태10:40-)
오늘 복음은 복음을 영접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가운데서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본문을 보려 합니다.
먼저 이 세상을 한번 봅시다. 지금 세상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입니다. 목불인견, 한편의 지옥도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좀 더 넓게 본다면 해수면이 상승해서 육지의 넓이는 조금씩 줄어 듭니다. 그런 반면에 인간의 숫자는 계속해서 무시무시한 규모로 늘어납니다.
게다가 물이 점점 줄어 듭니다. 러시아 남부의 아랄해라고 하는 바다도 , 사하라 사막 중간의 차드호수도 말라 버렸습니다. 비도 줄어 들고 물은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그래서 바다와 거대한 호수가 말라버리는 겁니다.
나우루라고 하는 태평양의 섬나라는 이미 나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바닷물이 너무 들어와서 농사는 포기했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매년 산불로 여의도 면적의 수십배의 삼림이 사라집니다. 이 동네의 삼림은 복구가 정말 어렵습니다. 여기도 궁극적으로는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사막지대기 때문에 숲을 조성하는 일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아직까지도 불에 탈 삼림이 남아 있다는 것이 용하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면 결국은 그 동네는 황량해 질 겁니다.
중국의 1/3은 황량한 사막지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황사 때문에 우리도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보는 그냥 대기가 뿌연 정도가 아닙니다. 옛날 방학동에서 황사를 한번 만났는데 너무 너무 심해서 방안에까지 들어온 황사 때문에 코가 아파서 숨을 쉬기도 어렵고 , 결국 밤에 잠을 못잘 정도로 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뿐입니까? 자연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은 어떨까요?
부부싸움 끝에 아기를 지하철에, 쓰레기통에 버려두고 간 부모들이 있습니다. 인신매매에서 한걸음 나가 산 사람을 죽여서 장기를 적출하는 일이 빈번해 집니다. 게다가 인육캡슐까지 등장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끔찍한 세상입니다.
돈 때문에 남편을 정신병자로 몰아서 정신병원에 넣는 일이 없나, 간부와 짜고서 남편을 죽이는 일도 흔합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상 인간이 예의염치를 저버리고 도의를 나몰라라 한다면 짐승처럼 잔인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한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흐려지고 개인의 유불리에 따라 선과 악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변한다면 여기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겁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터지고 , 방사능이 누출되고 ,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쓰나미가 일어나고... 최후의 때에 하나님의 불심판이 이와 같을 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현세를 보고 말세라고 혀를 찹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술 더 떠서 ‘말세지말’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혀 나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게 너 때문입니다. 나는 전혀 죄가 없습니다. 다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고 모든게 다 너의 죄입니다.
단지 나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고난 받는 어린 양입니다. 목자의 도움이 정말로 필요하고 남에게는 결코 해를 끼치지 않으며 이리들로부터 피해만 당하는 양.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지옥이 되는데에 전혀 책임이 없을까요?
이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데 우리의 죄는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나는 정말 양입니까? 이리로부터 피해만 보는 양이 맞습니까?
1.우리는 복음을 영접했는가?
오늘 본문은 ‘복음의 영접’에 대해서 말합니다. 복음을 영접한다는 말은 어떤 뜻을 가집니까?
먼저 ‘영접한다’는 말은 ‘손님으로 받아 들이다’는 뜻을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가 더해져서 ‘그 무엇을 인정하거나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까지를 영접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즉 복음을 인정하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복음을 영접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당시에 영접하는 자들은 복음전도자들을 자기의 집에 맞아 들이고 대접하고 그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숙식등 온갖 편리를 제공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두벌 옷이나 전대를 가지지 말고 아무개의 집에서 유숙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러한 영접이 물질적인 환대에만 그치는 것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돈도 음식도 옷도 숙소도 제공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복음의 가치를 부인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건 복음을 영접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땅에 복음이 제대로 영접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형편없게 된데에 대하여 우리가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그대로 살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사정이 나빠질 리가 없습니다. 안믿는 사람이 믿는이보다 많다고요? 당연히 그렇지요. 그러나 어떤 나라던지 그 나라 인구의 25%이상이 그 종교를 믿는다면 그 종교는 국교와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때요? 신교와 구교가 합쳐서 1400만이 넘어 갑니다. 한 가정에 한명은 예수믿는 이가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곧 예수의 가르침이 모든 가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정이 나빠졌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대로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가정에서부터 우리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복음대로 살지 못하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유독 대형교회, 초대형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교회들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악취를 종종 맡습니다.
만일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그런 초대형, 대형교회들이 하나님의 복음대로 제대로 살고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지금 이런 황당한 일은 덜 일어 날 것입니다.
교회 주차장에서 주차 때문에 한교회의 장로와 집사가 육두문자를 섞어가면서 싸운다면 교회가 초신자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겠습니까?
대형교회 부목사의 부인이 자기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가난한 동네에서 전학을 오는 학생들을 막아야 된다는 서명지를 돌리고 학부모를 선동하고 다니는 모습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 아직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요?
그 교회가 얼마나 꿀이 쏟아지는 지는 몰라도 70될 때까지 하나님의 복음 때문에 먹고 살았으면 되었지 그걸 자식이나 사위에게 세습시키는 자들은 도대체 교회를 뭐로 생각하는 겁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복음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복음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를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살기로 다짐하는 태도와 그런 행위까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교회의 목사도 문제가 있지만 교인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비난하지도 못하고 그런 모습과는 전혀 상관없이 보고도 못본 척 그 교회에 충성하는 모습은 한국교회에 대한 기대를 접게 만듭니다.
‘사람보고 믿지 마라’
언뜻 들으면 좋은 말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아주 나쁜 말입니다. 사람도 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제대로 영접된 곳인지는 그 교회에 다니는 목사와 교인을 보면 알게 됩니다. 자기네 행동이 형편없다고 ‘사람이 다 그렇지뭐, 사람보고 믿나 하나님보고 믿지’ 같은 말로 자기네를 합리화시켜서는 안됩니다.
문제가 터지기만 하면 ‘일부가 그렇지 그것을 가지고 전부를 매도하지 말라’
이런 얘기도 한두번이지 이제는 정말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래놓고 복음을 전한다고요?
그 복음은 도대체 어떤 복음입니까? 저는 그런 복음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주님 역시 그런 복음을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형편없는 행동을 하면서 복음을 입에 걸고 다닌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그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2.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태의 시대에 이미 선지자는 없어졌을까요? 신약시대에도 계속해서 선지자가 있다는 말일까요? 도데체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유대인공동체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미 구약적 개념의 선지자는 사라졌지만 보다 확대된 공동체에서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를 말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다 넓게 본다면 복음이 퍼지는 상황이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고 제자들의 다음에는 선지자와 의인들 그리고 소자가 차례로 나옵니다. 제자를 선지자로 보는 설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렇게 복음이 확산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문자적으로 정의한다면 구약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복음을 전하는 그 누구나 선지자라고 불려질 만 합니다.
신약에서 선지자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요즘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는 우리가 가끔 봅니다. 그런데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자를 보기는 정말 더 어렵습니다. ‘가뭄에 콩나듯이’ 보는게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합쳐서 생각해 보면 선지자가 무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와 선교사같은 자들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물론 목사와 교역자들 앞에 ‘참된’ 이란 말을 하나 넣어 둡시다.
두 번째는 공식적으로 타이틀을 달고 있지는 않아도 평신도이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그래서 생업에서 조금 약한 분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자비량하시는 분들, 선교단체의 책임자들 간사들? 기독교 봉사단체에서 적은 월급으로 또는 무급으로 전담하는 분들 이 외에도 여러 예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이 스스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영접하지 못해서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는 이들이 많다고. 그래서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선지자(?)들은 너무 부유해서 사람들의 영접이 전혀 필요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도 뺍시다.
자, 그러면 선지자의 상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실 본문에서 선지자의 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으로 풀라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간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하고 대접한 부분을 보시면 선지자의 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기근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 죽었던 아이를 다시 살리는 이적.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를 영접한 수넴 여인에게 주어진 기적, 수태하지 못했던 여인에게 아이가 태어나고 또 그 아이가 죽었을 때 그 아이를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그런 이적.
우리가 선지자를 대접하고 선지자의 상을 받는 이유는 그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두벌 옷과 전대도 없이 보내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역시 훌륭한 복음의 전파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상은 한편으론 선지자의 동역자와 같은 대우를 하게 합니다.
저에게도 선지자의 상에 대한 간증거리가 넘쳐 흐릅니다. 제가 예전에 목동에 있을 때에... (예화는 생략합니다.)
마치 저를 대접하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좀 무안하기도 한데 성경본문에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 뿐입니다.
3.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면 의인은 평신도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살며 복음을 증거하며 사는 일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를 대접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인을 영접하는 자 역시 의인의 상을 받습니다. 여기서는 의인으로부터 복음을 받아 들인다는 영접이 아니라 의인을 대접한다는 말입니다.
의인의 상은 무엇일까요? 선지자의 상보다는 급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역시 ‘의인의 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문에 설명이 없습니다. 역시 성경은 성경으로 풀라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비다의 이야기가 ‘의인의 상’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답니다. 그러다가 죽었는데 사람들이 다비다의 죽음을 도저히 그냥 받아 들이지 못하고 다락에 고이 씻어서 누여놓고 베드로를 청했습니다.
뭐 살려달라고 청했는지 장례식을 집전해 달라고 청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과부가 다비다의 시체의 곁에서 울면서,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생전에 자기네에게 지어준 겉옷과 속옷을 내어보였답니다. 이에 감동한 베드로는 다비다의 부활을 위해서 기도했고 그래서 결국 베드로의 기도로 다시 살아 납니다. 이게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면 받는 ‘의인의 상’의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대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는다고 하는데 의인을 대접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의인으로 대우받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와 같이 의인에게는 큰 특권이 따름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롭다 칭해진다고 했는데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대접하면 의인으로 대우받는 답니다. 왜냐면 의인을 영접하는 것이 곧 의인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도 역시 ‘이신칭의’교리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아마 ‘의인의 상’과 ‘선지자의 상’을 따로 언급한 것을 보면 두 상이 다른 모양입니다. 솔직히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 그런데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상을 받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면 상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전파에 힘쓰는 사람들을 도움으로 복음전파를 간접적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전파라는 것은 꼭 나가서 전하는 것 뿐 아니라 뒤에서 그들을 돕고 지원하는 것에서부터 주의 명령을 순종하고 그의 뜻대로 살아 나가며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의 산증인이 되는 것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3.냉수 한 그릇에도 상이 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기여를 모른다 하지 않으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심지어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소자는 가난하고 약한 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평범한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선을 행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 한 그릇을 예로 든 것은 아마 이것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가장 보편적이며 기본적인 대접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마른 대지에서 먼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물 한그릇을 대접하는 일은 그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물이 흔한 곳이 아니라 물이 귀하고 쉽게 얻을 수 없는 곳인데 나무도 없고 찌는 듯한 황량한 벌판을 가는 나그네에게 주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은 결코 적은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수고만 하면 되고 돈이 따로 드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그네에게 그것은 가장 소중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그네는 물이나 음식이 가장 필요할 것이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돈이 들지만 물이야 아침에 마을어귀 우물에 가서 떠 놓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옛날 유대인들은 집 앞에 몇 말 들이 큰 항아리를 두고 그 안에 물을 채워놓고서는 나그네에게 물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복음전파를 하러 다니는 이에게 그 물 한 그릇을 대접한 이에게도 상을 빼놓지 않고 주시겠다고 하시는 주님. 그것보다 큰 것을 대접한 이에게 설마 상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여기서 나오는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본절의 물 한그릇 대접에 주는 상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잘아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즘 구원은 상급으로 큰 매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하도 사람들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해서 이제 예수믿는 이들은 구원에 대해서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추가로 뭔가 더 와야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상이 보잘 것 없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상을 주겠다고 하시면 그 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굉장한 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준다? 벙을 낫게 해 준다? 취직을 시켜준다? 합격을 시켜준다? 사랑하게 해 준다? 평안을 준다? 근심 걱정에서 놓임을 받는다? 글쎄요,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4.영접과 상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상’이란 말을 참 많이 봅니다. 이 상은 보석이 박힌 거대한 황금잔에 번쩍 번쩍 빛나는 금화가 가득한 그런 상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누런 종이에 한국은행총재의 도장이 찍힌 종이묶음을 의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상의 내용이 궁금하지만 우리가 당장 그것을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도 하나님의 상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 상에서 상품이 뭔지는 상주시는 이가 마음대로 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시는 상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일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뭔가 앞뒤가 미묘하게 맞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을 영접하는 것, 즉 복음을 받아 들이는 것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복음 전파자에 대한 대접으로 본문의 주안점이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랍거나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결론입니다. 왜냐면 기독교의 복음은 결국 실천과 봉사와 희생과 섬김을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없는 복음, 행함이 없는 믿음을 우리 주님은 알지 못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하고 그 말씀의 내용대로 섬겨야 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복음의 영접이 복음전파자에 대한 대접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일익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지자를 대접했느냐 의인을 대접했느냐 소자를 대접했느냐가 각각 다르고 각각 받을 상도 다르겠지만 우리 하나님에게 복음 때문에, 영접 때문에 상 받는 다는 것에서는 동일합니다. 이러한 영접에는 반드시 상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자기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대접받으면 아버지가 대신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안 그래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은혜를 갚는다고 갚아 주신다면 얼마나 후하게 갚아 주시겠습니까?
상을 주신다면 얼마나 후하게 상을 내리시겠습니까?
상급이니 공덕이니 하는 것을 다 잊어 버리고 주의 이름으로 형제를 대접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이 따릅니다.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받지 못했다면 내 자녀가 그걸 받을 것입니다. 그 열매를 따먹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실천하고 따를 일입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비난하고 욕합니다. 오해도 있고 무지의 소치도 있을 것이지만 그 비난의 대부분은 우리가 잘못한 많은 일들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인식이 그렇게나 안좋은데 복음이 전파되겠습니까?
그렇게나 안좋은 일들을 많이 하는 이들이 믿는 예수를 어떻게 믿어라고 전할 수 있습니까?
또 전한다 해도 그들이 믿겠습니까?
아니 그건 놔놓고 우리가 그 복음 앞에서 떳떳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제대로 영접하는 것이
섬김과 대접과 실천이
복음을 전하는 강력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그런 실천과 섬김에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 들인 사람은 당연하게 복음의 원칙대로 남을 대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리 입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하더라도 선지자의 상도 , 의인의 상도, 물 한그릇의 상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떠드는 복음이 물 한그릇의 값어치도 없다면 그건 위선이요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가 잠시 동안 하나님의 것을 맡아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맡아 있는 것을 가지고 갑질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재산을 더 불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흩어서 사람들이 행복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대접하고 그들이 힘을 내고 위로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일들로 하나님이 이름이 존귀히 일컬어 지기를 원하십니다.
노랭이 수전노 소리가 아니라 관대하고 후하다는 이름이 퍼지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는다고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을 영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웃는 얼굴과 그럴듯한 말로 형제를 희롱하며 “형제여 왜 거기서 배를 곯고 있느냐, 가서 네 돈으로 빵을 사서 배를 불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돈으로 빵을 사서 배고픈 형제에게 주는 것이 대접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영접이고 선지자의 이름과 의인의 이름과 제자의 이름을 걸고 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요 희생이며 섬김이고 대접입니다. 그 계산은 손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습니까? 주가 보내신 이를 영접합시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삽시다.
우리가 제자입니까? 주님의 명령을 준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5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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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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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신영복 선생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맥에 갇혀 있습니다. 사회를 인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집단인 노동계급도 자본가와 같은 문맥에 갇혀 있다는 거죠. 어디냐 하면, 욕망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주 비인간적인 구조가 더 완고하게 자기 조직성을 강화해 간다는 거죠." 저는 이러한 표현들을 읽으면서 깜짝 놀랍니다.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틀에 맞춰서 자꾸만 더 많은 욕심을 챙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업데이트 하면서, 저는 슬픈 감정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기독교인들도, 머리로는 입으로는 기독교인이라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모습을 전혀 다스리지 않으려고 하는, 입만 떠 있는 기독교인이 아닐까 반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심지어 교회 내부의 잘못까지도 무조건 침묵하고 덮고, 은혜로 해결합시다 라면서 포장해 나가려는 것은 아닐까 경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닮아가야 할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웃이 앉을 자리 또한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아래와 같은 글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이 강도에게 칼 맞아 쓰러져 있습니다. 상류층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쌩~ 지나갑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회에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행인을 구해줍니다. 쓰러진 행인을 자기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 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것. 생각은 그런 겁니다" (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 p.198. 일부 발췌. 신영복)
잘 나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쌩~ 쌩~ 하면서 약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분명히 슬퍼하실 겁니다. 쓰러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한 때 교회를 다녔다가 지금은 실망해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여전히 좋은 벗이 되어주려고 노력한다면,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2016.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