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끝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14:7-)
우리 주님께서 성경 그 중에서도 신약에서 강조하신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 맞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약을 대표하는 신약의 시대정신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장 강조하신 대표적인 계명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사랑에 대한 설교도 많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혹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까?
주께서 사람들에게 강조하신 것이 있을까요?
믿음? 정직, 안식, 하나님의 나라........?
겸손 아닐까요?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행위. 겸손은 우리 주님이 사랑다음으로 강조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크게 보면 겸손이 사랑으로 통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고차원적인 고려는 하지 맙시다.
물론 우리 주님은 겸손외에 여러 가지를 두루 강조하셨지만 이 겸손 역시 신약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주께서 식사를 하시기위해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보니까 사람들이 서로 상좌를 차지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식탁에 상좌와 일반 좌석의 구분이 있었답니다. 여기서 상좌, 요즘 성경에는 ‘높은 자리’라고 되어 있는 이 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서로 앉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카페트 위에 베개를 받치고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합니다. 둥글게 기대어서 서로 쳐다보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지요. 멀리 있어서 손이 닿지 않는다면 시중을 드는 하인이 가져다 주는 그런 구조입니다. 여하튼 이런 식사 자리에는 상좌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문자적으로 ‘첫번째 좌석’이라는 뜻인데 식사자리에 초대받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앉으려고 높은 자리로 간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주께서 보시고 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 사람들은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지 못하고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7절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라는 구절을 잘 보면 주께서 보시는 앞에서 바리새인들은 서로 상좌에 앉으려고 자리다툼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들이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평소에는 마을의 잔치자리에서 당연한 듯이 상좌에 앉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바리새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게다가 잔치의 주인은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입니다. 그 사람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것이야 말로 자기의 위치를 잘 드러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각 마을에서 나름대로 큰 소리 치는 자들 사이에서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자리다툼을 벌여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바리새인들이 모인 잔치 자리에서는 서로 누가 높은가를 따지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 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서열이 밀릴 것이라고 생각한 자들이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벌이는 것이지요.
원문의 뉘앙스를 보면 단순히 겸양하면서 은근히 첫 번째 자리에 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첫째 자리에 앉기 위해서 공공연히, 그리고 열심히 첫 번째 자리에 앉으려고 투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잔치의 상석에 앉지 못하면 인생에 있어서 패배자가 되는 듯이 정말 열렬히 첫째 자리를 놓고 경쟁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누가 높은지를 따지는 일은 마치 목사들이 노회에 모여서 누가 높은지를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건 어떤 순으로 따지냐면 그 목사의 인격이나 나이, 목사가 된 기수 같은게 아니라 그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얼마나 큰가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모이면 너네 교회의 신도가 몇 명인지 너네 교당이 몇 평이고 건축비가 얼마고 예산이 얼마인지를 가지고 서로 더 잘났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에서는 제일 좋은 자리에 당연히 앉다가 같은 목사들끼리 모이니까 서열에 신경을 쓰면서 자리다툼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걸 보고 주님께서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총회장을 그만두면 이 사람들은 증경 총회장이라고 칭해집니다. 그런데 총회장은 일년에 한명씩 계속해서 생기므로 죽기 전까지 증경 총회장은 점점 더 많아 집니다. 노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모임의 회장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증경 회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나중에는 대접하는 사람보다 대접받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경우도 생기지 않을까요?
우리 개신교에 특히 교단이 많이 난립합니다. 분파가 어마어마합니다. 교단의 숫자를 아예 셀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리의 차이, 역사적 전통과 배경의 차이? 천만에요, 가끔 가다가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보통은 한자리를 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내가 한자리를 못하니까 그 단체에서 뛰쳐나와서 새롭게 자기가 한자리 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드는 겁니다.
가끔 가다가 우리도 듣지 않습니까? 대통령의 바로 옆자리에, 바로 오른쪽에 누가 앉고 왼쪽에는 누가 앉았다 이런 식의 발표가 다 이런 소동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게 은근히 사람들에게 명예욕을 부추기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사람들도 딱합니다. 왕궁의 연회도 아니고 시골의 식사자리가 뭐 대단하다고 이렇게 난리를 치는지.
여하튼 식사초대에서 서로 상좌를 택하려는 소동을 보시고 한심히 여기신 주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8절에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왜 상좌에 앉아서는 안 됩니까? 자격도 안 되는데 상좌에 앉았다가 주인이 와서 다른 사람에게 이 자리를 내어주라고 하면 부끄러워서 그 다음자리가 아니라 아예 끝자리로 내려가게 되니까 그렇게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처음부터 상좌에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상좌에 앉았다가 내려오지 말고 처음에 차라리 끝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와서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할 때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벗이여 올라 앉으라’는 그 자리가 바로 상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높은 자리가 모두 다섯 자리인데 끝에 앉았다가 올라 앉는다고 해서 네 번째로 간다는게 아니라 상좌 첫 번째 자리로 올라앉으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상좌는 주인의 바로 옆자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 ‘벗이여 올라 앉으라’는 말이 바로 ‘나의 벗이여 내 바로 옆자리에 앉으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 세상에서 이런 주님의 충고는 안 맞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남의 일에 세심히 신경을 쓴다는 게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 권리는 자기가 찾으라고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고 남이 나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므로 ‘네 권리를 스스로 찾으라’는 것이 오늘날 세상의 교훈입니다.
겸손하고 목소리가 작고 자기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는 이는 세상에서 자기 권리도 찾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도 보면 목소리가 큰 진상 손님이 돈도 환불받고 더 많은 서비스도 받는 거지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 부당한 것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질 낮은 상품과 서비스에 속을 부글부글 끓이면서도 별말도 못해서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상이니 뭐니 하면서 속으로는 욕해도 당장은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시끄럽게 되어서 자기에게 불리해지면 안 되니까 점원이나 지배인들이 그런 사람의 편의를 우선 봐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인터넷을 바꾸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사례 중략)
이때 모두에게 편의를 봐 줄 수 없으므로 아무런 항의도 제기하지 않는 이까지 챙겨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 주님의 교훈을 정말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잔치를 배설하고 주인된 자가 손님들 사이에서 손님들의 기분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서열을 재배치 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인이 봤을 때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의 자리가 더 낮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만 감사해 하거나 미안해하지 결코 손님들을 위해 일방적으로 누구의 편을 들어 주리라는 기대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러한 충고가 소중한 이유는 그 잔치 자리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잔치 자리에서의 인간 사이의 처세술을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천국에서의 겸손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비유가 약간은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상좌에서 내려온다고 해서 그 사람이 말석으로 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정말 상좌에서 내려온 자가 그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식사를 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는 합니다. 물론 두 번째 자리에 앉았던 사람하고 자리 때문에 신경전을 펼칠 수 있을 것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라면 맨 끝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미쳐 보지 못하고 끝까지 말석에서 식사를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괜히 혼자서 겸손을 찾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걸 기회로 짓밟으려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다가 끝까지 말석에서 챙피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라리 말석에 앉으라는 충고를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한번 말석에 앉게 되면 다음에 이런 자리가 있을 때 당연하게 말석으로 가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석에 가기가 싫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은근히 소심해서 자리의 배열이나 서열에 관심을 가집니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뒤끝 있게 좌석의 배열에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될 값에 이왕이면 높은 자리로 나아갑니다. 낮은 자리에 앉아서 '내가 저 사람보다도 못해?‘하면서 속으로 앙앙불락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사실 주님의 이 충고를 제대로 지킬 수 있으려면 자리 배치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어떤 자리에 앉아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좌석의 높아짐과 낮아짐에 상관없이 주님의 충고대로 끝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 비유의 결론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입니다.
겸손하라는 말이지요. 좋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비유를 계속해서 살펴봅시다. 주님은 겸손을 강조한 다음에 이제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뜬금없이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보세요. 잘난 사람들을 초청하니까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다툽니다. 그러니 차라리 잘나지 못한 자들을 초청하면 그런 소동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더 큰 혜택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자, 이런 자들을 식사자리에 초청해서 대접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제가 요즘 이런 설교를 많이 하게 되는데 이건 우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끼리 끼리 서로 즐거워하지 말고 낮고 힘든 자들을 대접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대접받고 뭔가를 얻기 위해서 투자의 개념으로 부자에게 선물하고 그들을 대접하고 아부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실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자에게 대접하라’
그래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가난한 자와 장애인의 대신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갚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걸 대신 갚아 주게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되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와 장애인들에게 베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나옵니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우리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장애가 있다고 해서 의인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주님의 최후의 심판 때에 그 보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항상 부자들에게, 권세있는 이들에게 잘 보일려고 합니다. 뭔가 우리에게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을 걸로 생각해서입니다.
이렇게 잘해주면 그들도 우리에게 잘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부자와 권세있는 자에게는 나의 선의와 친절과 선물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뻔질나게 선물하고 대접하며 손을 비비는 것입니다.
나에게 되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 장애인도 여기서는 가난한 자에 들어갑니다. 맹인도 결국은 가난한 자에 들어갑니다. 가난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약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나 약한 자. 사회의 약자들입니다. 당시에 농업이나 육체적인 일 외에 할 게 거의 없었던 장애인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노동을 할 수 없어서 장애인들의 삶은 아마 보통사람들보다 더 가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장애가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이 아무리 바뀌어도 되갚을 수 있을 만큼 부유해 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약자입니다.
그런 이에게 식사를 베풀면, 친절을 베풀면, 호의를 베풀면 하나님이 갚으시고 하나님이 갚으시면 사람들이 갚는 것보다 엄청나게 굉장할 것이기에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에게 베풀라는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물질적인 복을 받기 원하는 자는 부모에게 효도하던지 아니면 십일조를 하던지 아니면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던지 하라고. 물론 세가지를 다 해도 좋습니다. 아마 더 좋겠지요.
그 이유가 사람들이 갚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잘했다 칭찬받고 의인으로 여겨지며 결국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 확실히 천국은 결국 겸손한자에게 유리한 곳인 것 같습니다. 제 잘났다고 인간들 사이에서 서로 잘난척 해봐야 우리 주님의 눈에 그가 정말 잘난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아마 그 반대일겁니다.
낮은 자리에서 주님의 얼굴을 보는 자에게 주께서 오셔서 ‘겸손한 자여 너는 나의 명령을 가장 잘 준행했으므로 나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나의 영광에 참예할지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이 혹시라도 대접받지 못하고 힘들어 할까봐 우리 아버지는 그들이 진 모든 빚을 다 떠안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가난한 이들, 약자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수지맞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일반 백성에게 베푼 것을 왕이 대신 보상해 준다면 이는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당연히 댓가를 바라고 베푸는 선행은 주님의 명령에는 어긋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선행과 친절에 따른 댓가를 기대합니다. 선행을 베풀면 뭔가 하늘의 상급이 있을 걸로 기대합니다. 당연하게 이런 선행들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급은 사람에게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에게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일단 한번 받아 버리면 하나님은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르게, 사람들이 그 선행을 칭찬하지 못하게, 사람들이 상을 주지 못하게 아무도 모르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 겁니다. 이 땅에서도 보답을 받고 저 세상에서도 상급을 받고 하면 참 좋겠는데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네 상을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둘 중에 상을 선택한다면 인간의 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비록 우리의 눈에 아무 갚을 것이 보이지 않지만 내 아버지께서 대신 갚으시겠다는 말씀을 믿고 그 믿음대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음에도 아버지의 말씀만을 믿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선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사람이 도로 갚을까 두렵다고 합니다. 왜 두렵습니까? 하늘 아버지가 갚으실 기회를 잃어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풍성한 상급을 받을 기회가 인간의 적은 댓가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르게 되 갚을 수 없게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은 항상 서로 교제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나의 대접에 되갚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이는 항상 나와 교류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갚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내가 대접하고 대접받지 못하면 내 아버지께서 대접하십니다. 그런데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자는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와 재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대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잔치 자리에 초대 받아서 상좌에 앉는 것이 별거 아닙니다. 가장 상좌에 앉았다고 해서 권력이 주어지거나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주 조그마한 명예에도 집착합니다.
가난한 자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잔치의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과 교류를 하기 원하여 잔치의 상좌를 주지 않을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와는 달리 우리 하나님의 눈에는 누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잘 대접했는지 누가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높였는지에 더 초점을 둡니다. 인간들이 가진 것은 하나님의 눈에 극히 미미합니다. 우리가 어느 개미가 미남 미녀개미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외양이나 우리의 재산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가진 것이나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큰 것으로 되갚을 수 있는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베풀 수 있는 것에는 상대도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가난한자 약한 자 낮은 자를 대접하지 않기에 주께서는 복음서에 이러한 명령을 적시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믿음의 형제요 자매라고 말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두고 사람을 차별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피를 무시하고 짓밟는 행동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죄인을 대속하여 의인으로 만드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한 때 가난과 장애와 약함과 낮음이 다 죄의 결과라고 말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것하고 믿음하고, 그것하고 죄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죄인이요
연약한 자녀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입니다. 차별하거나 차별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구별하려 한다면 믿음의 지체 사이에서 구별하지 말고 세상과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믿음의 형제를 차별해야 하는 것이지 믿는 지체 가운데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고 건강한 자와 몸이 불편한자 사이에 차별을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고요? 가난한 자와 몸이 불편한 자와 장애자의 뒤에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빽을 중시합니다. 내가 누구의 아들이다 누구의 조카다 누구의 친구다 누구하고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와 장애인과 몸이 불편한 자의 빽이 바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실천함으로 완성됩니다. 그런 과정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우리의 성화가 이루어 지고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 지는 것입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선물도 많이 받고 또 많이 주고 대접하고 대접받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소외되는 형제가 없도록 주위를 잘 살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후견인이 되시는 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슬픔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슬픔은 하나님의 슬픔이 될 것이고 곧 하나님의 되갚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 우리 주님이 시키신 명령을 지켜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시나 아닌가를 한번 시험해 보세요. 반드시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에 갚겠다고 하셨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비의 손길을 곧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번 5월 가정의 달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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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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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CBS 설교 방송을 가끔 듣습니다. 어머님이 아프시기 때문에, 마땅히 틀어놓을 채널이 없을 때는 기독교 방송에 채널을 맞춰놓습니다. 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복 중에서 제일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만남의 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잡하게 기도할 것도 없이 만남의 복이 잘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말이 참 좋았습니다. 만남의 복이라... 저는 홍 목사님과는 대략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으니 참 길고도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복을 누렸으니 그것 자체가 기적이고 감사이기도 합니다.
20대 시절에 저는 공부방 교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과외처럼 아이들에게 수학이나 영어, 국사 같은 과목을 가르쳐주는 일이였습니다. 나도 실력이 없다보니까, EBS에서 강의를 미리 한 번 들은 다음에,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형태에 가까웠고, 사실은 함께 밥먹고, 영화보러 다니는 말짱 불량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이 몸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언젠가 어느 명랑한 의대생 아가씨가 "지수씨는 뭔가 가르치는 사람 같아요" 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례가 이후로도 두 세번 더 있고 난 뒤로는,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흔적이 어떻게든 남는구나, 얼굴에도 남고, 몸에도 남고, 그러므로 성결히 살아야 하는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완벽할 수가 없고, 설교 말씀처럼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자리로 먼저 나가야 하고, 끝자리에 앉아 보는 용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뒤는 주님께서 해결해주시고, 갚아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올리며 저는 깊은 위안을 얻습니다.
끝자리면 뭐 어때, 꼴등이면 뭐 어때, 느리면 뭐 어때, 그래도 선한 길로 다니면, 그래도 아름다운 길로 다니면, 멋지게 살려고 노력하면, 그것으로 좋은 일인데 라고 힘을 내게 됩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계속 인연을 만날텐데, 계속해서 당당하고 품위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바르게 살고 싶습니다. 헌신하는 그리스도인, 몸으로 증명하는 기독교인, 그런 행동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고백하자면, 늘 주일에 일어나기 싫어하는 게으른 신자였습니다. 이제는 반주를 좀 더 잘하기를 노력하는 변화된 신자이길 바랄 뿐입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나부터 바뀌는 것이 성장의 출발인 것 같습니다. / 시북. 2016.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