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ardo Zamora
전설의 골키퍼 사모라. 그 이름이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럽에서 사모라는 축구역사상 가장 훌륭한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스페인에서는 연간최우수골키퍼에게 사모라상을 주기도 합니다. 사모라, 도대체 그가 어떤 선수였길래? 자 그럼 아주 오래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볼까요.
프로필
이름 : 풀네임 Ricardo Zamora Martinez
생년월일 : 1901년 1월 21일, 바르셀로나 출신
신장/체중 : 194cm / 89kg
포지션 : 골키퍼
국적 : 스페인
국가대표 : 46시합 출장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 리카르도 사모라.
사모라는 1901년 유복한 의사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는, 병약해 보여서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사모라는 축구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훗날 골키퍼로 명성을 날리게 되지만 소년 시절에는 주로 스트라이커 였다고 합니다. 10대 중반 사모라는 유소년팀 Universitari라는 팀에 입단하게 됩니다. 당시 이 팀에서는 골키퍼가 부상당해서, 대신 뛸 GK를 찾고 있었는데... 사모라가 마침 이 기회에 축구선수로 제대로 한 번 뛰어보고 싶어서, 골키퍼로 입단해서 제가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사람 일이라는 게 참 모릅니다. 가끔 전혀 뜻밖에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곤 하지요. 그래서 경험하고 부딪혀 보는게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입단 후에 만난 팀이 하필이면 명문 FC바르셀로나, 컵대회에서 몇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던 강호였지요. 당연히 실력차가 났고, 골문으로 슈팅이 상당하게 날아오는데... 사모라는 놀랍게도 잘 막아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공을 좋아해서 축구와 가까이 지냈는데다가, 하고 싶은 축구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자, 펄펄 날았던 게 아닐까요. 눈에 띄던 이 어린 골키퍼는 드디어 1916년에 에스파뇰로 무대를 옮겨서 본격적 라리가 커리어를 써나갑니다.
바르셀로나를 연고로 하는 에스파뇰 팀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쳐나갑니다. 에스파뇰도 1917-18시즌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멋진 활약을 보아왔던 지역 라이벌 FC바르셀로나가 드디어 움직입니다. 1919년 팀을 옮겨서 사모라는 이제 FC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1920년에는 19살의 골키퍼로 국가대표에 선정됩니다. 승승장구가 딱 어울리는군요. 그 해 올림픽에 출장해서 준우승에 큰 공헌을 합니다.
바르샤에서도 1920년 7년만에 코파델레이 우승에 공헌하였고, 이 대회 우승을 2차례나 차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에피소드가 발생합니다. 부친이 병에 걸려서 몸이 안 좋았고, 사모라는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서 잠시 축구화를 벗습니다. 그 후 복귀할 때에, 에스파뇰이 다시 또 사모라를 데려오고자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시금 에스파뇰과 계약하게 되었는데... 아뿔싸 이게 이중계약이 되고 맙니다. 바르샤와 계약기간이 남아있던 상태였지요. 스페인 축구협회는 무기한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사모라에게 내리고 맙니다. 안습의 사모라... ㅜㅜ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스페인 대표팀 관계자가 강력하게 항의를 한 끝에, 국가대표로는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표팀 관계자가 명골키퍼인 사모라가 국가대표 자리까지 잃게 되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모라의 소속팀 공백은 길었습니다. 1928-29시즌이 되어서야 에스파뇰 팀에 다시 복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복귀하자마자 선방에 선방을 펼쳐나갑니다. 11년만에 바르샤를 물리치고, 카탈루냐 리그 우승차지... 그리고! 코파 델 레이에서는... 사모라의 에스파뇰팀은 놀라운 역사를 보여줍니다. 8강 AT마드리드, 4강 FC바르셀로나, 결승 레알마드리드 모두를 잡으면서, 1929년 사상 첫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레알 마드리드 역시 이 전설의 골키퍼를 너무나 가지고 싶어해서 당시 어마어마한 돈(15만 페세타라고 합니다)을 이적료로 지불한 끝에, 1930년부터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게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가는 곳 마다, 우승을 안겨주던 사모라 골키퍼.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8년 프리메라리가가 출범합니다. 그리고 1931년 레알 마드리드는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다음 해도 라리가 우승 2연패에 빛납니다. 뿐만 아니라 33-34시즌에는 17년만의 코파델레이 우승도 차지합니다.
자, 이 쯤에서 플레이스타일을 살펴볼 시간입니다. 사모라는 어떻게 이렇게 서로 데려오려고 아우성치는 명골키퍼가 될 수 있었을까요. 사모라는 그 카리스마와 존재감이 정말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골을 막는 능력도 대단히 뛰어났겠지만, 실력 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위압감까지 가지고 있어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속 팀에는 커다란 힘이, 반대로 상대 공격수는 주눅이 들어버릴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그는 전설을 만들어 갔습니다.
이제 사모라의 커리어 중 가장 유명한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야기 입니다. 이 대회는 사상최악의 월드컵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우승을 위해서 온갖 나쁜 짓을 총동원했습니다. 심판매수, 편파판정, 방해공작 등... 스페인은 16강전에서 브라질을 꺾고, 8강전에서 절대 이길 수 없는(?) 이탈리아팀을 만났습니다. 물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우승을 위해서 편파판정 등의 꼼수들을 최대한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가 마냥 약하기만 한 팀은 아니었습니다. 이태리 전설의 공격수 주세페 메아짜도 이 때 활약하던 선수였지요. 어쨌든 이 8강전에서 사모라는 눈부신 선방에 선방을 해나갑니다. 1-1 무승부로 경기가 끝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재시합을 가져서, 이탈리아가 1-0 승리... 조금 황당한 일이지만.
재시합을 했는데, 사모라가 없었던 것입니다. 역시나 무솔리니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작이 진행되었고, 사모라는 재시합에 출장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스페인은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진정한 승자는 사모라이며, 스페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승부차기라도 한 판 했었다면, 분명 스페인이 이겼을 가능성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혹은 재시합에 레전드 사모라가 출장했더라면, 이탈리아가 승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즉, 편파판정에 핵심 골키퍼까지 출장기회를 잃었던 스페인은 이탈리아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편들기 했다간, 무기한 대회출장자격 금지였을텐데 말입니다. (30년대 최강으로 꼽히던 오스트리아도 이탈리아에게 희생당하고 맙니다 -_-; 페어플레이의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갔었던 월드컵이었습니다. 허허.)
이제 커리어의 마지막입니다. 1935-36시즌 사모라는 레알 마드리드의 뒷문을 멋지게 지켜내면서,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다시 한 번 따냅니다. 당시 바르샤와 결전이었는데... 레알은 선수가 퇴장당해서 10명이 싸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모라와 레알은 점수를 잘 지켜내면서 2-1 승리. 그리고 이것이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시합이었습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반란군이 나치 독일과 독재자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으면서, 약 3년의 전쟁 끝에 공화국 정부군에 승리하게 됩니다. 미국은 중립선언을 하면서 뒤로는 전쟁용품들 팔아서 돈 좀 벌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초토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망자 수만 5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모라도 전쟁이 발생하면서 군에 잡히기도 했었지만, 다행히 프랑스에 망명. 이후 두 시즌을 보내고,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사모라는 스페인 국가대표로는 꾸준히 활약한 끝에 46시합 출장기록을 남깁니다. 당시에는 국가간 경기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할 때, 대단한 기록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이후 38년 동안 스페인국가대표 최다출장기록이었습니다. 혹자는 내전만 없었더라면 끝까지 멋진 활약과 기록을 남겼을텐데... 라고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현역 은퇴 후에는,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았던 팀이 지금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그리고 놀랍게도 아틀레티코는 레전드 사모라의 지도 아래, 사상 첫 라리가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듬해도 우승하면서 2연패. 감독생활 시작부터 화려한 역사를 남깁니다. 이후 에스파뇰팀, 스페인 국가대표팀 감독 등 여러 감독생활을 거치고 1961년에 감독으로서도 은퇴하면서, 그의 축구라이프를 마칩니다. 감독을 그만두고나서는 축구해설을 하기도 했는데, 역시나 사모라 였기 때문일까요? 굉장한 인기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1978년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눈부신 활약들은 지금 상으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바로 라리가 최우수골키퍼에게 주는 사모라상 입니다. 초대 수상자가 바로 사모라 였고, 가장 최근에는 카시야스가 생애 첫 수상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애독해주시는 분들의 응원과 관심에 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