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왕같은 제사장(창세기14:13-2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6. 6. 03:35

 

왕같은 제사장 (창세기14:13-24) 부제 - 성도의 길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종종 우리들이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뭐 듣기는 좋지만 일단 왕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왕같은’ 이니까 왕 대우를 받지만 일단 왕은 아닌 걸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랍니다. 이건 ‘제사장 같은’ 이 아니고 그냥 제사장이니까 우리의 진정한 신분은 제사장입니다. 왕의 대우를 받는 왕같은 제사장, 이게 진정한 우리의 신분입니다.

 

듣기만 해도 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에서 왕의 대우를 받은 일도 없고 제사장이란 말도 뭐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는 하루하루 아무 일없이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는 소시민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성도가 어째서 왕같은 제사장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문화에 속해서 정신없이 허우적대며 그 와중에서 주어지는 적은 쾌락과 편리에만 몰두하게 되면 성도가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하나님의 길에 서서 하나님만을 바라고 나아가면 성도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를 각각 보게 됩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아브람과 헤어진 롯이 일족을 이끌고 소돔성에 정착하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지역, 보다 정확히 가나안 남부에 대기근이 덥쳤습니다. 비가 오지 않았고 물이 말랐으며 풀이 죽었고 사람들은 생존에 힘들어 했습니다. 가나안땅은 당시에 주기적으로 기근과 대기근이 번갈아 덥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가에 심긴 나무가 그렇게나 복되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가나안은 도시국가 연합이있던 시절입니다. 여기보면 2절에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 스보임 소알의 다섯 개 나라가 나오는데 바로 이 나라들이 도시국가 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돔의 왕 베라를 국가 연합의 전체적인 우두머리로 하고 각각 도시와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나안보다 훨씬 북부의 엘람왕 그돌라오멜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1절에 보면 시날왕 아므라벨부터 시작해서 나라들과 왕들의 이름이 쭉 나오는데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은 그돌라오멜에게 해마다 무거운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가나안에 닥친 대기근 때문에 조공을 바칠 수가 없었습니다.

 

대기근이란게 한해만 기근이고 다음해에는 비가 오는게 아니라 몇 년동안 비가 잘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니까 사실 이때에는 제대로 조공을 바치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북부 역시 대기근에서 살아남기위해 가나안의 조공이 필요했으므로 그돌라오멜은 시날 왕부터 시작해서 여러 동맹국의 왕들과 합쳐서 가나안으로 쳐내려온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엘람 한 나라만 쳐들어와도 가나안 전체가 벌벌 떨 정도로 국력에 차이가 심하게 납니다. 그런 북방군을 아브람과 동맹군이 쳐서 물건과 사람을 도로 빼앗았다는 것은 매우 굉장한 쾌거입니다. 아마 가나안인들 사이에서 아브람의 이름이 드높아 졌을 것이며 더불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하튼 가나안의 남부 도시국가들은 십삼년만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이건 독립선언을 한 셈입니다. 북부의 왕들은 매우 강력하고 잔인합니다. 남부는 아주 약합니다. 상대가 될 리가 없습니다. 다섯 개의 도시 연합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대부분을 휩쓸고 약탈합니다. 이 와중에 소돔성도 노략당하고 그 성에 살고 있었던 롯도 잡혀갑니다. 물론 그의 모든 재물도 다 빼앗깁니다.

 

아브라함처럼 네게브나 요단의 서편에 살았다면 아마 북부군의 침략을 피해갔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소돔, 그 풍요롭게 보였던 소돔에 정착하는 바람에 모진 고초를 겪게 된 것입니다. 내가 보고 풍요롭고 탐스럽게 보인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똑같이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탐스러운 것 풍요로운 것은 항상 사람들이 다투어 차지하려고 합니다. 경쟁이 치열합니다. 지킬 힘이 없는 사람이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고 약한 나라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도록 강대국들이 놔두지를 않습니다.

 

더구나 소돔왕 베라의 이름뜻은 죄의 아들이란 뜻도 있습니다. 얼마나 죄를 동경했으면, 아니면 얼마나 죄를 많이 저릴렀으면 이름자체가 죄의 아들이겠습니까? 음란과 폭력과 남색의 도시로 유명한 소돔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자기의 신앙정체성도 히브리족의 정체성도 모두 버리고 정신없이 성안으로 들어갔는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고로 고모라 왕 비르사의 뜻은 악의 아들이랍니다. 이 동네가 얼마나 악한지 한명의 죄의 아들이고 한명은 악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멸망할 만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이런걸 잘살펴야 합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풍요와 번영만을 좇다가는 큰일납니다. 영적인 사인에 둔감하면 하나님의 사인을 놓치게 되면 파멸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깨어 기도해야 하고 항상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인을 언제든지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백년 전에 미국과 일본이 몰래 카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어서 한반도를 일본에 넘기는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중국은 인구가 너무 많고 우리는 인구가 너무 적어서 솔직히 걱정이 많습니다. 가난하고 못살던 중국을 자본주의 탐욕가들이 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옛날 중국을 강하게 하면 반드시 우환이 생길거라고 외친 이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당장 눈앞의 경제적인 이득만 생각한 것이지요. 저들은 영원히 우리의 밥일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일방적인 밥이 아니라 포식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의 탐욕이 나라를 망칩니다. 국민들의 이기심이 나라를 망칩니다. 지도자들의 음흉함이 나라를 망칩니다.

 

우리의 경제적인 풍요를 욕심 많은 이웃들이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더 간절히 이 나라의 보호와 안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풍요한 이라크의 곡창지대를 가졌으면서도 가나안의 풍요를 넘본 그돌라오멜과 다를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우리를 전혀 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것에 배고프시지 않기에 충분히 우리를 보호하실 겁니다. 다만 그는 공의에 목마릅니다. 그는 공의에 배고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우리를 보존해 달라고 기도할려면 우리나라가, 우리의 시민들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충분히 의롭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이 대한민국이 충분히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의 의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 걱정입니다.

 

사실 남쪽의 도시국가들이나 여러 족속들이 그돌라오멜을 배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당장 대기근이 일어나서 도저히 자기의 백성들에게 조공품을 마련하기위해서 더 수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공을 보내지 못한 겁니다. 그러나 엘람왕 그돌라오멜은 이런저런 사정을 보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아예 가나안을 철저하게 짓밟아서  감히 다시는 기어 오르지 못하게 만들 생각으로 쳐들어 온 겁니다.

 

힘없고 부유한 나라의 운명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더 기도할 일입니다. 이 나라를 배고픈 범과 이리떼들 사이에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할 일입니다. 물론 군비도 확충하고 정신 무장도 하고 경제도 활성화 시키고 애도 많이 낳고 사람들을 골고루 잘살게 해서 내 나라에 대한 애정도 키우고 다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도덕적 재무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 민족이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쫓아 소돔에 정착했던 롯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국제 역학관계의 틈바구니에서 재산을 다 빼앗기고 자신도 포로가 되어서 북쪽으로 끌려 가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롯이 요단 동편의 소돔지역을 봤을 때 그는 소돔을 향해 오는 그돌라오멜의 말발굽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만한 식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떠난 성도,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들의 말로는 이와 같습니다.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그런 낙원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사회이고 경쟁사회이고 그래서 더 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필요한 사회입니다.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들의 땅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고 있을 때 롯의 권속들 중에 한 사람이 아브람에게 비보를 전합니다. 북부 연합군이 당신의 조카를 사로잡아 갔다고.
아브람의 대응이 놀랍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째’하면서 걱정하고 한탄하기만 하지 않고 바로 군사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합니다. 14절에 보면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팔십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굉장하지요?

 

일단 자기들의 근거지도 지키고 노약자와 여자와 아이들도 지켜야 되므로 군대가 모두 동원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려 삼백팔십명의 기병대가 동원된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몰래 기습해서 적들을 쳐부수고 조카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재산들도 모두 도로 찾았다는 겁니다. 물론 아브람의 군사 삼백팔십명으로 이러한 일을 모두 다 했다고 하는건 아닙니다. 엘람이니 시날이니 하는 나라의 군대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24절에 보면 아브람은 이때 자기들과 이웃한 아넬, 에스골, 마므레 부족들과 연합해서 쳐들어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조카 롯이 경탄한 소돔과 고모라의 군대를 파한 북부 연합군의 군대를 아브람과 동맹군이 격파한 겁니다. 결코 아브람과 동맹군들의 활약을 깎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들은 소수기 때문에 몰래 추격을 했고 밤에 기습을 함으로써 대승을 거둔 겁니다. 그것도 군대를 나누어서 포위한 것을 보면 이들에게 상당한 전략적인 식견도 있었습니다. 아마 북부군들은 자기들이 빼앗은 물건과 사람들 때문에 먹고 마시고 대취했다가 방심한 차에 기습당해서 패한 걸로 보입니다.

 

북부군에게서 사람과 재산을 빼앗아서 돌아오는 길에 아브람은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소돔왕이 왕곡에 나와서 그를 영접합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고 소돔왕은 재물은 몰라도 사람만은 돌려 달라고 합니다. 웃기지요? 당시의 관례대로 하면 소돔왕은 아무것도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동네의 풍습은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이나 사람은 모두 승자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이게 바로 밥벌이입니다. 산업활동인 겁니다. 그런데 마치 큰 인심을 쓰듯이 재물은 네가 가지고 사람만 돌려 달라고 하니 소돔왕도 정말 뻔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소돔왕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돌려 받지 못한다면 그가 왕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백성이 없는 왕이 무슨 왕입니까?

 

여기서 왕들과 만난 아브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마치 전후 승전회담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왕들과 만나서 오히려 왕들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우뚝서서 왕들이 그의 눈치를 보는 그런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는 지금 근동지역의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겨우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그 회담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사실 가나안 남부의 다섯 도시국가 연합은 북방의 침략자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왜냐면 9절에 “네 왕이 곧 그 다섯왕과 맞서니라”고 되어있는 이 본문에서 실제 원문에는 ‘맞서니라’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남부의 왕들이 맞서 싸울려고 진을 치고 기다리기는 했지만 싸움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하게 무력하게 패주했기 때문에 아예 맞서 싸웠다는 말 자체를 할 수 없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그랬는데 세상에 아브람과 그 동맹군들이 그 북방의 침략자들을 요격해서 대승을 거두고 사람과 재물을 도로 찾아 왔으니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러니 당연히 아브람이 그 전승국의 왕으로서 위세를 내는 겁니다. 물론 아브람이 왕은 아니지만 이름만 족장이지 왕들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진게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살렘왕도 소돔왕도 아브람을 맞아서 비위를 맞추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아브람을 보면서 왕같은 제사장이 어떤 모습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성도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소돔왕의 말에 아브람은 이렇게 답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우리 성도들은 아브람처럼 세상의 왕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배격하는 저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주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너희보다 높으신 분이시다”

 

처음 아브람이 강을 넘고 사막을 건너 가나안의 가장 남쪽 네게브에 왔을 때 그는 야외에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마 이때 가나안 사람이나 아모리 사람이나 브리스 사람들은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무리들은 전혀 위협적이지도 강하지도 못했고 기껏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사막, 네게브 사막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람은 열왕들 앞에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세상이 주는 물질이나 세상이 주는 쾌락이나 세상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서 정체성,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잃고 하나님의 길을 이탈한다면 그는 결국은 세상의 정치 놀음에 빠져서 재산도 다 빼앗기고 포로의 신세가 되어 초라하게 땡볕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길을 간 아브람은 지금 왕들 앞에서 거대한 국제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으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서 있습니다.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고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호와를 ‘전쟁의 신’으로 불렀다는 거지요. 이후로는 아무도 아브람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처음 아브람과 롯은 서로간의 세력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네 목자와 내목자가 서로 싸운다는 표현은 일방적인 세력간의 우열이 있는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래도 뭔가 비슷하니까 상대가 되니까 다툼이 있는 겁니다. 그랬던 아브람과 롯의 지금 모습은 천지 차이입니다.

 

물질적 편리와 세상의 쾌락을 좇아 성도로서의 선택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간 롯과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아브람의 모습은 지금 포로민과 왕의 모습처럼 천양지차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그의 길로 따라 나아갔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그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따라 살며 그의 길 안에서 그와 동행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합니다. 그것이 전부인걸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들여서 하나님의 생령이 된 우리는 단순한 흙먼지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서로 영교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가 가지는 특질입니다. 성도는 결코 세상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더 소중히 해야 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따릅시다. 끝까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지금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고 지금 당장은 뭔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지혜와 그 도움위 손길을 믿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가장 기본적인 길로 나아갑시다.

 

그게 가장 지름길이고 그게 가장 바른 길이고 그게 가장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란 것을 결국에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그런 결과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의 손길을 믿어 보세요.

 

그는 결코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결코 배신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서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도로 만드실 것입니다.
당당한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아멘 주여 그리하시옵소서. 저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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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인내하고 하나님의 길에 서 있게 된다면, 우리는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반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게 된다면, 우리는 방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시간을 사랑하며 사람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곁을 떠난다면 우리는 자신만을 사랑하며 사람을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저는 이 짧은 이야기를 꼭 남겨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자만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정하고 높여주실 것이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실히 살아야 하며, 삶의 힘겨운 무게 앞에서도 지지 않아야 합니다. 때로는 밝은 날 대신에 어두운 날이 올지 모르나, 그럴 때는 자신을 돌아보며 초점을 더욱 주님께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 흔해 빠진 표현이겠지만, 터널은 반드시 끝이 나오며 환하게 우리를 다시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절대 비하하지 말기를. 오늘부터 펼쳐지는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 2017.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