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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서로 통용하다(사도행전4:32-5:1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8. 26. 16:27

 

물건을 서로 통용하다 (사도행전4:32-5:13)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 면접하던 교수님이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서로 다른 점이 뭐냐?
바로 이 구절을 예로 들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 모르니까 이제부터 배워보려고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벌써부터 어려운걸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일단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공산주의는 강제로 물건을 나누는 거고 기독교는 사랑으로 자발적으로 나누는 것이 다르다 이렇게 말입니다. 제가 제대로 답을 했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교수님은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이 없었고 그냥 다른 문제로 넘어갔습니다.

 

지금 여기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면 저는 조금 다르게 답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뭐냐면 ‘공산주의는 인간이 악하다는 것을 부인하고 들어가서 실패했고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고 악하다는 가정을 하고 들어갔고 인간이 악하다는 가정하에서 들어갔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이 임하기 전에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이렇게 말입니다.

 

사실 인간은 사악하고 나약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면을 억누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바로 성령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인간은 죄성을 버리고 거룩해 집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 인간끼리 뭘 해볼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실패합니다.

 

사실살 이런 구절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는 성경본문에 두 번 쓰여졌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행전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난 다음이고 두 번째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 두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사람들이 은혜가 충만해서 벌인 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결코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면 기독교는 굉장한 종교가 되었겠지요? 그러나 우리도 알다시피 지금 이런 형태의 교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식어지고 신앙 열정에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 재물을 아깝게 생각하는 마음이 싹텄고 또 질투심이 싹텄으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자기를 중심에 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뭐 이게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기는 합니다. 원래 사악하고 이기적이며 질투심이 많은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유토피아를 꿈꿨던 공산주의는 결국 실패로 끝나버렸습니다. 하나님없이 우리끼리, 인간끼리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죄성이 들어온 다음 인간은 변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강권하심이 없이 인간 스스로 천국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가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악한 인간들은 항상 질투하고 거짓말하고 뭔가 상대를 이용하려고 하고 음모를 꾸미고 뒷통수를 칩니다. 그리고 완장질을 하려고 하지요. 요즘 갑의 횡포가 사회문제라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이 갑의 횡포에서 으뜸은 먹는 것을 가지고 하는 횡포입니다. 이건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안 먹고 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나 신선이 되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신선은 이슬 받아 먹고 사니까.

 

예전에 어떤 책에서 공산주의를 ‘철학자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맞는 체제라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성인이나 현자쯤 되어야 가능한 제도라는 겁니다. 내가 좀 더 일하고 좀 덜받아도 남을 배려해서 괜찮아 하는 사람, 나는 못먹어도 저 사람이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 실제로 이런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나 있지 현실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로 굶어 죽고 요즘말로 호구가 될 겁니다. 나 하나만 착하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 불평을 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사악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욕망을 최대한 자극해서 생산과 분배로 사람을 조종하려는 제도지요. 여기에 경쟁과 질투와 음모가 마찬가지로 판을 칩니다. 살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결과가 달라질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인간이 만든 제도에 단점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두뇌는 한계가 있고 우리가 미리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광경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공동체는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이념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에 의한 자발적인 공동체입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단순히 우리 주님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에 의지해서 자기에게 남고 남에게 모자라는 것들을 가져와서 교회가 분배하도록 놓아둔 것 뿐입니다. 성령의 은총을 충분히 받자 이 사람들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1.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오늘 본문에 보니까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뭐했습니까?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더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공동체는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라도 있으면 곧바로 와해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기독교인들은 어떤 인간들이기에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습니까?

 

옛날에 공산주의 혁명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마무지하게 신념에 찬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무슨 말을 해도 씨가 안먹힐 정도로 신념에 투철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이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이 법륜공을 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공산주의 이념을 이기는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특히 중국은 사교집단에 의해서 왕조가 망한 경우가 많습니다. 황건적의 난이니 오두미교니 의화단이니 명교니 하는 것들을 보면 중국정부의 종교에 대한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 무슨 주의에 대한 신념보다 종교적 신념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까? 천만에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회의 모습은 성경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극히 이기적이 되었고 내것과 네것을 정확하게 구분하며 자기가 하나라도 더 복을 받으려고 서로 경쟁하고 질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도 끼리끼리 편당을 지어 놀려고 합니다.

 

자, 초기 교회의 모습과 지금 교회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다릅니까? 무엇이 이렇게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바로 성령이 임재하셨기 때문에 초기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고 더 이상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일이 많아서 지금 교회가 이런 모양이 된 것입니다. 뭐 지금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가 많이 있겠지만 성령의 역사가 있고 없고에 따라 물건을 유무상통하고 서로 재물을 내어놓고 하는지 아닌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들 보면 주로 그 나라의 국기에 벌건 바탕이 많습니다. 이것은 혁명은 피로 이루어 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피로 이루어진 혁명을 뛰어넘는 유일한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종교를 아편으로 취급합니다. 우리는 바탕이 벌건게 아니라 십자가 자체를 벌겋게 칠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 즉 사회주의 국가는 종교를 두려워합니다. 자기네의 사상을 뛰어넘는 유일한 것이 종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헌법에 교묘한 장난을 쳤습니다. 말하면 종교의 자유도 있지만 또 반종교 선전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습니다. 가령 1항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래놓고 2항에는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렇게 해놓으면 결국 꼴보기 싫은 종교를 핍박할 근거를 헌법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며칠전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중국의 습근평이가 공산당원은 종교를 가지지 말라고 명령한게 나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의 오른팔이라는 지방공무원은 그 지역의 교회에서 십자가를 떼어내도록 명령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겁니까?

 

이 사람이 어느날 밤에 우연히 도시를 시찰하다가 온 도시의 하늘이 십자가로 시뻘겋게 된 것을 보고는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중국이 기독교화되고 그래서 공산당이 발 불일 수가 없게 되겠다고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벌겋게 빛을 발하는 십자가를 보고 충격을 먹은 겁니다.

 

지금 중국의 기독교도는 1억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구비율로는 약7.6%에 달한답니다. 보통 25%가 되면 국교로 인정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공산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사실 초기 기독교도들의 삶에서 나왔지만 그 안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빠져있습니다. 인간을 인간되게 만드는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 인간들끼리 만든 사회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부작용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들끼리 지상왕국을 만들려고 하던 니므롯의 바벨탑이 무너진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배격한 인간집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 봅시다.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돈이 아깝지 않은게 아닙니다. 자기의 재물이 아깝지 않은게 아닙니다. 다만 성령의 역사가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뭐라도 더 주고 싶고 내어 놓고 싶어서 자기의 물건을 내어놓아 누구나 필요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보통 이런 역사는 안정적이고 평화스러울 때 생기는게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 위기상황일 때 생기는 겁니다. 어차피 위기상황에서 공동체의 안녕이 없이 개인의 안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의 존속을 먼저 생각하는 구성원들이 많아지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나보다 먼저 공동체를 생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그만큼 강력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천상의 것이 듬뿍 채워지면 그 나머지는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그냥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사도들이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했고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34절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언뜻 보면 상당히 멋있는 일 같지만 이것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뭡니까? 구성원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집과 밭을 팔아서 계속해서 헌금하지 않으면 있는 재산을 다 써버린 다음에는 어떡합니까?
그리고 이 공동체는 아무도 일은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그것으로 끝나는 단체입니까? 마치 내일이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게 건전한 모임일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생각해 보기 전에 옛날 아주 굉장한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간증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가 이 설교를 하고는 얼마 있다가 자기가 가진 물건이 하나씩 없어지더랍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자동 전기톱이 없어 졌어요. 이건 흑인 교인 중에 누가 빌려갔는데 안갔다 주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예배당에 있던 냉장고가 없어졌답니다. 바깥의 더운 날씨 속에 땀을 흘리고 들어와서 시원한 냉수 한잔이 정말 유용했는데 이제 냉장고가 없어 졌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선풍기가 없어 졌고 그 다음에는 뭐가 없어지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예배당에 전자제품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것만 없어 진게 아닙니다. 쓸만한 건 몽땅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이 선교사가 생각하기를 교회 밖의 사람들이 훔쳐가지는 않았을 거다. 그 사람들은 여기에 이런 물건이 있는 줄 모를테니까 아마 교인들 중에 누가 훔쳐갔을 거다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흑인 교인 집에 심방을 갔는데 놀랍게도 그 집에 교회에서 잃어버린 물건들이 다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그 흑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걸 들고 갔느냐? 그랬더니 뭐라고 했겠습니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돌려 주겠다고 답했겠습니까? 천만에요. “나는 이게 없고 또 필요한데 너는 이게 없으면 한국에서 또 보내주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 물건을 내가 쓰는게 맞다”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더랍니다.

 

이 사람들은 오랜 공산주의 문화로 말미암아 소유개념이 잘 없습니다. 게다가 잘사는 너의 것을 못사는 내가 좀 가지면 어떻느냐는 생각이 꽉 자리잡고 있습니다. 뿐입니까 물건을 서로 상통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도둑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더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안납니다. 그냥 그대로 넘어 갔는지 아니면 그 흑인이 물건을 도로 교회로 가져다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성경 본문의 내용만을 믿고 그대로 실천한 초짜 교인은 이 선교사를 아주 곤란하게 했습니다. 자, 어때요? 여러분은 과연 이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것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는 뭐든지 주고 싶습니다. 더 주지 못해서 안달합니다. 그래도 전혀 아깝지 않고 상대방이 그걸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즐겁습니다. 그래서 더 즐겁게 해 주고 싶어서 뭐 더 줄게 없는가 고민하게끔 됩니다. 이게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이 그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니 이 세상의 것들이 초개같이 여겨집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나머지를 더하신다는 말이 맞았습니다.

 

옛날 알바니아에 다단계 때문에 정권이 붕괴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랜 공산주의 문화 속에서 살다가 어느날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는데 이때 다단계가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아마 정부 고위관료들이 관계했나 봅니다. 그런데 처음 다단계가 퍼질 때는 그 다음 단계 층이 입사하면서 가지고 온 돈을 가지고 먼저 입사한 사람들에게 이익금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너무 잘되서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다단계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졌는지 이제 한번만 더 단계가 내려가면 전 국민이 다 가입하는 정도로 숫자가 많아 졌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와도 이전 다단계회원들에게 이익을 줄 수가 없게 되었고 결국 다단계는 공중분해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해자가 생겼는데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단계 피해액을 내어놓으라고 정부에 데모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수뇌부는 도망가고 뇌물을 받고 이를 묵인한 정치꾼들은 사퇴를 하고 결국 다단계는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는 정권을 붕괴시키는 걸로 끝이 난 겁니다.

이처럼 논밭을 팔고 집을 팔아서 먹고 살고 난 다음에 이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요?

 

초대 교회에서 처음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집과 땅을 팔아서 가져왔는지  그것을 얼마나 잘 나누었는지 그래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겠습니까?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주로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기독교의 교리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와 만인의 평등이니까 주로 약한 쪽에서 주님을 믿겠지요? 오순절 성령의 사역이 그 정도로 폭발적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돈도 신분도 초월하고 마구 마구 퍼집니다. 성령의 사역 중에서 제일 첫 번째가 교통이쟎아요. 서로 교통하는 것.

 

제가 옛날에 행정고시를 그만두고 순복음교회 기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과연 무얼 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기도응답을 받으려고 간겁니다. 연말과 연초에 계속해서 기도원에 있었고 정말 목놓아 기도했고 엄청나게 아팠고 금식도 강제로 했고 은혜도 충만하게 받았고 그러나 응답은 받지 못했고 그랬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돌아올 때입니다. 그 동네를 제가 몰랐는데 연초에 신년축복대성횐가 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드는지 자리가 없을 정도였는데 당연하게도 집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탈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이 버스가 교회버스고 그래서 공짜입니다. 제가 기도원에 올 때 그 버스를 타고 왔기에 그 버스를 타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중년 여자가 새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들이 안좋게 바라보겠죠? 그랬더니 이 아주머니가 자기는 순복음교회에 가서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래서 빨리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교회식당봉사를 하러 간다니까 빨리 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새치기에 별말을 안합디다. 그런데 제가 내리는 곳에 그 사람도 같이 내렸는데 그곳은 순복음 교회하고는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 다른 곳으로 걸어 갑디다. 한마디로 차를 빨리 타려고 거짓말을 한 거지요.

 

자, 제가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맹인거지가 찬송가를 틀고는 구걸을 합니다. 딱봐도 사기꾼인게 분명해 보였지만 그래도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는 점이 저를 괴롭힙니다. 걸인이 제 앞에 올 때 ‘에이 모르겠다’하고는 이천원을 줬습니다.

 

그런데 서울 지하철이 한번에 목적지 까지 가지 않고 갈아타는 건데 갈아탄 지하철에서 또 다른 거지가 또 찬송을 틀고 구걸을 합니다. 와 이 사람들이 단체로 구걸을 하나 싶었지만 어쩌겠습니까? 찬송가 때문에 또 한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차만 타면 부산으로 갑니다.

 

그런데 참 옷을 멀쩡하게 입은 사람 사기꾼이 이렇게 말합니다. 애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연락이 왔는데 지금 차비가 없다 그러니 한푼을 빌려 주면 나중에 갚아 준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저에게 와서 구걸을 합니다. 제가 만만해 보였나 봅니다.

 

저도 딱 들어보니 사기꾼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그래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은혜를 받으니까 사탄이 지금 시험하는 구나! 아니면 하나님이 지금 나를 시험하시는구나! 네가 진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준비가 되었는지 분위기에 취해서 그냥 울고 불고 난리친건지를 내가 시험하겠다!

 

그래서 이만원을 주었습니다. 차비니까 아무래도 그정도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 그런데 그 사람은 사기꾼이 확실한 걸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달라 붙어서 주로 저처럼 만만해 보이는 사람에게 붙어서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속으로 ‘너 때문에 주는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주는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참 지금 생각해도 은혜 한번 받고 안 쏟기가 어렵습니다. 웬 거지가 그렇게나 많은지! 전신만신에 거지고 사기꾼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사실 세상 재물은 좀 우습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네 삶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됩니다. 지금 예루살렘교회는 그런 단계에 접어 들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은혜를 받자 사람들이 재물을 헌금하는데 너무 너무 풍족하게 합니다.

 

이때 우리가 잘 아는 바나바도 역시 밭을 팔아서 그 전부를 헌금합니다. 집을 파고 밭을 팔아서 전부를 헌금하니까 지켜보는 사람들이 칭찬을 하고 구제를 받는 이들이 감사를 하고 참 보기 좋지요? 그리고 이 돈이 다 떨어지면 하나님이 뭔가 해결책을 주시겠지. 그래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밭을 팔아 헌금을 하는데 얼마를 감추었답니다.

 

성경에서 아나니아를 칭할 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라고 했지요? 그건 그가 교회에서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지 않은 평신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신도의 일을 장황하게 기술한 이유는 이때 아나니아의 일이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이 아나니아 사건이후로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서 헌금하는 일이 대폭적으로 감소하지 않았을까요?

아나니아가 참 한심한 것이 아니 감출게 뭐 있습니까? 어차피 자기 것이니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전부를 헌금한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제 소유를 팔아서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사용해 주십시오 하면 될 일입니다. 몽땅 다 바치라는 규정도 없고 전혀 강제사항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아니 헌금을 전부 다 하지 않으면 사탄이 마음에 가득한 겁니까?
베드로의 말이 이어집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라”

 

베드로의 말은 많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지만 아나니아가 헌금을 하면서 제가 소유를 다 팔아서 전 재산을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더 대단하게 생각하고 더 칭찬하니까 그게 샘이 난 겁니다. 그래서 그만 전재산을 다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게 단순히 사람들에게 한 거짓말이 아니요 하나님에게 한 거짓말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즉시로 아나니아의 숨이 끊어져버렸습니다.

 

굳이 그렇다고 사람을 죽일 것 까지야 없지요? 앞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고 꾸짖으면 그만인 것을 죽이기까지!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무서운 분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젊은이들이 시신을 장사합니다.

 

자 세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 삽비라가 들어옵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묻습니다. “그 땅 판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베드로가 왜 이렇게 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삽비라까지 같이 죽이려고 그랬을까요? 어차피 남편을 죽인 하나님에게 만정이 다 떨어질 것 같은데. 삽비라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시침을 떼고는 거짓말을 합니다. “예 이것뿐이라”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주의 영을 시험하는 일은 잘못한게 확실하지만 그래도 안내는 것 보다는 좋지 않을까요?

 

아니 헌금을 하고 욕먹고 신세를 망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되고. 이건 좀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한때의 치기어린 생각 때문에 아니니아 집안이 멸문을 당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베드로의 위엄을 높여 주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돈을 좀 감추고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굳이 목숨까지 뺏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의 순결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막 교회가 태동하던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절대적으로 순결하고 성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잘나가던 교회를 아나니아가 들어서 깨버린겁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말에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있는 자, 부정직 한 자,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자를 교회가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엄위하시고 울의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신다는 것을 알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정말 좋지 못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관계에 얽매여서 또는 좋은게 좋다는 식의 온정주의로 일관해서 제대로 된 권징을 시행하지 못하고 교회의 순결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정화시킬 것이고 또는 하나님이 세상을 시켜서 교회를 정화하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가 제대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정부에서 교회에 세금을 걷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목사개인에게만 세금을 걷으려고 하지만 일부 매체에서 교회의 헌금과 재산에 대해서 세금을 걷어야 된다는 식의 논지를 펴는 것을 봅니다. 왜냐면 그 많은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천하는데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즐기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의 불만과 의문을 뒤로 하고 성경을 따라 가봅시다. 삽비라 역시 죽었고 장사되었고 이를 들은 사람들이 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을까요? 교회에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아나니아가 판 소유는 모든 전 재산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판 소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 중에서 일부인 땅, 그러니까 집과 황금과 보석과 땅 중에서 땅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땅들 중에서도 그가 판 땅’이란 말입니다. 그래놓고 그 중에서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 드렸지요. 그래도 헌금하려고 땅까지 판 사람이 전부를 내지 않아도 죽음은 너무 과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여기 5:2절에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있지요? 여기서 ‘감추매’는 ‘도둑질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나니아가 헌금한 것에서 일부를 감추고도 전부를 헌금한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감춘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한번 뱉은 말은 주님이 철저하게 기억하고 지키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부를 가져 왔습니다라고 하던지 아니면 그냥 제가 구제하는데 쓰라고 돈을 가져왔습니다라고 했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을, 오히려 평신도가 구제를 위해서 동참한 것에 대해 칭찬을 들었을 것을 거짓말로 영광을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으로 되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기 때문에 사형이 된 겁니다. 정말 무섭지요?

 

아마 이 후로는 땅을 팔고 소유를 팔아 헌금하는 이가 싹 없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히 헌금하고 죽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건 솔직히 사탄의 궤계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큰 곳에 사탄도 크게 역사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더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과하게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벌하신 이유는 공회 앞에 사도들의 발 앞에 내면서 거짓말을 했을 때 이처럼 목숨을 잃는 일이 생겨야 사람들에게 거짓과 삿된 마음이 침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역사를 뜨겁게 한다고 해도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한 이도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교회에 들어와 있던 사람이 아니라 뭔가 이상 열기로 인해서 한때의 열정에 취해서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 생활하는 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열정이 식어 버린다면 인간적인 생각이 스며든다면 사탄이 공동체내부에 틈을 타고 들어와서 교회를 깨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돈 때문에.

 

사실 하나님은 교회가 처음 세워지는 때에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위엄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말하고 생활하는 건전한 교회를 세우기 원한 겁니다. 교회가 처음부터 거짓말도 제대로 거르지 못하고 사기꾼이나 음모꾼들이 활개를 치고 서로 편을 지어서 수군대고 이렇게 된다면 앞으로 교회가 절대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비상적인 일을 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정능력을 보이지 못하면 하나님은 외부의 힘으로 강제로 정화시킵니다. 그러면 정말 끔찍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앞에 떳떳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아보아 경성해야 합니다.

교회는 지금 처음 태동기이고 머지않아 로마의 대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 앞에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권능이 없다면 아마 교회가 도떼기시장이나 야바위 장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좀 과하게 반응하신 겁니다.

 

특히 베드로에게는 뼈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사탄이 그 마음에 가득해 진’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판 일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지금 아나니아가 사탄이 가득해서 이런 거짓말로 교회를 어지럽힌 것을 보고 베드로는 이대로 두었다가는 아나니아에게 침투한 사탄이 그로 하여금 교회를 배반하고 교회를 깨는 일을 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권면하지 않고 아나니아가 죽는 것을 방치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단지 교회를 정치적인 목적이나 세상살이의 한 방편으로 삼고자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성직을 취득하려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오히려 교회의 순수성과 일치를 해하는 일을 저지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가 처음 태동하기 때문에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이런 일에 단호하게 징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즉 교회를 세우기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셨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교회가 굳게 서 갑니다. 그러나 신앙열정이 식고 난 다음 사람들 사이에는 이기심과 탐욕과 재물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명예를 포기하지 못해서 거짓말을 일삼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게 그냥 들키지 않고 넘어갔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는 그리고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만만히 보고 공동체를 속이고 그리고도 공동체 속에서 더 큰 명예와 칭찬을 노리고 온갖 음모와 궤계가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목숨으로 교회를 굳게 한 것입니다.

 

시신을 싸서 매장했다는 말은 그가 애곡하는 의식이 포함된 일반적인 절차의 장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죽은 자의 예에 따라 간단하게 장사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구나 아나니아는 예루살렘밖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아내 삽비라가 남편의 장사를 몰랐을 것입니다. 여하튼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망하고 자신을 사탄에 내어 주고 공동체에서 헛된 명예를 추구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서 경각심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고 교회의 순결은 계속해서 유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이와 내친김에 삽비라까지 죽여 버릴려고 마치 심문하듯이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이렇게 말했다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베드로의 말은 원문 상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베드로는 마치 정답을 가르쳐 주듯이 “이 돈이 땅판 돈의 전부가 아니지않니 그렇지(아니라고 말해)?”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질문의형식으로 삽비라에게 대답해야 할 말을 가르쳐 준 겁니다.

아나니아는 어쩔 수 없이 사탄에게 넘어 갔지만 삽비라는 결코 죽지 않도록 베드로는 정답을 미리 말함으로 삽비라가 눈치채고 참말을 하도록 유도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서로 모의를 했습니다. 아나니아만 나쁜 마음을 먹고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려고 둘이 서로 공모한 것입니다. 그깟 칭찬이 뭐라고 사도들과 사람들의 칭찬이 뭐라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거짓을 말한 겁니다. 삽비라는 베드로의 회개의 기회를 촉구하는 대답에 거짓으로 답한 겁니다. 대답에 대답했다니까 웃기지요? 히브리어에 그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크게 두려워했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말로도 적을 수 있습니다. ‘아이고 나는 아예 헌금자체를 말아야 겠다. 괜히 헌금하다가 부정 타서 죽을라!’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분이며 그분 앞에서는 항상 정직해야 하고 전심을 다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런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목숨이 위험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에야 돈이 없어서 문제지 이 헌금이 전부냐 일부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건 헌금하는 이가 알아서 할 문제지 교회에서 추궁할 일은 아니지요. 그리고 요즘 이기심과 욕심이 팽배한 요즘 서로 돈을 내고 물건을 서로 나누고 구제하지 못해서 안달하고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교회도 이제는 세속화되었습니다. 목사도 돈에 따라 생각도 바뀌고 행동도 바뀝니다. 장로요 권사로 목에 힘은 줄려고 해도 봉사하는 일은 잘 없습니다. 어쩌다보니 돈을 내고 성직을 사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는 순수하지 않고 타락했으며 성령의 역사가 없어진 곳에는 사탄의 시험만이 판을 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옛날의 그 순수함이 부럽습니다. 로마의 핍박과 유대인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뻗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옛날 금식기도원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놓아 울고 부르짖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광경은 정말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입니다. 먹기도 하고 입기도 해야 하며 살 집도 필요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돈이 필요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생활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돈 주심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그러니 그 돈을 내어서 형제에게 주고 구제하고 하는 일은 보통 정신으로는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네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제일로 주셨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그게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 즉 네 형제를 사랑하라는 그 한마디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도 옛 기풍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풍이 계속되면 좋겠고 우리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항상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답니다. 다 마음을 같이한다는 말, 그래서 한곳에 모였다는 말을 가만히 다시 돌이켜보면 그 당시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신앙을 위해 목숨도 내어 놓고 덤빈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교회를 빙자한 고급 사교클럽활동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교회는 우리의 중심이 될 수 있지만 클럽은 우리의 취미생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하고 있습니까?

 

그 당시에 교회는 미증유의 핍박과 박해에 직면했고 그래서 성령의 더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도 성령이 역사한 결과 일어난 현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사도들의 기적과 사람들의 방언함, 그리고 기쁨과 찬미 그리고 모임, 그리고 자발적인 구제와 공동체성은 우리가 성령 받고 난 후에 나오는 결과이며 이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온 모습입니다.

 

이천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오늘날 오히려 우리의 신앙은 퇴보했고 우리는 공동체 보다는 개인을 더 중시하며 평화스럽고 안정적인 신앙생활에 젖어서 신앙의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회복하고 뜨거운 신앙 열정을 회복하고 성령을 사모하는 그런 교회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렇게 되어 질 지어다. 아멘.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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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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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천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과거에 비해서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목사님의 설교를 읽다가 사랑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맘껏 줘도 아쉽지 않다는 거에요. 즉 이 말은, 옛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사랑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감격했으며, 이 세상의 것들을 단지 초개 - 지푸라기로 여길 수 있었다는 거에요.

 

그러면 고도의 자본주의가 발달한 지금은 벌써 돈에 의해서 사람이 사로잡히기 쉽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가난하게 고생하면서 살기가 싫다는 마음도 중요하게 작용하겠지요. 그러나 궁핍함이라는 것은 우리를 삶의 진상을 보게 해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삶의 초점도 옆길로 흐르지 않을테지요. 다시 말해,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남을 도우면서 함께 살아가는 진정성 있는 삶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이것이 삶의 정수임을 깨닫게 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은 목사님이 노트북을 선물해주셔서, 또 좋은 키보드를 선물해주셔서 잘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아끼며 사랑하는 삶. 그것이 운명공동체의 출발이며, 함께 행복해지는 순간입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힘내어 사랑합시다. / 2017.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