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칠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창세기29:11-3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9. 20. 04:15

 

칠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창세기29:11-30)

 

이제 추석이 이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추석하면 고향, 부모 형제 , 그리고 친척과 어릴 적의 친구 이런 식으로 아련한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제생각에는 작년에는 이맘때면 벌써 추석이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좀 늦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상일 것도 같습니다. 너무 더울 때 추석이 되니까 좀 이상할뿐더러 음식도 잘 상해서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특히 추석을 전후해서 10일간의 휴가가 주어진답니다.

 

있는 사람에게는 좋겠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힘들겠고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심적으로라도 여유로움이 느껴지기는 하지 싶습니다.
지난 여름은 엄청나게 더웠지만 이제 찬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하니까 가는 여름이 아쉽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결국 적당한 아쉬움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입니다.

 

오늘 우리가 볼 본문은 야곱이 외갓집에 가서 외사촌들과 결혼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하고는 맞지 않지만 이스라엘에는 이런 풍속이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야곱이 결혼하러 하란에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야곱과 라반의 관계에서 인생의 세태를 그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간사함과 이기적인 속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옛기록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요즘 시골인심이 옛날 같지 않다고 말이 많은 모양이지만 아득한 고대시절에도 인심은 좋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다만 우리네 추억이 시대를 거칠수록 아름답게 미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면 나름 추억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이 군대하면 치를 떨지만 먼 훗날 군대 얘기는 남자들의 단골메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세월이 흘러서 추억이란 것에 아쉬움이니 미련이니 향수 같은게 더해지면 그래도 할만 했던 것이 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되고 그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남에게는 박하고 자기에는 관대하고 그랬지 않나 싶습니다.

 

자 잘 보십시오.
10절에 야곱이 한달 간의 여행 끝에 동방 땅에 당도해서 라헬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동방 땅이라고 했지 아직 하란에 당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양치는 목자들이 모여서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우물이 있는 이곳에서 역시 양떼를 몰고 와서 물을 먹이려고 하는 라헬을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마을 근처에서 가축에게 풀을 뜯기지 못합니다. 마을근처의 푸른 것이라곤 사람이 먹을 곡식이나 더위를 식혀줄 나무들 뿐 입니다. 이걸 가축이 뜯어먹도록 둔다면 마을은 반드시 황폐화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양떼들을 모아 나가서 풀을 뜯기는 겁니다.

 

라헬을 만나서 야곱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라헬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물 어귀에 있는 돌을 옮기는 것은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물이 귀했기 때문에 한사람이 물을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러명이 달라붙어야 우물 아귀를 막은 돌을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돌이 무거웠습니다. 보통은 장정 서넛이 달려 들어야 옮길 수 있을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야곱은 혼자서 바로 옮겨버립니다. 힘도 세지요?

 

그리고는 여기 11절에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처음 사촌을 만난 야곱은 순수하게 족친을 만난 기쁨에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었답니다. 그냥 운게 아닙니다. 대성통곡이라고 해야 합니까? 기쁨에 찬 눈물을 흘린 겁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무려 800km, 우리 식으로는 이천리에 해당합니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가 아마 이천리겠지요. 신의주에서 회령까지 해서 총 삼천리라고 합니다. 삼천리 화려강산 할 때의 그 삼천리가 그렇게 나온 겁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길이지만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이 험하고 강도와 맹수 떼들로 위험한 길입니다. 사막의 일기도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낮에는 무더위를 이기고 밤에는 추위를 이겨야 됩니다. 물을 구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말이나 낙타를 탄 것이 아니라 걸어서 외갓집에 간 겁니다. 그렇게나 고생을 하고 사막을 넘어서 북쪽 하란부근에 당도했기 때문에 사촌을 만난 기쁨에 소리 내어 운 겁니다.

 

아마 그리워하던 친족을 만나서 그랬던게 아니라 자기의 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감에서 울었지 않나 싶습니다만. 라반의 동네사람을 만났으니까 이제 하란이 지척인 모양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안고 울며 입 맞추고는 자기가 라헬의 아버지 라반의 조카이며 리브가의 아들임을 알렸습니다. 리브가가 가나안으로 시집을 간 후에 처음으로 리브가의 아들이 외갓집에 온 겁니다. 이제껏 야곱은 단 한번도 하란에 간 적이 없습니다. 그 어머니 리브가도 마찬가지로 하란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무려 97년간이랍니다. 세월이 참 깁니다. 그렇게 보면 라반은 이미 나이가 백세도 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라반의 입장에서도 사막을 건너 남쪽의 부자 친척에게 시집간 여동생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요즘처럼 전화를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닙니다. 우편제도가 있어서 글월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시절도 아닙니다. 편지왕래를 하려고 하면 사람을 시켜서 직접 편지를 전해야 되는 시절입니다. 당연히 서로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야곱이 하란 근방으로 왔고 사촌을 만났고 그래서 너무 기뻐서 입 맞추고 울었답니다. 여기서 남녀가 입 맞추었다고 해서 뭔가 굉장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반가운 인사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이 인사가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막을 건너와서 처음 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라헬과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사실 야곱이 라헬을 만났기 때문에 야곱의 운명이 비참해 집니다. 라헬을 얻기위해 무려 14년간을 삯을 받지 못하고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라헬이 낳은 요셉 때문에 엄청나게 속을 끓였지요. 게다가 라헬은 일찍 죽었습니다. 가깝게는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훔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야곱 일가의 목숨이 장인의 손에서 위험해질 뻔 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물을 길러 오는 라헬을 보고 야곱은 라헬과만 있으려고 목자들에게 빨리 물을 먹이고 다시 풀을 뜯기우라고 말하는 모습이 나오쟎습니까?
남이 노는 꼴을 못보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단 둘이 있고 싶은, 방해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그들 목자들 중에 라헬에게 찝쩍대는 이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예쁘다는 둥 말을 걸어야 겠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심퉁이 난 야곱이 빨리 일하러가라고 말한 건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면서 일에는 철저하고 성실했고 사랑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순진한 이였다고 봅니다.

 

참고로 라헬을 성경은 아리따운 여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요즘 기준의 미인은 아닙니다. 옛날 미인은 퉁퉁하고 복스럽게 생긴 여자, 좀 쉽게 말하면 힘도 쓰고 애도 잘낳게 생긴 그런 여자를 말합니다. 가녀린 지금의 서구형 미인을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러니까 ‘우람한’ 라헬이 양을 치고 있습니다.

 

자, 처음 만남에서 야곱은 라헬과 입 맞추고 울었습니다.
야곱뿐만 아닙니다. 라헬이나 라반의 반응도 다르지 않습니다. 12절에 보면 얼마나 야곱을 만난게 기쁜 소식이었는지 라헬은 달려가서 그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렸습니다.

 

13절에 보면 라반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야곱을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항상 상상하는 친척간의 그리운 상봉입니다. 우리네 풍속하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데서나 입 맞추지는 않습니다만 서로 극진히 반기고 울고 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리고는 안부를 서로 묻지요?

 

잘 보세요. 걸어서가 아니라 달려와서, 그 소식을 달려가서 전하고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서 안고 울고. 참 가슴 흐뭇한 광경입니다. 더구나 라헬이 있는 곳은 하란이 아닙니다. 부근에 있는 사막 가운데 있는 초지의 우물근처입니다. 목자들이 양떼를 몰고 와서 물을 먹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마을까지는 제법 먼 거리입니다. 더구나 사막에서 달음박질한다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라헬은 얼마나 기뻤던지, 아니면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했던지 아버지 라반에게도 뛰어가서 이 소식을 알린 겁니다.

 

라반도 그 소식을 딸에게서 듣고서는 달려가서 야곱을 만납니다. 라반은 젊은이가 아닙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만나려고 뛰어간 겁니다. 왜냐면 라반은 리브가가 시집을 간지 무려 97년 만에 조카를 만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리브가 본인도 아니고 생전 처음 보는 조카이기는 하지만 여동생의 소식도 알고 싶고 그립기도 하고 또 조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무려 백년 만에 듣는 소식이기 때문에 사막을 가로질러 뛰어 오는게 이해가 됩니다.

 

재미있는게 라반의 성품을 알 수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 보면 라반도 역시 야곱을 안고 입맞추고 있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야곱의 몸에 혹시라도 보석을 숨겨서 가져오지 않았을까 해서 이를 찾기 위해서 그랬답니다. 너무 심한 비약이지요?

 

라반은 이전에 부자 친척에게서 여동생을 데려오려고 한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많은 금은보화를 가져온 것을 생각하고 이번에도 그럴거로 생각했다는 거지요. 사람을 너무 심하게 악한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이게 유대 랍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랍비들의 관점에서 즉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라반은 정말로 악당이었다는 거지요. 제가 볼 때는 야곱도 그에 못지않은 악당인데도 유대인들은 자기네 조상이니까 그렇게 나쁘게는 보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런 두 사람도 이천리길을 건너서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게 순수하게 서로 안고 입 맞추고 울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석이야기는 그냥 유대랍비들의 삐딱한 시선으로 본 말이고 저는 그렇게는 생각지 않습니다. 천하의 라반도 처음 야곱을 만나서는 모든 것을 제켜두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안고 울었습니다.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악당들에게도 순정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제가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이 있습니다. 달려가고 달려오고 하는 일이 너무 기뻐서 너무 엄청난 일이라서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은 때가 차기 까지는 지극히 잠잠한 듯 보이지만 물밑에선 이미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한달간의 여행길에서 하나님은 처음 3일째의 밤에 야곱에게 나타나신 외에는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별 다른 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때가 차기까지 오래 참으시지만 일단 때가 차면 급속도로 일을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소망중에 하나님의 나를 위한 역사를 기다립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간밤에 하나님을 꿈꾸고 뭔가 좋은 일이 일어 날듯한 마음으로 길을 출발했지만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을 도중에 만난건 없습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관한 기사도 없습니다. 그냥 길을 가다가 동방 땅에 이르렀다는 말은 야곱에게 특별한 어려움도 특별한 사건도 없이 그냥 그런 여행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길을 가는 도중에 야곱에게 뭔가 특별한 일은 없었던듯합니다. 그러니까 기록이 없는 겁니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통의 경우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관해서 특별히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결코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곁에 서셔서 우리가 제대로 길을 가게 하려고 이리저리 간섭하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장애를 제거하시고 음모를 분쇄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우리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달 동안 길을 갈 때 너무 잠잠했고 너무 지루했다면 이제 때가 차서 동방 땅에 당도하고부터 하나님의 순적하게 만나게 하시는 역사가 마구 마구 급박하게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까? 절대로 답답해 하거나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시고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더 좋은 방법으로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단지 때가 차서 그것이 가장 좋은 상태로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 다시 야곱을 따라갑니다.
14절과 15절은 정말 극적입니다.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제가 그래서 한탄한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한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니 라반이 뭐라고 말합니까?

 

15절에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이 말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외삼촌이 조카를 챙겨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정말 이 세상을 제대로 살기 어려운 분입니다. 이 말은 라반이 야곱에게 이제는 더 이상 공짜로 내 집에서 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무위도식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삼촌과 조카가 아니라 사장과 직원, 주인과 일꾼의 관계로 대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품삯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원문으로는 ‘품삯’이란 말에는 ‘고용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야곱에게 고용을 제의한 라반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좋게 해석하면 야곱의 힘도 세고 또 근면한 것을 라반이 주목했다는 말입니다. 한달간 지켜본 결과 야곱이 상당히 성실했거나 아니면 소위 말하는 일머리가 트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7절을 보시면 야곱이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꼴을 뜯게 하라”

 

우리말로는 잘 못느낄 수 있는데 원문상으로 보면 세 번의 명령형이 사용되었습니다. 물을 먹이라, 가라, 뜯게 하라

이 말은 결국 야곱이 상당히 단호하게 그들에게 명령했다는 겁니다. 사실 야곱은 목자들에게 빨리 물을 먹이고 양떼들을 몰고 가서 다시 풀을 뜯게 하라고 명령할 근거가 없습니다. 야곱이 목자들의 상사도 아니고 이 양떼가 자기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자기에게 호의를 보인 목자들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 것은 야곱이 보기에도 이들이 너무 심하게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남의 양떼를 치는 품삯을 받는 목자에 불과하지만 일하는 이로서의 자세가 아니라고 느꼈다는 거지요.

 

이로 미루어보아 야곱이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인건 맞지만 상당히 성실한 사람이었음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일을 시작하면 내일 네일을 가리지 않고 아주 성실하고 철저하게 하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게다가 힘도 세고. 사장의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직원인 셈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라반의 눈에 뜨인 모양입니다. 어차피 야곱이 무일푼으로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남에게 고용되는 것 보다는 내가 고용해서 야곱의 성실함을 이용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물론 라반은 야곱을 철저히 이용합니다. 그래서 품삯도 열 번이나 바꿉니다. 항상 야곱에게 불리하고 라반에게 유리한 식으로 바꿨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중에는 야곱은 라반의 재산을 기반으로 부자가 되었고 야반도주를 하다가 군대를 이끌고 뒤쫓아 온 장인에게 잡히고 뭐 그런 식의 전개가 일어납니다. 서로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마치 생존본능만이 있는 짐승같습니다.

 

굉장하지요? 그렇게 서로 울고 혈육이니 뭐니 하면서 난리를 치다가 이제 겨우 한달 공짜밥을 먹었다고 그게 싫어서 너도 이제 무위도식하지 말고 일하라는 겁니다. 뭐 일하고 삯을 주는건 자연스러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빠릅니다. 요즘에야 인심이 메말라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야곱이 먼저 라반에게 제의했다면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라반이 야곱에게 먼저 제의를 한 겁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뭔가 라반의 면모가 이때부터 드러납니다. 결국 야곱은 20년후에 장인의 딸들과 장인의 양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고 추격전이 벌어지는 것을 압니다.

 

정말 야곱의 일생은 이렇게 굉장합니다. 역동적입니다. 그가 일생을 돌이켜 보면서 자기의 삶이 정말 험난한 삶이었음을 고백하는게 그럴만 합니다.

좋은게 좋다고 얼마든지 좋게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사람이 그리운 고대에서 손 대접하기를 천사 대접하듯 하는 풍습이 있는 지역에서 게다가 가난한 사람도 아닌 거부인 라반의 입장에서 조카 한명이 먹어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라반에 대해서 더 나쁘게 말한다면 딸까지도 자기의 경제적 이익을위해서 이용하는 아주 지독한 사람?  정말이지 라반은 굉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게 라반의 품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야곱은 죄를 짓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그 얼굴을 피해 도망한 상황입니다.

 

그가 오는 도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결코 하나님에게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거나 용서를 구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그가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인 것은 차치하고 그가 잘못했을 때 우리 하나님은 끝까지 그 죄를 묻는 겁니다. 물론 회개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벌이 감해 지겠지요. 그러나 그가 그 죄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고 모른척 하고 나가면 우리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에 그가 회개하고 깨끗해지도록 자꾸 감독하시고 건드리시는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죄인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20년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을 만났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만 생각하고 악착같이 살아나간 것 뿐입니다. 분명 벧엘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항상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자기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가 비록 죄인들의 모임인 것은 맞지만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곳이지 끝까지 죄인으로 남아 있는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의 행로를 지켜주시고 그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회개는 별개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라고 해서 가난하지도 않고 어려움도 없고 병도 안걸리고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 듯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의 일생에 역사하셔서 그로 하여금 궁극적으로는 이기게 하시고 그를 구원하십니다. 그를 절대 평안의 상태로 이끄십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일생에 어려움은 많았지만 근본적으로 야곱의 목숨은 건졌고 그의 재산은 건졌고 잃어버린 아들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그 정도면 하나님이 정말 잘해주신 겁니다. 다만 하나님은 야곱이 자신의 죄를 진실로 뉘우치기를 원하셔서 그의 인생길 곳곳에서 깨닫게 하려고 몇가지 장치를 하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야곱이 나오는 본문을 샅샅이 훑어도 그 어디에도 야곱이 자신의 죄를 뉘운친다는 말은 없습니다. 단지 야곱은 자기가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정의니 선이니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기꾼이자 죄인 야곱에게 하나님이 평안하게 생업에서 형통하도록 하신다면 그게 오히려 더 불공평한 처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비웃을 수 만은 없는게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우리 자신을 살피며 그런 모습이 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야곱에게 뭔가 불편하게 함으로써 야곱에게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야곱은 그럴 생각이 꿈에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에 대한 라반의 홀대는 계속됩니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은근한 훈계는 계속됩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답니다. 순정파는 아니지만 처음으로 만난 여인이 바로 라헬입니다. 그래서 야곱에게는 라헬이 깊숙이 각인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야곱은 삼촌의 말에 이렇게 답합니다.

 

“작은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섬기리이다”

옛날 이 지역에는 여자에게 신랑될 사람이 지참금을 지불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참금을 줄 수 없는 야곱의 입장에서 자기의 삯으로 신부집에 줄 지참금을 충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도 야곱은 칠년간 무보수로 일해야 합니다.

 

머슴도 세경이 있는데 무임금으로 칠년을 일하니까 야곱은 지금 일꾼이라기보다는 조건부 노예? 여하튼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이 칠년간을 며칠같이 여겼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라헬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여인입니다.

 

이제 날짜가 지나서 기한이 찼고 야곱이 장가를 갈 때가 되었습니다. 라반이 야곱의 요청을 받아 들여서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원했던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들여보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밤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야곱은 아마 술이 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레아를 라헬로 착각하고는 합방을 한 겁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사랑했던 라헬이 아니라 레아입니다. 화가 난 야곱은 외삼촌에게 따집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여러분 좀 웃기는 게 야곱이란 이름은 거짓말쟁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쟁이 야곱이 남에게 속아 넘어 갑니다. 그리고는 왜 속였느냐고 자꾸 따집니다. 본인들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제삼자인 우리가 볼 때는 코메디입니다.

 

야곱은 지금 외삼촌이자 장인에게 사기를 당한 겁니다. 속은 거지요. 그러나 야곱이 정작 스스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 사기를 치고 하란으로 도망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나 봅니다. 그는 스스로의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고 외삼촌이 자기를 속인 것에만 화를 냅니다. 장인, 처 아버지.

 

야곱은 고향에서 친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와서 처아버지 장인에게 속습니다. ‘남잡이가 제잡이’라고 보응이 놀랍습니다. 아마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었을 걸로 봅니다. ‘네가 속아 보니까 어때? 너무 힘들고 괴롭고 특히나 가까운 이에게 배신을 당하니까 너무 속상하지? 네 아버지도 네 형도 그랬을거야. 이제 알겠니?’

 

야곱이 화가 나서 따졌지만 정작 장인이자 외삼촌 라반의 대응은 놀랄만큼 뻔뻔스럽습니다.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여기서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면 진작 그걸 알려주고 동생 라헬을 먼저 주는 것은 안된다고 했어야지요. 그때는 가만있다가 막상 결혼식이 끝나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야곱을 등쳐 먹겠다는 소리밖에 더됩니까?

 

결국 야곱은 동생 라헬을 얻기 위해서 또 칠년을 무료로 봉사하기로 했습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정작 어둠 때문에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해서 눈을 뜨고서도 속아 넘어 갔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눈뜬 봉사가 된 것입니다. 소경? 맹인? 그리고 억지로 다시 칠년을 무임금으로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는 7년이 몇일같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위한 무료 노동은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속고 속이는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뛰는 뭐시기 위에 나는 뭐시기가 있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신앙 안에서 사는 이삭의 집안에서 아직 사기에 단련이 덜 된 에서를 훌륭하게 속여 넘겼지만 세상이 좋아서 세상에 남은 불신 가정 라반의 집에서 오랜 세월 거짓말과 사기로 단련된 이들을 이기지는 못한 것입니다.

 

눈뜨고 사기를 당한 야곱이나 눈감고 사기를 당한 이삭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야곱에게는 자기의 잘못에 대한 회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당한 피해에만 격분할 뿐 남에게 준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둔감해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기야 우리네 모습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야곱은 진정한 신앙가의 족장으로 거듭나기는 멀었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실 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귀에다 대고 네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이것은 잘못했으니 고쳐라 이렇게 하시면 우리가 알아듣겠는데 그는 우리에게 뭔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분이 찝찝하다? 약간 남에게 해를 끼쳤다면 마음이 찝찝합니다. 양심이란게 있다는 증거지요? 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성령께서 내 속에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자꾸 아까 일이 생각나면서 뭔가 이 상황을 바꾸고 싶습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던 그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면 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피해를 보상해 주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개운해 지지요? 이것 역시 성령께서 내 마음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에 의해서 유기된 자라면 양심이 화인 맞아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전혀 마음에 거리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일을 하고 마음에 거리낀다는 것이 아직 우리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징조로 자연 사물로도 그는 무엇으로도 나에게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꿈으로도 계시하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뭣 때문 인고 하니 바로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아주 나중에 일어날 일이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의 옷에 염소의 피를 묻혀서 야곱을 속입니다. 뭐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야곱이 바로 염소를 잡아서 사냥한 고기라고 속이고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축복기도를 받았지 않습니까? 염소로 속인 자는 염소로 속는 거지요.

 

일생을 두고 속인걸 회개하지 않는 야곱도 정말이지 징한 사람이고 우리 하나님도 역시 끈질기게 야곱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뭐라고 합니까?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기도하지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위기를 보시고 지키시고 보호 하시는건 좋은데 그 눈동자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도 역시 지켜보시고 가슴아파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양이 제대로 길을 가지 않으면 목자는 막대기로 양을 찌릅니다. 그러니까 목자 지팡이의 한쪽 끝에 날카로운 쇠붙이를 달아서 그걸로 길을 벗어나는 순간에 찔러 버립니다. 그러면 아파서 양이 다시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양이 너무 멀리 벗어났다면 목자는 그 양이 가는 앞길에 물맷돌을 던져서 양이 놀라서 다시 돌아 오도록 합니다. 우리네 인생길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와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생을 통하여 끊임없이 환난과 어려움을 주셨는데 그것은 그가 처음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약 20년 정도를 살았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양과 소떼가 심히 많아지고 아내와 자식도 많아 졌고 그래서 거부가 되었지만 인생의 고비고비 마다 야곱에게는 어려움이 있었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네 성도의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뭔가 조금 편해지려고 하면 또 어려움이 생기고 그게 해결되면 조금 있다가 다시 일이 생깁니다. 파도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밀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가 약간 뜸한 기간이 길어지면 그 다음 파도는 이전보다 훨씬 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항상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인생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바랄 때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비쳐질지를 한번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도 변하고 사랑도 식어 질 수 있습니다. 처음엔 좋게 시작했다가도 나중이 안좋게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인생이 아니니 결코 변개치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변개치 않는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소원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있지만 항상 하나님과 한몸처럼 붙어 있으려고 하면 우리네 죄를 회개하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고난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의 날개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고난이 지나가고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슬슬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졌습니다. 추석도 앞두고 있고 또한 하늘은 넓고 공활합니다. 그 대자연을 만드시고 결실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이모양 저모양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하면 더 감사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우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로 하여금 평안히 하나님 앞으로 갈 때까지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내 눈으로 내 자녀와 내 손자들이 복을 받는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육체적인 걱정, 정신적인 걱정, 경제적인 걱정에서 해방되어 절대적인 평안의 상태인 솰롬의 상태에 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인생길을 보면서 야곱과 라반의 인생사를 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그렇게나 고군분투할 때 우리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가 가나안으로 나오자 우리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승리케 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번 한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일주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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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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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야곱이 7년의 세월을 사기당한 이야기네요. 어쩌면 마음의 큰 상처들은 가까운 사람, 믿었던 사람에게 겪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잘못을 무작정 덮거나 잊지 않고, 회개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고난이 지나간다는 말씀에 힘과 위로를 얻습니다.

 

저 역시 잘못한 것들이 참 많았던 인생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실망을 안겨다 주었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조만간 20년이 다 되어가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입니다. 과한 욕심들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탐욕은 인간다움을 집어삼킨다는 것을 늦게 배웠습니다. 겸허하게, 즐겁게,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오, 주님 현실에 절망하지 않게 부디 도와주세요. / 2017.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