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순례자의 꿈(신정판,창세기28:1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8. 1. 25. 02:06

 

순례자의 꿈(신정판) (창세기28:10-)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이생망’이란 말이 유행이랍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 그런데 인간의 생은 한번뿐이 없습니다. 이번 생이 망했다고 해서 다음 생에서는 잘해보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번만 이 지상에서 순례길을 걷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되지 불가에서 말하듯이 환생이 있지 않습니다. 회귀가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한걸음을 내딛는다면 결코 인생이라는 순례길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생망이 되면 인생길은 그걸로 끝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바라며 믿음을 가지고 소망 중에 천성을 향하여 걸어가는 겁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은 우리의 인생여정의 종착지에 이르기위한 과정입니다. 인생의 종착지가 어디입니까? 무덤입니까? 아니요 인생의 종착지는 하나님 앞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때로는 혼자 걷고 때로는 둘이 걷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명이 함께 걷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증오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쉬워하고 후회하며 그리워합니다. 인생이 그렇게 고독하고 외로운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종착지에 도착하면 우리는 하나님앞에 홀로 서게 됩니다. 백년의 삶을 꿈결같이 보내고 어느듯 정신을 차려보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를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행을 다니지 않고 항상 다니던 길만을 다닌다 해도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가는 인생길은 하루 하루 다 다릅니다. 거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루라는 시간이 더해져서 여건이 달라지는 것이며 그 길을 걷는 우리 또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요 인생은 두 번도 아니고 단 한번 미지의 길을 걷는 여행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인생길을 걸을 수 있다면 우리네 삶이 전혀 달라질겁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길은 한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길을 실패하지 않도록 각종 조언을 책에서 선배에게서 부모에게서 구하지만 우리가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잘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인생에는 후회가 따릅니다.

 

여기 본문을 보면 한 사람이 광야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형의 분노를 피해 외갓집으로 도망을 가는 중입니다. 더구나 그의 여행길의 목적지는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하란입니다.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인생이라는 순례길과 너무 닮았습니다.

 

자기 할아버지의 땅 하란, 증조할아버지가 살다가 묻힌 곳이며 조상들이 약속의 땅을 찾아 떠났다가 가나안으로 오지 못하고 머물러 살고 있는 땅입니다. 하란은 지금의 터키 남부에 있습니다. 우르에서 유브라데스 강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면 하란이 있는데 이 하란이 사막과 녹지의 경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란에서 보면 마을 밖은 사막입니다. 모래투성이 광야.

 

야곱은 지금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심리적으로도 쫓기고 있습니다. 야곱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혹시라도 형이 따라와서 자기를 해하지 않을까? 너무 심한 비약입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행보를 보면 야곱이 얼마나 형에게 겁을 먹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지금 가고 있는 하란의 외갓집도 결코 온전히 자기의 편은 아닙니다. 형 에서 역시 외삼촌의 조카입니다. 모두 리브가의 배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가 더 사랑받고 덜 사랑 받고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불안합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뭔가 확실한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우리네 인생길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걸어갈 뿐 이 길의 끝에 성공과 보상이 기다린다는 보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이 언제 끝날지 이 길의 끝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아니 이 길을 가는 도중에 무엇을 만날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힘이 듭니다.

 

우리네 인생길 역시 따지고 보면 평탄한 길보다 어렵고 역경의 길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웃음짓게 만드는 기억보다 힘들게 하고 눈살 찌뿌리게 하며 아프게 하는 기억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세월이 더 흐른다면 그러한 것도 다 추억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길은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물론 후회도 됩니다. 그때 이렇게 했을걸.........내가 만일 다시 십년 전으로 이십년 전으로 돌아 간다면 이렇게 했을 터인데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면 인생길은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이고 돌아 갈 수도 없으며 우리가 정신을 차릴 때면 문득 목적지에 다달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미지의 길을 끝없이 계속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때까지.

 

그런데 우리 인생이라는 순례자들에게 한가지 꿈이 있다면 그건 나의 자식들은 나의 후손들은 나의 후회를 되풀이 하지 않고 바르게 가능하면 보다 쉽게 더 바라기는 성공의 지름길로 가는겁니다. 저들은 비록 모르지만 나는 이미 한번 다녀보았기 때문에 저들에게 나만의 비법을 전수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실패했던 수많은 선택들에서 얻는 교훈으로 저들을 더 똑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잔소리가 많은 겁니다. 안타깝기 때문이지요. 자기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뼈저리게 느꼈던 후회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만들려고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들은 아직 자식이 다 자랐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저들을 훈계하고 인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나 사랑하는 자식들을 두고 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순례길에서 저들을 이끌 이는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자식들의 앞길을 위해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고 비는 겁니다. 저들의 앞날을 위해서 비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비록 저들과 함께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걷지 못한다하더라도 내 아버지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듯이 나의 하나님이 아이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꿈입니다. 그래서 순례자의 꿈입니다.

 

1.한곳이 아니라 ‘그곳’이다
28:11에 보면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마치 여행길을 가다가 해가 뉘엿뉘엿해서 아무 곳에서나 길을 멈춘 것 같습니다. 하룻길을 걷고 해가 뉘엿 뉘엿 지는 때에 주위를 살펴보니 그럴듯한 장소가 보여서 자리를 편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우연히 당도한 장소!

 

그런데 원문은 조금 다릅니다. “그곳 안에 이르러 해가 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한곳’이 아니라 ‘ 그곳’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기 위해 미리 선택하신 장소가 있고 그곳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거칠 것 하나 없는 광활한 사막에도 당연히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비록 물이 귀한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를 만나서 물을 보충할 수 있고 나무가 있어서 그늘을 제공받으며 비교적 단단하고 넓은 그리고 평탄한 길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공인된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막을 가는 여행객은 길을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 길이란게 오늘날처럼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아닌다음에야 그렇게 크게 구별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초보 여행자는 무턱대고 방향만을 정하고는 걸어갑니다. 한번도 가 본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길 어딘가에 나를 만나시기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내가 그곳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당연히 주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나를 만나시기위하여 어떤 때와 장소를 예비하셨고 내가 그 장소에 당도하도록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나를 이끌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시며 혹여라도 내가 다른 길로 갈까봐 나를 강제로 강권적으로 몰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가 오늘 여기에 당도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디를 우리와의 만남의 장소로 예비하셨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곳안으로 당도하도록 주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인도하고 몰아 가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갈 때에는 중요한 때마다  갈림길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선택의 고비가 있습니다. 그러한 갈림길을 몇 번이고 만나서 선택한 결과가 오늘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입니다. 물론 우리의 선택이 후회가 되어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껄....껄”할 경우가 많습니다. ‘아, 저것을 선택했을걸...’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예언자가 아니므로 당시에는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후회하고 탄식할 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세상에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만족하며 주님 앞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늘 보좌 앞에 설 때 누구나 다 아쉬워하고 한탄하며 그리워하게 되며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런데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르고 한 그런 선택조차도 우리 주님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를 몰아간 결과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오늘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저 대학에 원서를 넣지 않고 이 대학에 넣은 것도 내가 저동네로 이사 가지 않고 여기로 이사 온 것도 내가 저 사람과 결혼하지 않고 이 사람과 결혼한 것도 모두 다 우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이 모든 선택을 통하여 가야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곳 안에 이르러’가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마구잡이로 길을 간 것 같지만 우리는 그 길의 결과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우리가 취득한 비법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전해주려고 노력합니다.

 

2.첫날밤이 아니라 삼일 째 밤에 만나다
실제로 야곱의 집이 있는 브엘세바에서 이곳 벧엘까지는 90km정도가 떨어져 있습니다. 사막의 여행자는 하루에 보통 30-40km정도를 걷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만에 벧엘까지 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는 적어도 삼일길입니다. 벧엘은 사막가운데서 나무가 자라고 수풀이 있는 비교적 쉴만한 곳입니다. 사막가운데 수풀이 있다는 말은 물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의 초지로 특히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삼일째 밤에 비로소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곳 안으로 당도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이 가장 힘들었을 첫날밤에 그를 만나 주시지 않았습니까? 야곱이 생애 처음으로 먼 길을 떠나면서 당황하고 힘들어 하고 외로워할 때 그때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의 기쁨은 더 커졌을 것인데 왜 하나님은 그때는 잠잠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첫째 날도 아니고 둘째 날도 아니고 셋째날 밤에야 비로소 그를 만나셨습니까?

 

그건 야곱이 사실 자기의 잘못 때문에 집을 떠나서 도망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서 야곱을 변화시킬 더 좋은 시기와 장소를 이미 정해두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네 인생같지 않습니까? 내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는 응답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목이 터져라 울부짖을 때 그는 잠잠하십니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분 같습니다. 너무 잠잠합니다. 그런데 가만보면 그 시절또한 이래저래 지나갔습니다. 잘 지나고 아니고를 떠나서 어떻게든 지나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먼 훗날 돌아보면 우리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 바로 그때가 가장 최선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때때로 합니다. 우리가 어려워서 기도할 때 마다 즉각 즉각 응답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즉각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계시다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렇게나 하나님을 섬기며 충성했는데 그가 나를 외면하시는구나! 하고 한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라고 해서 환난을 면하게 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환난에서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환난 중에 빠진 성도, 환난 중에 부르짖어도 응답받지 못한 성도는 ‘그가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구나!’ 아니 ‘아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외치며 쓸쓸히 세상으로 돌아섭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돌아서는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원하고 그가 나의 앞길을 막아 서시 기를 원하며 나를 위로하시고 나의 소원에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가 없다고 그로부터 돌아서다가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주께서 지금이라도 나에게 나타나시고 나를 부르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왜 그런지 우리에게 인내하게 하시고 때가 될 때까지 잠잠하십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 때’가 과연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이 삼일밤에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의 계산법으로는 삼일밤이지만 유대인들의 계산으로는 사일째의 첫 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해질 때를 기준으로 하루를 끝내고 밤부터 다음날로 계산합니다.

 

즉 야곱은 지금 삼일거리를 막 벗어나서 이제부터는 4일거리에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 차마 4일거리를 들어서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지요?

 

보통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은 해가 져도 완전히 캄캄해 질 때까지 계속해서 길을 갑니다. 한낮의 태양이 없는 지금이 오히려 길을 가기는 더 좋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야곱은 지금 마음이 허합니다. 그래서 해가 지자마자 여행길을 접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허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리에 누운 이유가 있습니다. 사막의 여행자는 아침에 출발하지 않고 해뜨기 전 새벽에 출발해서 한낮에는 그늘에서 쉬고 잠을 잡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 다시 길을 떠나서 완전히 캄캄해질 때까지 길을 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신을 지역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 신이 보통 삼일거리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각에는 여호와 하나님 역시 삼일거리까지만 영향을 미치는 신입니다.

 

이제까지는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 자기 부족의 신이 자기를 보호했지만 이제부터는 여기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길을 가기보다는 일단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 다른 신의 영역으로 접어들기 이전에 시간을 벌기위해 잠자리에 든 것입니다. 무섭기 때문에. 그 미지의 신이 과연 나를 보호해 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사일째의 하루를 시작하지 못한 겁니다.

 

자기 부족의 신, 자기 할아버지의 신, 자기 아버지의 신이었지 자기의신은 아니었기에 그는 확신하지 못하고 미지의 땅을 앞에 두고 잠자리에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내가 직접 체험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를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3.편재하신 나의 하나님으로
꿈에 본즉 사다리가 땅에 섰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분명히 야곱의 생각으로는 이곳부터는 다른 신의 영역이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랍니다. 너는 아직 모르지만 내가 바로 너희 할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 너희를 지켜온 바로 그 신이다. 그리고 여기도 분명히 나의 땅이다. 이제 이곳을 너에게 주마. 너는 ‘네가 혼자인 것 같지. 이제부터 전혀 모르는 신의 영역으로 들어갈텐데 어쩌지? ’이렇게 걱정하지만 여기도 나의 영역이야.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도저히 다른 신의 영역으로 들어 가지 못하고 허한 마음으로 자리에 누운 야곱에게 주님이 찾아 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15절에”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자기집안의 신, 여호와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야곱에게 여기뿐만 아니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나는 브엘세바에서 삼일거리만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분이 결코 나를 떠나지 않고 지키신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제 야곱은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가 직접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어떻게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는 단계에서 자기가 직접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에서 야곱의 하나님도 되는 것입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일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님도 되시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알고 보니 내가 섬기는 그 하나님에게 거리적 제한, 지리적 제한은 없습니다. 시대적 제한도 없습니다. 공간과 시간이 그를 제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야곱에게 벧엘에 나타나셨던 전능의 하나님은 오늘 이 땅에서 나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는 브엘세바의 신도 벧엘의 신도 아니고 하란의 신도 되고 우르의 신도 되고 온 세상의 신이 된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일대 사건입니다. 그 당시 아무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외에 참된 신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제외하고.

 

야곱이 잠을 깨고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탄식하고는 감사하며 서원합니다. 21절에“나로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하나님이 그냥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조건이 붙어 있지요? 뭐뭐 해주시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쓰는 수법입니다.

 

‘하나님 뭐 해주시면 제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주의 뜻대로 무엇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본문의 ‘하시오면’이란 말을 조건으로 해석하지 않고 강한 확신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를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제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었습니다. 그 잘나고 부유하며 성공한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 갈 축복기도를 빼앗을 흉계를 꾸몄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아버지와 형이 두렵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그 하나님은, 자기부족이 섬기는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고 할아버지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일거리만 다스리는 지역신이 아니라 전 세계를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나는 너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너의 하나님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산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하나님이며 온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이 지상에 어디든지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기도로 영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운명까지도 함께하신답니다. 인생길을 마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때까지 나와 함께하고 나를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즘 믿음 좋은 집안의 자녀들이 손자들이 어긋난 길로 가다가 곤란을 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회의하며 세상길로 갈까 말까 회의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서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반드시 그 곤란을 해결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한번 두 번 더 기다려야 합니다. 결코 우리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쌓인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기에 믿음의 자녀들을 보살피며 하나님의 품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십니다. 만일 벗어났다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실망하지 말고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4.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21:1에 ‘야곱이 발행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길을 간 겁니다. 그런데 이 ‘발행’은 마치 학생이 소풍을 앞두고 자다가 당일날 벌떡 일어나서 ‘아 잘잤다. 이제 한번 가볼까’하는 즐거운 기분이 드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 가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소풍만은 예외입니다. 소풍은 정말 가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런 기분으로 길을 떠나는 겁니다.

 

이제까지 야곱의 길은 너무나 지치고 고독하며 가기 싫은 길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실에 대한 낙망, 미지의 세계가 주는 공포
그러나 이제부터 야곱은 하나님이 하란에도 계시고 내가 가는 곳 어디에도 함께하시며 나를 지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즐겁고 힘차게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세상이 변했습니까? 사막이 오아시스로 변하고 그의 광야길이 수목이 우거진 숲 속 길로 변했습니까? 아니오, 아니오. 그의 여행길은 어젯밤이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에 그는 힘차고 즐겁게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한곳에서 조용하게 그냥 이대로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정해진 일상은 크게 번거롭지 않고 크게 힘들지도 않습니다. 그냥 인간의 삶 가운데서 잔잔한 일들이 이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새롭게 나아간다면 이전과 다른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일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끝난게 아닙니다. 이제부터 더 놀랍고 더 재미있고 더 신나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멋진 여행길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인생길에, 인생의 여행길에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함께 동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의 집
야곱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야곱이 잠이 깨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지요. 야곱이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는 그가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조금 살을 붙인다면 하나님의 집이 곧 ‘하늘의 문’이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집’이지요. 그래서 ‘벧 엘’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벧 엘, 하나님의 집을 보고 하늘의 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한가지를 더 생각합니다.

 

뭔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때 담이 놓여 있거나 장애물이 놓여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아뢰는 것 보다 문에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담은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는 곳이고 문은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는 곳입니다. 그러라고 있는 문이쟎아요. 우리가 어디서나 하나님께 아뢸 수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과 직통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 거대한 건물이나 거창한 조직을 생각합니다. 돌로 된 거대한 기둥들과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돔의 천정, 그리고 돌로 된 벽들. 그리고 그러한 곳에 주님이 더 영험하고 성령님이 더 많이 역사하시는 듯이 느낍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베개로 삼고 누워 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서원합니다. 그리고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돌베개를 세우고서는 교회의 기둥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지요. 자기가 어젯밤에 노숙했던 바로 그 장소가 하나님의 집이 될 거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자기 집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어때요, 우리는 야곱의 이 행위에서 결코 거대한 건물이나 장엄한 예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믿는 기도와 간구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집은 곧 하나님의 교회인 것이지요.

 

이제 말씀을 마쳐야 겠습니다. 장소와 때에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만난 그 곳,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나의 운명이 정해지는 때입니다.

 

우리네 인생길에서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만날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더디 만나신다고 해도 조금 더 인내하십시오. 분명히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그의 길을 좇은 다면 우리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직 그런 체험이 없습니까? 실망하지 말고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의 시간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므로 반드시 우리네 인생길에서 우리를 만난 주시고 힘을 주시고 갈길을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복잡하고 위험하며 불확실한 인생길에서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안전하며 가장 믿을 수 있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되신 것을 먼저 축하합니다. 우리가 이미 들어온 하나님의 품안에서 결코 벗어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우리의 힘으로 저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 뜨리고 유혹하고 낙담시키려고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가 제시한 길을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요, 마음을 굳게 먹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이제 2018년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그래서 올 년말에 그는 진정 나의 하나님이고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갈 때 때로 힘들어 헉헉대고 외로워 눈물짓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심을 믿고

 

반드시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때까지 그가 나를 지키실 것을 믿고
이제까지의 삶을 뒤로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놀라운 여행길을 시작하는 성도
하나님과 즐겁게 동행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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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눈을 들어서 하나님께 방향을 맞추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약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얼마나 쉬운지 몰라요. 때로운 가식의 껍데기와 가면을 쓰고 잘난 척 착실한 척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모습, 완벽한 나 자신을 너무 바라지 않아도 되요. 그냥 우리는 괜찮은 하루를 보내면 되는 거에요. 대담하게 살아가고, 정직한 길로 걸어가면 되는 거에요. 사탄의 별별 방법이 우리를 흔들 때, 이제는 "아니, 나는 더 성도답게 살려고 계속 노력할꺼야!" 라고 외쳐보세요.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그거면 됩니다. / 2018.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