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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로마서13: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8. 11. 30. 11:45

 

위에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로마서13:1-)

 

오늘 우리는 논쟁거리가 다분한 그러면서도 유명한 구절을 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이 말이 왜 유명하느냐 하면 지금 세대는 잘 모를 수 있는데 이전에 한창 독재시절에 독재를 반대하는 성도들에게 정부 당국자와 어용목사들이 던진 물음 때문입니다. “봐라, 로마서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는데 너희는 왜 성경말씀을 어기느냐?” 이렇게 반문하면서 데모하거나 반정부 운동을 벌이는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가지고 압박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 기독교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부를 반대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위에 있는 권세를 반대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왕을 반대하고 책망하고 저주한 일, 나라의 멸망을 예언한 일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물론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신약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까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오늘날 신약과 구약을 동시에 지켜야 하는 우리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를 체포하러 온 왕의 군대를 백명이나 불사르게 한 엘리야와 그의 제자면서 왕을 비판한 엘리사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윗의 불륜과 패악을 지적한 나단 선지자는 또 어떻습니까? 왕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한 느헤미야와 이사야는 또 어떻습니까?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본문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본문을 제대로 살펴보고 나면 우리는 이 본문에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포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앞서의 질문에 대해서 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한번 살펴봅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
본문은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권세에 복종해야 한답니다. 그래요, 하나남이 허락지 않으신 권세는 당연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먼저 ‘각 사람’이란 말을 살펴봅시다. 헬라어로 사람이란 말은 원래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프쉬케’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영혼’ 또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각 사람’이 아니라 ‘각 영혼’은 또는 ‘각 마음’은 이란 뜻입니다. 왜 성경은 사람이란 단어대신에 영혼이란 단어를 넣어 놓았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영혼까지도 철저하게 복종하란 뜻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권세에 대해서 철저하게 영혼까지 복종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공포나 무력이나 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는 있습니다. 또 일시적으로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는 있지만 한결같이 철저하게 마음으로부터 복종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노예근성을 가졌다고 밖에 할 수 없거나 아주 특이한 경우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다음 ‘복종’이란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복종이란 말을 봅시다. 이 말은 이전 성경번역에서는 ‘굴복’이라고 쓰였는데 원뜻은 자발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외압에 의한 복종이나 복종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철저하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불의한 재판관에게도 불의한 권세에도 악을 저지르고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독재자에게도 복종해야 합니까? 그것도 마음으로부터 철저하게 복종해야 합니까? 글쎄요. 점점 더 이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자, 여기 ‘위에 있는 권세’라는 말에서 약간의 단서가 나옵니다. 위에 있는 권세는 권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를 가진 정부기구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정당하게 권력을 취득한 정부기구와 그 기구를 담당하여 권세를 행하는 권세자와는 일단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구별하는 것이 여기서는 전혀 무의미하게 보입니다. 가령 로마황제라는 권세와 네로 황제라는 권세자를 구별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말에 우리는 정말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신 권세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불의한 권세자도 독재자도 폭군도 만드신 걸까요?

 

자 2절에 보면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처하리라”

 

이건 뭐 꼼짝없이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권세를 거스르는 것과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을 동격으로 놓고 이를 거스르는 자는 심판을 자취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렇게까지 취급되는 권세를 그가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악인이라고 해서 불복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 말대로 하면 구약의 엘리야는 왜 아합왕을 책망하고 그를 거부하고 벌했지요? 그를 잡으러 온 오십인대를 두 번이나 불살라 버리는 일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합법적인 권세에 의해서 내려진 명령대로 파병된 군대를 죽이라고 하는 기도가 어떻게 해서 응답될 수 있었지요? 엘리야가 마법으로 불을 던져서 군대를 사른게 아닙니다. 하늘에 기도했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사르 겁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은 그가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지 않았음에도 탓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한 거역이 아닙니까? 그런 거역을 우리 하나님은 자기에 대한 거역으로 본다고 했는데 아닙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판을 자취한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심판’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심판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심판을 우리는 그냥 심판으로 받아들입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일 수도 있고 인간기구의 재판장이 하는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판이 당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면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세상의 권세를 거스르면 인간기구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는 절대로 위에 있는 인간의 권세를 무시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니까 우리 성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권세에 순종하고 거역하거나 저항해서는 안 된다면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떻습니까? 놀랍게도 우리는 여기에도 우리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위에 있는 권세를 순종하는 걸로 하고 본문을 계속해서 따라가 봅시다.

 

이 본문을 한번 보시면 우리가 권세에 순종해야 하는 또 다른 합리적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 위에 있는 권세는 선한 일에 대하여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만 두려움이 되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는 우리 성도는 권세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면 오히려 권세자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거지요. 그러니 선을 행하는 우리 성도들은 권세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칭찬을 받을 것이므로 위에 있는 권세가 더 친근하게 여겨집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이기 때문이랍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를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지칭합니다. 하나님이 악을 행하고 악한 자를 칭찬하고 선한 자를 징치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인 지상의 권세자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권선징악을 실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의 편에 속한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권세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솔직히 지상의 권세가 모두 그렇게 양심적이고 합리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권세자들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상의 권세자들이 이기적이고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 외에 관심이 있는지 조차도 의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지상의 권세자가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서 악을 경계하고 선을 장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지상의 사역자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꾸로 하나님이 만드신 권세자가 아니라는 뜻도 되는 겁니다. 본문에 말하고 있는 ‘사역자’란 말은 ‘보조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보조하는 자’라는 뜻이므로 그가 스스로 악을 행하거나 악을 칭찬하고 장려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이처럼 본문은 우리가 지상의 권세 잡은 자에게 순종해야 됨을 말하고 있지만 또한 지상의 권세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보조자로 인식해서 권선징악을 행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사역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비판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바른 정치를 펴도록 조언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지상의 권세가 우리 하나님의 의도대로 사용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실현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나에게 선을 베푸는 자이기 때문에 내가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악을 행하면 보응하는 자이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답니다. 그가 칼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살인이니 강도니 도둑질을 할 때 처벌하려고 칼을 가진 것이라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가 칼을 가진 것은 착한 사람들을 보호하기위함이라는 겁니다.

 

사실상 우리가 세상권세에 복종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양심적으로 복종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해할 수 있는 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권세자에게서 뜨거운 맛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악을 행해서는 안되고 선을 행해야만 한다고 하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을 보고 우리가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앞장 12장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세상권세는 공명정대하고 하나님의 사역자로 선을 칭찬하고 악을 징계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당시의 로마당국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선인 성도를 핍박하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로마의 제의를 따르도록 하는 무자비한 악한 존재였을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로마당국이 실제로 선한 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로마당국에 맞서서 혹여 목숨이라도 잃을까봐 성도들을 제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것은 이 로마서를 읽는 로마당국자가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이 결코 로마에 위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제국의 충실한 신민이 될 수 있음을 납득시켜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시키려고 하는 목적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은 성도에게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 완벽한 복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만일 위에 있는 권세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적이 되어 악을 행할 때는 이를 거스릴 수 있음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는 말에서 ‘양심에 따라 복종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국가권위에 대한 복종을 양심에 따라 하게 한다면 잘못된 권위에 대한 저항도 역시 양심에 따라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내 양심상 이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악이므로 나는 도저히 이 시책에 따를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저항하는 겁니다. 그러나 너무 노골적으로 이를 밝힐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완곡하게 기술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위에 있는 권세가 나쁜 권세라면 저항해도 된다고 기술한 성경을 본다면 로마당국이 가만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국가의 권위에 대해 양심적으로 저항할 때에도 폭력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폭력과 폭력이 만나면 결국은 애꿎은 희생만이 생길 따름이고 이때 희생되는 이는 아마 가장 약한 자들 가장 가난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폭력을 제일 배제해야 할 것입니다.

 

자 이제 나오는 말씀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성직자 납세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당시 로마제국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 중에는 로마에 대한 원한으로 인해 로마에 납세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핍박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기 때문에 로마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그래서 세금을 내는 것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로마의 은화에는 황제를 행운의 여신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여신은 사실상 로마황제의 어머니를 형상화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신의 돈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진 은전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것도 그 일환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돈부터 마음에 안듭니다. 그러니 로마가 예쁘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로마를 마음으로부터 싫어하는 민족이 유대인들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나라와 민족이 강제로 로마에 병탄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침략자인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내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하는 일들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정치적으로 예속된 처지에 세금을 현실적으로 내지 않을 수 없었던 성도들에게 너희가 비록 천국시민의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로마의 신민이므로 로마에 맞서지 말고 납세를 당연히 하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더구나 신앙 양심상 로마를 반대하고 그래서 세금도 내기 싫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너희 양심 때문에라도 로마에 세금을 제대로 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세금을 낸다고 해서 결코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적은 한줄의 글에 다양한 뜻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마 당시 이 로마서를 읽었던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이 뜻을 잘 았았을 것입니다.

 

표면적인 이런 내용 속에는 마찬가지로 로마당국에 잘 보여서 성도를 보호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스며있습니다. 자발적이고 양심적인 납세를 강조하는 종교이므로 기독교는 제국에 도움이 되는 종교라는 인식을 로마당국자에게 심어 주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해서 아주 무거운 벌을 내리던 시절입니다. 왜냐면 먹고 살기 힘든 그 시절에 대다수의 백성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세금에 대한 거부는 엄격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지금처럼 세금체납을 하고서도 감옥에 가지 않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의 세율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또 세금을 면제 받는 특권층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더 세금을 내는 것이 억울하게 여겨졌고 그래서 자기들 나름으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이들에게 양심적으로 세금을 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의 권세들, 관원들은 바로 세금을 거두고 세금을 바로 쓰는 일에 몰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산을 세우고 세금을 걷고 그것을 제대로 집행하는 일. 그것을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일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제가 지금 세금을 바라보는 입장은 이렇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성직자에게 세금을 면제시켜준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소외되고 어려운 곳을 향해 많은 구제의 손길을 펴고 봉사를 하기 때문에 정부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속한 이들을 삶의 현장에서 더 잘 돕고 그리고 합법적으로 내는 세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한다는 믿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점 성직자들이 종교인이 되어갔고 또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정부의 이런 평가가 오판이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강제적으로 정부가 세금을 징수해서 자기들이 원래 정해진 대로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물론 정부의 이런 의도는 상당히 곤란한 문제를 야기시킬 겁니다. 왜냐면 대부분의 목사들이 가난해서 이들이 내는 세금보다 이들을 지원해야 되는 정부의 부담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세정의를 이룬다는 차원에서 세금을 징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부에 또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좀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교회의 자정능력을 제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입장이라 제안하는 겁니다. 먼저 성직자 개인에게 세금을 징수할 뿐만 아니라 대형교회가 보유하고 있는 재산에 대해서 그리고 헌금수입에 대해서 과세할 것을 제안합니다.

 

말이 전혀 안됩니까? 이렇게 하는 겁니다. 헌금이 얼마나 들어오든 그걸 가지고 과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헌금을 일년 동안 정당하게 사용하고 남은 돈에 세금을 집행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산세의 개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교회가 가진 부동산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보유한 교회에는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약한 교회 그러니까 면세점을 설정해서 그 이하의 교회재산에는 면세하는 그런 정책을 펴면 됩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식으로 징세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배당이나 교육관이나 선교센타같은 건물 그리고 담임목사 사택같은 건물은 면세기 때문에 각 교회들이 계속해서 남는 헌금으로 아니 그런 건물을 지으려고 일부러 헌금을 아껴서 자꾸 건축에만 몰두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정 규모이상의 예배당 건물에도 세금을 걷고 일정 규모 이상의 목사관에도 세금을 걷고 이렇게 해야 교회들이 건물을 계속해서 화려하게 짓고 사치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파트 재건축을 도시가 허가하는 것처럼 일정 규모이상의 대형교회가 재건축을 할 때에도 당연히 도시재개발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도록 법을 만드는 겁니다.

 

부산의 모 교회는 아직도 충분히 사용이 가능하고 엄청난 돈을 들여 지은 예배당을 단 한번도 만석으로 꽉 채운적도 없는데 또 새롭게 건축을 한답니다. 핑계야 여러 가지인데 제발 이렇게 살지 맙시다. 그 귀한 헌금을 정말 잘 사용할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하면 교회는 쓸데없이 은행에 빚을 내서 예배당을 건축하거나 각종 종교건물을 확장하고 땅을 넓히지 않고 들어온 헌금을 가지고 필요한 곳에 사용하고 남은 돈을 가지고는 세금으로 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구제금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예산을 아껴서 계속해서 성전건축만을 하게 되면 절대로 안됩니다. 물론 건물이 너무 낡았거나 적거나 하면 당연히 건축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쩡한 건물, 아직도 충분히 교인들을 수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 때문에 신축을 계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래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이 욕망의 비틀린 결과로 경매에 나오는 좋은 예배당이 많이 있고 이러한 사례가 부동산지에 뉴스에 소개되는데 이런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세금 정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양심 때문에라도 검소한 생활, 검소한 건물을 지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정부의 손을 빌려서라도 강제로 그렇게 하도록 강제로 검소하고 질박한 기풍을 심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는 돈에 세금을 부과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하고서도 참 부끄럽네요.

 

아니 교회 담임목사자리가 얼마나 좋으면 글쎄 자식에게 그 자리를 세습까지 시키겠습니까? 세습은 절대로 안됩니다. 기업도 세습이 어렵도록 상속세니 양도세니 해서 감시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습하다니요? 이번에 서울의 어떤 대형교회에서 편법세습을 실시했는데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지금 자정능력자체를 상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런 식의 강제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된다고 봅니다.

얼마 전에 총신대학원은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아서 강제로 입학정원을 줄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일년에 700여명 800여명까지 합격을 시켰는데 어떤 목사님이 계속해서 문교부에 투서를 넣었답니다. 이분이 처음에는 교단관계자에게 말했는데도 안되니까 정부에 넣은 겁니다.

 

그래도 명색이 대학원인데 대학도 나오지 못한 학생을 입학시켜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과연 정부에서 조사를 해보니까 대학자격이 없는 지방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연구과정으로 입학을 시켜서 대학원에 다니게 한 겁니다. 그래서 정부가 강제로 입학정원을 줄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한300여명 정도가 대학원에 다니고 지방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평생교육원에 다닌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 신학교도 쇠퇴해 버렸습니다.

 

이들이 입학정원을 줄이지 않은 이유는 결국 돈 때문입니다. 등록금이 워낙 비싸니까 이걸 받아야 학교를 운영하고 교수들 월급도 주고 하거든요. 그래서 목사들이 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너무 많다고 수십년을 이야기해도 듣지 않고 편법으로 입학정원을 막 늘린 겁니다.

 

지금은 대학원에 지원하려는 이들이 엄청나게 줄었답니다. 요 몇 년사이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총신에 들어가려면 몇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했지만 이제는 겨우 입학정원을 약간 넘기는 정도로 지원자들이 온답니다.

 

그러니까 진작 입학정원을 줄이고 했으면 아직도 신학교의 인기가 식지 않았을 텐데 몇몇의 치부를 위해서 개혁에 눈감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여하튼 교회는 욕심에 젖어서 사탄이 주는 욕망에 눈이 멀어서 개혁하지를 못하니까 정부가 강제로 손을 댄 겁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자업자득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성직자 납세에 기대가 큽니다. 왜냐면 소득이 낮은 성직자에게 근로장려금을 지급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 호화로운 목사들이 없어질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되면 이는 궁극적으로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동이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사업체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직자가 가난할 필요는 없지만 호화로운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영국 국교회의 주교들은 영국 상원의원입니다. 상원은 아무 실권이 없기는 하지만 귀족들의 국회입니다. 그러므로 귀족들과 같이 회의하다 보니까 성직자가 스스로를 귀족인양하게되는 거지요. 이렇게 성도들의 삶과 유리된 삶을 살다보니까 지금 영국국교회는 영국본토에서조차 완벽하게 몰락해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무시하고 잘될 수가 없지요.  만일 무시했는데도 잘된다면 그건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셨기에 고쳐서도 사용할 가망이 없기에 아예 관둬버리는 상태가 된다면 이야 말로 큰일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탄이 밀어 주니까 잘되는 겁니다. 사탄이 왜 밀어줍니까? 욕망이 세상풍조가 교회를 집어삼키는데 그런 교회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거지요.

 

아무래도 과세자료를 공개하게 되면 억대 연봉을 받는 목사들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목사들도 자제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종교인 납세가 자정능력이 없어진 목사들을 강제로 참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대도 가지지 말고 두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당부는 어디로 흘려듣고 비싼 외제차에 고급 빌라에 수억의 판공비에 심지어 비서까지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저를 절망시킵니다.

 

목사는 섬기는 자지 결코 중세의 귀족이 아닙니다. 교인은 부유해질 수 있어도 목사는 결코 사치해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양심적으로 목회하면 우리 주님이 일용할 양식은 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채워주십니다. 자제합시다. 욕망을 제어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일에 힘을 씁시다. 저도 오늘 이 선언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7절에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말로 본문이 끝이 납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라는 말은 돈 빌린게 있으면 빨리 갚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완수하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걸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라고 번역한 이유는 ‘줄 것’ 이라는 말이 ‘의무’라는 뜻 외에도 ‘부채’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세니 관세니 하고 쓰여 있지만 별로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유사한 단어를 두 번 사용하여 반드시 세금을 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언어 표현습관이 이렇습니다.
당시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고 기독교도들이 낸 세금으로 자기들을 핍박하는데 사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세금을 내기를 꺼려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겁니다. 세금은 반드시 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납세를 이렇게까지 강조하는데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세금을 가지고 성도를 탄압하는데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세금을 안낼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이 정부가 이민족의 정부도 아니고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정부이니까 더 잘된 겁니다.

 

단지 목사들이, 교회가 스스로 알아서 세상에 잘 분배했다면 국민들의 존경도 받고 세금도 안내도 되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아니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제 나라도, 사람들도 더 이상 교회의 자정능력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씁쓸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기독교인이 사회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충분히 이 본문에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공감하기는 어렵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악의 화신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 게다가 국가적인 우상숭배, 게다가 검투노예를 만들어서 유흥을 즐기고 이민족들을 침략하고 저들을 학살하고 .... 당시 로마가 정부로서 가진 순기능도 많았겠지만 분명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좋기보다는 나쁜 정부였습니다. 게다가 자기민족의 나라도 아니고 저들은 정복자일 뿐입니다.

 

물론 여기서 로마서의 독자들은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다고 해서 로마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마 이들 중에는 이민족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며 노예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노예는 세금은 내지 않지만 로마를 좋아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위에 권세를 존중하고 조세를 바치고 관원을 두려워하고 또 존경하고.... 솔직히 입맛이 씁니다.

 

그러나 이 본문 전체를 잘 보십시오. 바울은 본문에서 권세를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하는 보조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억누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부와 관리를 존중하고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건 다르게 말하면 그렇지 못한 정부나 관원일 때는 순종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전혀 아니라고요? 그런 말이 없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이나 바울의 이 편지도 마찬가지로 성도들을 염려하여 하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로마정부에 대해 자기들이 결코 로마를 위협하는 불순세력이 아니라 누구보다 충실한 로마의 시민이 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자라는 인식을 심어 주려고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적게 되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은 생략한 것입니다.

 

보통 바울의 언어습관을 보면 같은 뜻의 긍정과 부정을 교차하여 기술함으로 주장하는 바를 강조합니다. 이런거 기뻐하고 슬퍼하지 말라 ,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여 ...이게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똑 같습니다. 단지 어떤 주제를 강조하기위한 기교입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지 말라 악을 권장하는 정부에는 끝까지 저항하고 거역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만일 바울의 평소 언어습관을 반영한다면 이렇게 되겠지요.
5절에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6절에는 이어서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평소 바울의 언어습관대로 기술하면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바치지 않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양심에 따라서 사악한 정부에 대한 저항을 인정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적는게 성도들을 더 잘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치지 않는 것도’ 란 말이 생략된 것이 그 예입니다. 이런 예는 여기도 있습니다. 7절에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말은 평소 바울의 언어습관대로 기술하게 되면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자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존경할 자를 존경하거나 존경할 필요가 없는 자를 존경하지 않거나”이렇게 적어야 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유독 이 부분에서는 그런 식의 언어기교를 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성도들의 안전을 위해서 기독교에 로마당국이 호감을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강조적 용법에서 부정적인 말들을 생략한 것입니다. 이건 성도들의 안위와 교회의 미래가 위험에 처해질 수 있기에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바울을 비겁하다고 욕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이렇게 몰고 가신 겁니다. 사실 종교적 정열에 취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허리에 폭탄을 두르고 불구덩이로 뛰어들게 시키는 수많은 악덕 교주들이 있습니다. 또는 이맘들이 있습니다. 순교해야 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꼬셔서 자기네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 교도들을 조종하려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이 그런걸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종교적 신념은 모든 다른 신념들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광신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습니다.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근 백년간 사람들 사이에서 맹위를 떨쳤지만 결국 그들은 사라지고 다시 그 땅에 기독교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런걸 보면 결국 이 땅에 영원한 것은 교회입니다. 왜냐면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이 세운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사세부득이 저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복종해야 할 때도 있지만,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아 쫓겨다니거나 숨어 다닐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도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그런 모든 권세는 우리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왜 주셨습니까? 자기의 일을 대신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또 다르게는 성도들의 신앙을 시험하여 단련된 정금같이 순결한 성도를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또 다르게는 성도를 시험하여 참과 거짓을 가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천성을 향해 마음을 두고 있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당장 이 지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의 권세에 복종하고 그 권세가 하나님의 뜻을 대리하여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도록 힘을 더해야 합니다.

 

중세 시대에 하나님은 황제와 교황에게 각각 권세를 주셔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위치하게 한 그런 그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 이것을 주님이 세상권세 성속의 세상권세들이 서로 견제하여 하나님의 성도를 보호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지 않고 잘 세워지도록 하려는 주님의 안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세상과 교회가 서로 한 통속이 되어 하나님의 제단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힘들게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둘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또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현세에 우리에게 중세와 같은 기능을 부여하셨습니다.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정부를 이용하셨고 정부가 바로서기위해서 교회를 이용하시는 겁니다. 서로 서로 자정능력은 없지만 남을 비판하는 기능은 있으니까 그런 역할을 나누어서 결국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이 택하신 이 나라가 바로 서고 잘 나아갈 수 있도록 기능하실 걸로 믿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정부는 그래도 교회보다는 더 깨끗할 수 있습니다. 먼저 5년마다 선거가 있고 여야가 있어서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론과 시민단체가 호시탐탐 정부를 노립니다. 물론 공무원 개인은 부패하기가 쉽지만 그래도 법적인장치가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도 정신을 바짝차릴려고 합니다. 이제는 세상의 관심이 특히 국세청의 관심이 쏠릴겁니다.

 

지금 한국에는 두가지 교파가 존재합니다. 장로회 합동이니 통합이니 하는 교단이 아니라 개인구원을 강조하는 쪽과 사회구원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함께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사람이 사회를 떠나서 존재한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생활할 때 사회가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건 그 사회 속에 사는 성도를 죽이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성도가 악한 사회에 살면 당연히 그 성도가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가 사납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눈이 벌겋고 거짓과 음모가 난무하고 폭력이 판을 치는 그런 세상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거짓을 멀리하며 진실만을 가진 성도가 살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만일 그런 사회 속에 있다면 그 성도는 고난에 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구원만이 중요했다면 주님이 교회를 세웠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저는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몇몇 교권주의자들 때문에 더렵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호화생활을 영위하고 불법을 저지르는 몇몇 목사들 때문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는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권세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그런 기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의 보조자로 권선징악을 실천하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구원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이 세상도 구원되어서 우리 성도들이 더 안전한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의 후손들이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도록 두가지가 다 충족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교회에게 주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본문에서 말했듯이 위에 있는 권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위해 우리 교회가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나라가 잘되도록 기도하고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시민임과 동시에 이 땅의 국민입니다.

 

우리는 교인이며 성도인 동시에 국민입니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교회안에서 더 잘 구현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부를 통하여 교회를 정화시키려 하십니다. 자발적으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뭐 늦었지만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러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주님과 더불어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또한 타의 모범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표하는 멋진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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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11월의 마지막 날 겨우 설교를 올리게 되었네요. 저는 요즘에야 한 가지 강한 확신이 들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돌봐주신다는 거에요.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일인데,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계속 걸어가다보면 그 분께서, 참고, 또 참으시다가, 개입하실 수도 있는거에요.

 

옛날에 영화 양들의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요. 제목만 어렴풋이 기억나네요. 양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으면, 사회는 사이코패스들이 날뛰는 무법천지가 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어리석을지라도, 우리가 비록 약할지라도, 우리가 비록 겁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기를, 침묵하지 않기를 저는 응원합니다. 미친 광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돈에 미쳐서, 약에 미쳐서, 광기에 미쳐서, 인간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데요. 그런 생지옥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나요. 그것은 크리스천들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고자 먼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해 봤습니다. / 2018.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