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스타열전

#1 한국 축구의 레전드 차범근 + 원투펀치 동영상 (애정을 가득 담아)

시북(허지수) 2019. 11. 3. 00:03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손흥민과 차범근의 모습 (사진출처 : 한국일보)

 

 초안공개일 2008. 07. 08 / 사진과 동영상 업데이트 및 내용 추가 작성일 2019. 11. 03.

 

 축구이야기를 언젠가 다시 써야겠다고 항상 가슴 속에 오래도록 품어왔습니다. 바셋님, 푸에르타님, 즐라쭈리님 등 이 블로그를 소중하게 여겨주시는 주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환경이 좋아지길 더이상 바라지말고,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주 1회씩 써야겠다고 다짐한 게 최근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10년의 세월을 살아보니,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때, "간단히 쓰면 힐링 된다는 것이고... 글 쓰는게 물론 제법 고생이긴 하나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빌려 그 즐기는 고생이 있으면 (삶의) 고통까지 치유한다는 거에요"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 쓰는 글쓰기가 되겠지요. 오래 전일이긴 하나, 300명 정도를 쓰는 동안, 정말 큰 사랑, 깊은 애정, 많이 받았습니다. 축구에 쏟아부어 본다면 52주 x 10년이면 500명이 더해진다라... 그리하여 아마 20년이면 제가 중년 신사가 될 무렵, 젊은 날의 꿈인 1,000명의 축구스타열전이 완성되겠지요.

 

 오늘 11월 3일 은사님 생신이라 제게는 특별한 날이기도 했는데요. (공식적으로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구요.) 운동하느라 집을 나서며 유치원 앞 길가의 벽을 예쁘게 다시 꾸미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가슴 벅차던지... 업데이트가 사실은 굉장한 거구나를 영감을 크게 받았습니다. 게다가 축구는 통 안 보시는 교회 목사님 조차도, "너 정말 축구 좋아하잖니? 부담없이 막 써보는거야, 써라 써. 사람들 미소 짓게 하는 얼마나 좋은 일인데." 라고 폭풍 위로와 칭찬을 마구 선물해주십니다. 그제서야 아, 이제 다시 도전할 때가 되었구나를 받아들이고, 레전드와 현역을 오가며 축구로 제대로 힐링하자!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 첫 번째 업데이트는 제가 사랑하는 분, 차범근 선수 이야기 입니다.

 

 음... 2008년으로 잠시 추억을 회상하면, 저 블로그 1년차의 초심자였고요;;; 자료정리차 시작해서, 당시 100번째 축구선수 포스팅을 기념해, 대한민국의 자랑 차범근 이야기를 조금 해봐야겠다, 제 나름대로 큰 용기를 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프로필

 이름 : 차범근 (Cha Bum-Kun)
 생년월일 : 1953년 5월 22일
 신장/체중 : 179cm / 79kg
 포지션 : FW / MF
 국적 : 대한민국
 국가대표 : 121시합 55득점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2014년 135경기 58득점으로 수정됨)

 차붐에 대하여...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팬이 쓰는 부족한 글.

 차범근은 80년대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였습니다. 또한 분데스리가 굴지의 스트라이커 이기도 했습니다. 차범근은 체격도 좋았고, 특히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습니다. 뛰어난 드리블 실력과 호쾌하면서도 정확한 슛은 도무지 아시아 선수의 레벨이 아니었습니다. 차범근은 당당하게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을 펼쳐나갔던 세계적인 실력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지금이야 분데스리가가 EPL, 라리가, 세리에 보다 간혹 저평가 받기도 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분데스리가는 세계최고봉이라고까지 평가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서독은 70년대 유로, 월드컵을 연거푸 우승했으며, 당시 유러피언컵(=현재의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바이에른 뮌헨이 3연패를 차지하고 그랬습니다. 요한 크루이프의 아약스 이후, 10년 동안 이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7번이나 올라갔던 것이 분데스리가 팀들이었지요. 이 리그가 당시에 무조건 최고였다 라고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야말로 분데스리가의 수준은 당시 대단했습니다.

 거기에 아시아의 한 젊은이가 도전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차범근. 1978년, 스물다섯살의 차범근은 서독의 클럽팀 다름슈타트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차범근은 당시 한국국가대표 선수였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의 대표였지, 분데스리가에서 통할지는 미지수였지요. 당연히 그의 실력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차범근도 분데스리가 첫 시즌에는 단 1경기에 출장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프랑크푸르트 팀으로 이적하게 되는 차범근. 여기서부터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전설이 펼쳐집니다. 10년동안 차범근은 늘 25경기 이상 출장했습니다. 후후, 첫 시즌부터 활약을 했다는 거 아니겠어요! 차범근은 언제나 주전이었고, 팀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선수로 인정받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첫 시즌에 12골을 넣었으며, 또한 팀은 UEFA컵에서 우승까지 차지했습니다. 차범근의 공헌이 대단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4시즌 동안 46골을 넣었습니다. 꾸준하게 출장하면서, 꾸준하게 골을 넣었던 차범근이었지요.

 

 이제 더 이상 차범근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82-83시즌 차범근은 리그에서 15골이나 넣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꽤나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프랑크푸르트는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차붐이 떠나고 나서 프랑크푸르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프랑크푸르트는 이 당시 20년 동안 10위권 밑으로 떨어진 적이 단 2회 밖에 없던 나름 중상위권에서 늘 자리잡고 있던 강팀이었습니다만, 팀의 주축 중 한 명인 차범근이 떠나고 리빌딩도 실패하면서, 곧장 16위로 추락했고 5년 연속 중하위권에서 고생해야만 했습니다. 스포츠라는 것이 단순하게 접근한다면, 잘하는 선수들 몇몇 빠지면 티가 안 날 수 없어요.


 레버쿠젠에서도 차범근의 활약은 변함없이 빛났습니다. 분데스리가 5년 연속 두자리 수 득점을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85-86시즌에는 17골이나 넣습니다. 차범근은 "올해의 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정말 눈부셨습니다. 그는 존경받던 선수였으며, 분데스리가의 빅스타였습니다.
 
 당대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비독일인 중에서 차붐과 비견될 수 있는 선수로는 케빈 키건과 알란 시몬센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두 선수 모두 유럽최우수선수상까지 수상한 바 있습니다. 한편 우리 차붐은 겸손한 자세로 이 올해의 스타 수상에 대해서 혹여 자신이 뽑힌 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워낙 이 상을 받았던 걸출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지요. 잉글랜드의 빅스타 케빈 키건도 1979년 분데스리가에서 이 상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겸손하실 필요는 없는 듯 합니다. 당신을 존경하는 선수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참 많았으니까 말입니다.

 차붐은 분데스리가에서 리그 통산 98골을 넣었습니다. 당시 비독일인, 즉 외국인선수로는 최다골이었습니다. 덴마크의 레전드 알란 시몬센이 분데스리가에서 넣었던 통산 76골의 기록을 바로 한국의 레전드 차범근이 갈아치웠습니다. 여기서 이 점을 함께 고려한다면 더 좋겠죠? 알란 시몬센은 명문 보루시아MG에서 뛰면서 발롱도르(유럽최우수선수상)까지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차범근, 당신은 명문팀에서 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해냈습니다. 항상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했고, 한 골을 더 넣고자 노력했고, 결국 그 수라장에서 알란 시몬센의 외국인최다골 기록까지 넘어섭니다. 유럽선수도 아닌, 아시아에서 온 젊은이가 명문팀이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멋진 활약을 펼쳐나갔으며, 분데스리가 올해의 스타로 선정되었으며, 비독일인 최다골 기록까지 달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분데스리가에서 명성을 날렸던 그의 이름이 바로 차범근 입니다. 그 시대를 살던 독일 축구팬들이 차붐을 잊을 수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금의 21세기 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에이, 98골이 뭐에요~ 차붐은 유럽최우수선수상도 받지 않았잖아요? 그가 챔스리그 우승을 했나요? 그가 분데스리가 리그우승을 했나요? 맞아요. 98골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단지 숫자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축구선수이지요. 차범근은 단 한 골도 PK골을 넣지 않았습니다. 모두 필드골이었지요. 물론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대학시절부터 승부차기와 PK에 약했다고 솔직히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맞아요. 그는 유럽최우수선수상(발롱도르)도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상은 1995년, 조지 웨아가 되어서야 비유럽권 선수에게 상을 주었지요. 차붐은 그냥 독일로 귀화를 하고, 독일대표팀에서 뛰고, 그렇게 활약을 펼쳐서 유럽에 더 크게 이름을 날릴 기회도 있었습니다. 요즘의 다민족을 포용하는 독일대표팀 처럼, 만약 차범근이 귀화를 하고 독일 대표로 뛰게 되었다면, 발롱도르 순위권에 차붐의 이름이 올라갔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았겠지요. (분데스리가와 리그는 다르지만 세리에 A 에서 이름을 날리던 덴마크의 엘케어 라는 선수도 약팀에서 멋지게 활약하며 유럽최우수선수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한 바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차범근, 그는 참 어리석어서(?), 참 고맙기도 한 그런 사람이에요. 또한 경기장에서의 예의는 그의 진가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분데스리가 통산 옐로카드 1장. 상대가 반칙을 해도, 단호하게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보복 대신에 용서를 선택한 선수였지요. (*귀화 부분에 대해서 제가 오해한 바가 있어서 2010년에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차붐은 트위터를 통해 귀화는 와전이며, 당시 독일대표팀 감독이 차범근 같은 공격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한 내용이 알려져 있습니다 ^^ 2010.07.수정.)

 실제로 거친 태클로 인해서, 부상을 당해서 병원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차붐은 그 선수에 대해서 미워하지 않으며 용서한다고 발언합니다. 독일이 큰 감동을 받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선수로서 많은 이들이 차붐을 존경해 마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공격수 클린스만 (=독일국가대표 통산득점 2위) 마저도 자신은 차붐만큼 성공한 공격수가 아니었다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이 아닙니다. 단순히 스타성만 놓고 본다고 해도 차범근은 그만큼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차범근은 리그우승도, 유러피언컵 우승도 하지 못했습니다. 명문팀에서 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우승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987-88시즌 UEFA컵이었지요. 소속팀 레버쿠젠은 당시만해도 이제까지 주요트로피가 없던 팀이었지요. 제대로 된 우승 한 번 못해본 팀이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해 레버쿠젠은 UEFA컵에서 돌풍을 일으킵니다. 8강전에서 통합스코어 1-0 신승을 거두며, FC바르셀로나를 침몰시킵니다. 그렇게 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결승 상대는 스페인의 에스파뇰이었지요. 에스파뇰도 16강에서 인테르밀란을 침몰시키는 등 좋은 기세를 보여주었습니다. 1경기 원정을 떠난 차붐과 레버쿠젠팀은 0-3 으로 참패를 당하고 돌아옵니다. 이를 우짭니까. (과연 레버쿠젠은 이 시절에도 만년 준우승팀입니까?)

 2경기를 홈에서 가지게 되는 레버쿠젠. 전반전 까지도 레버쿠젠은 한 골도 넣을 수 없었고, 준우승이 너무나도 유력해 보였습니다. 이건 정말로 다 실화입니다. 후반전 레버쿠젠은 열심히 에스파뇰의 골문을 두드렸고, 드디어 첫 골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추격골이 터집니다. 이제 레버쿠젠은 정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경기 종료 약 10여분을 남겨놓고, 마침내 동점골이 터집니다. 그렇습니다. 차범근의 골이었습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차붐 뿐만 아니라 레버쿠젠 선수들이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같은, 천금같은, 드라마같은 동점골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분데스리가의 스타 다운 결승전 활약이었습니다. 결국 원정가서 0-3 대패를 당했던 레버쿠젠은, 홈에서 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면서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승부차기 끝에 UEFA컵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은 레버쿠젠의 첫 트로피였습니다. 차범근, 당신이 자랑스러운 이유입니다. 레버쿠젠은 첫 트로피부터 유럽클럽대항전 트로피를 따냈으니, 그것도 참 재밌는 팀이군요. 하하.

 이후 차범근은 1989년 현역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분데스리가에서 통산 308시합을 출장했습니다. 98골 기록은 14년동안 외국인최다골 기록을 유지했습니다. 또한 308시합 출장기록은 세월이 더 흘러 2007년이 되어서야 깨어졌습니다. 당시 차범근의 활약상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비독일인으로서는 알란 시몬센과 케빈 키건과 비견될 스타였습니다. 아시아에서 나타난 빛나는 선수였지요. 물론, 국가대표로도 잘 찼습니다. 58골 기록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앞으로도 깨어지기 힘든 대한민국 최다골 기록이 아닐까 싶고요.

 차범근은 유럽에서도 아시아 출신의 선수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선구자였습니다. 그가 개척해 놓았던 유럽무대의 길을 이제는 많은 아시아 선수들이 밟고 있습니다. (예컨대, 맨유 박지성과 토트넘 손흥민은 너무 유명하죠.) 차범근, 그는 20세기 최고의 아시아 선수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은 대한민국 불멸의 레전드입니다. 옆나라 일본에도 레전드 선수로 올림픽 득점왕에 국대 75득점을 기록했던 가마모토(釜本)라는 명공격수가 있었지만, 차범근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라는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위키에 가보면 가마모토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차범근은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선정 20세기 아시아최우수선수라고 그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차범근의 세계적인 선수로서의 위상은 20세기 아시아에서 비교할 선수가 정말로 없었습니다. 서독의 국가대표를 맡기도 했던 귄터 네처가 차붐을 두고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참 인상적이고 훌륭한 극찬이 아닐까 합니다. 귄터 네처는 차범근을 두고 어떠한 리그, 어떠한 팀에 가더라도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스트라이커라고 평가합니다. 차범근은 참 열심히 하고, 참 훌륭한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명공격수였습니다. 요즘 같은 시절에 활약했더라면, 매번 밤마다 Live로 중계 보면서 환호활 수 있었을텐데, 그게 저는 조금 아쉽군요 (웃음)

 이제 부족한 글을 마쳐야 겠습니다. 그래요, 차범근은 축구의 신 이런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차범근은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전설적인 축구선수임에는 당연히 틀림없습니다. UEFA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으며 팀을 감격의 첫 우승으로 견인하기도 했으니, 많은 독일인들이 지금까지도 기억하며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는 그가 바로 차범근입니다. 독일에는 정말로 차범근을 위한 시까지 존재합니다. 아, 대한민국 축구에 그가 있어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맞다, 이건 전설이긴 한데요. 국가대표로 뛰었던 경기에서 7분 사이에 해트트릭을 했다는 놀라운 기록도 존재합니다. 음, 어쩌면, 차범근은 대한민국의 레전드라는 말로 부족할지도 모르겠네요. 감히 저는 애정을 담아 쓰겠습니다. 그는 아시아의 전설이자, 분데스리가의 전설이었습니다.

 

 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에서 차붐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어서, 끝으로 동영상으로 함께 첨부합니다. 다음스포츠 감사해요! 함께 보시면 더욱 즐거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리그 외에도 축구경기는 있으니까 통산 372경기 121골이라고 한준희 해설위원께서 집계해주셨네요.

 

 그리고, 물론 제가 노린 건 아니고요. 기막히게도, 이 글을 쓰는 2019년 11월 3일 시점, 현재 손흥민 선수의 유럽 개인 통산골이 무려 121골. 차붐의 전설을 넘어서기 직전에 와 있습니다. 그 차붐은 또 손흥민에게 따뜻한 칭찬을 잊지 않으십니다. "축구팬뿐 아니라 온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정말 대단하고 박수를 쳐주고 싶다." 라고 말이죠. 10년 만에 다시, 가독성을 올리고 약간씩 편집하며 읽어보니 참 긴 글이었네요. 아마 제가 그만큼 애정이 가득한가 봅니다. 차범근 감독님 감사하고요. 손흥민 선수도 부상 없이, 더욱 롱런하기를 힘껏 응원하며 마칩니다. / 2019. 11. 뉴 축구스타열전 제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