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스타열전

#129 브라질 왼발의 마술사 리베리노

시북(허지수) 2020. 9. 14. 23:58

 

 외모부터 범상치 않은 브라질의 스타 리베리노. 왼발의 달인이며 또한 프리킥의 달인이기도 했던 리베리노는 "왼발의 마술사"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펠레가 은퇴 후, 브라질의 10번을 달았던 70년대 스타 리베리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프로필

 

 이름 : Roberto Rivelino (리베리노 혹은 히벨리누, 히벨리노 등으로 표기됩니다. 저는 전자로 표기했습니다.)
 생년월일 : 1946년 1월 1일
 신장/체중 : 169cm / 73kg
 포지션 : FW / MF
 국적 : 브라질
 국가대표 : 122시합 43득점

 

 왼발의 마술사, 리베리노 이야기

 

 리베리노는 왼발 하나로 축구예술을 펼쳐나갔던 선수였습니다. 강력한 왼발 슈팅, 다양하면서도 날카로운 패스, 독창적인 드리블 실력까지! 창조성과 득점력을 겸비한 명선수였던 리베리노가 펠레의 10번을 물려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왼발을 무기로 하며 프리킥도 잘 찼는데, 월드컵에서 전설적인 프리킥골을 기록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리베리노는 마법의 왼발로 멋진 축구를 구사하던 마술사 였습니다.

 

 1965년 10대의 나이로 소속팀에서 주전 선수로 자리를 잡았으며, 또한 국가대표로 발탁될 정도로 훌륭한 재능을 가졌던 리베리노 였습니다. 하지만 일반적 스타들과 달리 리베리노는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리베리노의 소속팀이었던 코린티안스는, 펠레 등이 이끌던 황금기의 산토스 팀에게 밀려서 제대로 우승 한 번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이 바뀌면서 리베리노는 대표 데뷔는 일찍 해놓고도 1경기도 제대로 국가대표로 출장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늘 변하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1967년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 자갈로 감독으로 바뀌게 되었고, 리베리노는 자갈로 감독의 중용 아래 약 2년 반만에 드디어 다시 국가대표로 활약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 리베리노는 브라질 대표팀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갑니다. 이렇게 1970년 월드컵이 되었습니다.

 

 브라질은 엄청나게 잘 찼습니다. 리베리노도 있었고, 펠레, 토스탕, 자일지뉴, 제르송 등 화려한 특급멤버들이 즐비했습니다. 압도적인 공격력을 선보이면서 70년 월드컵 우승. 종종 사람들은 이 팀을 최강의 대표팀 중 하나였다고 손꼽기도 합니다. 리베리노도 왼쪽 날개로 맹활약하며 3득점을 기록했습니다. (브라질은 8강, 4강, 결승전을 합해서 토너먼트에서만 무려 10골을 넣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후 펠레가 브라질대표팀에서 은퇴하고, 그의 10번을 바로 리베리노가 물려받게 됩니다. 리베리노는 이후 섀도우 스트라이커 위치에서 활약하면서 공격의 조율을 담당하고 브라질의 중심선수로 활약을 펼쳐나갑니다. 그렇게 1974년 월드컵이 되었습니다. 이제 펠레도 떠나고 브라질 대표팀도 예전만큼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높았습니다.

 

 막을 열어보니, 예선부터 힘겨운 통과였습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지요. 1차 조별리그 두 경기부터 0-0 무승부의 치욕을 경험합니다. 지난 대회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주었던 브라질 대표팀이었기에, 브라질 국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했었는데 이렇게 뭐하나 제대로 풀려나가는게 없자 자갈로 감독은 당시 욕도 무지 먹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최약체 팀으로 평가받던 자이르(현재 콩고민주공화국)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간신히 2차 조별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그래도 명가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가 봅니다. 리베리노, 자일지뉴 등이 버티고 있던 브라질은, 그래도 브라질이었습니다. 2차리그 첫 경기 동독전, 이번에는 리베리노의 예술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프리킥골이 터집니다. 이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는 브라질! 설명을 덧붙이자면 리베리노가 프리킥을 찼습니다. 자일지뉴가 동독선수들 벽 사이에 살짝 들어가있다가, 리베리노가 강력하고 정확하게 슛을 날릴 무렵 기습적으로 자일지뉴가 쑤구립니다! (사투리이고, 여하튼 엎드립니다.) 그 약간의 빈틈을 통과하며 예술같은 그림으로 골이 들어갑니다. 정말로 동독의 선수들과 골키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골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월드컵 프리킥 베스트골 중 하나로 회자될 것입니다. 완벽한 컨트롤을 보여준 환상적인 마법이었지요. 역시 왼발의 마술사!

 

 이후 아르헨티나 전에서도 리베리노는 선제골을 넣으면서 공격을 주도했고 2-1 승리를 거두면서 결승 진출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만, 1974년 7월, 그 전설의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네덜란드의 토탈사커에게 패배하면서 4강 진출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리베리노는 7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선수 중에서는 가장 많은 3골을 넣었으며, 펠레에게 물려받은 10번 다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요한 크루이프와 안 부딪혔으면, 혹은 우승이라도 차지했더라면 포스트 펠레시대의 영웅이자, 화려한 레전드로 기억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웃음)

 

 1975년이 되어 리베리노는 소속팀을 플루미넨세 팀으로 옮기게 되었고, 지역선수권 대회 팀우승에 공헌하게 됩니다. 1979년부터는 사우디에서 선수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81년 공식적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한편 1978년 월드컵에도 주전은 아니었지만 리베리노는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78년 월드컵에서는 지쿠 등의 떠오르던 젊은 스타들이 있었지요. 그래도 리베리노는 3경기에 출장하면서 노장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월드컵 통산 15시합 6득점, 국가대표 통산 122시합 43득점의 훌륭한 성적을 남겼습니다. 다른 나라 였다면, 화려한 전설적 스타의 기록으로 남았겠지만, 브라질이니까 워낙 특급스타가 많아서 리베리노가 많은 조명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펠레와 지쿠가 이끌던 브라질 10번의 눈부신 전설시대 사이에 리베리노의 10번 시대가 이렇게 있었습니다. 리베리노는 아쉽게도 상복이 없었는데, 1977년에는 지쿠에 이어서 남미최우수선수 2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몇 차례 3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리베리노 같은 스타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던, 브라질은 이 시절에도 정말 대단한 축구의 나라였습니다.

 

 FIFA 100주년을 맞이해서, 펠레가 선정한 위대한 선수 125명 중에서도 리베리노는 이름을 올렸습니다. 호나우지뉴 처럼 화려한 발재간을 지닌 페인팅 드리블의 대가이자, 왼발의 마술사, 프리킥의 명인. 리베리노는 브라질의 빼놓을 수 없는 레전드 축구선수였습니다. 이제 글을 마칩니다. 애독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2008. 07. 23. 초안작성.

 2020. 09. 14. 가독성 보완 및 동영상 업데이트 - 축구팬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