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나님의 나라/에스라에게 내린 조서 (에스라7:12-23)

 

오늘 우리는 다시 에스라서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에스라에게 페르샤의 아닥사스다왕이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 중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올라가고 내가 재물을 줄테니 하늘의 하나님에게 율법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조서를 내린 그래서 유대인의 2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제사에 드는 재물을 내려서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활성화한 사람의 이름이 아닥사스다 입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놀라운건 성전공사를 중단시킨 사람 역시 아닥사스다라고 하는 겁니다. 동명이인이 아닙니다. 이 두사람은 동일인물입니다. 말도 안돼! 그래요, 말도 안됩니다.

 

4:23에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역사를 그치게 하니” 여기에 분명히 아닥사스다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닥사스다가 강제로 공사를 중지시킨게 나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은 사람이 한때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짓는 것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이제 무슨 변덕인지 갑자기 에스라에게 포로 귀환민들하고 같이 예루살렘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까?

 

솔직히 여호와 하나님이 무슨 페르샤의 국가신도 아니고 페르샤 국민들이 숭상하는 그런 신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먼 변경의 조그만 민족, 실제로 거의 부족 수준의 유대인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거지요?

 

이건 뭐 왕이 이랬다 저랬다 하면 누가 왕의 명령을 제대로 지킬 수 있지요? 예부터 왕의 명령은 법률로서 기능했기에 함부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는 스스로 금기를 깬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지요?

 

오늘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고 그가 역사를 움직이신다고 하는 사실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믿는 성도를 그 중심에 두고 역사를 움직인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만드신 거대한 존재가 우리를 중심에 두고 역사하신다는 그 놀라운 사실이 경이롭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 본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진실된 아닥사스다의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변덕이 심한 왕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 왕인지 도데체 그는 어떤 성향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하수에로왕의 아들입니다.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로. 그러나 아닥사스다가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라고 해서 에스더의 아들이란 말은 아닙니다. 옛날 페르샤의 임금들은 엄청나게 많은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궁중암투가 벌어지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아닥사스다라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페르샤의 임금으로서 과도하게 하나님의 전에 제물을 지원하고 율법에 맞게 제사 지내도록 조서를 내려서 까지 친절을 베풀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여러 이민족들의 포용정책을 펼치는 왕이 한 작은 특정 민족만을 감싸고 돈다면, 그들만 편애한다면 다른 민족들의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페르샤의 임금이 추구하는 바는 결국 자기네의 영역 안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중앙정부의 통치에 순응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지 페르샤 전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편애하는 이 조서는 정말이지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낍니다. 그의 역사를 깨닫습니다. 담담히 사실만을 기록한 에스라서에서 우리는 역사의 배후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손길과 그의 섭리를 느낍니다.

 

1.하늘의 하나님

12절에서 아닥사스다의 조서에는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에스라에게”

보세요. 아닥사스다왕은 자신을 모든 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왕의 왕’이란 말은 황제란 말입니다. 당시 페르샤는 중근동을 제패한 제국이었고 127개의 민족을 포함하는 그 나라의 대왕이니까 당연히 황제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여호와 하나님을 일러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에스라를 일러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제사장 에스라’라고 합니다. 페르샤의 왕의 입장에서는 소수민족인 유대인의 신에 관한 것을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나 중요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아닥사스다가 혹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인인가 의아합니다. 그러나 그는 페르샤의 임금으로서 자기 민족의 신 외에도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자입니다. 그러니 유일신관을 가진 유대교인일 리가 없습니다. 만일 그가 페르샤의 신을 배반하고 여호와를 섬긴다면 당장 반란이 일어나서 페르샤의 왕위에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권력유지가 제일 목적인 그가 하나님을 섬길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다른 일체의 신들을 부정해야 되니까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신을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외치는 종교이기 때문에 예수쟁이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사람들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일러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페르샤인들에게는 ‘하늘을 다스리는’ 신이 가장 높은 신이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하늘의 하나님이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페르샤의 임금이 유대인의 왕, 이미 오래전에 패망해서 신전도 없어지고 창고의 보물도 빼앗긴 약소민족의 신을 하늘을 다스리는 신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뭔가가 없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됩니다.

 

혹 하나님이 아하수에로의 생명을 구해주셨을까요? 왕좌를 위협하는 적을 멸망시키고 그의 보좌를 공고하게 하셨을까요? 건강을 회복시키셨을까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2.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제1차 포로귀환이 있고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포로 귀환민들의 신앙열정이 형편없이 식어버렸습니다. 성경에 약속한 다윗왕국에 대한 열망도 식어버렸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식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은 이방인과 통혼하고 이전의 멸망하기 전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짓던 가증한 범죄를 다시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순수한 신앙공동체의 재건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없어도 하나님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성벽이 없어도 하나님의 공동체는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열정이 없다면 저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앙공동체는 건설할 수 없습니다.

 

처음 열정에 불타서 페르샤에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텅 비다시피한 그래서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옛땅으로 그래도 하나님의 성도 예루살렘이라고 올라왔지만 계속되는 생활고와 현실과의 타협, 세속주의 때문에 포로들과 그 후손들도 타락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충분한 시간 이후에야 이루어 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아주 짧은 순간만을 살기에 하나님의 눈에 찰나라고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때까지 기다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의심하고 분노하며 세상으로 떠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이제 일주일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 전에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갔다가 처절한 멸망과 실망을 겪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1m를 파들어가지 못해서 노다지를 발견하지 못했던 여인과 같습니다. 남편이 절대로 자기의 사후에도 여기를 떠나지 말고 금광을 파들어 가라고 한 그 말을 지키지 못하고 금광을 중도에서 팔았습니다. 아주 헐값에 팔았지요.

 

백만장자였던 남편은 자기의 전 재산을 밀어 넣고서도 결국은 금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지요. 그런데 죽으면서 금광을 계속해서 개발해 줄 것을 아내에게 유언으로 당부했습니다. 아내가 그 당부를 지켰을까요?

 

처음엔 아내도 그 당부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실망하고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된 아내는 헐값에 금광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뒤를 이어 금광의 주인이 된 사람이 1m를 더 파고 들어가자 그렇게나 찾았던 노다지가 발견되었고 엄청난 거부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버리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그 오랜 세월을 하나님께 헌신한 그 노고를 헛수고로 만든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의심이 파고들거나 믿음이 약해지려 할 때에 하나님은 그가 존재하고 지금도 역사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보여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참고 인내하고 소망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답답하고 급하고 필요한 쪽은 우리지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손에 쓰임 받으려고 지금도 줄 선 사람이 말도 못할 만큼 많습니다. 부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켜서 하나님이 우리의 손에 쥐어주신 복을 남들이 빼앗아 가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그대로 둔다면 아마 이 지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없어질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처럼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물들고 돈 숭배에 찌들어서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인데 이를 보신 하나님이 에스라와 포로들의 후손들을 돌려 보내신 것입니다.

 

신앙이 타락하고 도덕 수준이 후퇴할 때 하나님은 자신이 준비하신 새로운 사람을 통하여 자기의 일을 더 열정적으로 하게 하시고 힘을 주시고 격려하십니다. 선지자를 세워서 말씀으로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중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꾼을 보내시는 데는 다 뜻이 있습니다. 뭐하라고? 신앙열정을 전파하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실망한 사람들에게 신선한 피를 공급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죽었던 공동체를 소생시키게 하시려고 보내시는 겁니다.

 

2차 포로귀환때 포로들이 몇 명이나 유대로 돌아왔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자 장정들의 숫자를 가지고 역으로 추산해서 한 9000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처음에 한 5만명 정도가 올라왔고 이제 두 번째로 다시 9천명 정도가 올라간 것입니다.

 

제가 컴퓨터를 좋아하는데 속도를 담당하는게 바로 중앙처리장치 즉 cpu라고 합니다. 그런데 속도가 빨라져도 대부분의 사람이 체감하려고 하면 적어도 15%이상은 빨라져야 알아차릴 수 있답니다.

 

물론 연속극 속에서 종종 우리는 뛰어난 한 사람의 영웅이 등장해서 민족과 사회를 구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소설이지 현실은 좀 어렵지 않을까요?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 한명 한명을 따로 떼어 놓으면 힘이 없는 민초들이 모여서 업적을 이루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흩어지면 민초요 모이면 민중이지요.

 

뛰어난 누군가가 앞장을 서면 그를 지지하고 뒷받침하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결국 그는 영웅이 아니라 순교자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방관하는 이가 생기고 결국 그러한 다수의 방관속에서 개혁시도는 실패하고 공동체는 결국 쇠락하다가 해체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의 수혈에서 적어도 15%이상의 사람들이 수혈되어야 사회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침체된 사회와 나라가 새롭게 위로를 얻고 힘을 얻어 다시 힘찬 출발을 하지 않을까요? 포로귀환은 총 삼차까지 있었다고는 하는데 삼차 때에는 대략적인 숫자도 알 수 없습니다.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더 적은 숫자가 올라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뜻이 있는 자는’ 이라는 말은 원문으로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어떤 일을 자원하여 하다’라는 뜻이지만 주로 성심으로 드리는, 즐거이 드림 이란 뜻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포로 귀환민들이 올라갈 때의 심정은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 풍요로운 유브라데스 강가에서 떠나 척박한 산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예물로 자원하여 드리는 것과 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백만의 포로 후손들 가운데서 겨우 6만명 정도만 올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돌아갈 예루살렘이 온갖 풍요와 황금과 기회의 땅이라고 한다면 유대인 포로의 후손들이 아마 서로 갈려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들이 척박한 현실을 이기고 신앙 열정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한 결심은 스스로를 하나님께 예물로 바치는 것처럼 자기를 비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려는 숭고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불의와 싸우며 현실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려는 이들은 자기를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로 드림과 같습니다.

 

3.유다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표면적으로 보면 아닥사스다가 과한 친절을 베풀면서까지 에스라를 이스라엘에 파견한 이유는 성경의 율법대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제사가 잘 지내지고 있는지를 살피려고 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재정지원까지 하면서 새로운 제사에 쓸 은금기명까지 새로 만들어 가면서 아주 적은 유다민족의 신을 제대로 섬기는지 살피러 왔다고요? 말이 안됩니다.

 

그래요, 말이 안됩니다. 실제로 종교적 이유를 내세운 에스라의 파견은 총신 에스라를 파견하여 팔레스틴 일대의 반란상황을 조사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에스라를 믿을 수 있기에 자기의 신복을 통하여 반란 여부를 보고 팔레스틴을 안정시키려고 에스라를 종교제사 임무를 주어 보낸 겁니다.

 

실제로 당시에 아닥사스다는 애굽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떠나가면서 인근 지역인 팔레스틴까지 흔들리면 유브라데 강 건너편의 모든 땅을 빼앗길 것 같으니까 부랴 부랴 에스라를 파견한 겁니다.

 

그래서 유다도만 아니라 강서편 전 지역에 대한 권한을 에스라에게 준 것입니다. 이 권한이 사실은 강서편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원천이 된 겁니다. 왕은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전능하시니 우리의 앞길을 막을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굽은 바벨론과 더불어 중근동의 남북을 대표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애굽에서 반란이 일어나니까 아닥사스다가 조바심이 난 겁니다. 혹시나 애굽에게 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에게 잘 보여서 반란을 진압하려고 그렇게나 겸비하고 헌신적이고 호의적이었던 겁니다.

 

사람은 큰위기 앞에서는 항상 겸비한 법입니다. 이것은 제국의 대왕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중의 왕이라고 큰소리쳐도 그는 사람이고 위기 앞에서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서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아닥사스다가 유대인에게 아무런 이유없이 과한 호의를 베푼건 아닙니다. 다 자기의 실속을 차릴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정세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꼼수가 들어 있습니다.

 

이게 왜 꼼수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성전공사를 중단시킨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라가 멸망할까, 혹은 자기의 후대들에게 물려줄 나라가 잘못될까 걱정했기 때문에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자기가 언제 여호와에 대한 제사에 신경을 썼다고... 그래서 꼼수입니다.

 

혹시나 반란동향 감시를 위해서 에스라를 파견했다는 것을 인근 민족들이 알게 되면 오히려 반란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잘 지내는지 감시하려고 보내는 걸로 공표한 겁니다. 그래서 꼼수입니다.

 

자기가 이전에 지은 죄가 있어서 겁이 납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에게 죄스럽고 혹시나 그것 때문에 애굽의 반란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봐 두렵기도 한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후하게 후하게 퍼주는 겁니다.

 

4.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바로 7:15절에 “왕과 모사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22절에 “은은 일백달란트까지 밀은...포도주는... 기름도...소금은 정수없이 하라” 어마어마한 재물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풀려고 합니다. 에스라가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라고 합니다.

 

‘정수없이 하라’는 말은 얼마를 주었는지 기록하지 말고 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왕이 에스라를 그만큼 신임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소금은 왕실의 전매품입니다. 개인이 사사로이 내다 팔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소금이 왕국을 경영하는데 필수적인 물품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아니고 너무 과한 듯이 보입니다.

 

에스라에게 아무리 소금을 퍼주어도 결코 개인이 사사로이 착복하거나 헛되이 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기록하지 말고 달라는 대로 주라고 명령한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믿지 않는 세상사람으로 부터도 무한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좋아하지는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쟁이가 싫어.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정직해”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옛날 그 지역의 사람들은 신들의 전쟁을 자기들이 대신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바벨론이 싸워서 이스라엘이 졌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신이 바벨론의 신보다 약한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 보물을 바벨론의 신당에다 둔 겁니다. 마치 전리품처럼 여긴 겁니다.

 

그것도 돌려주고 또 새롭게 왕이 금은으로 그릇을 만들어서 주고 세금으로 걷어서 나라의 창고에 보관한 물품 중에서 하나님에게 제사 드릴 제물을 주라고 한 겁니다. 국교도 아닌데 나라에서 제물을 주고 신관과 봉사자들의 세금을 면제해주고...마치 국교처럼 우대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위대한 기적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서나 형통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겸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신관으로는 바벨론을 쳐서 이긴 자기네 신이 더 위대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보다 정확히는 유대의 신전에 그렇게 막대한 예물을 바치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그 광대한 능력과 지혜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도 그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을 본 아닥사스다는 자기가 저지른 성전공사 중지 명령을 취소하고 완벽한 여호와 제사를 위해서 재물을 베풀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사람은 정말이지 영악하고 그리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조금만 잘나간다고 여기게 되면 그냥 기고만장해서 목이 부러질까 두려울 정도로 뻗뻗 하다가 자기가 마치 신이라도 된 양 교만해지다가 일이 잘 안되고 몸이 안 좋아지고 여건이 불리해지면 금방 기가 죽어서 다 죽어가는 상을 합니다.

 

아닥사스다가 그런 사람인 모양입니다. 성전공사를 중지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니까 혹시라도 이 전쟁에서 질까 봐서 하나님 앞에 겸비한 모습을 보입니다.

 

5.진노가 임하지 않게 하라

계속해서 아닥사스다는 그의 조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3절에 “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의 명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그가 하나님에게 이렇게 설설 기는 이유가 결국은 자기 집안에 화가 미칠까 봐서입니다. 지은 죄가 있어서 더 납닥 엎드린 겁니다. 왕과 왕자의 나라는 결국 자기 나라를 말합니다. 그리고 당대에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옛날 이런 나라의 왕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온갖 권세와 부귀와 사치는 다 누리지만 그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양 사방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가 누리는 부귀영화와 권세를 빼앗으려 합니다.

 

그러니 좀 나누면서 살면 좋을 것을. 그러나 왕 자리를 나눈다? 권력을 나눈다? 하하.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고독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페르샤의 강역을 설명하면서 무려 127개의 도, 인도에서 이디오피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다고 자랑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페르샤의 왕이 누리는 부귀를 위해서 127개의 민족을 불행하게 한 겁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더러운 이득을 탐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더러운 이득이 결국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이고 이웃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벌이 두렵지 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이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물에까지 신경을 쓰고 에스라를 파견한 이유는 당연히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결코 상급을 잊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제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위해 강서편 전 지역에 하나님의 법에 통달한 재판관들을 세워서 강서편 전지역에 하나님의 통치를 확고히 하려고 합니다.

 

애굽의 잡신들이 감히 침노치 못하는 멋진 나라를 만들려고 한겁니다. 그가 생각해도 하나님의 나라와 애굽의 우상의 나라와는 비교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6.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그런데 여기 본문에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꿈만같은 명령이 적혀 있습니다.

 

뭘까요?

7:25에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여기 강서편이란 말은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페르샤는 유브라데스강의 서편에 하나의 관구를 설치했고 그 아래에 시리아니 사마리아니 유대니 하는 도를 두었습니다. 유대가 요즘의 군이라면 강서편은 도쯤 되는 상급 행정구역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강서편 전체에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몰록을 섬기는데 이 신은 인신공양을 좋아하는데 이걸 금지하면 어떻게 하나요?”

“시끄럽다. 공의의 하나님은 인신공양을 증오하신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잔인한 짓은 하지 못한다”

“아니, 우리가 유대인도 아니고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지도 않는데 왜 우리가 당신네 신의 법을 따라야 한단 말입니까?”

“몰랐어? 여기 보면 강서편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되어 있어. 그러니 잔말 말아라”

 

아닥사스다의 조서는 이런 효력을 가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정통한 자를 재판관으로 삼고, 모르면 가르치라는 겁니다. 유대인 만세입니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 강서편 전체가 하나님의 사람들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다스리는 나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나라가 바로 이렇습니다. 이 강역 전체에 하나님의 법이 원칙이 되고 중심이 되어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도 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나라.

 

하나님의 법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처음에 보면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하게 하는 정말이지 피곤한 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면 결국은 이 나라가, 이 사회가 평안하고 부흥하고 살기 좋은 사회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규례와 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그가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만드신 인간들이 그의 품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7.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그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자비는 왕과 모사와 방백들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입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의 손이 나의 위에 있으므로, 우리의 위에 있으므로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승리합니다.

 

여기 27절을 원문으로 보면 더 생동감이 넘칩니다. 뭐라고 되어 있는고 하니 “송축할지로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그러니까 송축이 제일 앞에 나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제일 먼저 할 말은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것 저것 기도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됩니다.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송축을 먼저 하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감사 먼저, 기억해야 할 규칙입니다.

 

감사도 생략하고 냅다 달라고만 하지 말고, 냅다 원망만 하지 말고 먼저 감사하고 그리고 시작하세요. 안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섭섭해 하십니다. 내가 저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인데 저러는지...

 

에스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는 그가 왕과 모사와 방백들 앞에서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위에 있으므로”

 

그래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위에 있으면 내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을 수 있고 내가 하나님의 큰일을 이룰 수 있고 내가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려고하면 죄를 회개하고 깨끗해 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영교하며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를 반복하며 무한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수요일 신학교에 강의를 하러 가는 길입니다. 약간 마을 안길같은 곳을 가는데 그래도 포장도로기 때문에 차들이 다닙니다. 그런데 한 여성이 출근시간에 늦었는지 냅다 뛰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로를 비스듬히 건넙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택시가 지나가는데 마침 이 택시가 여자가 뛰어들기 직전에 엑셀을 밟아서 가속을 합니다. 아마 이 택시는 여자가 뛰어서 도로를 건널줄을 몰랐나 봅니다. 이를 지켜보는 제가 다 가슴이 쫄깃합니다. 저하고 이 택시는 반대방향입니다.

 

그래서 제가 급히 손을 들어 그러니까 택시의 정면에서 약간 거리는 있었는데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습니다. 택시도 급히 섰고 저도 멍하니 서서 손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채 왜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지 이상하게 저를 보면서 길을 건너서 뛰어갔습니다.

 

한20cm정도만 더 갔다면 아마 여자는 아침 출근길에 엄청난 일을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한 생명을 구하고 두 가정의 행복을 지켰다? 그 당시에는 아무런 칭찬도 없었어요. 보상도 없었지요.

 

그런데 수업시간에 그 이야기를 하니까 학생들이 저를 향해서 박수를 치는 겁니다. 박수 받음. 좋은 보상입니다. 그날 오후에 더 놀라운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보상 내용은 생략합니다.

 

제가 또 말합니다. 하나님에게는 공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다면 결코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급을 바라고 착한일을 하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의 포상을 약속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항상 착한 일, 선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자, 곧 성도라고 합니다. 함께 하려면 우리가 깨끗해야 하지요. 그래서 회개하고 그리고 조금씩 하나님의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이 조금은 더 성숙해 져야 합니다.

 

28절에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라는 말에서 은혜는 우리가 매우 잘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한 두번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품어 주신다고 할 때의 헤세드.

 

결국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도대체 왜 아직까지 서울경기권에서 코로나가 끊이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그 위험한 곳에서 살면서도 안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품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서울에서 대전권까지 퍼졌던데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부산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 입국한 두사람이 코로나 확진을 받았답니다. 외노자인지 내국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역감염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나의 전능의 하나님이 보호하시므로 눈에 보이는 거대한 환난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로부터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이 모르면 가르쳐야 합니다. 음란과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행복해지고 공동체가 건강해진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귀찮고 힘든 면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사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먼저 우리 성도가 바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행해서 잘못한 것을 책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산다면 책망은 커녕 얼굴도 들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세상 사람 모두가 성도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법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게 만들면 그걸로 족합니다. 너무 경쟁이 극심하고 무자비하고 살벌한 세상을 우리는 살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가 주시는 평안을 맛보며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고 우리가 전도하고 그러려고 우리가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보호받고 평안을 누리를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6월 21일 주일 설교 원고


――――――――――――――――――――――


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특별히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매일의 생활이 고달프고, 하나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편안한 삶으로 바뀌기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뜨거운 불에 달궈진 후에, 또 강하게 내려쳐야만이 좋은 도구가 된다고 합니다. 고난이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관점은 매우 유익하지만, 그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 아닐까 고민합니다.

 

어쨌든 고통 속에 있으면 하나님을 더 찾게 됩니다. 더 의지하게 됩니다. 어떤 고민들은 단번에 답이 내려지지 않고,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어쩌면 그 어려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훌륭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자주 고민합니다. 게임을 10분이라도 더 할까, 책을 한 페이지라도 더 볼까. 둘 다 즐거운 취미 생활이지요. 그런데, 의미 있는 삶이라면 후자를 어렵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멀게 높게 생각하는 법도 배웁니다. 10년 뒤에도 즐거우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물어볼 수 있게 되었네요.

 

당장 기분을 좋게 만들고 순간적인 행복을 느끼려면 술을 마셔버리는 행동도 있겠지요. 그러나 10년 뒤라면 그의 인생은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져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래서 하지 말라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만둬 라는 말의 중요성을 인간은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다소 여백이 있게 덧붙여 봤습니다. 부디 삶의 고민들을 이겨내고, 더욱 근사한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 2020. 06. 시북 (허지수)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