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로시, 그는 키도 크지 않았으며, 체격도 왜소했습니다. 게다가 한 때, 승부조작 파동으로 2년 가까이 경기장에 나설 수도 없었지요. 파란만장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스타, 파올로 로시편을 준비했습니다.
프로필
이름 : Paolo Rossi
생년월일 : 1956년 9월 23일
신장/체중 : 174cm / 66kg
포지션 : FW
국적 : 이탈리아
국가대표 : 48시합 20득점
주요수상 : 1982년 유럽최우수선수상, 월드컵 득점왕, 월드컵 MVP 석권.
이탈리아에게 우승컵을 안겨준, 황금의 아들 파올로 로시!
파올로 로시의 아버지는 피오렌티나의 팬이었다고 합니다. 축구팬인 아버지의 권유에 힘입어서 공을 차게 되었던 로시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명문 유벤투스에서 실력을 쌓아갈 만큼, 꽤나 재능이 있었던 파올로 로시 였으나 무릎이 좋지 못해서 팀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20살, 파올로 로시는 세리에 B 팀인 비첸차 팀에 몸담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실력이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스무살의 젊은이가 21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치며 2부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소속팀은 덩달아서 세리에 A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파올로 로시는 이듬해에도 세리에A 무대에서까지 빛나는 활약을 이어나갔다는 것입니다.
세리에A 에서도 멋진 골감각을 펼쳐나가던, 젊은 로시는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으며, 이 시즌 30시합에 출장해서 24골이나 넣습니다. 또 다시 득점왕을 차지한 것입니다. 세리에B, 세리에A 연속 득점왕은 파올로 로시가 사상최초였습니다. (이 진기록은 100년의 역사가 넘는 이태리 축구에서 오직 파올로 로시만이 가지고 있었으나, 훗날 델 피에로가 세리에B, 세리에A 연속 득점왕 기록을 달성하면서, 이제는 역사상 두 사람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허허.)
이렇게 20대 초반에 세리에A 득점왕까지 차지하며 잘 나가던 파올로 로시는, 1978년 월드컵에도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도 파올로 로시는 3득점 2어시스트의 눈부신 활약을 펼쳤고, 이탈리아는 4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파올로 로시는 이제 장래가 더 기대되는 이탈리아 대표팀 주포로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파올로 로시는 몸집이 작았지만, 위치 선정 능력이 아주 뛰어났으며, 특유의 빠른 스피드를 살려서 기회를 살리는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체격이 좋은 훌륭한 공격수도 물론 있겠지만, 파올로 로시처럼 자신만의 특기를 멋지게 발휘하면서 골을 양산하는 스트라이커도 있기 마련입니다. 공격수가 골을 잘 넣는다! 이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겠지요.
실력을 널리 인정받으며, 파올로 로시는 팀을 잠시 옮겨 페루자팀에 몸담게 되는데, 하필 이 때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이탈리아 축구에서 종종 등장하는 "승부조작" 사건입니다! 그 때나, 요즘이나 이런 일들이 가끔씩 '펑'하고 터졌습니다. 파올로 로시는 2년간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게 되면서, 한동안 경기장에서 뛸 수가 없었습니다.
축구도 당연히 꾸준히 경기장에서 실전감각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한 때 이탈리아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올랐던 파올로 로시는 이렇게 경기장에 뛸 수 없게 되는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하면서, 선수생명이 위태로워지고 말았습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직전에야 간신히 출장 정지가 풀려서 대표팀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는 로시와 이탈리아 대표팀.
여론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몇 년 쉬었던(?) 선수를 대표팀 공격수로 쓴다면서 비난도 있었고, 실제로도 이탈리아는 좀처럼 경기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특유의 수비전문축구(!)를 내세우면서 3무를 기록. 운좋게도 간신히 2차 조별리그에 진출했습니다. 파올로 로시는 1차리그에서 부진을 거듭하며 무득점에 그칩니다. 그럼에도 감독은 파올로 로시를 계속 기용합니다. 저만한 선수는 어딜가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랄까요.
이탈리아는 2차 조별리그 첫 경기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마라도나를 집요하게 괴롭힌 끝에 어렵사리 승리를 따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전의 상대인 브라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82년 브라질 축구는 예술이었습니다. 이탈리아가 1차리그 3무로 헉헉대며 여기까지 왔다면, 브라질은 1차리그 3전 전승에다가 10골을 몰아넣었고 예술적인 축구로 수 많은 관중을 반하게 만들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브라질의 미드필더진은 사상최고라고 평가받으면서 "황금의 4중주"로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대부분의 팬들이 브라질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고, 심지어 이탈리아 자국의 언론들 조차도 이탈리아의 답답한 축구운용방식에 불만을 표출하며 비난을 계속 날렸습니다.
그렇게 브라질과의 결전이 밝아 오릅니다.
이 결전에서 이탈리아는 월드컵의 손꼽히는 명승부로 추억되는 경기를 보여줍니다. 우승후보 0순위로 찬사받던 브라질은 거침없는 공격축구로 나섰으며, 이탈리아는 특유의 역습과 끈끈한 조직력을 통해서 결정력을 살리는 축구를 구사합니다. 어차피 정면승부해서는 답이 없으니 이탈리아는 브라질의 에이스 지코를 물고 늘어졌고, 찬스를 로시가 잘 살려줘야 했습니다.
이 날 약 2년간 축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대표팀에 복귀해서도 욕만 엄청나게 들어먹던 그 파올로 로시가 기적같이 일을 냅니다. 경기 시작 5분만에 선제골을 파올로 로시가 넣었고, 후반전에는 2-2 로 흐르던 치열한 경기에서, 파올로 로시가 결승골을 터뜨립니다. 경기는 다소 밀렸지만 결국은 이탈리아가 3-2 로 승리. 파올로 로시가 3골을 모두 넣었습니다. 해트트릭이었지요. 지금까지도 브라질의 축구팬들 사이에서 파올로 로시의 이름은 금어로 여겨질 만큼, 브라질은 엄청난 충격의 패배였습니다.
로시는 작지만 강했고 매웠습니다. 기세를 탄 이탈리아는 4강 전에서 파올로 로시가 또 혼자 두 골을 터뜨리면서 폴란드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결승전에서도 로시가 선제골을 넣으면서 이탈리아의 공격을 주도, 서독을 3-1로 완파하면서 감격의 월드컵 우승트로피를 따냅니다. 44년 만이었습니다. 파올로 로시는 매우 중요한 경기들에서 6골을 기록했으며, 득점왕에 선정됩니다. 1982년 유럽최우수선수상에는 단연 파올로 로시가 1위를 차지합니다. 영웅의 부활이었습니다. 마라도나가 신의 아들로 불렸다면, 그에 앞서서 파올로 로시는 황금의 아들로 불리며 명예를 회복하게 됩니다.
월드컵 이후에는, 유벤투스에 몸담으면서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어느정도 공헌했지만, 무릎이 좋지 않아서 20대 후반 무렵에는 움직임이 많이 저하되고 말았습니다. 현역 마지막에는 AC밀란과 베로나를 거쳐서 31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것으로 파올로 로시의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혹자는 파올로 로시는 활약할 운이 좋았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운이라는 것도 실력이 없으면 따라오지 않았겠지요. 그가 세계 축구계의 정점을 맛볼 수 있었던 것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상, 승부조작 등 여러가지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또 자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들을 짊어지고 신화를 썼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치며 유튜브 영상을 덧붙입니다. 앞으로도 이탈리아와 브라질이 맞붙을 때면, 1982년의 이야기들이 한 번씩 회자될 것 같습니다. 언제나 재밌게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8. 08. 14. 초안작성.
2020. 06. 23. 가독성 보완 및 동영상 업데이트 - 축구팬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