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독교

1. 나는 아무 가망도 없습니다.

시북(허지수) 2026. 4. 26. 02:08

 제목 - 나는 아무 가망도 없습니다.

 

 순전한 기독교 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실재적 법칙이 등장합니다.

 나는 이 법칙을 읽다가 "나의 쓸모없음"을 또렷히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선함 은,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가끔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건넵니다.

 하지만 현실 속의 나는 있는 힘껏 부정합니다.

 "나는 안 돼..."

 "이미 늦었어..."

 "귀찮아...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테야!"

 

 그렇게 점점 게으름에 물들어 갑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는,

 "나쁜 그리스도인" 혹은 "비참한 그리스도인" 의

 스스로를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가 되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을 때,

 전해지는 소리는 "회개하라" 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소리 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있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는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던 저에게

 하나님은 "쿵" 하고 저를 들어서 늪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욥기의 내용을 빌릴 필요는 없지만,

 충분했던 건강, 기쁨의 일터, 좋은 사람들, 앞으로의 꿈

 까지 동시에 잃었습니다.

 

 청춘 시절 처럼, 책에서 답 (또는 위안) 을 구하려고 끝없이 스크롤을 넘기다가.

 그만 포기해 버리고, 기독교 앞에 다시 서 있습니다.

 대체로 기독교인들은 직선과 빠른길이 지옥으로 가는 길임을

 아주 오래전 세월부터 세게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해피 라이프"를 전부 거두어 간 까닭이 있을꺼야.

 

 나는 지나치게 교만했던 것이 아닐까?

 나아가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빠진 자리에도 세계는 변함없음을 선명히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되물었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조건에서,

 

 너는 성경말씀에 나온 삶처럼 - 하루를 감사하고, 삶을 노력할 것인지.

 아니면 무기력한 인간임을 깨달을 것인지.

 저는 철저하게 후자가 되어갔습니다.

 

 괴롭습니다. 살려주세요. 라는 기도가 백 번쯤 넘었을 무렵에야...

 나는 어떤 찬송가의 가사가 작게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여전히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아름다운 기준을 보며,

 괴로움에 시달리는 모습을 고백합니다.

 

 전혀 따라가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무 가망 없는 인생이기에.

 

 어쩌면 남은 인생에서 주님이 말했던 삶을,

 생각에서 그치지 말고,

 조금이라도 살아내는 것으로 삶이 바뀌어 간다면.

 

 그것이 내가 이루어가는 "회개"가 아닐까,

 첫 번째 글은 이렇게 마무리 지어 봅니다.

 

 선함의 길을 알고서도 좀처럼 선택하지 못하는

 씁쓸한 인생.

 

 삶의 어떤 모습이,

 예컨대 피아노와 닮은 구석이 있다면,

 잔뜩 긴장한 채 힘으로 치려고 할수록

 오히려 불편해진다는 것이지요.

 

 나의 힘으로는, 존재가 나날이 병들어 가는

 불완전한 시간들. 시들어 가는 시간들.

 

 그렇기에 시편의 말씀들 처럼,

 인도가 필요하고, 공급이 필요하고, 묵상이 필요한 인간.

 

 마음의 선한 길 을 인정한다는 것이 신성함 이며,

 그 길을 끝내 살지 못한다는 것이 비참함 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인 으로서 미친듯 광인이 되어 괴로워하다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끝없는 우울과 절망감 앞에서도 그러나 포기하지 않음은,

 하나님은 내 생각 끝 - 아득하게 바깥에 있을테니,

 

 이 무섭고 아픈 불구덩이를 지나,

 삶이 풍성한 연주소리가 될 때.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남겨 놓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2026. 04. 26.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