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스타열전

#91 리즈 시절의 축구전설, 캡틴 빌리 브렘너

시북(허지수) 2020. 7. 14. 13:02

 

 이 글을 갱신하는 2020년 현재 리즈가 다시 1부 리그에 진출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세월은 참 즐겁게 흐르기도 하네요. (불과 10년 전이었나요. 처음 초안을 작성할 때만 해도... 리즈는 ㅠㅠ.... 아, 리즈여! 오늘날 3부리그로 추락한 리즈유나이티드 입니다 라고 썼네요.) 여하튼!

 

 전성기 시절 리즈는 굉장한 포스를 자랑하던 명문팀이었습니다. 1970년대 챔피언스컵(현재 챔피언스리그)에서 결승전 무대까지 올라갔던 리즈. 그 화려하고 강렬한 포스 때문에, "리즈 시절" 이라는 말도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화려했던 시절이라는 말을 의미하지요. 1부리그에 좀처럼 명함을 못 내미는 리즈가, 챔피언스무대 결승까지 올라갔던 팀이라는 사실은 이제 아련한 옛추억이 되고 말았네요. 오늘은 그 시절 스타선수였던 빌리 브램너에 대하여 한 번 알아볼까 합니다.

 

 프로필

 

 이름 : Billy Bremner
 생년월일 : 1942년 12월 9일 (작고 1997년 12월 7일)
 신장/체중 : 166cm / 63kg
 포지션 : MF
 국적 :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 54시합 3득점

 

 화려했던 "리즈시절"의 중원을 지배하던 사령관, 빌리 브렘너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키 166cm 입니까 (웃음) 하지만, 빌리 브렘너는 거인이었습니다. 리즈의 거인이지요. 사람을 외모만 보고 쉽게 판단해서는 잠재력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뭐, 마라도나도 166cm 였고요. 아무튼, 작은 키 때문에 굴욕을 맛보았던 브렘너였는데요. 이야기 출발합니다.

 

 입단테스트를 아스널, 첼시 등에서 받았던 브렘너 였습니다만, 작은 키도 좀 걸리고, 결국 테스트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리즈에 입단할 수 있었는데, 1960년 1월, 만 17세의 영건 브램너는 이렇게 리즈에서 축구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영광의 "리즈시절"이 쉽게 찾아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브램너는 초창기시절 1부리그에서 겨우 11시합 뛰어봤습니다. 왜냐구요? 팀이 "강등" 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반 눈물의 2부리그 생활이 시작됩니다.

 

 인생은 기회의 연속이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인 "하나의 길이 닫히더라도, 또 하나의 길은 열린다" 라는 것을 음미해 봐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리즈팀의 강등은, 빌리 브렘너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10대였던 브렘너에게 더욱 많은 출장 기회가 찾아왔고, 2부리그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쳐나가며 리즈에서 일약 중심선수로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1961년에는 30대 젊은 감독 돈 레비 감독이 리즈에 취임하게 됩니다. 돈 레비 감독은 이 때부터 10년 넘게 리즈를 지휘하며 화려한 시대를 이끌었고, 훗날 명장으로 평가받게 되지요. (나중에 잉글랜드 대표팀까지 이끌게 됩니다)

 

 수년간의 2부리그 시절이 끝난 것은, 1964년이었습니다. 그리고 화려했던 "리즈 시절"이 시작됩니다.

 

 1968년 리그컵 우승, 1969년 감격의 리그 첫 우승, 1971년 FA컵 우승, 1974년 2번째 리그 우승을 기록합니다. 리즈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잉글랜드의 손꼽히는 강팀이었습니다. 65,66,70,71,72년에는 아쉽게 우승을 놓쳤지만 리그 2위를 기록했습니다. 국제무대에서도 잘 찼습니다. UEFA컵의 전신인 "인터시티 페어즈컵" 에서도 2차례 우승을 기록하며 위상을 높입니다.

 

 물론 리즈에는 브렘너 외에도 훌륭한 선수가 많았습니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여하튼 브렘너는 당시 주장이었고, 강렬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었기 때문에 특별히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 스타일도 조금 언급해야 겠습니다.

 

 우선 성격 자체가 피가 막 끓어오르던 선수였어요. 경고도 종종 받았고요. 투쟁심이 강했습니다. 장점으로는 엄청난 체력과 뛰어난 패스 감각이 손꼽힙니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는지, 그 뜨거운 투지 때문에, 그라운드의 호랑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재밌는 에피소드로 1974년 당시 잘 나가던 리버풀의 에이스 케빈 키건과 맞짱을 떠서 둘 다 퇴장당한 유명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불같은 성격하면 떠오르는 캡틴 "로이 킨"처럼 확실히 투지가 넘치던 빌리 브렘너 였어요.

 


  1974-75시즌의 챔피언스 무대도 리즈에게는 참으로 대단했던 시절이었습니다. 4강전에서 강호 FC바르셀로나를 잡아내면서 결승까지 올랐던 것입니다. 당시 바르샤에는 토탈사커의 전설 요한 크루이프가 뛰고 있었습니다. 빌리 브렘너는 요한 크루이프의 활약을 집요하게 봉쇄하면서, 승리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발군의 퍼포먼스였지요. 그렇게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독일팀이었어요. 결승전은 바이에른 뮌헨과 리즈 유나이티드의 진검 승부가 펼쳐집니다. 뮌헨은 또 어떠했습니까, 레전드 베켄바우어를 시작으로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등 화려한 독일 대표팀 멤버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리즈와 브렘너는 그러니까, 전성기 시절 - 1974년 월드컵 우승팀(독일/베켄바우어등)과 준우승팀(네덜란드/요한크루이프등)의 에이스들을 상대했던 것이지요. 이런 초특급 주장들이 이끄는 최강팀들과 맞붙어야 했음에도, 리즈는 충분히 강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4강에서는 "무실점으로 4강까지 올라왔던 거함 FC바르셀로나"를 기어이 침몰시켰어요.)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승전 경기 결과는 0-2. 리즈 유나이티드의 패배였지요. 74년 월드컵 우승팀의 정예 멤버가 포진한 바이에른 뮌헨은 정말 강팀이었습니다. 70년대 중반에 챔피언스무대에서 무려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면서, 유럽 최고봉의 명성을 날리던 팀이었으니까요. 아쉽긴 해도, 리즈는 충분히 잘 싸워주었고, 유럽 최고의 팀을 겨루는 무대에서 결승까지 올라섰던 이 화려했던 리즈의 지난 이야기들을 우리는 "리즈 시절"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자국의 리그에서 조차 밀리면서, 하부리그에서 뛰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정말 안타까움 그 자체입니다.

 아! 재기할 수도 있으니 그 점도 재밌습니다. 후후.

 

 또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로도 빌리 브렘너는 주장을 맡았으며, 상당히 잘 해나갔습니다. 1974년 월드컵에서 조별리그부터 강호 유고, 브라질 등과 같은 조가 되었다는게 안타까웠지요. 브라질, 유고, 스코틀랜드는 나란히 1승 2무를 기록했는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는 득실차에서 1골 밀리면서 3위로 내려앉았고,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스코틀랜드 대표로서 54시합을 출장했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하며 마쳐야 겠습니다. 빌리 브렘너는 1959년부터 76년까지 리즈에서 587시합이나 출장했으며, 90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선수생활 말기에 다른 팀에서도 잠깐 뛰었지만, 리즈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쳐나갔던 캡틴이었지요. 2006년 12월 9일, 그의 탄생일을 기념하며, 리즈의 홈경기장 앞에 빌리 브렘너의 동상까지 세워졌습니다. 리즈의 대선배 브렘너는 97년 12월에 심근경색에 의해서 향년 54세로 생을 마칩니다. 빌리 브렘너의 노래까지 있을 만큼, 위대한 선수였던 그가,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평소보다 좀 더 이야기가 길어졌던 것 같습니다.

 

 인기도 많았기에, 유튜브에서 그를 기념하는 영상들도 존재합니다.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빌리 브렘너는 앞으로도 이야기가 전해질 훌륭한 선수 중 한 명이었으며, 리즈에게는 영원한 레전드로 기억될 것입니다. 늘 애정과 격려를 보내주시는 분들 덕분에, 많이 쓸 수 있었고 갱신도 해나가고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언제나 전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2010. 01. 24. 초안작성.

 2020. 07. 14. 가독성 보완 및 동영상 업데이트 - 축구팬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