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글을 쓸 수 있고, 생각보다 무척 즐거운 글쓰기가 되고 있는, 추억의 이야기들. 어쩌면 요즘 제가 피곤한 생활에 쫓기다보니, 이런 추억을 생각해보면서 조금이나마 삶의 위안을 얻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지난 번에 개인적으로 힘겹게 택틱스오우거의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까, 이제는 그야말로 수 많은 리뷰들을 써내려갈 자신감이 조금 들더군요. 그 중에서도 SFC말기의 명작 SRPG 하나 또 소개해볼까 합니다.
1996년 2월 발매한 스퀘어의 SRPG, 바하무트 라군 - バハムートラグーン (BahamutLagoon) - 입니다. 지금에서 알게되었는데, 판매량도 무려 53만장. 생각보다 많이 팔았었네요. 현재는 역시 Wii 800포인트로도 플레이 가능하게 되었네요. 후기 슈퍼패미콤 시대에는 그야말로 역작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PS2 초기와 PS2 후기의 작품들이 그래픽 수준들이 다른 것과 비슷하겠군요. 바하무트 라군의 경우도 네 가지 중요 요소라 볼 수 있는 스토리, 시스템, 그래픽, 음악이 굉장히 훌륭한 수준이었습니다. 추억의 영상 한 편 덧붙이고 이야기를 좀 더 이어나가겠습니다.
기억나는 신기한 시스템 중에 하나는, 맵의 지형을 마법으로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이었습니다. 풀밭을 태우는 것은 물론이고, 벽을 부순다던가, (- 뭐 이 정도는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있어왔습니다만) 특히, 다리가 하나 뿐인 강 앞에서 아군이 여러 부대 대기하고 있다면, 슈○로봇○전 같은 작품 들은 줄줄이 차례를 지키며 한 유닛씩 건너가야 하겠지만, 바하무트 라군에서는 얼음 마법 몇 방으로 강을 모조리 얼린 후에, 한꺼번에 얼린 강 위로 도하 하는 재밌는 전개도 가능했어요.
전체적으로 수작이다보니, 한 번 클리어 하면, 굉장히 인상이 강하게 남는 작품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에스트폴리스 전기, 크로노 트리거 같이 DS로 이식되는 경우도 있고, 풍래의 시렌처럼 후속작이 휴대용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또 드래곤퀘스트 처럼 리메이크 이식되는 경우도 있는데, 여하튼 후속작이나, 리메이크를 해주면 좋을텐데...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택틱스오우거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절대 악"이라는 단순한 개념이 없습니다. 저마다 신념과 지켜야 할 중요한 것, 지키고 싶은 사람, 이런 까닭을 안고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과 마주하고 맙니다. 인상적인 것은 일반적인 게임스토리 라인에서는 보기 드문, 매우 이색적인 여주인공의 반전. 보통은 여주인공이 잡혀가면, 남자주인공이 열심히 구하러 가고, 끝내 구해내고 해피엔딩에 이르지 않습니까~ 영화를 봐도 그렇고요.
하지만 바하무트 라군에서는 잡혀간 여주인공이 제국의 근사한 장군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서... 쿨럭. 상당히 현실적인 묘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군대간 2년을 기다리기 힘들 듯이, 잡혀있는 기간동안 능력있고 성실한 훈남이 잘 해준다면, 주인공이고 뭐고 생각나겠어요... 갈등할 수도 있겠지만, 뭐, 한 때의 애절했던 사랑도 지금의 현실 앞에 무너질 수 있는 거지요 -_-;;;) 하여간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플레이어들은 당황스러운 후반의 전개 앞에서 슬픔을 맛볼 수 있습니다. 누가 게임은 몽땅 해피엔딩이라 하는가!!! 두둥. 절대로 여주인공 이름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넣지 말기 바랍니다. 일본어를 조금 한다는 분은 필경 자신의 그 어리석은(!) 선택에 당혹할 겁니다 (...) 쿠흑.
종합하자면, 캐릭터성과 관계의 이야기들을 잘 살린 수작이었고, 상쾌하게 즐길 수 있으며, SFC 최고수준의 그래픽과 훌륭한 사운드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전투에서의 전략적 완성도 면에서는 택틱스오우거(이쪽은 전략적인 신게임;)와 비견할 수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재미를 잘 살리고, 캐릭터를 키워나가는 맛이 좋기 때문에, 충분히 훌륭했습니다. 아마존 리뷰에서도 SFC시절 SRPG 최고의 명작 중 하나 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동의하는 바입니다. 별점을 굳이 준다면 ★5 주겠습니다!
막장스토리에서 평가가 엇갈리지만, (예컨대 게임은 대단한데 트라우마는 어쩔꺼냐 등... ㅜㅜ) 뭐, 천편일률적인 남녀관계도 식상하지 않습니까. 하하. 확 깨는 여주인공도 간혹 있어줘야 하지요. [덕분에 여주인공 요요는 스퀘어3대악녀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달고 있으며, 바하무트라군으로 구글에서 검색하면, 공략, 요요, 리뷰, 이렇게 세 가지 연관어가 뜹니다. 그야말로 공략만큼 중요하게 이름을 날리는 굉장한 여성이지요. 큭!]
뻔한 스토리에 반기를 드는 파격적인 전개와 용을 키운다는 독자적인 참신한 요소를 잘 살린 바하무트 라군. 누가 뭐라고 해도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엔딩을 보고 느낀 감상에 어떤 아마존 리뷰어는 그러더군요. "단순한 해피 엔드는 당연히 아니었고, 게다가 눈물이 나온다든가 그러한 일도 아니었어요. 그러나 다만 다른 의미로 슬퍼집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결국 인생, 그리고 인간이란 사실 이럴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슬퍼진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배신, 쓰라림... 2AM의 노래처럼 남자는 "죽어도못보내"를 부르면서 달려가지만... 이미 여자는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고 있었으니...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냉정한 현실을 알아가고 마주한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기대대로 움직일꺼야"라는 환상에서 벗어난 다음 느끼는 슬픔이랄까. 이런 여운은 꽤 강렬한 것이라서, 아까도 말했듯이 트라우마를 주는 게임이었어! 라고 절규하기도 하고요. 하하. 이 쪽도 일본어 수준이 나아지면, 한 번 더 플레이 해보고 싶은 작품이었는데, 결국 그 이후 14년이 지난 지금에도, 다시 플레이할 기회는 없었네요. 여러가지로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많아서 좋아했고 참, 재밌었는데... 추억에 잠기니 그립기도 하고, 그렇네요. 이제 리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덧붙이며. 요요를 위한 변명.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들었던 요요 왕녀지만, 현실적으로 그를 재검토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간혹 있습니다. 여자아이에 불과했던 여주인공은 초반부에서 미숙했던 정신을, 결국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성장해 나가고 커가는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지요. 인상적인 장면을 돌아보면 "요요는 몸과 마음이 고독속에서 사로잡혀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장군과 사랑을 주고 받을 때, 주인공를 그립게 느끼기도 하고, 주인공에게 응석부리던 것을 생각하기도 하는 장면은, 그만큼 그녀가 외로웠고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주인공을 거절하고 바람났다는 전개에서 많은 유저들이 분개했지만... 말이지요. 또 혹자는 스톡홀름 증후군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 그래도 저도 요요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주고 싶은 마음은 약간 있습니다. 외로움 앞에서 흐느끼는 히로인의 마음을 그 자리에서 위로해 줄 수 없었던, 주인공의 현실이 다만 슬펐던게 아닐까 합니다... (이러다가 악플 달리겠다 -_-;;;) 그럼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