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04년3월21일/여호와께서 네 앞서 가신다(청년설교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5. 1. 00:12

- 2004년 창신교회 청년부에 계실 때의, 홍종일 목사님 설교문.

오늘은 바로 기드온 직전의 사사였던 드보라와 바락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또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누구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징치하시는고 하니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왕 야빈에게 그들을 파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의 왕을 섬겼습니다. 지금의 이라크정도되는 나랍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서 가나안으로 강을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실로 메소포타미아는 이스라엘 인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모국쯤 됩니까? 미국에게 영국과 같은 의미를 줍니다.
글쎄 그정도 나라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모압왕입니다
사실 모압은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엄청 작은 나라입니다. 또 이스라엘보다도 작은 나라입니다.
슬슬 자존심이 상합니다. 이런 적은 나라를 섬기다니.....
그런데 이번에는 모압도 아니고 가나안의 하솔왕를 섬긴답니다.

사실 이 하솔왕 야빈에 관한 기사는 여호수아11장에도 등장합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하솔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진멸하고 왕은 목베었으며 성읍은 불살랐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바로 그 하솔이 다시 강성해져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은 도시국가체제였기 때문에 통일왕국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야빈은 가나안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하솔이라는 도시를 다스리는 왕이면서 북 가나안의 영도자격 인물이었던 같습니다

이정도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존심이 좀 상합니다.
이런 조그만 도시국가에게도 이기지 못하고 이들을 섬기다니!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조금 더 읽어나가면 조금 다른 기사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군대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야빈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야빈왕은”이란 말로 번역된 곳을
히브리원문에는 야빈왕이 아니라 시스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걸로 보아서는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고 괴롭게 한 자는
하솔의 왕 야빈이 아니라 그의 군대장관인 시스라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정도면 이스라엘이 얼마나 한심한 상태에 빠져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일개 도시국가의 왕도 아니라 그 자의 심복에게 굴종하고 학대받는 신세!
정말 비참합니다.

이같이 이스라엘은 한번 씩 범죄할 때마다 점점 더 추락해서는 이제
조그만 군사집단에게도 학대를 받는 무기력한 상태로 빠져버렸다는 겁니다

우리는 [북으로 간 단지파]에서 이스라엘의 단지파가 북으로 간 이유가
골짜기를 차지하지 못해서이고 골짜기로 진출하지 못한 원인이
철병거가 무서워서 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무시무시한 철병거가 무려 900승이나 있다는 겁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사실 하로셋은 중요한 가나안의 철생산지 였습니다.
하로셋이란 이름의 뜻은 숙련된 기술자, 공교한 장인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는 정교한 철장들이 많이 살아서 이들이 철병거를 많이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제 시스라가 바로 이 하로셋에서 철병거 900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었단 말입니다
이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이스라엘은 야빈을 섬긴것입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이스라엘은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는
그에게 부르짖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심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왜 부르짖었겠는지를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 성경에는 심히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부르짖은것 같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부르짖은것 뿐만 아니라 철병거때문에도 부르짖었다고 나와있습니다.
즉 철병거 구백승은 자기네의 힘으로 이겨내기에 너무나 어려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이 굳어서 완강한 백성들이라 자기네가 할수만 있다면
쾌락의 여신을 섬기며 그냥 그렇게 지내고 싶은데 철병거 앞에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하나님앞에 다시 돌아온것입니다

그 때에 여선지자 이며 한 사람의 아내였던 드보라가
에브라임 산지의 종려나무 아래에서 재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사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20년간 고통받을때도 사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참 사사가 무언지부터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사사는 우리말로 하면 판사정도의 지위입니다. 그리고 비상시에는 군대지휘관을 겸하였습니다.
또는 사람에 따라 왕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드보라는 아마 판사의 역할을 한것 같습니다

드보라는 납달리지파의 바락을 군사령관으로 삼으려고 그를 소환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이니 일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볼산으로 이끌어가라고 말합니다
우리 본문에는 이끌어간다는 표현이 나와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이 표현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20년간이나 시스라의 철병거가 무서워서
죽은듯이 그를 섬겼지만 이제는 힘없는 백성들이 마침내 일어서서 다볼산에 모이려합니다

그러나 드보라가 일만명의 군사를 모집해서 준 것은 아닙니다.
바락에게 납달리지파에게 가서 일만의 군사를 모아서 다볼산으로 이끌고 가라고 합니다
참 정말 곤란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까지 죽은듯이 있었던 노예상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스라의 철병거와 싸우게 한다는건 정말 쉬운일이 아닙니다
여기 '이끌다'는 동사는 히브리어 ‘마솨크’입니다

이 말은 강력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인것을 볼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싸우기 싫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바락은 눈물로 호소해서 일만의 군대를 모집하고 다볼산으로 그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다볼산!
산이기 때문에 철병거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해발400M의 작은 산에 모여서 이들은 지금 오들오들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표징을 바라면서

왜냐고요
그것은 하나님이 시스라의 철병거와 군대를 기손강으로 이끌겠다고 하시고
그들을 네 손에 붙이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붙이셨는데 이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자 야빈과 그 군대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 전에 그 강력한 철기군단을 기손강으로 이끌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이끌다’는 ‘마솨크’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바락과 하나님의 신인 합작을 보여줍니다

“네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다볼산으로 가면
나는 시스라의 군대를 기손강으로 이끌겠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하실 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혼자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도구인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을 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에 쓰임받는 사람에게 한없는 영광과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그 기회는 처음 드보라에게 왔다가 다시 바락에게로 온 것입니다
단지파의 남자들이 못한 일을 여자에게 시키셨는데
다시 남자의 손으로 철병거를 무찌르는 임무가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바락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않으면 내가 가지 않겠다”
이 사람의 고충은 알겠습니다
단지 싸움밖에 할 줄 몰랐던 이 장군은 하나님의 명령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드보라만한 명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드보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확신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내가 싸움터에 같이 가겠다고 이야기 하고는
그러나 이 싸움의 영광은 네가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시스라를 파시겠답니다

여기서의 여인은 드보라 자신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의 묘미입니다

여기서 보면 시스라나 이스라엘이나 모두다 하나님이 임의대로 팔고 붙이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의인은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시지만 악인 역시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의로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여하튼 바락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자기가 영광을 받지 못해도 드보라와 동행을 해야 한다는 바락 때문에
드보라 역시 바락과 함께 전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에 가서 군대를 모집하는 일입니다

모두 일만의 군대를 모집해야 되는데.......
10절에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에서 ‘부르니’는 ‘와야즈에크’라는 동사를 번역한 것인데 이 동사는 고난과 압제아래 있을때 도움을 애처롭게, 눈물겹게 부르짖을때에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바락이 이 일만의 군사를 모으기위해 얼마나 애처롭게 울부짖으며
고생해서 모았는지를 아시겠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시스라을 전혀 엉뚱한 여인에게 파시겠다고 말합니다

영광을 바락이 아닌 제 3의 여인에게 돌려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락이 그렇게 힘들여 모집한 군사는 군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백성의 남자들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시스라의 군사는 용사를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자 , 전혀 훈련받지 못하고 억지로 억지로 모집된 백성들과 역전의 용사들과 더하기 철병거 900승

이정도면 말안해도 우리는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스라와 철병거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답니다.
그리고 특히 시스라는 여인에게 파시겠답니다

자 과연 하나님은 어떤 놀라운 방법으로 자기의 예언을 이루실까요?
“겐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시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니”라는 말이 갑자기 나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바락의 전투로 이이기가 돌아갑니다

참 뚱딴지 같습니까?
우리도 성경을 따라 바락의 전투현장으로 가봅시다
자 이제 다볼산에 일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있다는 첩보가
시스라에게 신속하게 전해집니다
아마 시스라도 좀 놀랐을 겁니다
지난 20년동안 찍소리도 못하고 눌려살던 백성들이 갑자기 다볼산에 모여서 반란을 꾀하다니
좀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여하튼 이번기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댓가가 무언지를 가르키기위해서
자기의 모든 철병거와 온 군대를 다 모았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정도 군대는 필요치가 않습니다

용사 천명만 가도 이스라엘 백성 일만정도는 얼마던지 괴멸시킬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무구도 변변찮은 것들이 철병거가 무서워서 산속에 숨어 있는데
아 그래 그걸 무슨 반란군이라고 여길것 까지 있습니까
철병거가 무서워서 산아래로 내려오지도못하고........
이제 다볼산을 공격하기 위해 기손강으로 군대를 몰아갑니다
그의 자랑인 무적의 철병거900승과 함께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기손강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 기손강은 강이라기 보다는 와디입니다
우리말로는 마른하천, 가나안에는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데
우기에만 강에 물이 흐르고 평소에는 말라서 교통로로 이용되는 그런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손강바닥의 넓고 평평한 지형을 이용해서 철병거를 이동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지금은 건기때이므로 기손강에는 전혀 물이 없고 비가 올 예정도 없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지축을 흔드는 굉음을 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있는 다볼산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전차대의 위력에 겁먹고는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자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될까요?
14절에 보면 갑자기 드보라가 바락에게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과연 무엇을 보고 드보라는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한다고 자신있게 단언한 것일까요
그리고 바락은 과연 무엇 때문에 군말없이 군사를 이끌고 산을 내려간 것일까요?

사실 드보라는 기손강으로 몰려드는 비구름을 보았단 말입니다.
바락역시 그 비구름을 보았기 때문에 군말없이 산을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건기에 비구름이라니!
그러면 드보라가 보고 바락도 본 비구름을 대군을 이끈 시스라는 못본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으로 장수로 천기를 살피는것은 기본중의 기본아닙니까
더구나 지금 자기네는 강바닥으로 철병거와 군대를 이동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비가 오면 삽시간에 급류가 휘몰아치고 강바닥이 수렁이 되어 철병거가 바퀴가 빠지고
그래서 움직이기 어려우면 이스라엘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것을 과연 몰랐겠습니까
전 솔직히 그렇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만일 시스라가 그 정도도 생각지 못하는 장수라면 야빈이
그에게 철병거와 자기의 군대를 맡기고 의지할 리가 없을것이고
그런 사람밑에서 이스라엘이 20년 동안이나 학대를 당하면서도
꼼짝하지 못했을 리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나안의 주신이 누굽니까?
바로 바알아닙니까?
바알은 비와 구름, 바람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시스라는 비록 비구름을 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비가 되어서
자기네를 해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네의 신이 자기네를 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사람들이 여호와를 산의 신이라고 생각했던것과 마찬가지로
평지에서는 바알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자기네가 그렇게 열심히 섬겼던 바알은 절대 절명의 순간에
그들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산의 신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되시고 바알이 가지고 있는것 같았던
비와 바람과 구름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갑자기 닥친 물에 떠내려가고 겨우 기진맥진한 몸으로 강에서 탈출한 그들에게
이스라엘은 성난 사자처럼 달려들었고 그렇게도 강한 용사와 최신 장비로 무장된
시스라의 철기군단은 패주에 패주를 거듭하여
마침내 자기들의 고향인 하로셋으로 도망을 가다가 뒤쫓아온 바락의 군대에게
모두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아무도 이런 기상이변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비로 인하여 ,자기네가 평소에 그렇게 원하고 바랬던 그 비로 인하여
철기군단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시스라는 자기네 군대를 벗어나서 전차에서 내려서는 도보로 도망을 가지 시작합니다
그런데 가다가 이 사람은 자기네와 평소부터 우호적이었던 겐사람의 장막을 지나게 됩니다
아마 시스라는 모든게 틀어진걸 알고는 하솔왕 야빈에게 도움을 구하려 갈 생각이었던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헤벨의 장막이 바로 하솔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때문입니다

막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을 지나려 하는데 갑자기 야엘이 나가서 시스라를 부릅니다
우리 성경에는 들어오소서 들어오소서 라고 되어있지만
원문에는 돌이키소서 돌이키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걸로 봐서는 시스라는 이 장막을 지나서 계속 하솔로 갈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엘이 나가서 통과하려는 시스라를 불러서 자기의 장막으로 맞아 들입니다.
사실 전쟁에 패한 시스라는 이왕에 우호적인 족속이었다고 해서 겐사람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을때는 자기하고 친한 척 비위를 맞추려고
온갖 아첨을 늘어놓다가도 막상 자기가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병의 신세가 되었을때
어떻게 사막의 유목민을 믿는단 말입니까?

그런데 너무 간절하게 그리고 극진히 시스라를 영접하자 그만
시스라는 야엘을 믿고는 도망가던 도중에 잠을 청하게 됩니다
바로 이게 시스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야엘이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찍어서 죽여버렸다고 나옵니다
참 잔인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스라가 도망중이고 경황이 없더라도 여자의 몸으로
장막말뚝으로 관자놀이를 꿰뚫어 죽인다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목민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이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목민들은 보통 안주인이 터를 잡고 위치를 선정합니다.
그래서 먼저 말뚝을 박습니다. 그러면 남자들이 장막을 치는 형태로 삶을 영위합니다 .
그러므로 야엘 역시 항상 해왔던 말뚝질이라서 아마 익숙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막 죽이고 나자 바락이 야엘의 장막에 도착합니다
바락은 군대를 모두 전멸시키고는 뒤늦게 시스라가 없는 것을 알고 지금 허겁지겁 찾는 중인데....
이미 시스라는 야엘의 장막 말뚝에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전혀 엉뚱한 여인이 이번 전투의 제일 큰 공을 차지합니다

머뭇머뭇 거린 결과 바락은 가장 큰 공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이루어지더니
이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여인에게서 또 다른 성취를 봅니다

처음 우리는 남자들이 철병거 때문에 평지를 포기하고 산에서만 살다가
결국은 한 개의 지파가 그대로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도 못하는 일을 여자인 드보라가 맡았습니다

그러나 드보라 역시 여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바락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엘이라는 전혀 엉뚱한 한 여인의 손에 그 무적의 철기군단을 이끌던 시스라가
정말이지 어이없게 죽어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사사도 아니고 장군도 용사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유목민 집안의 안주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야엘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어느 날인가 야엘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주시키시고
야빈의 관할에서 우호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라 역시 오랜 이웃인 야엘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가 큰 일을 당하였습니다
즉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야엘을 먼저 보내셔서
결정적인 순간을 준비하게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철병거가 자기네의 섬기는 신 바알이 가졌다고 생각되어왔던 장기,
비와 구름에 의해 무너진것을 보았습니다. 즉 가나안인들이나 이스라엘 인들은
바알을 너무 과대 평가해 왔습니다.
실제로 바알이고 아세라고 전혀 도움이 되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은 전혀 능력이 없는 목석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러한 목석을 이용해 쾌락을 즐겨왔을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을 목도했습니다.
인간의 눈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그는 하십니다

왜냐, 그는 바알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늘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펼쳐집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나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일들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섭리의 역사의 주인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사랑의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안된다고 낙담하고 좌절하지만 말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기도에 무슨 돈이 들고 시간이 들고 큰 희생이 따릅니까?
괜히 기도하기 싫으니까, 어차피 기도해도 안될거라고 기도를 무시하니까
기도하지 않고 안된다 안된다 하며 걱정만하는 겁니다
조용히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우신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홍종일 목사 (現 정관영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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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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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아래부터는 시북군의 이야기 입니다.)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일종의 신앙공동체에 가깝다고 합니다. 차별화된 교리를 지키지 못하면 공동체가 침묵 속에서 그대로 붕괴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이교도와 섞이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민족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철저히 우리와 이방인을 구분지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막강한 영향을 가지고 있는 비바람의 신 바알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을 테지요.

1929년 시리아에서 이른바 우가리트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부분들이 실제의 일들을 기반으로 기록되었음을 증명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신으로 숭배되었던 바알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도 사실이었던 셈입니다. 말하자면 바알은 그 지역의 지존으로 추앙받았던 셈입니다.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자꾸만 헤어나오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화려한 바알에게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말하자면 바알은 나이트클럽에서의 묻지마 부킹에 이은 원나잇 만큼이나 아찔한 신이라는 것. 언제나 항상 추종자가 있는, 꺼지지 않는 대상인 셈입니다.

흔히 3S를 조심하라는 말을 과거에 많이 했습니다. 스크린, 스포츠, 섹스 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묻는다면, 셋 다 좋아한다고 그래서 빠져드는 것을 경계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영화와 게임 등 이른바 미디어를 좋아하고, 축구와 야구에 매우 열광적이며, 성적인 코드에 굉장히 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 좋은 것들을 조심해야 합니까. 오색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고 멋있고 즐겁고 근사하기에, 눈과 귀를 멀게 해서, 노예처럼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중요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순화하거나, 조작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포츠의 땀과 근성은 눈물날 만큼 멋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더 이상 유럽이나 미국처럼 데모를 하지 않는 것은, 이미 3S가 더욱 막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데모나 투쟁은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바쁘고, 혹여 소송이라도 당할 수 있으므로 권력 앞에 모두 고개를 조아려야 합니다. 아무리 삶이 팍팍하고 힘들어져도, 3S가 밤마다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학대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학대적인 사회에서 일부는 자신의 못남을 탓하다가 마음의 병이 들어서 죽음의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차라리, 본능적으로 남탓이라도 해둬야 이 절망적인 상황이 이해받을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이 생기고, SNS가 활성화 되었고, 새롭게 연결된 세상은 만들어졌습니다. 정말 21세기 같습니다. 당신의 삶은 얼마만큼 행복해 졌습니까? 한 번 뿐인 인생을 주인으로 보내고 있습니까? 저는 최근 "요즘 정말 살맛나는 멋진 세상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구동성으로 "힘들어 죽겠어", "스트레스로 멘탈붕괴 중", "그저... 막막하다" 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오늘 무슨 생각으로 대체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오늘 대체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혹자는 군자를 두고 자율적 인간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꿈꾸던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오늘 한 걸음 내딛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하게 되는 5월 입니다. / 2012.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