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04년3월28일/주님은 왜 무화과를 저주하셨나?(청년설교1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5. 5. 20:09
- 2004년 창신교회 청년부에 계실 때의, 홍종일 목사님 설교문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전의 승리의 행진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기록한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그루 무화과 나무 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주님의 사랑과 고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예수님은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얻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는 ‘가난한자의 양식’이라고 불려집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누구나 이 무화과를 따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본시 무화과는 보통 3월말에 싹이 나서 5,6월에 열매를 맺고 8-10월 사이에 수확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4월경에 열매를 구한 것은 시기적으로 너무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는 열매가 먼저 나고 난 다음에 잎사귀가 나거나

적어도 잎과 동시에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푸른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열매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멀리서 잎사귀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하여”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역시 이런 희망을 가지고 무화과를 살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나무에는 비록 잎사귀는 무성했지만 어떤 열매도 있지 않았습니다.

자 여러분
이렇게 본다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은
조금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문의 저자인 마가역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13절후반부에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그렇습니다.
그때에는 무화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신적 예지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셨나,
제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나무를 저주하시다니 등등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무화과나무는 우리가 오늘 이야기할 내용의 시발점이 될뿐입니다.
사실 이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는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급박성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서는 이 사건뒤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에
일부러 눈을 감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2.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얻으려 하셨는지에
한번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본문과 같이 무화과 저주사건을 다룬 마태복음21:18절에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른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때에 시장하신지라”라고 기술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은 “이른아침” 과 “시장하신지라” 라는 구절입니다.
“이른아침”은 히브리어로 ‘프로이’라는 말로 새벽3시에서 6시사이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침식사를 하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루에 두끼만을 먹었습니다.
솔직히 하루에 세끼를 제대로 먹게된 것은 비교적 근세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끼를 먹었던 옛날에 한끼를 굶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세히 본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끼만을 굶지 않았을 확률이 아주 큽니다.
두끼를 굶었을 확률이 있다는 거죠

본문 11절에 “때가 이미 저물매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과 마태21:18절의 “이른아침과 시장하신지라” 라는 구절을 연계시켜서 로버트선이란 학자는
예수님과 제자들은 베다니의 길거리나 야외에서 노숙을 했을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주님이 베다니의 어떤 집에서 유숙을 했다면 당연히 그들이 주님에게 아침을
대접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만일 노숙하셨다면
아마 저녁도 드시지 못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그러면 왜 주님은 노숙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베다니에서 아무도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았기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맞아들이는 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셔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배고프시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수 있습니까?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덩이로 장정만 5000이 넘는 무리를 먹이셨던 능력의 주님께서.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배고프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발휘하시는 분이지만
자기를 위해서는 돌로 떡한덩이도 만드시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높고 영광스런 하늘보좌도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분이시며
33년간 이땅에서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그런 사랑의 주님이셨습니다.

4.사람들은 하루만에 그들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불과 하루전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실 때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벳바게사람들은 주님에게 나귀새끼를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의 등에 펴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땅에 펴며, 가지를 꺾어서 깔았으며
순례자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행렬을 열렬히 환영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앞뒤를 따르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소리높이 외치며 주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왕으로 대접했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입성으로 소동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불과 하루전인데 지금 주님은 몸 누일곳을 찾지 못하시고
야외에서 유숙하시며 아침을 굶으시고 시장하셔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려 하셨던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 오는 우리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 유대인들이 주님을 자기네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옛적 다윗임금때의 강력한 나라를 만들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드리며,
겉옷을 땅에 깔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고 따랐지만
주님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시고 단지 11절의 표현대로 단순히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는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나가시”고 말았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주님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주님을 환영한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들의 기대대로 로마군인들을 몰아내지도 않고
왕좌에 앉아서 제2의 다윗왕국도 선포하지 않고
단순히 성전을 둘러보시고는 나가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정치적환상이 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로마당국의 분노를 유발한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그분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험할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아침에 태도를 돌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5.베다니까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여러분
이 베다니에는 예수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려주신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신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던 베다니조차도 주님에게 아무런 유익을 구할수 없다고
판단하자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른새벽에 무화과 열매를 찾으시게까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베다니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성으로 종려가지를 흔들며 동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아서 그분을 길거리에서 유숙하게도 하지 않았고
하룻밤 잠자리와 한끼 따뜻한 식사를 아끼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주님을 외면한 적이 없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우신 사랑,
영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높고 영광스런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오늘 이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는데,
마지막 피와 물 한방울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쏟아주셨는데
지금 우리는 과연 주님을 어떻게 기념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내게 유익이 되면 그 앞에서 온갖 죽는 시늉까지 다하다가
주님이 내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냉정하게 주님을 배반하고 돌아서는 2000년전 유대인들 같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무화과 한그루에서 알 수있듯이
사랑하셨지만 사랑받지는 못하셨던 주님을 생각하는 그런 부활절
최후의 순간에 자기의 사랑하는 이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셨지만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그런 부활절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홍종일 목사 (現 정관영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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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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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아래부터는 시북군의 이야기 입니다.)

목사님의 부활절 맞이 설교. 2004년 당시나 2012년 지금이나 핵심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모처럼 지난 번에 못 달았던 코멘트를 덧붙이자면, 과연 사람들의 행동하는 형태는 시간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딱 잘라 말해서, 도움 (정확히는 이익) 이 되면 가까이 하고, 도움이 안 되면 멀리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현대사회는 이것이 극대화가 된 것이 아닐까 가끔 염려합니다. 이익을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는 능숙합니다. 심지어 회사라는 것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모임으로 정의되기까지 합니다.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손대서는 안 되며, 이익이 되지 않는 다면 존재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길을 간다는 것은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일상으로의 초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익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을 하고,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는 예배 같은 의식을 합니다. 은혜라는 선물에 매일 감격할 수 있고, 힘을, 가진 것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쓴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것이 인간을 기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참 인간이란 생각할 수록 신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