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5월27일/다윗과 골리앗(사무엘상17:1-5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6. 3. 21:1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5월 27일 주일 예배

다윗과 골리앗 (사무엘상17:1-58)

오늘 설교의 제목은 다윗과 골리앗입니다.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말 유치찬란한 제목입니다. 마치 유년부 설교제목같지요.

이 제목을 듣는 순간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아주 자세하게. 그리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긴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른이 된 지금은 설교를 하기도 듣기도 그런 좀 유치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다윗과 골리앗을 다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정말 더 깊은 ,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더 깊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1.블레셋의 침공
본문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에베스담밈’에 진쳤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왕 사울이 백성들을 이끌고 이에 대항하기위해 맞은편인 ‘엘라’골짜기에 진을 칩니다.
보통 쳐들어 온 쪽이 침략을 받는 쪽에 비해 힘이 셉니다. 자신이 있으니까 쳐들어 온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여기서는 약세입니다.

중간에 골짜기가 있고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양쪽 산지에 진을 치고 마주보며 맞서고 있습니다. 전면전이 일어나기는 좀 어려운 지형입니다. 중간에 골짜기가 있거든요. ‘엘라’는 ‘상수리 나무’란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골짜기는 건천을 뜻하는 ‘와디’입니다. 그러니까 비가 오면 하천이 되지만 평소에는 물이 말라버린 골짜기란 말입니다. 여하튼 양측은 산지에서 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맞서고 있습니다.

지형상 전면전이 어려워서 블레셋에서는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자기의 군대를 대표하여 상대방 군대와 싸워 승패를 결정짓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챔피온’이라고 표현했네요. 한마디로 블레셋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본문에서 주연은 누구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다윗이지요. 그리고 다윗의 상대역은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이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주인공과 거의 비슷한 비중을 가집니다. 보통 영화에서 주인공과 악당이 서로 싸웁니다. 악당은 엄청나게 힘이 세고 무시무시하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결국 주인공에게 죽지만 출연횟수는 주인공과 거의 비슷합니다. 사실 엄청나게 힘센 악당이 죽으면서 주인공의 이름을 높여주고 그리고 바로 이야기가 끝이나잖아요.

오늘 본문에도 다윗과 골리앗이란 두 인물이 대결을 펼칩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정말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있습니다. 막연히 생각한 골리앗의 이름이 본문17장에는 딱 두 번만 나옵니다. 나머지는 ‘골리앗’이라고 부르지 않고 ‘블레셋사람’ 또는 ‘그 블레셋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이란 이름이 무려 30번이나 나오는데 비해서 너무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에서 이름은 단순히 부르는 호칭을 넘어서 그 사람의 내면이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악당 골리앗의 이름이 겨우 두 번 언급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골리앗의 인격을 무시하고 있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는 거대한 육체와 완벽한 무장을 갖춘 챔피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두 번만 이름을 부르고 나머지는 그냥 “블레셋 사람” 또는 “그 블레세 사람”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거든요.

2.골리앗
골리앗의 뜻은 ‘방랑자’입니다. 그는 ‘가드’사람으로서 이 가드지역은 거인족인 ‘아낙’자손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골리앗이 아낙자손의 피를 이어받았으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골리앗의 이름은 두 번만 언급한 대신 그의 무장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의 신장, 키는 여섯 규빗 한뼘 이랍니다. 한 규빗이 보통45.6cm를 말하기 때문에 그의 키는 대략290cm이상이라는 말입니다. 4절에 골리앗의 고향하고 키를 기록한 다음 성경은 무려 7절에 걸쳐서 그의 무장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차려입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웠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주로 외모지상주의 잖아요. 그 외모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놋투구를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습니다. 이 어린갑은 물고기 비늘처럼 쇠를 만들어서 이어붙인 갑옷입니다. 무심코 넘길 수 있는 이 부분에서 우리는 골리앗이 철기 문명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놋투구를 썼다고 강조하는 것은 마치 고대의 전쟁영웅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듯이 보입니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율리시즈나 트로이 전쟁 때의 영웅들 같은 그리스의 전쟁영웅들은 철기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도 희한하게 놋투구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놋으로된 갑옷을 입었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우승하고 받은 부상이 바로 코린트식 청동 놋투구였거든요. 마치 위대한 영웅에게는 놋투구를 씌운다는 듯이 말입니다.
골리앗의 갑옷 무게는 57kg 이었답니다. 웬만한 어른무게만큼이나 나가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그의 무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라고 기록합니다. 아마 이 시대는 청동기시대거나 철기가 막 사용된 시대같습니다.
골리앗은 또 놋단창말고 쇠로 된 장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날의 무게가 무려 7kg이고 창자루는 베틀채같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골리앗의 앞에 따로 방패를 든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방패는 ‘친나’라고 하는 전신을 다 가려주는 방패를 말합니다. 이 방패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방패병이 따로 있어서 용사의 전신을 가리고 앞서서 걸어가는데 전투시 시야확보를 위해서 보통 사람의 눈 바로 아래까지 온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가히 완벽한 방어태세입니다. 스스로도 완벽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는데 ‘친나’를 든 방패병까지 앞세우고 나오니 누가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방패가 되시고” 할 때 바로 그 방패가 친나를 말합니다. 다윗에게 이 방패가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 방패가 여호와의 보호처럼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3.자유민과 노예
이런 무시무시한 골리앗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의 중간에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들 중에 한명을 뽑아서 나와 싸우게 보내라 그리고 그 사람이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고 그가 지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라”고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너무 답답해서 엄청난 부상과 높은 지위, 심지어 자기의 딸까지 내걸었는데도 나설 사람이 없습니다. 지위도 좋고 공주도 좋지만 그것도 살아있고서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이 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골리앗이 한 말의 서두에 자기를 블레셋사람이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복이란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원어적 의미는 ‘노예’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가드의 ‘자유민’이지만 너희는 사울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나는 자유민으로 자발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너희는 사울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축처럼 취급됩니다. “나는 사람이고 너희는 가축이다” 이런 말입니까?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을 모욕하고 나아가서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보세요. 어차피 너희는 노예다. 사울의 노예나 블레셋의 노예나 다를게 없다. 상대도 안되는데 괜히 덤비다가 죽지 말고 차라리 노예로라도 목숨을 부지해라. 뭐, 이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실제로는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다 같이 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노예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화를 내게 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용합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소리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4.다윗과 이스라엘군대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상징이 바로 다비드의 별입니다. 그것만 봐도 이스라엘사람들이 다윗을 얼마나 위대하게 생각하는지가 답이 나옵니다.
그래요, 그런데 처음부터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어떤 불가능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입니다.

처음부터 그냥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성장한 사람입니다.
골리앗이 거대한 놋투구와 놋으로 된 갑옷 그리고 단창과 쇠로된 거대한 창을 가지고 자기의 앞에 친나를 든 방패병을 앞세운 것과 달리 다윗의 무장은 형편없었습니다.
더구나 다윗의 나이는 골리앗과 싸울 때 얼마였을까요? 그는 8형제중 막내였는데 세명의 형만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당시 20세가 넘은 남자는 의무적으로 전쟁에 참여해야 했으므로 다윗위에 적어도4명은 20세가 안되었다는 말입니다. 일년에 한명씩 낳았다면 다윗의 나이는 글쎄 한 15에서16세 정도? 만으로 15세면 중3에서 고1정도? 다윗은 아직 채 자라지 못했습니다.
군대에 갈 나이가 되지 않은 다윗은 형들을 위해 위문품을 가지고 전장터에 나갑니다. 물론 싸우러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이 가지고 간 것은 단순 위문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가지고 간 것이 식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나라에서 양식을 지급받지 못하고 자기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전쟁을 친 것으로 나옵니다. 즉 자급자족해야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주 원시적인 상태이고 나라의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세련된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자랑하던 블레셋에 비해 열세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에서 철검을 가진 사람은 왕과 태자 딱 두사람뿐입니다. 다른이들은 글쎄요, 청동기나 아니면 몽둥이, 나무창, 물매같은 걸로 싸우겠지요.
골리앗이란 거인 때문이 아니라도 이스라엘은 분명히 약세입니다. 게다가 블레셋에서 나온 골리앗은 지금 40일이나 연속해서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40은 보통 어떤 일이 극에 달한 상태를 나타낸답니다. 40일간의 금식기도, 40년간의 식민통치, 40년의 광야 생활 등등,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아무 대응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의 등장이지요.
다윗은 형들에게 위문품을 주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욕하고 여호와를 모욕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는 화를 내며 마주 싸워야 되는데 사람들은 두려워서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군대에 복무하고 있는 다윗의 큰형 엘리압은 다윗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화를 내는 거지요. 여기에 싸움 구경하러 왔느냐?
네가 치던 양은 어찌하고 여기에 왔느냐?
참나, 엘리압은 지금 골리앗에게 화를 내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두려움을 가지고 만만한 자기 동생에게만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까지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엘리압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다윗을 상당히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이 전쟁터에 오니까 걱정스러워서 화를 내는게 아니라 원래 다윗을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사무엘이 엘리압에게 기름을 붓지 않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다윗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윗에게 “양은 어쩌고 왔느냐?”고 묻지 않고 “몇 양”은 이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즉 너는 양치기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능력이 안되서 겨우 몇 마리의 양만을 치는 보잘 것 없는 목동이라는 말이지요.
엘리압은 사무엘이 자기가 아니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으려는 것을 보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압이 보기에 다윗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꼬맹이였거든요. “하는 일도 겨우 몇 마리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한 아이에게 왕을 삼기 위한 기름을 붓다니, 아마 사무엘이 맛이 갔나봐!”이게 솔직한 엘리압의 생각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출전을 허락해 달라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서 다윗에게 이야기 합니다.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소년”과 “어려서부터”는 똑 같은 말입니다. “너는 아직 어리다. 그리고 골리앗은 너만 할 때 부터도 싸움의 전문가였다. 그러니 너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씨가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는 정도일까요? 여하튼 다윗은 그 정도로 형편없었습니다.

5.다윗과 골리앗
다윗은 사울왕의 허락을 얻고 골리앗과 싸우기위해 전쟁터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골리앗이 요청한 것은 대전사 전투입니다. 즉 양군의 대표를 뽑아서 이기는 쪽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걸로 하고 지는 쪽의 군대는 모두 종이 되자고 하는 조건입니다. 즉 다윗하나 죽는 걸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다윗을 이스라엘 군대의 대표로 내보낸 사울도 어지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의 결과를 잘 압니다. 다윗의 승리, 골리앗의 죽음
이 일로 인해 다윗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고 일약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우리가 너무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제 설교의 요지가 나옵니다.
과연 다윗은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응, 그것도 몰라, 당연히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했쟎아”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순진한 분은 안계시겠지요.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행동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우리가 항상 승리하고 우리가 무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를 봐도 우리는 세상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걱정이 끊일날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도 많고 , 고민도 많고, 산넘어 산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함께해서 승리했다고 한다면 성도들에게 세상은 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세상은 우리의 밥이 아닙니다.
또 악인이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면 세상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악당들의 성공신화는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 너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자세하게 성경을 살펴봅시다.

전투장면을 정확하게 다시 살펴봅시다.
48,49절에“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 지니라“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조금 더 천천히 묘사해 봅시다. 먼저 골리앗은 다윗에게로 걸어 옵니다. 아마 앞에 친나를 앞세운 방패병의 보호를 받기위해 천천히 걸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창으로 찌르던지 아니면 어느 정도 가까이 가서 단창을 던지든지 할 것이고 가까이 다가가서는 칼로 다윗을 베어버릴 요량입니다.
한편 다윗은 골리앗쪽으로 신중하게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골리앗쪽으로 빨리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냥 빨리 달려간게 아니고 달리면서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서 물매에 재어서는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던집니다. 돌을 발사한 것입니다. 이마를 맞고 골리앗이 쓰러집니다.

사무엘상17장은 무려 58절이나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장면에 할말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국민적인 영웅의 무용담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년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290cm에 달하는 거인 장군을 쓰러뜨리는 소년 용사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한폭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용담이면 싸우는 과정이 묘사가 많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싸우는 과정은 겨우 단 두절입니다. 나머지는 다 배경화면입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게도 배경화면을 설명하는데 무려 56절이나 사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단 전투장면을 다시 한번 되풀이 해서 봅시다. 먼저 골리앗이 다윗쪽으로 걸어 옵니다. 앞에는 방패병이 눈아래까지 오는 방패를 들고 골리앗을 보호하며 골리앗과 보조를 맞추고 걸어 옵니다. 다윗은 빠르게 달려가면서 번개처럼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돌을 끄집어 내어서 물매에 재고 돌리고 마침내 돌탄환을 발사합니다. 물매의 한쪽 끈을 놓으면 돌이 날아갑니다. 그런데 그 돌은 정확하게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여기서 잠깐 정지를 해봅시다.

골리앗은 놋투구를 쓰고 놋갑옷을 입었습니다. 어린갑이요. 게다가 손목과 발목에도 경갑을 쳤습니다. 일반적으로 돌맹이를 맞으면 사람이 치명적으로 부상을 입으려면 투구와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에 맞아야 합니다. 게다가 급소부위는 정해져 있습니다. 아프게 해서는 안되고 움직이지 못할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야 합니다.

골리앗은 지금 놋투구와 방패에 의해서 이마와 눈 정도만 노출되어 있지 나머지는 모두 보호받고 있습니다. 투구와 갑옷뿐만 아니라 전신을 가리는 거대한 방패가 눈부위를 제외하고는 골리앗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돌맹이가 맞아봐야 충격정도지 상처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 다 움직입니다. 특히 다윗은 아주 빨리 움직입니다. 왜냐면 느리게 움직이면 골리앗이 던질 단창에 맞을 수 있거든요. 이 말은 물매로 맞히기가 매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약점인 이마에 정확하게 돌맹이가 맞았습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이게 운일까요? 하나님의 손길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마를 맞히게 하셨다고요?

7.다윗의 성장배경
다윗은 자기가 기름부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각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왕은 백성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선택받은 자입니다.

일단 40절을 봅시다. 그는 골리앗과 싸우기위해 엘라 계곡으로 가면서 시내바닥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주워서 목자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목자의 지팡이를 들었고 손에는 물매를 가지고 나갑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주는 왕의 갑옷과 투구와 검을 걸치고 걸어보고는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다고 도로 반납하고 목자의 무기를 가지고 갑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이거든요.
즉 다윗은 겉치레가 아니라 자기의 장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장점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한 무장을 하고 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대표가 되었다는 괜한 허영심, 사울왕의 갑주와 무기를 들고 폼나게 싸우겠다는 허영심에 우쭐한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의 손에 익은 무기를 들고 갑니다. 명품 무기도 좋지만 자기에게는 안맞습니다.

왜 물매를 손에 들고 돌 다섯 개를 골랐을까요?
그것은 그가 물매를 날리는데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 날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돌맹이를 다섯 개만 골랐지요. 있는대로 돌맹이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딱 다섯 개만.
물매는 보통 고대의 투석기입니다. 이동식 손 투석기. 우리도 이 물매를 잘 압니다. 끈가운데 가죽을 연결하고 여기에 돌을 재어서 끈을 빙빙 돌리다가 놓으면 돌이 날아갑니다. 베냐민 지파가 특히 이 물매를 가지고 적을 물리치는데 재주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실 물매는 생활무기입니다. 전장터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들이 양을 몰 때 사용합니다. 즉 양무리 중에서 이탈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양들의 옆으로 물맷돌을 날려서 양들이 진로를 바꾸고 떼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도구로 잘 사용됩니다.
뿐만 아니라 양떼를 칠 때에 사자나 곰, 여우같은 것이 나타나면 물맷돌을 던져서 이를 물리치는데 사용합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사자나 곰을 공격하지는 않겠지요.
35절에 보세요.“내가 따라가서 그 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자나 곰이 양을 몰고 가면 비록 양한마리는 잃었지만 그래도 자기의 목숨이 산 것에 대해 안도합니다. 그리고는 사자와 곰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양떼와 함께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반대입니다.
일단 사자나 곰이 양떼를 움키고 가면 그 뒤를 쫓아갑니다. 그리고 물매를 가지고 돌을 던집니다. 그래서 사자나 곰을 쓰러트리고 그 양을 구해냅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죽지 않은 사자나 곰이 일어나서 덤비면 이번에는 주먹으로 쳐 죽인답니다.

실로 무시무시한 괴력입니다. 이런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갈려고 했고, 어떤 형식으로든 왕이 다윗의 이런 실력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군의 대표로 다윗을 보낸 것입니다. 그것도 기분이 좋아서 자기의 갑옷과 무기까지 하사하면서요.

만일 소년이 말로만 자기가 사자와 곰을 때려죽였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당연히 안믿지요. 오히려 왕을 능욕했다고 끌려 나가서 죽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다윗을 왕에게 소개한 이도 다윗의 실력이 확인이 되니까 그를 사울왕에게로 데리고 간 겁니다.
보십시오. 다윗은 맨손으로 사자와 곰을 쳐죽이는 괴력의 소유자였고 양을 물고 도망가는 사자와 곰을 물매로 쳐 죽일만큼의 물매실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표적인 골리앗의 이마를 자기도 빠르게 움직이면서 맞힌 것입니다.

물론 실수가 없었다는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혹이라도 먼저 단창이 날아와서 다윗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달리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다면, 물매돌이 엉뚱한 대로 날아갔다면, 물매의 끈이 하필이면 그때 끊어졌다면....골리앗 역시 어려서부터 싸움의 용사입니다. 그가 한두번 이런 경우를 겪은 것이 아닙니다. 그도 나름대로 최고의 전술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경우를 없애주신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가 맞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윗은 골리앗의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대표로 싸울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가 더해진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의 손에 여호와의 은혜가 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든지 철부지 아이의 손으로도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오랜기간동안 물매를 돌리며 연습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맡은 몇 마리 양떼를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도 내어놓고 싸울 수 있는 용기와 힘과 실력을 겸비한 그는 골리앗 앞에 서기전에 이미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해야 할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고 생각하고 평소에 자기의 맡은 알에 최선을 다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완성된 영웅을 꿈꿉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의분으로 세상에 나가서 기적적인 성공을 이뤄내는 영웅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 영웅은요, 미안하지만 일조일석에 그냥 이뤄진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아 왔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사자와 곰을 맨손으로 쳐 죽인 사람은 다윗 외에는 삼손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얼마나 굉장한 사람인지 알겠지요. 천하장사!
게다가 다윗은 결코 ‘아담’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우리말로 작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글 성경의 번역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은 보통 사람보다 어깨하나가 더 큰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아담한 작은 싸이즈의 소년에게 투구와 갑옷을 입혀주었다고요? 이건 뭐 아예 싸우지 말란 말입니까? 싸움으로는 안되니 골리앗을 웃겨서 죽이라는 의미입니까? 이 동네가 지금 개그 콘서트에서 누가 누가 더 웃기나 시합하는 ‘개그 배틀’하는 곳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이고 , 웃겨죽겠네”하듯이 싸이즈가 안맞는 옷을 입고 웃기라는 말입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 옷이 다윗의 싸이즈와 비슷했기 때문에 사울이 자기의 갑옷과 투구를 준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싸이즈가 너무 커서 합바지 같아서 도저히 못입겠습니다”가 아니라 익숙치 못합니다. 단지 다윗은 그동안 갑옷을 입고 싸운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 역시 어느 정도로 큰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이미 골리앗의 앞에 서기전에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그를 알아보고 왕으로 삼기위해 기름을 부었고, 그의 큰형은 다윗을 교만하다고 질투합니다. 실력도 있습니다. 다만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공식적인 데뷔입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왕이 될 재목이라는 인증을 받는 것이 남았습니다. 인증절차가 바로 골리앗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실 골리앗이 굉장하기는 하지만 사자와 곰들과 실전을 겪어온 다윗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소년장사였기 때문에 사울이 그를 골리앗의 상대로 내세울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물론 다윗도 골리앗을 보고 떨었을 수도 있습니다. 워낙 크고 유명한 용사잖아요. 인근의 유명한 챔피언을 보고 긴장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자기를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데 아무도 그것을 징계하는 이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선 것입니다. 자기에게 기름부으신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용사로 나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아버지의 일을 한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그가 죽여온 사자와 곰보다 더 못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왜냐면 적어도 사자와 곰은 하나님을 모욕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나를 건지시리라는 체험적 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 평소에 하나님을 위하여 나설 실력을 쌓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용사로 세상을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지금 당장 생각을 중단하고 먼저 노력하십시오. 실력을 쌓으십시오. 그런 연후에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십시오.

다윗이 다윗된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기름부음받은 자로서의 자각을 가진 다윗은 몇 마리 양을 치는 일에도 자기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맷돌 한방에 골리앗이 쓰러졌지만 그 한방을 위해 얼마나 많은 물맷돌 날리는 연습을 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빈들에서 그는 수많은 물맷돌 날리기 연습을 한 것입니다. 사자와 곰을 쳐죽이는 신력을 타고 난 그가 단지 힘만 셀뿐만 아니라 날쎄기도 하고 게다가 허례허식을 좇기 보다 자기의 장점을 활용할 줄 알고, 관습보다 효율을 중히 여기는 실용성과 혁신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인물도 잘생겼죠. 이 정도면 왕이 되고도 남습니다.

사울은 보통 사람보다 어깨하나가 더 크고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 왕을 뽑는 입장에서 이정도면 손색이 없다고 생각될 사람을 뽑은 것이죠. 그러므로 그 왕을 대체할 사람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다윗 역시 키가 크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예술적 감각도 있고, 재주도 있고 힘도 세고 용기도 있고 신앙도 좋고 성실하고 겸손하며....그런 사람일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저 정도면 왕이 되어도 되겠다고 인정하지요.
말하고 보니 제가 다 황당하네요. 이정도면 너무 완벽하잖아요.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노력과 오랜 세월의 기다림 끝에 멋진 영웅으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들의 생활태도가 이와 같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싸움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는 자각이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세우신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므로 나는 어디서도 이기겠지요. 그러나 내가 죄를 짓는 한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빈들에서 수없이 물맷돌을 날렸던 다윗은 결국 그 물맷돌로 세상을 이깁니다. 오늘 우리 역시 세상이 알아 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적인 싸움의 주인공으로 서기위해 물맷돌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그 한방의 물맷돌을 성공시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사람들 앞에서 성실한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못생기게 태어났다고요? 마음을 갈고 닦으세요. 얼굴도 바뀝니다. 인상이 바뀌잖아요.

멋지게 태어났습니까? 그렇다면 아름다운 마음으로 안팎을 골고루 닦으세요. 언젠가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군대를 대표해서 골리앗앞에 당당히 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멋지게 물맷돌 한방을 날려 봅시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남이 보지 않을때도 , 남이 알아 주지 않을때도 묵묵히 물맷돌을 돌립니다. 나는 이미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택한 자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호하며 그 나라를 대표하여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그때 당당히 한방을 날리기 위해 오늘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공부합시다. 체력을 닦읍시다. 심신을 도야합시다. 건전한 생각과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 갑시다. 언젠가는 내가 대표로 세상의 챔피온과 싸워야 할 날이 옵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5월 2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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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쓸데없는 이야기를 소박하게 덧붙여 봅니다. 중국의 존경받는 고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자신처럼 역사의 무대에 내던져진 인간의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지요. 리더나 공적인 일을 맡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리더라는 것, 그것은 삶과 행동, 태도 등에 있어서, 자기 개인의 욕심이나, 바람을 포기해야 한다는 다소 엄격한 의미로도 들릴 수 있습니다. 하기야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리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주목해 보는 것은 다윗의 침착함과 여유로움 입니다. 왕이 주는 옷을 거절할 수 있는 침착함과 돌을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여유로움. 이것은 다른 말로 한다면 자신감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의 비밀은 평소의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고, 밝은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에게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속히 길을 열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과 원망으로 세월을 낭비하는 것과 둘째,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살거라며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오늘을 성실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평생 생각해 볼 주제가 아닐까요, 다윗은 갑자기 영웅이 되지 않았다 라는 것. 위대한 인생이란 위대한 하루를 보내겠다는 그 태도가 핵심이라고 감히 생각해 봤습니다 / 2012.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