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7월8일/인간이 쌓아올린 탑(창세기11: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7. 10. 22:5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8일 주일 예배

인간이 쌓아올린 탑 (창세기11:1-9)

1.오늘 저는 바벨탑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인간이 쌓아올린 탑 중에서 가장 높고 거대하면서도 가장 치명적이었던 탑. 그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전까지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탑 때문에 인류의 언어가 나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인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축물입니다.

2.먼저 11:1에 보면 온땅의 구음이 하나였답니다.
사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서서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고의 내용까지를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사이에 사고의 차이가 보다 덜하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2절에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동편으로부터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가 됩니다. 국역에는 ‘동쪽으로’ 옮겼다는데 원문에는 ‘동쪽에서부터’ 떠났답니다.

3.왜 원문에는 ‘동편으로부터 떠났다’고 이야기 했을까요?
먼저 옛날 지도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동서남북을 나누었을까요?
성경은 바로 에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편은 바로 에덴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동쪽으로 떠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인 에덴으로부터 이제 사람들이 멀리 갔는데 방향이 동쪽이란 말입니다.

사실 우리 성경에 쓰인 동방이라는 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동편이라는 말입니다. 어디의 동편이냐면 에덴의 동편이라는 말입니다. 에덴의 동편이 어쨋는데요?
에덴의 동편에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언젠가는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에덴의 문이 있는 동편에 모여 살았습니다.
아득한 태고적 자신의 조상이 살았던 바로 그 약속의 땅, 지상의 낙원 에덴!

하지만 이때 사람들은 더 이상 에덴으로 들어갈 희망을 버리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에덴과만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에덴을 만드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에덴의 동편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시날평지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곳에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시날은 지금의 유브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사이에 있는 바벨론 지역을 말합니다. 비옥한 넓은 평야와 풍부한 물, 게다가 큰 강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아마 그들이 볼때는 천혜의 지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전설상의 에덴보다 더 좋은 땅을 구하려 애썼습니다. 아니 더 좋지는 않아도 그 정도로 좋은 땅이 틀림없이 어디엔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찾다가 마침내 시날평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끝내 허락하시지 않는 에덴입성은 포기하고 하나님없이도 우리스스로 그보다 더 좋은 땅을 발견하려고 길을 나선 끝에 마침내 그들은 시날평지라는 좋은 지역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봐라! 하나님없이도 우리끼리 이렇게 좋은 땅을 찾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그들은 평지를 선호했을까요?
여기에는 정치적인 고려가 있습니다. 한 인간의 세계단일정부를 향한 야망이 숨어 있습니다.

4.누가 이들을 이끌었을까?
여러분
과연 누가 이 인류의 대이동을 주관했을거 같습니까? 사람들이 그냥 살다보니 땅도 좁고 인구는 많고 해서 자발적으로 이동했겠습니까?
‘우리 한번 다른데 가서, 좀 넓은데 가서 살자’
이렇게 되어서 사람들이 에덴의 동편을 떠났겠습니까?
그래서 일부는 남고 일부는 떠나고 그렇게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을 것 같습니까?

사실 본문에는 전혀 여기에 대한 기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앞장인 10:8절에 보면”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리고 10절에”그의 나라는 시날땅의 바벨과…시작되었으며”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럼 누구겠습니까?
바로 니므롯이란 사람이 이 인류의 대이동을 주관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영걸이라고 합니다. 처음 영걸, 그리고 그의 직업은 사냥꾼이랍니다.

그가 보통의 사냥꾼일까요? 천만에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사냥꾼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에 사냥을 했는데 이것은 몇가지를 의미합니다.
첫번째는 무력을 소유했다는 말입니다.
두번째는 땀흘려 농사를 짓거나 양을 치지 않고 산과 들을 쏘다니며 야생의 것을 취하는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아 살 수 있는 기반이 닦여짐을 의미합니다.
점점 그런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최초로 조직적인 폭력집단을 소유하게 됩니다. 국가를 이룰 수 있을 만큼의.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가 닿았던 아라랏산 주변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산이라고 해서 우리의 북한산이나 도봉산 같은 적은 산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 산위에서 살았단 말도 아닙니다. 아라랏산은 근동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산으로 그 일대가 끝이없는 산지입니다. 수많은 봉우리들과 사이사이의 골짜기, 그리고 하천이 있는 넓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백성들이 산 위나 골짜기에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산이나 골짜기는 자기의 눈을 가리고 그러면 그는 그들이 뭘하는지 감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직업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에게 들판보다 산이 아무래도 더 적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보통의 사냥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다스리기 쉬운 곳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위해서 그는 사람들의 필요와는 상관없이 자기의 눈을 가리는 산이나 골짜기가 없는 넓은 곳에다가 사람들을 모아놓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넓은 평지와 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면 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해 줍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을 공격할 외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강들로 둘러싸인 곳이 필요했을까요?

자기의 백성들이 함부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위해서
여러분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서가 아니라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서 거대한 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배가 없이는 도망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땅의 모든 백성들을 한눈에 보면서 통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니므롯 왕조를 바벨에 세우고 인류최초의 왕이 되었던 것이며 자기 왕국의 영원한 존속을 위해 백성들을 두개의 강 사이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5.서로 말하되 벽돌을 굽자
시날평지에는 돌이 없는 대신에 흙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을 지을 재료로 돌이나 나무대신에 흙벽돌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흙벽돌은 아주 만들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냥 흙을 반죽해서 네모 반듯하게 빚어서 그늘에서 말리면 끝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흙벽돌 사이에 접착제로 역시 진흙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흙벽돌의 치명적인 단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물에 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접착제로 사용된 진흙 역시 물에서는 너무나 접착력이 약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홍수를 겪고 난 다음에 물에 대한 큰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홍수가 날 것에 대비해서 이 흙벽돌이 물에 풀어지지 않게 하려고 고심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흙벽돌을 불에 구워보았는데 과연 튼튼하고 오래갈뿐만 아니라 물에도 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흙벽돌을 불에 굽기 시작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벽돌들을 연결하는 접착제입니다. 불에도 물에도 강한 접착제를 개발하면 이 흙벽돌로 그들은 끝없이 높은 건물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침내 홍수의 공포로부터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마침내 역청이란 것을 발견합니다. 역청은 아스팔트를 의미합니다. 당시 시날평원에는 천연 역청 구덩이들이 흔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유정이라고 할까요?
이것에 열을 가하면 끓어서 마치 물처럼 되었다가 식어버리면 단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사람들은 접착제 마저 개발해 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자기네의 힘으로 이룩한 발명품들 때문에
이제 다시는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완벽한 인간들의 문명으로 인간들을 위한 인간의 도시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니므롯은 천년만년 자기의 왕국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6.또 말하되 성과 대를 쌓자
여러분
우리가 성경본문을 보면 3절은 ‘서로 말하되 자’로 시작되고 4절은 ‘또 말하되 자’로 시작됩니다. 원문상으로는 이 두말은 똑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말하되 자’란 구절이 반복해서 사용된 것입니다.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성과 대를 쌓아서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합니다.
이건 엄청 높게 쌓자는 말이죠. 그런데 원문에는 조금 다른 의미를 풍겨줍니다. 원문에는 ‘그것의 꼭대기를 하늘들 안에 두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4:13절의 '내가 하늘에 올라...나의 보좌를 높이리라'고 한 사단의 자만을 연상시킵니다.

하늘들안에 꼭대기를 두면 그 꼭대기까지 올라간 사람은 하늘에 사는 신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의 신이 되고자 했다 이말 입니다.
그들의 왕인 니므롯이 바로 이 탑의 꼭대기에 살면서 하늘의 신이 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탑의 꼭대기에 거하면서 땅의 인간들을 감시하고 하늘의 신들과 교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그는 현인신, 바로 살아있는 신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역대의 왕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거나 신의 아들,또는 대리자를 칭했습니다.
그러한 전통이 바로 니므롯의 바벨탑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탑과 대를 쌓자고 되어있는데 히브리인들은 관용적으로 중요한 것을 뒤에 배치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주 목적이 성을 쌓는데 있다기 보다는 하늘꼭대기에 닿은 탑을 쌓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일을 위해서 니므롯이 내건 두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필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벽돌에다 자기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늘에 오르게 한 사람으로 자손만대에 자기들의 위대한 이름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두번째는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인간들에게”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땅에 흩어지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반대하는 니므롯의 의도
왜냐면 땅에 흩어지면 자기는 어떻게 그들을 다스리겠습니까? 이것은 자기의 왕국을 산산조각 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막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흩어지다’가 ‘산산조각나다’ 란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직접적으로 다스리기를 원하셨고 사람들이 무슨일이든 하나님에게 물어보며 시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간섭없이 자기들끼리 살기를 원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쾌락을 금지시킨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 안에서 안연히 사는 것을 쾌락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죄성에 오염된 인간들 마음대로 정욕대로 하는 것을 쾌락으로 여기는 형편에서 하나님의 간섭은 인간들의 쾌락을 뺏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위해서 에덴의 동편을 떠났고 이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네들끼리 문명을 건설하며 마침내는 하나님에게 대적하고 대항하고자 하는 것이며 자기들도 더 이상 하나님의 노예나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아 지려고 한 시도가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7. 서로 말하되
여기에서 우리는 3절과 4절의 도입부인 ‘서로 말하되’의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말하되 - 직역하면 '각자 그 이웃에게 애기하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배척하며, 인간끼리의 중지(衆智)를모아 일을 결정하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결의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제하려고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나님이 듣지 못하도록 서로 자기네들끼리 소곤소곤 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끼리 소곤소곤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듣지 못하시겠습니까?
어두운 골방에서 이야기 한다고 우리를 보지 못하시겠습니까?

천만에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분은 그 모습을 보시고 그 말을 들으시고는 웃으십니다. 우리는 결코 하늘만큼 높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음부에까지 낮아질 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8.여호와께서 강림하셨더라
사람들의 탑이 점점 높이 올라가자 사람들은 이제는 하늘에 닿는 것이 단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벽돌을 쌓고 틈새를 역청으로 접착시키는 단순한 일로 그들은 이미 자기네의 문명이, 자기네의 지식이 신과 같다고 착각하게끔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거대한 건축물이 니므롯제국의 앞날을 보장할것입니다. 영원히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터운 성벽과 두개의 강으로 둘러쌓여서 이제는 도저히 그의 눈을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벗어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영원히 그와 그의 자손들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대신에 엄격한 법률과 채찍 속에서 자신의 내일이 보장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니므롯왕국을 건드릴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왜 강림하셨습니까?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여러분
여기에서 하나님에 관한 표현들은 실제로는 인간들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인격화해서 감정과 행동을 표현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려면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현장을 꼭 구름을 타고 내려오셔서 가까이서 보셔야 알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여하튼
저는 여기서 한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자기들이 쌓는 탑이 너무나 높아서 마치 하늘에 닿은 것 처럼 여기지만 실제로 그들의 탑은 너무나 낮아서 그 탑을 보기위해서 하나님이 강림하셔야만 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탑은 중도에서 그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혼돈시키셨기 때문에 서로간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그만 공사가 중단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탑의 이름이 바벨 즉 혼돈이된것입니다.
그러나 바벨이란 이름에는 ‘혼돈’ 말고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바로 ‘신들에게로 이르는 문’이란 뜻입니다. 이게 원뜻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나뉘어서 끼리 끼리 살게 되었습니다.

니므롯의 왕국은 분열된 것입니다.
세계단일 제국은 깨어졌습니다.
사람이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왕국의 괴멸로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으면 신에게로 갈 수 있으리라고 여겼고 신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바로 그 바벨탑은 대신에 온갖 혼돈과 혼란만을 주고 세계단일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시도가 실패한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은 이루어졌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편만하라’
이제 사람들은 타의에 의해 온 지면에 흩어지게된 것입니다.

9.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6절에 보면 “이같이 시작하였으니”란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이들이 행한 바벨탑쌓기는 단지 죄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이며 이제 이들은 계속적으로 더 많은 죄악을 저지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 이제 결론을 내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는 인간을 징계하시고 인간들의 계획을 페지시키셨습니다.
언어를 혼돈시키시고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니므롯 왕국은 붕괴되었습니다.
천년만년이 아니라 겨우 탑하나 쌓다가 망한 것입니다.
처음 영걸이라며 뽑내고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눈이 미치지 않는다고 데리고 간 곳에서 그는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좌절되고
이제 다른 사람들이 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더 많은 속박과 어려움에 처할것이며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사실 언어란 굉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의사소통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닌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언어는 사회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언어에 따라 우리의 가치관이 변한답니다.
즉 언어는 그물망과 같아서 이 구멍의 형태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언어가 혼돈 되었다는 것은 인간들의 사고가 달라졌다는 말이며 그들은 서로의 생각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 서로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통일을 계획한 인간들은 오히려 더 큰 분열과 혼돈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인간들은 민족과 언어별로 나뉘어 끊임없이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웃으십니다.
너희는 흙이니 결단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여서 하나님과 교류하는 생령이 아니라면 우리는 단순한 흙덩이, 티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한갖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귀한 것은 우리를 만드신 재료가 흙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생기를 가진 생령이기때문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영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귀함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합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눈길을 피해서 죄악을 저지르려 합니다. 그것이 쾌락이라 믿고 탐닉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견딜수 없는 억압과 구속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를 끊임없이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하나님을 대항할 계획만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명이 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학만능주의에 빠져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우리는 아무런 비판없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신앙의 원천인 성경과 하나님 자신까지 해부하고 비평하고 비판하고 마침내는 부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쌓은 탑이 너무나 대단하고 높고 거대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한번 계획으로 삽시간에 중지되며 뿔뿔이 흩어지며 붕괴되는 것입니다.
흙을 불에 굽고 역청을 불에 끓여서 마치 대단한 무엇인가를 만든것처럼 생각했지만
인간의 힘으로 희대의 발명품을 만들어낸것처럼 생각했지만
불도 흙도 그리고 역청도 결코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 모두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작태를 우리는 오늘날 되풀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 탑이 완성되면 저것이 우리를 신처럼 만들어줄 신에 이르는 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마치 너무나 아득하게 높고 거대해서 온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며 하나님과 같은 높이에서 살게 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인류는 에덴에서부터 끊임없이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 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고통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그러한 어리석은 시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위에서 너무나 많은 불가능을 봅니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일들로 인하여 낙담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끼리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옛날 사람들은 그 탑을 바벨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신에게로 이르는 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탑을 바벨이라 하셨습니다. 혼돈이다, 혼란이다
후세의 사람들 역시 그 탑을 바벨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요 바벨, 혼돈입니다.
왜냐하면 그 탑이 사람을 신으로 만들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문명을 바벨, 신의 문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바벨, 혼돈과 혼란이라 부릅니다
저는 문명과 문명의 이기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문명과 이기 조차 우리 하나님의 작품이고 그것의 운행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눈에 찬란한 문명을 건설하고 찬란한 업적을 쌓는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과 끊어지는 그 순간 그것은 ‘신에게로 이르는 문’이 아니라 ‘혼란과 혼돈’으로 변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나만의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큰 일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기교로 이루어진다고는 결코 생각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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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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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반 일리치라는 사람은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한 철학자 입니다. 그의 주제는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라는 것이었지요. 바벨탑을 쌓기 이전, 바로 그 때, 설교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에덴의 동쪽의 문이 열리기를 고대하면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겠지요. 심플하고, 재미없는(?) 지극히 목가적인 삶의 스타일입니다.

힘센 니므롯은 불만이었습니다. 기득권이 있으니까요. 언제까지 그렇게 한가하게 살 것인가?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야지, 신의 들러리나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음... 요즘 말로 하면 이렇게 쓰면 적당하겠지요. 니므롯은 시속 300km를 달릴 수 있는 최고급차 페라리를 갖고 있는 능력자인데, 여기에 있으니 공동체를 위해서 안전운전을 해야하니 30km로 달리세요. 하하, 니므롯은 이런 에덴의 동쪽에서 살 수 없는게 당연합니다. 자, 떠나자! 그리고, 가서 진정한 나라를 세우자! 내가 세운 규율로 너희를 더 즐겁게 다스릴 수 있을꺼야!

유대 고대사를 남긴 1세기경 로마시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묘사한 글은 더욱 신랄합니다. 니므롯이 말하길, "조상이 신에 의해서 멸해졌으니, 이제 복수를 하자, 신의 노예로 살지 말자,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그야말로, 당대 명 연설이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열심을 내었고, 예상보다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탑은 세워지고 올라갔다고 요세푸스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충격을 받습니다. 1. 사람이 얼마나 신을 싫어하는가? 2. 사람이 얼마나 신이 되고 싶어하는가? 이러한 강력한 동기부여에 힘입어서 대건설 프로젝트는 눈깜짝할 사이에 성공적으로 치고 올라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중단되었지만요.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났고, 오늘날이 되었지만, 본질은 그대로 입니다. 1. 여전히 우리는 쾌락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조용히 홀로 앉아서 생각에 잠기고, 독서를 하고, 세상을 바꿀 고민을 하는 것은 이상한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 되었고, 더 나를 매혹시키는 것을 찾아서 밤늦도록 술에 취해, 인터넷에 취해, 게임에 취해, 욕망에 취해서 살아갑니다. 2. 여전히 우리는 멋진 아파트에서, 완벽한 배우자와 함께, 남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삶, 그야말로 신이 되고 싶어합니다. 뭐, 당연히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저는 본적은 없습니다 :)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최선의 삶을 추구해야 하며, 그런 삶이 타락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진 것을 나눠주는 삶을 추구해야 하며, 그런 태도에서 이기적인 욕망이 조금이나마 개입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 조영래 변호사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원칙을 이야기 하며, 언제나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이라고 썼습니다. 이것이 최선의 삶을 추구하고, 타락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권한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마치 신이 된 마냥, 높은 사람이 된 마냥, 그 권력을 쓰기를 좋아합니다. 마치 모두가 니므롯의 현대판 복사버전인 듯 싶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다른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친절한 삶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며, 선한 삶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며,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를 먼저 말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권력을 봉사라고 생각할 것이며, 상대방을 돕는 의무로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감히 결론 내려봅니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벨탑을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가? 에덴 동산을 생각하며 겸허하게 사는가? 한편의 설교를 깊이 묵상하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 2012.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