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7월15일/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라(느혜미야3:1-3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7. 17. 16:01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15일 주일 예배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라 (느헤미야3:1-32)

우리가 느헤미야를 생각하면 무엇이 생각날까요? 성벽이 없던 유대민들을위해 성벽을 재건한 사람! 아니면 포로의 귀환을 이끈 사람!

그런식으로 느헤미야를 살피면 느헤미야서는 단순히 유대인 포로들의 민족성 회복을 위한 공동체 건설의 성공기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대인들의 역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이미 멸망해 버린 유대라는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도록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힘든 가운데서도 서로 힘을 합쳐 성벽을 중건하고 새롭게 유대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든 기사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새로 쌓은 기사가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니까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느헤미야서를 자세히 보면 놀라운 묘미가 있습니다.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지도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 내용을 가지고 LTC과정의 한 과정으로 삼을 정도로 우리에게 주는 내용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 3장에서는 단순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누가 성벽을 중수했다는 내용이 전부 다입니다. 사람 이름이 지루하게 나오고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성벽의 망루니 성문이름이 나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래서 별로 할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혀 쓸모없는 것들을 기록하셨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반복되는 몇가지 패턴이 보입니다. 그것도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 바로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을 중수하였고” 라는 구절인데 이것과 동일한 표현이 3장에서만 10,23,28,29,30절에 걸쳐서 나옵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보면 표현들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내용은 똑 같습니다. 성벽을 새로 쌓는데 자기 집과 마주대한 부분을 쌓았다는 것이지요. 어떤 이는 자기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쌓았답니다.

우리가 이 3장에서 성벽을 쌓는 부분을 자세히 보면 놀라운 많은 영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 건설에 참고해야 될 삶의 지혜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영적인 사역의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사역에도 원칙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본문은 그러한 원칙을 특별히 강조하거나 제시하지 않고 그냥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라고 강조하거나 명확하게 명령하지 않고 그냥 사실만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1)사역은 자기와 가까운데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어디서부터 사역을 시작해야 될지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쌓는 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릅니다. 무엇부터 먼저 쌓아야하는지, 재료를 어디부터 공급해야 할지, 사람들을 작업에 어떻게 자발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을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분리해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야 될 일이 너무 많거든요. 그리고 누가 이 성벽재건을 선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원칙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원칙이 가장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이러한 순서와 누가 앞장서야 할지에 대한 일들을 알려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우리는 놀라운 지혜들의 한 개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와 가장 가까운 부분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자기의 선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 맞은 편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사역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 자기가 일하는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최고의 사역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가정, 나의 회사, 나의 마을, 학교,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해 주세요. 바로 그겁니다. 내가 선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 우리에게 담담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가 볼 부분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의 성벽을 쌓았다”는 대목 입니다. 물론 성벽을 쌓을 돌은 주변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바벨론군대가 예루살렘성을 점령하고 파괴했을 때 원래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돌들을 해체해서 주변에 버려둔 것이지 돌들을 멀리까지 가지고 가서 치워버리거나 큰돌을 조각내어서 자갈을 만든게 아닙니다. 그들은 성벽을 무너뜨려서 성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물론 오래되었기 때문에 돌들 중에서 못쓰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 나무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자라는 석재나 나무같은 것을 보태고 해체되어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던 무너진 성벽을 포로귀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새로 쌓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성벽재건의 기사가 기록된 3장1절에 제일 먼저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자기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양문을 건설하고 함매아 망대부터 하나넬 망대까지를 건설하여 하나님앞에 바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별하였다고 하네요.
대제사장과 형제 제사장들이 제일처음으로 성벽재건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손댄 부분이 바로 양문입니다. 이것은 양문이 원래 성전에 제물인 양을 공급하던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집 맞은편의 성벽을 재건했다는 말하고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양문을 제일먼저 건축한 것처럼 우리들 역시 우리와 관련된 일부터 먼저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역시 내가 선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일도 내 주위부터 먼저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가서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위 부모형제와 친구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는 순서가 이렇습니다.

(2)공동체는 연합이다
10절 맨앞에 ‘그 다음은’ 이란 말이 번역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는 있어서 앞사람에 의해서 쌓아진 성벽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벽이 빠진 부분이 없이 계속해서 중건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성벽을 중수한 사람은 9절의 표현처럼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후르의 아들 르바야’라고 합니다. 즉 10절에서 자기 집 앞의 성벽을 재건한 여다야라는 사람이 성벽을 쌓는 바로 앞부분을 담당한 사람은 유대총독 느헤미야에 이은 제 2인자인 고위관리란 말입니다.
그리고 10절의 여다야는 성경의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결코 중간이 생략되거나 빠질 수가 없지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다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부자는 부유한 만큼, 가난한자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성벽을 중건해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도 이와 같습니다. 결코 중간에 비거나 무너진채로 두고 성벽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앞사람에 연달아서 쌓아 나가는 것입니다. 나만의 개성을 추구해서 성벽의 규격을 달리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앞사람과 사이가 나빠서 저사람이 쌓은 성벽과 연결되는 것이 싫다고 중간에 조금이라도 틈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벽이 아닙니다.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적의 공격에 바로 무너지게 됩니다. 돌과 돌이 맞물려야 만이 견고한 성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어깨동무하고 공동의 적을 향해 내부를 보호하는 성벽이 되는 것이 바로 신앙공동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에는 끼리끼리가 어느 정도 있는게 보입니다. 돈있는 사람끼리, 같은 고향사람끼리,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끼리...이런 끼리끼리 문화, 패거리 문화가 교회 내에 존재한다면 결코 제대로된 신앙공동체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패거리 문화를 떨쳐내었기 때문에 느헤미야 치세의 유대인들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느헤미야 총독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사람이 성벽을 쌓은데 이어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그냥 백성일 뿐인 여다야라는 사람이 성벽을 이어서 쌓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집앞에 있는 성벽의 부분을 쌓은 것입니다.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3)책임의 분량이 있다
사실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을 중수한다는 말은 자기의 역량에 맞게 성벽재건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집이 크면 큰 만큼, 작으면 작은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함에 있어 그 물질의 다소나 지위의 높고 낮음이 중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성벽을 쌓는 일에 공이 큰지는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과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벽을 얼마나 많이 쌓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위치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역시 자기 집 맞은 편을 중수한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냐민과 핫숩, 이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추측하건대 베냐민은 베냐민 지파의 한 가문의 가장입니다. 그런데 핫숩은 11절에서 이미 풀무망대를 건축하는데 참여한 사람입니다. ‘핫숩’은 풀무망대를 ‘말기아’와 더불어 중건하였고 여기서 다시 ‘베냐민’과 더불어 자기 집 앞 맞은편의 성벽을 쌓은 것입니다.

원문을 분석해 보면 ‘자기 집’이 아니라 ‘그들의 집’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베냐민’과 ‘핫숩’은 한집에 거하는 형제인 걸로 추정되어 집니다. 이렇게 핫숩은 자기 집앞 맞은 부분의 성벽을 쌓는 일에도 참여하고 이미 다른 이와 함께 풀무망대를 쌓는 일에도 참여합니다. 이 사람은 두 군데에 참여했고 또 다른 이와 함께 참여합니다.
아마 핫숩은 풀무망대를 혼자의 힘으로 중건하지 못한게 맘에 걸려서 또 자기의 형제 베냐민과 힘을 합쳐 자기들의 집앞을 다시 중건한 것 같습니다. 핫숩은 결코 자기의 능력에 못미치게 성벽재건에 참여한 걸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한번의 건축참여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몫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다시금 자기의 집앞을 쌓은 것입니다.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래야 합니다. 망대의 건축이라는 중요한 일에도, 자기 집앞의 성벽이라는 연속적인 일에도 최선을 다해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한번 참여했다고 내가 할 책임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형제와 연합해서 일하기를 즐깁니다.
모든 것을 나혼자의 공으로 돌리려 하지 않고 형제와 연합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아사랴’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합니다. 아마 성벽의 위치상 성벽 맞은편에는 집을 지을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요? 그는 할아버지까지 언급되는 걸로 보아 상당히 유력한 집안 출신인 것 같습니다.
28절에는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기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답니다. 3장에 보면 제사장들도 성벽재건사업에 참여했는데 본 절에서도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집 앞부분을 재건합니다.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29절에 보면 사독이 자기 집의 맞은 부분 성벽을 재건합니다. 이 사람은 당시 스룹바벨과 함께 유대로 돌아온 유력한 제사장 집안의 후손입니다. 우리가 사두개파라고 하쟎아요? 그때 나오는 사독 제사장의 집안입니다. 이런 유력한 사람 역시 자기 집의 맞은편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유력한 집안이므로 집의 규모가 상당히 거대합니다. 그러므로 이 집의 맞은편이라면 가난한 자의 집의 맞은편보다 더 넓은 성벽이 할당됩니다. 그러니까 성벽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에 따라 힘에 따라 차이를 두고 성벽을 쌓았던 것입니다.
부자나 높은 사람이 아주 작게 쌓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많이 쌓아서는 결코 공동체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부자일수록 높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4) 각자의 생각과 처지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부분에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무관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형제들도 그 성향을 달리합니다.
30절에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살랍의 다섯형제들은 성벽재건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아들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의 다섯 형들은 아무도 성벽재건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만은 열심히 있어서 다른 부분의 성벽도 쌓았습니다. 이 사람은 8절에 나오는 ‘향품장사 하나냐’와 동일 인물로 자기의 막대한 부를 이용해서 예루살렘성의 동쪽뿐만 아니라 서쪽 성벽을 쌓는 일에도 참여한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사실상 신앙까지도 좋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있던 신앙공동체는 ‘금장색’도 ‘향품장사’도 성벽을 쌓는 일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한부분 뿐만 아니라 부자로서의 의무인 공적인 사업과 자기의 집앞이라는 사적인 연고에 이르기까지 두루 두루 자기의 책임을 다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홀로 자수성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높은 뜻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셔서 형제들가운데서 그가 유일하게 성공한 것입니다.

이름만을 보고서 어떻게 이런걸 알 수 있느냐고요?
이 사람의 아버지 이름이 ‘살랍’이기 때문입니다. 살랍의 뜻은 ‘상처, 균열’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결코 부유하거나 순탄한 복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게다가 자기의 형제들과의 사이에서 그 혼자만 성벽재건에 참여했는데 그가 향품장사란 것에서 위의 사실을 유추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두종류가 있는데 ‘금장색’과 ‘향품장사’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제사장이나 고위 관리, 가문의 족장이나 가장의 이름이지요.

마지막으로 역시 30절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은 자기 방과 마주한 부분을 중건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이전에 이미 성벽재건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전내에 방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의 집앞이 아니라 자기의 사무실 앞을 중건한 것입니다.
끝으로 나머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재건한 걸로 이 예루살렘 성벽공사의 명단이 끝이 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성벽재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어떤 불이익을 주었다는 기사를 보지 못합니다. 살랍의 다섯 형제들이 어떤 불이익을 받았다는 말도 물론 없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사실상 성벽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의 책무를 다하고 자기의 집앞부분 성벽을 중수했지만 성벽 앞에 집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성벽은 너무 길고 기록된 사람들의 이름은 너무 적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느헤미야가 어떤 강제적 수단을 가했다는 기록은 본장에 없습니다. 그냥 성벽재건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담담하게 기록한 것 뿐입니다.

오늘날 성전건축이니 교회의 사업을 하는데 있어 모든 이들이 한마음이 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닙니다. 반대도 있을 수 있고,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도 있고, 비협조적이거나 아주 적은 생색만을 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지도자의 입장에서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일심으로 단결하여 일을 해나가는 것이 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단결력과 추진력이 있을 것임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대자나 소극적인 자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거나 그들을 비난해서는 공동체의 건설이 깨어집니다.

공동체를 보호하기위해 성벽이 필요한 것이지 성벽 때문에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거대한 성전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거대한 공동체를 수요하기 위해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존속과 확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공동체 구성원보다 성벽이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그는 공동체를 이끌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예배당이 교인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목사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각 생각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환경이 다릅니다. 이들을 최대한 한마음으로 뭉치고 다둑이며 이끌고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구성원 개개인의 사정을 파악하고 그들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적대하거나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의 사욕을 위한 사설왕국이지요. 교회 공동체는 결코 목사의 개인 재산이 아닙니다.

(5)결국은 사람이다
사실상 이스라엘 이란 나라가 다시 선다면 가장 혜택을 많이 볼 사람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혜택을 많이 볼 사람들이 앞장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실제로 포로귀환자의 명단에 가장 많이 나오는 부류가 제사장의 가족입니다. 성경은 이를 그냥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높은 사람들은 보통 어리석은 구성원들을 교묘하게 선동하고 자기들은 그냥 슬쩍 묻어 가려하거나 그 위에 올라타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그래도 힘든 사람들 위에 올라타서 부담을 가중시키려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결국 공동체는 붕괴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절대선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공동체는 구성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구성원들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법인식이 바뀌어 사단이니 법인이니 하는 구성원들을 떠난 공동체에 법인격을 부여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것의 근본취지는 사람들을 더 널리 이롭게 하자는 것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건 좋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공동체가 공동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전체주의 논리요 강자의 논리요 기득권자의 논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논리는 항상 일정합니다. 가장 약한 공동체의 구성원을 기준으로 합니다. 어떤 극단주의자들처럼 가난이 곧 선이고 약함이 곧 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난한 자나 약한 자를 배려하지 않는 공동체는 결코 영속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공동체는 운명까지도 함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너와 내가 나뉜다면 이미 그것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논리는 차별과 경쟁이 아니라 연합과 일치이며 사랑과 희생입니다.

(6)맺는 말
중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더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대강만을 보았는데도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극소수의 이기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기의 능력껏 최선을 다해서 성벽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고위관리들, 재벌들이 앞장서서 무거운 공사를 부담했다는 것입니다.

어떤이들은 자기의 집앞 부분의 성벽을 맡았고, 어떤 이들은 자기의 집앞 부분의 공사에 참여하기 전에 이미 다른 부분에서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자기의 집앞 부분 공사에 빠져도 되는데 솔선수범한 사람도 있습니다. 두몫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벽을 쌓는데 고위관리라고 해서 약하거나 가난한 자들과 차별을 두어서 성벽을 건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성벽의 특성상 성벽은 결코 한부분이라도 생략되거나 비어 있어서는 성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자나 낮은자가 서로 협력하여 돌과 돌들이 서로 맞물려야 만이 그 성벽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자기의 집앞 부분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부자는 집이 큰만큼 더 넓은 부분의 성벽을 쌓게 됩니다. 가난한 자는 집이 작으니까 성벽을 작게 담당합니다. 그리고 멀리 갈 필요없이 자기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영적 교훈을 내려 주기도 합니다.
공적인 책임을 맡았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공적인 부분에 참여하고서도 자기의 집앞 부분 역시 참여합니다.
그리고 높은 사람부터 솔선수범합니다. 돈많고 권세있는 자는 사실은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자입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나라가 사라지면 가장 손해를 많이 볼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야 솔직히 이 나라나 저 나라나 살기 어려운건 매한가집니다. 어차피 가진게 없어서 잃을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벽공사에 열심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높은 사람들, 힘있는 사람들, 부자들은 뒷짐지고 빠지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매달렸다면 그 성벽은 완공되지도 못했겠지만, 설령 완공되었다고 해도 겉으로만 그럴듯해 보이지 실제로는 부실해서 고양이가 올라가도 무너질 그런 형편없는 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공동체가 건실하게 서기위해서는 서로 서로 굳게 협력해야 하고 , 자기가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높을수록 더 많은 책임을 기꺼이 떠 안아야 합니다. 그래서 밑에 깔린 돌이 중한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중한 것입니다. 이걸 중심으로 연결되고 위로는 엄청난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지요.
만일 그러하지 못한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사업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서 별다른 부연설명을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두 번  참여했니, 많이 참여했니 하는 것들은 성경학자들이 이름과 족보를 연구해서 찾아 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멋진 일을 한 것인데 왜 성경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들이 이 일들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 군데서 참여한 이도, 특별하게 어려운 부분에 참여한 이도, 공사가 중한 곳에 참여한 이도 똑같이 이어서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만으론 각 사람이 담당한 성벽의 넓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지도를 놓고 대조할 수 있어야 만이 그 규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이들이 한마음이 되고 연합되어야 만이 하나의 성이 완성되어 진다는 것은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우리들 역시 서로 연합해야 됨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옆의 돌들과 더 굳게 연합하면 할수록 우리가 만든 신앙공동체, 교회라는 성벽은 더 튼튼할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이는 방 맞은편을 중수합니다. 이는 매우 작은 부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성벽재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결코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고, 자기의 실력보다 더 적은 할당량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한 형제끼리도 공사에 대한 참여의 태도가 다른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 중에서 가장 부유한 자가 성벽재건에 열심을 내었던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성벽재건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복을 받은게 아닙니다. 다만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향한 책임과 열심히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복을 주신 것이고, 평소의 신념대로 그는 두군데에서 성벽재건에 참여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한 성벽재건도 그 성벽이 완벽하게 연결되지 않고 중간 중간 끊어지거나 이빨이 빠진 것 같은 형태로 완성되었다면 성으로서 아무 쓸모도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부자라서 가난한 이와 어깨동무하고 연합하기가 꺼려집니까? 끼리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힘있는 자는 힘있는 자끼리 모여 있다면 결코 성벽은 완공될 수 없습니다.
가장 힘있는 자가 앞장서지 않고 백성들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공동체는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망해 버립니다.

또 하나 본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성벽이 모두 평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훼손이 심한 곳과 절벽 위라서 쌓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 부분을 담당한 사람 중 그 누구도 왜 나만 이런 과중한 짐을 져야 되느냐고 불평한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그렇게 중하고 힘든 부분을 담당한 사람들은 모두 다 힘있는 자들입니다. 충분히 감당할 만한 자에게 과중한 책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려운 부분은 부유하고 힘있는 자가 맡고, 평평하고 쉬운 부분은 약한 이들이 맡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교회 안에서도 한 형제요 자매가 아니라 서로 헐뜯고 시기하며 무시하고 아부하는 인간욕망의 축소판 같습니다.
성벽을 쌓는 돌맹이는 같은 높이 같은 줄에서는 모두 같은 규격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곳은 거대한 돌덩이를 어떤 곳은 자갈들로 성벽을 쌓는다면 그 성은 이미 성이 아닙니다. 서로 아귀를 맞출수가 없어서 담으로 기능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 인간이 헌신하는 눈물의 본질은 똑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재능대로 최선을 다한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내가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역량이 있으면 솔선수범해서 밑에서 힘을 내고, 내가 비록 힘이 약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바는 최선을 다해서 하고 그렇게 서로 어깨동무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그렇게 서로 맞물려서 더욱 굳세어 지고 완성되어 지는 것입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1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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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느혜미야 3장에서 전하고 있는 압도적인 이야기에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깁니다. 한 번도 이런식으로 건설하는 공동체를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건설하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소외되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의 개성을 뽐내려는 튀는 인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맡아서 열심히 해나갈 때, 성벽이 재건되었다 라고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별로 자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표현해 봅시다.

열심히 일을 해서 10억이라는 제법 많은 돈을 모았는데,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1억을 내야 한다면 부자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는 저 병약한 친구는 겨우 만원짜리 한 장을 냈는데 말이니까요. 따라서, 이 이야기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너와 내가 같은 가족이거나, 또는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즉, 제대로된 공동체라면, 누군가가 힘들고 아프다면,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가서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또한,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내가 잘난 덕분이 아니라, 사회 덕분에 이런 지위를 얻을 수 있었기에, 사회에 당연히 돌려주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답은 결국 사람에 있다면, 공동체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이어야 합니다. 성벽을 쌓자고 했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나가면서, 세상은 변화를 마주하곤 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이라는 사람은 재밌는 표현을 한 바 있습니다. 0.1%가 창의적인 발상을 하면, 0.9%가 통찰력을 발휘해서 거기에 동조하는데, 이 1% 사람들이 결국 새로운 세상에 깃발을 꼽는 역할을 한다 라고 말합니다. 나머지 99%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상으로 그냥 넘어와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조금은 어려운 말인가요.

각자가 맡은 일을 충성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일, 더 험한 일들을 하고, 힘 없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함께 공동체를 이룬다는 원칙. 이 원칙은 지금은 이상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다들 승진의 개념을 더 많은 돈을 벌고, 좀 더 편해지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본디 높은 자리라는 개념은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더 많은 봉사를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여겨야 합니다.

누군가가 교회의 중심은 사람이다 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충분하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좀 더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좀 더 많은 일을 해야할 것이며, 또한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 약한 사람은 배려를 받음과 동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나갈 것입니다. 이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조금씩 확산되어 나갈 때, 종교는 아편이며, 장사다 라는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내는 만큼 대접해 주는 곳이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너와 내가 함께 웃고, 행복한 인생의 추억들을 쌓아나가는 것이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질문으로 마쳐야 겠지요. 인생을 무엇인가를 내세우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생을 의미 있는 경험을 함께 공유해 나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미친듯이 질주하는 인생은 훗날 세월을 돌아보면 총알처럼 빠르고, 세월의 흔적과 기억들이 텅비어 있다고 합니다. 의미 있는 행복한 일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함께 추억을 쌓아가는 만큼,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 2012.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