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7월29일/가식의 옷을 벗자(열왕기하5:1-1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8. 8. 20:01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29일 주일 예배

가식의 옷을 벗자 (열왕기하5:1-14)

오늘은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고 그 병이 낫는 기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기사를 볼때는 희대의 명장이요 군대 사령관인 사람이 나병환자라는 충격적인 사실 때문에 뭔가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과연 이 본문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요? 이제 본문을 보면서 차근차근 살펴보십시다.

우리 목사들은 항상 이런 상상을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난치병을 낫게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 보이는 그런 꿈 말입니다.
의술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에도 난치병은 많습니다. 의술로는 안되기 때문에 난치병일 수도 있고 , 몇 명만이 앓는 병이라서 치료술이 개발되지 않아서 난치병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병원은 철저하게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지요. 몇 명을 치료하는 방법은 돈이 안되거든요.

엘리사가 활동하던 시절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은 피부병 환자였습니다. 예전 성경에는 문둥병이라고 했고 지금 성경도 나병환자라고 하는데 원문상으로는 나병인지 아니면 심한 피부병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에서는 오늘날과 다른 나병 판별 기준법이 있었고 여기에 해당되면 실제로 나병인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나병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병일수도 있는데 우리는 원문에 따라서 극심한 피부병으로 여깁시다. 전염도 되고 점점 심해지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이러한 심한 피부별을 나병으로 여기고 사회에서 격리시킨 것은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이고 이게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벌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이름 나아만은 ‘기쁘다, 즐겁다,아름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람나라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이었고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진정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었으며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싸움을 잘해서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용사로 전쟁영웅이었고 왕은 그를 높여 부귀영화를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일러 나아만(기쁘다, 즐겁다,아름답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진정으로 ‘나아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극심한 피부병 환자였거든요. 그의 화려한 옷 속에는 추악한, 차마 마주하기 어려운 피부병이 있습니다.

엘리사 당시의 이스라엘과 아람나라는 전쟁 중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대의 적이 바로 아람입니다. 원래 아람나라는 이스라엘의 속국이었기도 하였지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약해진 틈을 타서 이스라엘의 국경을 계속해서 침략하고 있습니다. 전세가 역전된 것입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람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아람인으로 아람에서 나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경분쟁 중에 아람군인들이 이스라엘 변방의 마을에서 한 소녀를 사로잡아 갔고 그녀는 나아만의 집으로 팔려갔습니다. 노예가 된 것이지요.
겉으로 보기에 일국의 군대장관과 노예소녀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사람들은 이 노예소녀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 소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여아로 말미암아 나아만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가 해결되는 실마리가 제공됩니다.

그 아이는 이방 땅에서 아무런 권리도 없으며 나그네와 외국인과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고대 아람(시리아)에서 이 아이보다 더 낮은 사회계층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바로 크고 존귀한 나아만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1:27)”

그래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사람보고 믿나 하나님 보고 믿지” 하는 말은 틀린 겁니다. 사람을 보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가 뭐길래 저렇게 사람들이 착하고 멋진 일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열왕기서의 일차 독자는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지금 만리타향에서 전쟁포로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회의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있습니다. 자기네의 신이 무력하고 자기들이 자기네의 신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본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포로로 사로잡힌, 그래서 지금 자기들과 같은 처지의 한 포로소녀를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신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포로의 신분이지만 이 소녀처럼 큰 일을 할 수 있다. 너희도 너희가 일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다. 이 소녀는 주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소개했습니다. 그 선지자는 나아만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

나아만의 병이 낫고 난 다음 이 소녀의 형편이 얼마나 좋아졌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서를 읽게되는 유대인 포로들은 아람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계집아이를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소녀가 우연히 나아만의 아내의 종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포로소녀를 통해서 나아만을 치료하시고 그 치료를 통하여 아람나라가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것을 멈추게 하시고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리려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포로들 중에서 유독 이 소녀를 택하셔서 나아만의 집으로 보내시고 여주인을 수종 들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서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서게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위치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소개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은 나를 이곳에 불러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적국의 포로소녀의 말을 일국의 대신이 듣는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축과 마찬가지로 주인의 재산일 뿐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말하는 가축.
더구나 동족도 아니고 적국에서 잡혀온 소녀입니다. 혹시라도 치료를 빙자해서 전쟁에 큰 위협이 되는 나아만을 제거하려는 계략일 수도 있습니다. 노예소녀를 사주한 이스라엘의 간첩이 책략을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아만은 소녀의 말을 들은 것일까요?
그 전에 왜 나아만의 아내는 노예 소녀의 말을 확신하게 된 것일까요?

2절 끝에 있네요.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었는데 너무나 성실하고 지극정성으로 주인을 섬기기 때문에 나아만의 아내는 그 소녀를 완벽하게 신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소녀는 적국의 원수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성실로써 나아만의 아내에게 봉사했던 것 같습니다. 곁에서 본 여주인이 판단할 때 결코 이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만큼 성실하고 진실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아만의 아내는 각종 위험요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도저히 이 병을 낫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아이의 말에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의사도 아니고 어린 소녀의 말을 신뢰한다는게 좀 웃기지요? 그래서 이 소녀가 그만큼 주인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위한 준비과정이 좀 웃기지요?
나아만은 아내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의 사마리아로 엘리사를 바로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뜬금없이 자기의 왕에게 찾아갑니다. 그러자 아람의 왕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나아만의 치료를 부탁하는 친서를 써줍니다.
편지의 내용은 더 웃깁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결코 의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보고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완전 황당 그 자체입니다. 나아만은 왕의 친서와 예물로 은 십달란트와 금 육천개, 그리고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갑니다. 은 십달란트가 금 육천개보다 앞에 있지요? 그것은 은의 양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 육천개의 가치를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일달란트는 34kg이고 한 세겔은 11.4g입니다. 달란트가 세겔보다 큰 단위이기 때문에 앞에 쓴 겁니다. 즉 은340kg과 금68.4kg입니다. 요즘시세로 금값만따져도 37억원이상입니다. 아마 옛날에는 가치가 더 높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시에는 기술이 없어서 금은을 채취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예물을 가지고 간 것을 보면 아마 나아만은 이 병 때문에 너무 너무 괴로워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금은과 비단의복을 주어도 결코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면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도 이 병은 결코 낫는 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간 것이 아니라 자기나라 왕의 친서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왕궁으로 갑니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 사람은 아직 자신의 실상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나라의 사신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전쟁영웅도 아니고 큰 용사도 아니고 군대 장군도 아닙니다. 그가 부자고 높은 사람 이라는거하고 그의 병을 치료하는 것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치료가 필요한 병자일 뿐입니다. 그것도 실상을 알면 모두가 놀라 자빠질 추악한 피부를 가진 병자입니다. 전염도 되기 때문에 모두 도망갈 겁니다. 그의 껍데기에 걸치고 있는 비단이나 황금보석은 전혀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의 병은 추악하고 위험하며 혐오스럽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착각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지 멋진 대접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나아만이 가지고 온 아람왕의 친서를 보고 적이 전쟁을 도발하기위해 시비를 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옷을 찢고 난리가 났습니다. 슬프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의 왕은 제대로 말하네요.
“내가...하나님이냐 어찌하여 내게로 보내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그래요, 나아만의 병을 고치기위해 필요한 사람은 의사겠지요? 그런데 당시의 의술로 나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왕이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고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나아만을 자기에게로 보내라고 합니다.
비록 길은 돌아 왔지만 나아만은 결국 엘리사의 치료를 받게 될 것 같습니다.
나아만의 행렬을 봅시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말들과 병거들. 나아만은 지금 군대를 끌고 온 겁니다. 엄청난 보물을 지키기 위한 호위병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병자가 병원에 가는것치고는 너무 과한 행렬같습니다. 어쨌든 그는 나라의 국빈자격으로 방문을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습니다. 단지 사환을 보내서 처방만을 줍니다.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엘리사는 외국의 귀빈을 맞이하는 자세로 그를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의 규례대로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정한 것과 접한 자는 같이 부정해 지기 때문에 부정한 자와 접촉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부정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거든요. 그래서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에게 말을 전한 것입니다.
자기 집안에 들이면 집이 부정하게 되니까 집안으로 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환이 나와서 엘리사의 처방만을 전해주자 나아만은 크게 노합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사실 ‘그 부위’는 원문상 ‘그 지점, 그 장소’를 말합니다. 키텔이라는 학자는 그곳이 성소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상처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치료를 할 줄 알았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면 당시 이교도들은 그런식으로 치유의식을 행했기때문이지요.

이 치료방법을 잘 살펴보면 키텔의 논리에 의하면 나아만은 옷을 벗지 않습니다. “성소에서 엘리사의 손을 흔들어”
만일 본문이 성소가 아니라 단순히 상처부위를 말한다해도 우리말 성경대로 하면“엘리사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가 됩니다.
두 방법 다 나아만의 옷을 벗기고 상처가 드러나지 않게 하고 치료합니다.

여기에 나아만이 화를 낸 이유가 있습니다. 나아만은 비밀리에 치료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소는 매우 어두운 곳입니다. 요즘처럼 대낮같은 환한 조명이 있는게 아니라 겨우 촛불정도 밖에 없고 창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은 자기의 추악한 진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됩니다.
어둠은 추악함을 어느 정도 감추어 줍니다. 설마 성소에서 망측하게 옷을 벗기기야 하겠습니까?

성소가 아니라 엘리사의 집앞에서 치료한다고 해도 그냥 상처부위에 접촉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율례에 벗어나는 것이므로 직접 상처부위에 접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입고 상처부위의 위쪽 허공에서 그냥 손을 흔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를 치료하는 겁니다. 부정한 것과 접하면 엘리사도 부정하게 되므로 옷을 안벗어도 됩니다.
감쪽같이 치료가 됩니다. 자기의 상처부위를 보여주지 않고도.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오늘 나아만의 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저는 나아만이 노한 이유가 엘리사가 그를 정성껏 모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가 적국의 선지자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매우 간절하게 그의 병이 낫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사환이 그에게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하자 그는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냥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가 옷을 벗기 싫어서 그렇게 화를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가 왜 그렇게 옷을 벗기를 싫어했을까요?

솔직히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신 것은 지극히 간단한 것입니다.
그의 가신들도 그에게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과연 나아만은 요단강이 다메섹의 강보다 더 보잘 것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요단강에서 7번 목욕하라는 명령을 우습게 여긴 것일까요?
사실 나아만이 언급한 아바나강은 다메섹에서 흐르는 강인데 물이 대단히 맑아서 그리스 로마인들은 이 강을 일러 황금의 강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요단강보다 차라리 아바나강이 낫다고 소리친 겁니다. 그런데요 나아만은 또 착각합니다. 이 병은 난치병이라서 아무리 맑고 깨끗한 강에서 씻는다고 낫는 성질의 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질의 차이가 나아만의 치료에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지요?
엘리사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한 것은 숫자 7회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완전한 수’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완전한 인내’를 나타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교만을 책망하고 그에게 겸손과 완전한 인내, 그리고 절대적 순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럼 나아만은 그의 상처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노한 것일까요?
천만에
사실 나아만은 가식의 옷을 벗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부드러운 비단과 번쩍이는 황금으로 장식된 옷 속에 그 자신이 보기에도 끔찍한 몸을 보이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애써서 쌓아올린 명예가 깨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백주대낮에 자신의 흉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엄청나게 괴롭고도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이들의 피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져보신 적이 있나요
마치 차가운 대리석을 만지는 듯 합니다.
양지옥을 만지는듯 합니다.

그런데 피부병이 발하여 울긋불긋할 때는 견딜 수 없습니다. 각질이 앉고 그게 보기 싫어서 긁게 되면 이게 벗겨져서 피가 나고 그러면서 점점 더 흉해지는 것을 보기가 싫어서 애써 외면하며 옷으로 가리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보다 몇십배 더한 치부를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피부병은 ‘하얗게 변해서 각질이 앉는’ 그런 병인 걸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처를 직접 보게 되면 자기의 부하들도 모두 도망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여기서 이것을 남에게 보이는 것도 괴롭지만 자기 자신이 이러한 현실을 직면하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두가지가 생겨남으로써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두가지가 바로 시계와 거울입니다. 자기를 너무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은 사실 매일 매일 우리로 하여금 무서운 진실에 직면하게 합니다. 거울 때문에 우리는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과 처진 피부에 대해서 더 애석해 하고 이를 복구하기위해 엄청난 돈을 얼굴에 투자하는 것이지요. 거울은 일체의 조작이나 포샵처리가 되지 않은 그대로를 마주하게 합니다. 천하의 미남이나 미녀가 아닌 다음에는 끔찍한 일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가지는 꿈속에 안주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솔직히 자기 자신을 백주에 내어놓고 마주 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상의 나래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들로 적당히 뒤섞어서 나는 비극의 영웅이 되기도 하고 , 시대의 불의를 맞서서 싸우는 의인이 되기도 합니다. 천하의 미녀가 되기도 하고 전설의 미남자가 되기도 합니다.
때론 그러한 꿈을 깨고 비참한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 애써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가장 나아만이 하기 싫어했던 그것을 엘리사가 요구했기 때문에 그가 노한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킹덤 오브 헤븐’에 나오는 예루살렘 왕국의 문둥이왕이 생각납니다.
그는 자기의 추한 모습을 감추기위해 철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그리고 매끄러운 철가면속에 썩어져가는 육신을 감추고 있습니다.
자기의 여동생이 철가면을 벗기려 하자 그는 여동생의 손길을 거부하며 옛날의 아름다웠던 모습만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침내 왕이 죽자 여동생은 오빠의 철가면을 벗기는데 그 속에는 생각은 했지만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보기 어려운 끔찍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요.
우리가 단지 상상하는 것보다, 막연히 추정하는 것보다 현실은 어쩌면 더 악화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실은 더 나쁜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러 그런 현실을 외면하며 적당히 가면을 쓰고 , 가식의 옷을 가지고 치부를 가리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아만은 ‘그것을 벗어라’고 명령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백주 대낮에
그것도 자기의 부하들 앞에서.
만일 그가 끝끝내 자기의 위신을 생각하고 옷벗기를 거부했다면 그는 영원히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그의 병은 천하의 어떠한 보물로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가식의 옷을 벗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내가 바라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인데 그걸 적당히 감추고 남에게 존경과 복종을 강요해왔다면 이거야 말로 엄청난 난센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며 치료받아야 하는 불쌍한 병자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가식의 옷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걸치고 있는 명품옷이나 우리가 걸치는 보석으로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쌓은 부와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높은 사회적 지위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우리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는 한갓 가련한 병자일 따름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한 겸비한 자세로 오늘 주님 앞에 나온다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과연 그의 병은 언제 나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엄청난 결단을 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내려갈데가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옷을 입고 있을때는 그는 나아만이었습니다. 그는 아람의 군대장관이고 아람왕의 존귀한 자이며 구국의 영웅이었지만 그가 옷을 벗고 자기의 끔찍한 피부병을 공개한 순간 그는 단지 치료받아야 할 병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도저히 당대의 의학으로 고칠수 없는 난치병을 가진 난치병환자지요.

그게 나아만의 실상입니다. 나아만도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비참해 지는 것을 막으려고 옷을 벗기 싫었던 겁니다. 그런데 옷을 벗고 강물에 몸을 담구었다고 해서 일순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강물에 몸을 담구었을때 어느 정도의 차도가 있다면 그는 신이나서 다음 목욕을 서둘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에 만족해하며 신나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몸은 여섯 번 목욕할 때까지 결코 변화가 없었다가 마지막 일곱 번을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깨끗해졌으리라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용기를 가지고 가식의 옷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해서 금방 어떤 차도가 있고 상황이 나아지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현실은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가식의 옷을 벗어버렸지만 바라던 결과가 그렇게 금방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기다림이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믿음은 기다림을 빼고는 이야기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믿음이기도 하며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
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나아만이 일곱 번을 물에 담구어서야 비로소 몸이 완전케 된 것 같이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를 애써 헤아리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가 명령하신 횟수를 채우면 저절로 때가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때는 5번도 6번도 아니고 7번이였지만 그것은 선지자의 명령한 횟수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단지 순종만이 요구되어질 뿐, 적당함이나 타협이란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그의 명령대로 하는 것 외의 어떠한 다른 길도 결코 그 병을 낫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엘리사의 명령은 전혀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사의 명령은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즉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이는 레위기 14:8,9절에 의하면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어야’한다는
성경의 정결의식에 따라 지시하였을 뿐입니다.

물론 그것은 병이 나음을 입고 난 다음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명령할 때 이미 이 명령이 지켜진다면 그 병에서 완치함을 입으리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굉장한 자신감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 권능을 행하던 스승 엘리야의 능력의 보자기를 자기가 받았거든요.

우리는 멀리 보거나 차분히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하며 원망하다가 마침내는 좌절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분노하며 좌절하기전에 우리의 아버지께 아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시한대로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부터는 단지 순종과 기다림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까?
그렇다면 그 횟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며 그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앉았던 자리에서 실망과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2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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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지난 주에, 현실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짧게 코멘트 했었습니다. 한마디로 "현실이 힘들다며 현실적인 고민에 파묻혀서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었습니다. 이번 주는 그와는 매우 대조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는 힘"에 관해서 입니다.

현실은 위인전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과 달리 복잡한 존재이며, 그의 생각이나 가치관 조차도 일관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꽤 잘 알려져 있는데, 흑인 인권 운동의 대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그의 여자 사생활 문제로 인해서, 매우 곤욕을 치뤄야 했습니다. 흑인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그것도 목사(!)가 성적파트너가 있었다는 것은 보는 이를 매우 곤란하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어딘가 와닿지가 않습니다.

나아만에 대해서 아무리 고민해봐도 쓸 말이 생각나지 않은 것도, 그는 대단한 장군이면서도, 불치병 환자라는 점이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일국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면서, 한편으로 가장 약한 사람이다 라는 역설. 한 마디로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살아갔던 사람인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가면을 씁니다. "나는 괜찮아" 라는 가면, "나는 행복해" 라는 가면, "잘 될꺼야" 라는 가면. 하지만, 때로는 진실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가면을 벗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돌아보고,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실히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실하다는 말은 쉬지 않는다 와 같은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매일 좀 더 나은 자신, 매일 좀 더 나은 환경을 바라면서 기도하는 사람의 인생은 조금씩 변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잡하고 엉켜있는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더 나은 인생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어쩌면 때가 찰 때까지 말입니다. 약해 빠진 저라는 사람은 그래서 오늘도 일을 해내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 2012.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