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8월 5일 주일 예배
기도의 방법 (누가복음11:5-13)
우리들은 세상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한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 강하고 우리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시때때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때로는 위험한 순간에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때로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제대로 된 선택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도할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과연 어디까지 우리의 운명을 계획해 놓으셨을까요? 그가 인간과는 달리 결코 변개치 않는 분이시라면 과연 기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조차도 듭니다. 과연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바뀔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는 결코 인간처럼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건 하지 않건 원래 정하신 하나님의 역사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문제에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될지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우리들도 잘 아는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주기도문처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본문5-13절은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물론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7절에 보면 떡 세덩이를 빌리러 온 친한 벗에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려는 의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강청하면 그것 때문에라도 떡 세덩이를 빌려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당초의 계획을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면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들어 주지 않을 때는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주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해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끈질긴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본문의 예화는 점점 더 강해집니다. 처음 예화는 떡인데 떡은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떡에 생선이 더해지고 마지막으로는 알까지 추가되는데 이는 삶은 달걀을 말합니다. 즉 누가의 예화에 나타난 음식들이 점점 더 좋아집니다. 빵에서 생선, 그리고 달걀까지.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성령’이 나옵니다. 이것을 기도와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아니 더 요구 조건이 커진다고 해야 합니까?
주기도문에서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더 기도하면 할수록 더 더 좋아지는 것이지요.
떡을 달라고 기도하면 주시고 생선도 달라하면 주시고 더 기도하면 달걀도 주시고 더더 기도하면 성령의 충만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을 얻기 위한 기도는 앞에서 말한 떡이나 생선이나 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나머지 인생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기하지요? 그것은 그 기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뭘 달라고 달라고 강청하면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이걸 달라고 기도하고 저걸 달라고 기도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이것저것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끈질기게 기도하는 우리의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그것보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는게 더 중요합니다. 더 좋은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 충만한 자에게는 필요한 모든 것을 끈질기게 기도할 필요없이 미리 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나의 소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니까요.
주님은 한 제자의 요청에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주기도문을 소개하고 바로 뒤이어서 5-8절은 하나님은 인내를 가지고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고 11-13은 언제나 좋은 것으로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의 확실성과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므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에 무감각해 집니다. 왜냐면 현실은 이런 이야기와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해서 애타하고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 목말라 합니다. 심지어 기도의 특권을 가진 성도들이 점쟁이한테까지 찾아가서 자기의 미래를 알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가 기도함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하나님의 응답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점쟁이 한테까지 찾아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중요한 가르침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그냥 지나쳐왔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것도 많이 있을 것이므로 이제부터 자세하게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옮긴이 주 - 여기 아래부터는 설교 원고를 옮긴 것이라 경어체가 생략되어 있으니 양해 부탁 드립니다)
벗이 있는데, 여기서는 세명의 벗이 등장한다. 여행 중에 갑자기 찾아온 친구, 그를 먹이기 위해 한밤중에 떡을 찾아 나선 벗, 간절한 요청을 받고 일어나서 떡을 준 벗 이렇게 세 사람의 벗이 등장한다. 이 사람들은 각자 각자는 벗의 관계에 있지만 세사람이 동시에 벗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떡을 얻으러 온 친구는 떡이 있는 친구에게 가서 그 벗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떡을 얻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만일 찾아온 벗에 초점을 둔다면 끈질기게 기도해야 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반면 떡을 준 벗에 초점을 둔다면 하나님은 끈질기게 기도할 때 들어준다는 점이 강조된다. 기도자의 입장에 서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입장에 서던지 이 이야기의 주제는 명확하다. 바로 끈질긴 기도만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내게 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럼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다. 본문의 예화를 살펴보면 보통 처음에는 주지 않으실 것 같다. 왜냐면 밤중에 떡을 빌리러 온 벗에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거절의 뜻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성경에서는 “벗됨으로 인하여는 주지 않아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는 주신다”고 하였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있다. 처음 한 두번 해보고 안된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들어 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밤중’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 찾아와도 요구에 응하기 싫은 주인의 심정을 나타내 준다. 오늘날처럼 전등이 있거나 촛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등잔불을 사용했고 달빛이나 별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칠흑같은 밤에 일어나서 불을 찾아서 밝히고 떡을 찾아서 벗에게 주는 일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벗들은 모두 가난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루의 일용할 양식이외의 양식을 가지지 않고 자기들이 먹을 떡만을 갖고있기 때문에 갑자기 벗이 오니까 대접할 여분의 떡이 없는 것이다. 물론 떡을 할려면 여분의 가루가 있어야 하고 또 그 가루반죽 속의 누룩을 발효시켜야하기에 시간도 걸리지만 내일아침을 위해 가루반죽을 해놓았다고 생각하면 이들이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집처럼 당시에 유대의 집들이 창이 많아서 밤에도 달빛과 별빛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유리가 없는 당시에 창을 낸다는 것은 도둑이 들지 못하는 삼층 이상의 대저택에서나 있을 수 있는 구조고 단층의 집에서는 창문이 넓으면 밤에 도둑이 들수 있기에 그들의 창문은 매우 작다.
그들의 집은 흙집으로 바닥도 그냥 흙이었으며 침상에 올라갈 때 발을 깨끗하게 씻고 올라가기 때문에 다시금 신발을 신게 되면 다시 자러 갈때에는 또 발을 씻어야 되고 발을 씻으려고 하면 물이 있어야되는 ...만일 물이 없다면 물을 길러 가야되고, 물은 동구밖에 있다면 한밤중에 얼마나 힘들겠는지를 생각하면 밤중이 주는 의미가 그대로 와닿는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매우 가난해서 불을 밝힐 기름도 아끼기 때문에 겨우 한 개정도의 등잔만이 있고 이 등잔이 일단 꺼지면 어두워서 등잔을 찾아서 불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대게 그들은 해가 지면 자려고 준비하고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는 일찍 잠자리에든다. 기름이 넉넉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일단 잠자리에 들면 보통은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하루종일 육체노동에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밤중에 떡을 빌리러 온 벗의 방문은 이미 그 속에 떡을 빌려 주는 것이 곤란하다는 상황이 내포되어 있다.
떡 세덩이는 한 끼에 해당하는 양이며 당시 이웃이나 벗에게 빌리는 것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드물지 않은 경우였다. 즉 비유가 상당히 현실성이 있다. 유대인들의 이 떡은 누룩을 넣어서 부뚜막같은 곳에 붙여서 구운 것으로 오늘날의 떡이나 빵과는 다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보통 이 떡을 조금씩 찢어서 무화과나 꿀에 찍어 먹기를 즐긴다. 물론 가난한 이는 그냥 먹을 것이다.
떡에 물고기에 달걀에 찍어먹을 꿀이나 쨈이면 굉장한 식사가 된다. 그러므로 누가의 예화에 바로 이 순서, 떡과 생선과 알의 순서로 예화가 이어진다.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하면-밤중에 찾아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밤중에 친구집을 방문하는 일은 중동에서는 낯선 일이 아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열처녀 비유에 나오는 결혼식 신랑이 한밤중에 도착하는 것을 보라. 보통의 여행자들은 태양을 피해 오후 늦게 여행을 시작하고 밤늦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므로 이 설정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친구의 변명에서 떡을 주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는 하루의 곤한 노동으로 피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친구의 외침으로 잠이 깼을 것이다. 또 캄캄한 밤중에 일어나 닫힌 문을 여는 일은 귀찮다. 또한 다른 식구들 역시 자기와 같이 잠이 들었다.
문이 이미 닫혔고-여닫이 문이 빗장에 의해 굳게 닫힌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의 가옥에서 창문이 없거나 있어도 환풍용의 조그만 것이다. 그러므로 집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캄캄한 한밤중에.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는 표현에서 이 가정은 온 식구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아주 가난한 전형적인 시골 농부의 집이다. 예수님이 겉옷을 잡힌 자에게 밤이 되기 전에 돌려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겉옷이 그들의 이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대부분의 이들에게 여분의 이불은 굉장히 사치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전에 발을 씻고 잔다. 그들은 보통 맨발이거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샌들류인데 이것은 걸치는 것이 아니라 신발끈을 정성들어 매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캄캄한 한밤중에 신발끈을 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농가의 바닥은 흙이다. 즉 그가 침대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자리에 들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흙발을 다시 씻어야만 하므로 이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유대인들에게 물은 엄청나게 귀한 것이고 집집마다 수도가 있거나 우물이 가까이에 있는 경우도 드물다. 만일 그 집에 여분의 물이 없다면 그는 한밤중에 발을 씻기위해 물을 길러 가거나 아니면 흙발로 침상에 올라야 하는 황당한 경우를 겪어야 한다.
물론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이들의 고충도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식구들이 일어나야 된다. 왜냐면 한 이불이므로. 혹시 유대인들은 속옷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오늘날의 긴 티셔츠같은 옷위에 겉옷을 입고 외출을 했다. 음, 바지나 속옷같은게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친구를 맞이하기위해서 그는 일어나서 겉옷을 입어야 했을 것이고 다른 식구들, 적어도 자기의 아내 역시 겉옷을 입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그 들이 까는 요가 아내의 겉옷이고 덮는 이불이 남편의 겉옷이라면....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유대의 가난한 가정에서는 겉옷을 이불대용으로 사용하는 일이 흔했다.
누웠으니-너무 곤하게 잠들어 있다. 단순히 자려고 누웠다는 말이 아니다. 원문의 뜻은 이미 곤하게 잠들었다는 뜻이다. 물론 벗은 깨었지만 다른 이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데 그들을 몽땅 다 깨워야 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귀찮고 힘들고 식구들의 원망을 사겠는가?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그는 떡이 문제가 아니라 일어나서 식구들을 깨우고 문을 열고 하는 일련의 행위가 더 문제라고 한다.
할 수가 없노라-하고자 하지 않다. 원하지 않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가 싫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떡 세덩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귀찮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벗이 떡 세덩이를 빌리기위해서는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고 떡을 주는 귀찮음보다 떡을 주지 않아서 더 크게 귀찮다고 느끼게 만드는 경우 밖에 없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쿵쿵거리면서 이름을 크게 부르고 떡을 달라고 강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변명이다. 그는 결국 친구의 강청 때문에 떡을 준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일어나기 싫은 핑계에 불과하다.
강청함-부끄러움이 없음, 뻔뻔스러움.
문밖의 벗은 떡을 먹어도 그만, 아니라도 그만의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떡을 얻기위해 계속해서 두드리고 강청했다. 그런데 잘 보라. 문밖의 벗은 자기를 위해서 떡을 강청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한밤중에 찾아온 벗, 즉 남을 위해서 떡이 필요하기 때문에 두드리고 강청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가 배가 고프면 이렇게 친구의 거절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배고픔 때문에 강청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의 배고픔 때문에 단순히 그 친구의 배고픔을 덜어 주기 위해서 자기가 이렇게 수고하는 경우는 자기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할 때보다 아무래도 열의가 덜하고 강도가 약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의 벗은 자기를 한밤중에 찾아온 벗의 주림을 해결하기 위하여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딱 이 본문을 예로 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당시 랍비들의 어법은 인용을 좋아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달랐다. 당시의 랍비들은 구약 성경 중 토라의 인용을 즐겼고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라’고하면서 자기 말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
구하라-주실 것이요-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더욱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구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능동태로 사용되어) 더불어 자신이 직접 구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실것이요-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일을 나타낸다. 미래 직설법. 구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강한 확신이 있다.
찾으라 찾을 것이요-찾으라는 발견하기 위해 애써서 찾는 것을 말한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을때도 사용되었고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을 때도 자주 사용된다. 천국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는 데도 사용된다. 그러므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에다가 그 복을 주시는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으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이것 역시 우리가 문을 두드리면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을 말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는 말은 사실 점점 적극성을 띠고 있다. 구하는 것은 입으로, 찾는 것은 눈으로, 두드리는 것은 우리의 손과 발을 사용하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려면 문으로 가야되고 손을 들어서 두드리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우리의 기도도 안되면 계속적으로 그리고 더 열심히 해야된다.
(더욱이 이 단어가 현재직설법으로 사용되었다.) 즉 한글로는 미래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실제 사용된 단어는 현재다. 기도의 응답은 현재 일어나는 일이다.
삼중 반복 대구를 사용하여 매우 생동감있고 현실감있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 현재 -하고 있다.
생선대신에 뱀을 주며-‘생선과 뱀, 알과 전갈, 좋은 것과 성령’을 예로 들고 있다.
여기서의 뱀은 물뱀으로 이방인들이 식용으로 사용하였다. 요리하고 나면 사실 생선과 비슷하지만 유대인들에게 뱀은 부정한 것이므로 결코 아들에게 뱀을 줄 유대인 아비는 없다.
전갈은 맹독성이다. 그러므로 생선 대신에 뱀을 주는 것과 같은 속임수나 맹독성의 전갈과 같이 기도하는 자를 더 어려움에 처하게 하는 일은 없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간구자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응답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라.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보다 변화가 있는 것이 응답에 더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그는 우리의 간구에 속임수를 써서 돌려대거나 아니면 우리의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 구해서 그 응답이 우리를 어렵게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당연히 아버지는 우리에게 다른 더 나은 것을 임의로 주실 것이다. 우리가 잘못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알은 삶은 달걀, 떡과 마른 생선과 함께 유대인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전갈이 몸을 말고 있으면 달걀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즉 비슷하게 보이는 것으로 대구를 삼고 있다.
아주 강한 부정의 의미가 쓰여 ‘결코 주지 않는다’
너희가 악할 지라도-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선하신 하나님과 대조되는 악한 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지칭하는 이는 인간들 중에서 특히 악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게 좋다.
너희 천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는 성령을 ‘좋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본에는 마태와 누가를 합쳐서 ‘좋은 영’이라고 표현한 곳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성령이다. 왜냐면 성령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의 근원이 하니님이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의 아들이 되게 하는 말씀을 ‘복음’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시지 않겠느냐-언약적 미래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시행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끈질기게 구하는 자는 반드시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 예화를 보면 몇가지를 알 수 있다. 여기 본문에 등장하는 벗들은 모두 가난한 자들이다. 여분의 떡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멀리서 밤늦게 벗이 왔는데 소고기 세덩이가 필요하지 않고 떡 세덩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아이들과 한 침상에 누웠다는 것을 보라. 이집에는 방도 침대도 하나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자, 무언가 필요로 하는자, 힘없는 자들이 더 기도한다.
그리고 종이 가서 떡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가서 떡을 빌린다. 주님 역시 가난한 이들의 삶을 가정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 하나는 예화에서 나오는 것들이 바로 유대인의 기본적인 음식이라는 것이다. 제일 처음에는 떡이 나오고 다음으로는 생선이 나왔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가 유대인의 기본적인 식단이다. 여기에 달걀이 나온다. 이것은 분명 점점 식단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달걀이 보편화된 오늘날과 달리 닭이 귀했던 당시에 달걀은 굉장히 귀한 음식이었다. 이렇게 점점 식사가 좋아 지다가 예화에서는 최종적으로 성령의 충만이 나온다. 왜냐면 개별적인 무엇무엇들을 다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기만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필요에 의해 무엇 무엇을 구할 필요도 없고 구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예화를 보면서 우리가 응답받는 것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을 보게된다. 이것을 기도라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연약하고 가진 것 없는 인간이기에 우리의 삶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무 너무 많다. 그때마다 달라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삶동안 계속해서 달라는 기도만 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필요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예화에서도 나왔지만 그는 자신이 아니라 먼 곳에서 온 벗을 위해서 떡이 필요했다. 그래서 또 다른 벗에게 떡을 빌리러 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도가 효력을 보려고 하면 자기보다 먼저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경에서 기도의 효력에 관해 한가지 원리를 발견한다.
기도의 효력이 제일 센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다음이 남을 위한 기도이며 가장 효력이 약한 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 하는 기도이다. 만일 자기를 위한 기도 중에서 정욕대로 구하는 것은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너무 우리의 필요만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된다. 이제까지 준 것에 대한 감사도 없이, 남도 돌아보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나라도 생각지 않고 냅다 자기를 위해 달라고만 기도한다면 그 기도의 응답률은 매우 많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 일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께서 채워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군사로 나가는 우리는 더 이상 나머지 일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또 하나는 기도하는 이의 자세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계속해서 들어 줄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정말 성가시게 계속해서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도는 한번 두 번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들어 주실 때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도 성령님이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결코 기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고 자녀가 아버지에게 간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11절부터 13절까지의 비유가 바로 우리에게 하는 비유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된 우리가 바로 그 대상이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긴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결코 잘못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우리의 기도가 잘몰라서 잘못된 것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결과가 있도록 그렇게 응답하신다.
지금 당장 자그마한 것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더 좋은 것,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함이다. 나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일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기도하나 안하나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함이 없다고 말하기는 그렇다. 벗됨을 인하여는 들어 주지 않을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는 들어 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일이다. 물론 우리는 그 기도가 응답 받을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것에 대해서 일일이 기도할 필요도 없게 만들 것이다. 왜냐면 나는 나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은 나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놓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성령님께서 나에게 충만히 임하실 것이며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의 모든 걱정을 다 제거하신다. 성령의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불가능을 뛰어넘는다. 왜냐면 내 안에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며 ,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것은 나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모집한 하나님의 당연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자. 그것도 계속해서 기도하자.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자. 그러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강도는 점점 더 세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본 뜻에서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입으로만 하고 눈을 뜨고 찾고, 마침내 손발을 움직여 두드리는 순서를 보면 우리의 기도는 점점 더 세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반대로 기도한다. 처음에는 열심히 기도하다가 안되면 점점 강도가 약해지다가 결국은 기도를 중단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안들어 주면 점점 더 열심히 간구하라고 하시고 들어줄때까지 끝까지 뻔뻔하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기도하라, 기도가 응답받을때까지 기도하라,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8월 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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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해보다가 잘 안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어서 집어치우고, 적당히 괜찮고 할 만한 것을 찾아서 둘러본다. 둘째, 해보았는데 잘 안 되었으니, 더욱 더 열의를 가지고, 있는 힘껏 부딪혀본다. 두 가지 선택지 모두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고민하거나 마주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올림픽이 요즘 화두니, 과거 노먼 빈센트 필의 책에 있던 재밌는 예화 (실화입니다!) 꺼내면 타이밍이 괜찮겠네요. 어떤 사람이 힘껏 높이 뛰기를 해서 그야말로 첫 번째 시기에서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우승이 확정되었고, 나머지 추가 기회를 뛰거나 시도할 필요조차 없었지요. 1등의 박수갈채를 받고 폼나게 있으면 되는데, 그는 무엇이 아쉬웠던지,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겠다고 더 높은 신기록에 도전합니다. 순식간에 관중석은 조용해 졌고, 그는 보란듯이 더 높은 신기록에 도전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패했습니다. 분위기도 싸해졌지요. 분명 우승인데, 뒷맛은 좀 찝찝하고 아쉬운... 뭐, 그런 분위기.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도전을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그렇게 대회는 끝났습니다. 시간이 몇 년 흐르자, 그 선수는 당연하게도 더욱 좋은 신기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좀 더 용감하고,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하다가 잘 안 되었을 때... 계속해서 기도하고, 계속해서 시도하는 사람은, 분명 이루어 낸다는 것이지요. 그 기도가 올바른 것이라면 분명 응답받을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포기하지 말라는 말에 현혹(?)되어서, 노력도 없이 계속해서 똑같은 도전만 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바보스러운 사람이 누구이야기냐 하면, 바로 저같은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어떤 도전을 할 때는, 자신이 봐도 감동스러울 만큼, 진지하고 치열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전이라 할 수도 없고, 그냥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고 합리화 하기 바쁜 저처럼 비겁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 입니다. 매일 무의미하게 똑같이 비슷비슷하게 살던가, 매일을 기적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열정적으로 살고 치열하게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던가... 아인슈타인이 했던 말을 조금 각색했네요.
눈감고 누워서 부르짖어도 안 된다면, 더 열심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또 찾고 그래도 안 된다면, 죽기 살기로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면 됩니다. 힘내자고요. / 2012.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