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8월12일/사랑의 예언(누가복음21:20-2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8. 17. 19:07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8월 12일 주일 예배

주가 주신 사랑의 예언 (누가복음21:20-28)

우리들이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할때부터 우리는 한가지를 강조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읽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성경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래요, 성경은 우리 신앙생활의 기준이었고 표준이었습니다. 울타리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며 읽히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부분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거대한 영적인 진리와 비밀이 있다고 믿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모두 알필요도 없지요.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모두 알려고 하다가 넘어진 것이 바로 사탄이쟎아요. 아담 역시 신이 되려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저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만큼만 그 자신을 공개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책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삶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책입니다. 심지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경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인간의 말도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그래서 성경을 더 이상 제대로된 신앙의 지침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솝우화처럼 비유와 철학적인 교훈이 적혀있는 어느 먼 다른 나라의 옛날 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경은 우리 신앙의 표준이며 세상의 가치관과 이단적인 교리로부터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울타리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많은 비유가 있습니다. 심지어 그 비유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무엇을 말하는지 불명확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본문은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전에 자기의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면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거대한 환난가운데서 구하시려고 하신 예언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그 닥쳐올 환난을 피할 방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은 이 예언대로 행동해서 거대한 , 유대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대환난에서 구함을 받습니다.

세계의 오래된 나라들에는 다 예언서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몇년전 송하비결이라는 책이 유행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정감록이니 격암유록이니하는 책들이 유행했었습니다. 이런 책들은 주로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는데 좋은 일보다는 주로 큰 환난에 대해서 예언하고 이를 피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십승지가 있습니다. 난리가 났을 때 피할 수 있는 열군데의 지명이 나와있는데 난리가 나면 이곳으로 피하라는 말이지요.

솔직히 이런 예언서들이 제목은 그럴듯하지만 내용이 애매모호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내용이 많아서 별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난리가 지나고 난 다음에 “알고 보니 예전에 무슨 책에서 예언한 내용이 바로 그거더라”는 식의 전개가 많습니다.

가령 6.25전쟁을 예언했는데 이때는 계룡산으로 피난하라는 것이죠. 그 책에 ‘계룡산하 구백만’ 란 글이 있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계룡산은 충청도에 있기 때문에 6.25전쟁때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공산군이 휩쓸고 지배한 곳이기 때문에 이 예언서를 보고 계룡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계룡산이 남해안 거제도에도 있답니다. 포로수용소 뒷산이 계룡산이라는 것이죠. 황당하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나라의 수많은 산들, 심지어 동네 뒷산의 이름까지 다 알고 있을까요?

그래서 예언서의 내용은 주로 뜬구름 잡는 식의 해석이 많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난리가 났을 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로 신뢰할 만한 것도 못됩니다. 그런데도 이런 예언서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사회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뭔가 그럴듯한 말이나 글들을 쫓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주로 비유나 예화를 들어서 말씀하기를 즐기셨습니다. 가령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아니면 저 하늘에 나는 새를 보아라’ 는 식으로 일상 생활가운데서 잘 찾아 볼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즐기셨습니다. 드라크마, 누룩, 겨자씨 비유 등등........
이렇게 이야기하는 습관에 익숙한 우리들은 복음서를 보면서 뭔가 현실생활과는 동떨어진 철학적인 의미를 찾으려고만 노력합니다. 물론 성경 본문 속에 깊이 숨어있는 복음의 진리를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유용한 것이지만 우리 주님이 항상 이런 식으로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득권자들 대제사장,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들과 사이가 매우 좋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이 순진무구한 백성들을 쥐어짜서 백성들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든다고 비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군병들에게 해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자신의 제자들을 책임질만큼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바로 사랑으로 나온 예언이지요.

사실 이 예언의 시작은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것 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헤롯이 지은 거대한 성전은 황금으로 뒤덮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거대하고 볼만한 것입니다. 왜냐면 에돔(이두매)출신인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서 성전공사에 나름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왕이라고 칭해지기는 했지만 독립국의 국왕이 아니라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책봉된 , 한마디로 유대의 로마총독과 비슷한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에돔사람의 지배를 싫어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서 거대한 성전을 지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의 장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이미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유대에게 있어 나라의 멸망이란 것은 약간은 생소한 단어입니다. 나라자체는 이미 멸망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의 파괴 외에도 더 끔찍한 예언도 하셨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사실상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영원한 영광의 도시이자 하나님의 성지이며 이스라엘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의 영광이 영원할 것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식민지가 된 후에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써 사랑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예루살렘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20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줄로 알라고 하십니다.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환란을 피할 길도 알려 주십니다. 21절에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고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구절만 보면 우리나라의 흔한 예언서들처럼 그저 그런 내용인 것 같지만 이게 절대로 그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20절과 21절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군인들이 성을 에워쌌는데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유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예언은 너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행 기사인 마태복음24:15-16절에 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생략된 이 구절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5년 후에 그대로 일어납니다. 폭군으로 유명한 로마의 칼리귤라 황제가 예루살렘의 성전에 자기의 신상을 세울 것을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지시를 받은 안티옥의 로마 총독(유대총독의 상급기관)은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죽음을 기다리지만 다행히 총독 푸블리우스를 죽이라는 황제의 명령이 당도했을 때는 이미 칼리귤라가 살해된 뒤였습니다.

여기서 ‘멸망의 가증한 것’은 우상이고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다니엘서에 잘 나온 내용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내용을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왔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이교의 우상이 선 것을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까웠으므로 군대를 피할려고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산으로 난리를 피해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에 군대를 피하는 길은 성안으로 피난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성이 포위될 수도 있지만 거대한 성벽은 사람들로 하여금 난리를 피할 수 있다는 안정감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벽이 없는 촌에 사는 사람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안으로 피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 사이에는 로마에 대한 반란의 조짐이 점점 커져 갑니다. 그러다가, 주후66년경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황제는 자기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로마의 전 영토에서 돈을 긁어 모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돈을 강탈합니다. 이번에는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총독이 병사들을 시켜 성전 금고에서 금 17달란트(435킬로그램)를 꺼내 오게 했습니다. 이 행동으로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에 쌓여온 긴장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로마당국이 나름 예루살렘의 성전을 존중해서 그들은 성전경내로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단지 성전의 담벼락이라고 할 수 있는 인근의 ‘안토니오 요새’에서 성전을 주시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게 깨진겁니다.

유대 민족주의자와 열심당의 선동으로 예루살렘 전역에서 소요가 일어났고 예루살렘 성으로 쳐들어온 가이사랴의 로마총독군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승전의 소식이 유대 전역으로 퍼졌고 마침내 3만 명의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갈루스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 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후퇴 도중 유대인 반군에 포위되어 로마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6,000명가량이 죽게됩니다. 이것은 로마 역사상 정규 로마 군대가 기존 속주의 주민들에게 당한 최대의 패배였습니다.

로마는 주로 거대 속주마다 한 개씩의 군단을 상주시켰는데 이 군단이 전멸한겁니다. 로마 역사상 이런 거대한 패배는 처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예루살렘의 영광이 영원할 것임을 믿고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네로는 그리스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진압 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베스파시안이 로마군대를 끌고 쳐들어 왔을 때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과 반대의 현상이 일어 났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산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촌락을 떠나서 정반대로 예루살렘 성안으로 도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스파시안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로마의 네로황제가 살해당하고 새로운 황제들이 연달아 등장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군인들이 쿠테타로 황제가 되었는데 누구나 로마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황제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네로가 죽고 삼년 만에 로마에서는 세명의 황제들이 등극하고 쿠테타로 죽는 무법천지가 됩니다. 자기도 황제가 되고자 기회를 엿보던 베스파시안은 포위를 풀고 군대를 아들 디도에게 맡기고는 자기는 로마로 황제가 되기 위해서 떠납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예언이 맞아 들어갑니다. 예루살렘성이 로마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난 다음에도 일시적으로 포위가 풀리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예언처럼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나 광신도들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로마의 군대와 일차로 싸워서 대승을 거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네를 지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난 다음에는 서로 정권을 잡기위해서 예루살렘 성안에서 싸웠습니다. 성안의 동서남북으로 나뉘어서는 이들은 로마군이 물러간 틈을 타서 이번에는 동족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는 성문을 닫아 걸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성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안에는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유대전역과 세계로부터 온 백만이상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상황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처럼 국제적인 소식을 제때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가 죽어서 로마군인들의 공격이 일시적으로 주춤해 진 것을 모르고 이것을 자기네의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이 자기를 새로운 유대인의 왕으로 세우신 것으로 여기고 서로 성안에서 성문도 닫아 걸고는 싸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

그러다가 이들은 예루살렘 성안에 비축해둔 곡식창고를 불태워 버립니다. 이 곡식창고가 상대방의 세력권내에 있었거든요. 그러자 상대편은 물 저장고에 독약을 타버립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은 생각지도 않고 상대방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곡식과 물을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날마다 전쟁을 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성안에는 칼에 맞아 죽은 시체와 굶어 죽은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매장지가 없어서 성안에는 산을 이루고 때로는 성벽에서 시체를 던져버리기도 했습니다. 집과 골목마다 시체가 쌓여있습니다.

이 끔찍한 재앙은 21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골목골목마다 몰려나와서 서로 죽이고 또 집안에서는 굶어죽고...성밖으로 탈출하다가 잡혀 죽고 ..... 유대인들에게는 이때가 진정한 지옥이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예루살렘성안에 있던 유대인들은 차라리 로마군인들이 쳐들어와서 자기들을 핍박하는 독립군들을 죽이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기록에는 이들을 ‘독립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강도’라고 불렀습니다.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서 내전을 벌이던 무장세력들은 각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로마군인들을 물리치셨으므로 모두 나를 따라라’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곡식창고도 불을 질러 버립니다. 나중에 죽을지라도 너희가 잘되는 꼴은 못보겠다는 것이지요. 현세의 지옥이 벌어 집니다.

양식도 없이 물도 없이 성안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죽어 갔습니다. 마침내 로마군인들이 예루살렘성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성안에서 만나는 모든 유대인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백만 이상을 죽이고 포로가 된 자들은 약97,000명에 불과했답니다. 아이도 어른도 여자도 노인도 그냥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성전을 무너뜨립니다.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파괴해 버립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기 전에, 폭도들이 성문을 닫아 걸기전에 중간에 로마 군인들이 물러간 처음 몇 일은 예루살렘 성문이 열린적이 있습니다. 무교절인 니산월 14일에 예루살렘성안에서 한 무리를 이끌던 폭도인 엘르아살과 그 일당은 성전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 제사드리기를 원하는 자들의 출입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명절을 지키기 위해 유대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과 유대인 개종자들이 몰려와 성안으로 들어갔고 로마군의 포위 공격은 이 때 다시 재개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독립과 승리를 축하하고 감사하러 유대로 모인 세계각지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한 2만명의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을 탈출해서 요단강 건너편의 ‘팔레’라는 곳으로 피난을 해서 무사했다고 합니다. 처음 성문이 열렸을 때 유대인들은 성을 탈출하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받은 거룩한 성도 예루살렘성으로 꾸역꾸역 들어갔습니다. 세계 최강인 로마군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거룩한 하나님의 도시인 것을 보았거든요. 그래서 성전에서 제사도 지내고 유월절도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2만명의 기독교도들을 제외한 백여만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과 영원히 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민족주의자, 급진파, 열심당, 범죄자들에 의해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고 이들은 날마다 거리에서 서로 싸웠고 사람들은 점점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어떤 여인은 자식을 잡아 먹었다고 하고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몰래 성벽을 넘어가다 잡힌 사람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의 칼에 맞아 죽었고 성벽을 넘는 것에 성공한 유대인들은 로마군인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로마군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성은 멸망한 것입니다.
23절의 예언의 말씀도 이루어 졌습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는 추측하시겠지요? 너무 끔찍해서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때 살아난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서 애굽의 광산이나 로마로 노예의 신세로 팔려갑니다. 24절에 보면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베스파시안의 아들인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성은 성벽이 헐리고 유대인들의 거주가 금지되었습니다. 24절 하반절에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어떻습니까? 적어도 예언이 이정도는 되어야겠지요?

주님은 감람산에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자기가 하늘로 올라간 다음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갈지가 걱정이 되셨습니다. 마치 부모님들이 죽으면서도 자식들이 걱정이 되어서 유언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반드시 알기를 원하셨고 자기의 말을 듣고 환난을 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예언에 따른 기독교도들은 모두 환난을 피했지만 주님이 말씀을 믿지 않은 백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태복음24:25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할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그 요구대로 유대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핏값을 치른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 본문을 택한 것은 성경이 추상적인 철학적 교훈을 주는 책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생의 지침이 되는 책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경제서도 아니고 기술서도 아니고 수학책도 과학책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 인간의 지혜를 능가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지침이 되는 인생의 지혜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성경을 단지 시대에 뒤떨어진 믿음의 교리책,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책,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나라 역사책으로 생각합니다. 은유와 카테고리로 점철되어진 이상한 책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을 너무 신격화해서 성경자체가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만 하면 좋은 일이 생기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몇 번 읽었니하는 것으로 상을 주기도 합니다. 성경을 베껴 쓰는 일도 많습니다. 예전에 제가 시무했던 교회에서는 성경을 필사하는 것이 대 유행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성경을 읽고 필사하는 자체가 거룩한 행위는 아닙니다. 읽는 것과 필사하는 것이 권장되는 이유는 그 내용을 잘 알고 실천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기만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옛날 바리새인처럼 그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오늘 하고자 하는 주제는 성경은 그냥 단순히 존재하는 책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인간의 기록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사실 삼국시대 이전에 쓰여진 기록물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천년전의 고려시대 때의 책들부터 시작됩니다. ‘화랑세기’라고 신라시대의 책이 최근에 발견되었는데 이게 위작이니 아니니 하고 논란이 많은 이유도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의 기록물이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수천년 전의 기록이지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신비입니다. 보통의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세상에 얼마나 많은 환난이 일어나는데 책이 완벽한 형태로 수천년을 내려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알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성경이 오늘날에도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별볼일 없는 책입니까?
우리가 잘아는 SCE, SFC강령이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그래요, 우리는 지금 말씀 중심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참고로 오늘 본문의 기사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왜냐면 요한복음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예언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읍시다. 그냥 건성으로 읽지 말고 정독합시다. 그리고 그 책에 쓰여진 대로 지킵시다. 요즘 세상사람들이 기독교를 못잡아 먹어서 난립니다. 왜냐면 기독교도들이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쓰여진 대로 생활했다면 이런 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경으로 돌아 갑시다. 인간의 화려한 언변, 기교도 좋지만 성도들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으로 돌아 갑시다.

만일 대환난의 중간에 예루살렘성의 포위가 풀리고 처음 며칠간 성문이 열렸을 때 예루살렘성안에 있던 기독교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항상 상고하고 자구 하나 하나까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죽어가던 그 대환난 중에서도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닥칠 대 환난을 피할 방책으로 예언을 남긴 것처럼 이 세상에서 거대한 사탄의 세력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되셔서 오늘 주님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성경 안에 우리의 삶에 필요한 영적인 비밀과 지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방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에서 승리할 영적인 비밀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후 1세기의 유대인 기독교도들처럼 우리도 성경을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깊이 읽어 봅시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재앙을 피할수 있는 재난대처 매뉴얼로 읽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잘살게 하기위해서 비밀을 감추어둔 보화를 발견하는 기분으로 말씀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새겨 봅시다.
무더운 여름철 피서다 뭐다 해서 힘들게 다니지 말고 조용함과 깊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그래서 숨겨진 보화를 발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탄의 법칙이 지배하는 환난의 세상에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8월 1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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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제와서 가식적으로 쓸 필요도 없겠지요. 저 역시 성경책을 일종의 교훈서나 황금률 정도로 이해할 때가 많았습니다. "대접받고자 한다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 식의 말들은 얼마나 근사하고 멋있습니까. 힘들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좋아하는 몇 가지 구절들을 꺼내보고 또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던 부분은 "피하지 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 라는 것. 다시 말해 어려움이 왔을 때, 그 어려움 속에서 배울 것이 있고, 어떻게든 견뎌나갈 수 있는 길도 함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하튼 요즘 저는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 예언된 것이라면, 이것은 교훈임에 동시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한다" 라는 강한 메세지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말을 듣고, 당연하게도 구름을 자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언제 예수님이 오시나 하면서요... 이미 처참한 예언의 성취를 체험했기에, 더욱이 그들은 그랬을 것입니다. 아, 물론 예수님이 오실 그 때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하.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대로, 명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매일 질문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다른 것 다 제쳐놓고서라도, 먼저 남을 대접하고 있는가. 그 하나라도 지키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대접받기 좋아하고, 감사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가득하다면? 어려움이 닥쳐올 때, 정작 패닉상태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살아왔으므로... 결국, 엄격하게 말하자면, 명심하고 실천하는 "행동이 없는 신앙"이란, 죽은 신앙, 위선 신앙이겠지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단지 구호가 아니려면, 그저 실천하면 됩니다. 그저 "나의 소중한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를 고민하는 잠깐의 시간부터 가져보면 됩니다. 실천은 먼 곳에 있지 않으니까요. / 2012.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