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10월28일/엘리사와 하사엘(열왕기하8:7-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11. 3. 05:0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0월 28일 주일 예배

엘리사와 하사엘 (열왕기하8:7-15)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뭐, 어떤이는 이미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말씀으로 다 이루어 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다른 계시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능력을 제한하려는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 엘리사가 하사엘을 보고 네가 다음번 아람의 왕이 될거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래서 하사엘은 왕에게 돌아가서 물에 적신 이불로 왕을 질식시켜서 죽여 버리고 다음번 왕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째 뒷맛이 찝찝합니다. 마치 엘리사의 예언이 하사엘로 하여금 야심을 촉발시키도록 유도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사의 예언이 살인을 교사한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더구나 하사엘이 왕이 되고 난 다음 이스라엘을 극도로 괴롭힙니다. 이전의 여러 왕들보다 더 그리고 다른 나라도 괴롭힙니다. 결과가 결코 좋지 못합니다.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한 것일까요?

엘리사가 다멕섹에 갑니다. 왜 갔을까요? 성경에서는 엘리사의 목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정해 본다면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가 다메섹으로 간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삼으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스승이 못다 이룬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다메섹으로 갔다는 겁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적국의 선지자가 일국의 중신, 특히 왕의 신임을 얻는 장군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적국의 선지자가 와서 뜬금없이 네가 왕이 될거라고 예언을 한다면 그게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아, 예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네요” 이렇게 답할까요? 아니면 “네 이놈 네가 뭔데 감히 왕의 폐위를 입에 담느냐?”며 분노한 칼에 죽음을 당하게 될까요?

누구나 왕이 되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반역의 음모가 다른이들의 귀에 들어가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쿠테타를 일으키려는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안보에 극히 만전을 기합니다. 비밀이 새어나갈 경우 죽여서 입을 닫게 만드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데 자기편도 아니고 적국의 선지자의 입에서 반역의 음모가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그래도 신통하기로 소문난 엘리사가 반역의 음모를 입에 담는다면 그 파장이 결코 적지 않을 겁니다. 엘리사는 이전에도 아람왕궁에서 하는 작전도 다 알아서 아람군대를 방비한 사실을 아람의 왕과 신하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로잡으려고 도단성으로 군대를 파병했다가 모두 사로잡혀서 죽을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엘리사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엘리사가 하사엘을 만나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지 아람의 선지자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지금 엘리사는 과거에 스승에게 내리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해야 합니다.

하사엘을 왕으로 삼으려면 어떻게든 일단은 그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사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나옵니다. 당시 아람왕은 오랜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벤하닷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왕의 이름이 아니라 왕의 칭호입니다. 즉 아람왕을 아람에서는 벤하닷이라 합니다. 애굽에서는 왕을 바로라 하고 가나안에서는 아비멜렉이라고 우리가 왕을 임금이라고 하듯이 아람에서는 왕을 벤하닷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본문의 왕이 누군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 상황을 종합해서 벤하닷2세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비문에 하사엘을 일러 ‘비천한자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하사엘이 왕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그는 백성의 신분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왕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하사엘을 만날 기약이 없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메섹으로 엘리사가 오자 당시의 벤하닷은 엘리사가 다메섹으로 온 소식을 듣고는 하사엘을 불러서 그로하여금 약대 40마리에 엄청난 예물을 마련해서 엘리사에게 가서 자기가 병세에서 회복할 수 있을지를 묻고 오라고합니다. 단순히 물어보는데 그렇게나 많은 예물을 준비할 리는 없습니다. 아마 그는 그 막대한 예물로 선지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서 그의 신통력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바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사엘이 엘리사를 찾아 오게 된 것입니다. 안그래도 어떻게든 하사엘을 만나야 하는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형통함이 임한 것이지요.
엘리사를 만날때만 해도 반란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습니다.

원문상으로 벤하닷이 병들었다고 할때의 병들다는 말은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야가 병들었다고 할 때와 같은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읽는 이들은 북이스라엘왕의 병과 아람왕의 병이 연관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패악과 죄를 징계하기 위해 아람의 하사엘을 채찍으로 이용하시려고 그 전대 벤하닷을 병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의 병에서 회복되기 위해 벤하닷이 하사엘을 시켜서 엘리사에게 보낼 것이고 하사엘과 엘리사가 만나야 그를 아람의 왕으로 삼을 것 아닙니까?

물론 하사엘이 아니라 다른 신하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사엘을 보내도록 하신 것이지요. 왜냐면 하사엘과 엘리야가 만나야 되기때문이지요.
우리가 히브리어를 몰라도 엘리사와 하사엘은 이름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뭡니까? 엘이 들어 있잖아요.

하사엘은 뜻이 ‘하나님이 보심’이란 뜻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이름은 비슷합니다. 한사람은 ‘하나님이 지켜 보시는 이’고 한 사람은 ‘하나님을 구원의 주로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 다 하나님이 지켜서 보호하시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신기하지요?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엘리사가 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람의 왕이 된 자가 하사엘이 되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엘리사와 하사엘의 만남은 이미 그들이 이땅에 태어날때부터 어쩌면 예견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심합니까? 우리는 모르지만 두 사람의 이름에 모두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예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상대가 뉘우치지 않고 그 죄악이 관영할때까지 오래 참다가 때가 차면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7절에 보면 아람왕에게 신하가 와서 “하나님(엘로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라고 합니다. 굉장하지요. 적국의 신하가 그 왕에게 엘리사를 일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기들이 엘리사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습니까? 그런데도 엘리사의 놀라운 능력이 너무나 굉장한 것이기 때문에 적국의 신하들도 그를 일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의 원수가 비록 우리 때문에 자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의 형통함과 능력을 보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고백할까요? 저는 이런 기사를 볼때마다 주여 저에게도 그러한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장중에서 능력을 행하고 그의 종으로 인정받으며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드높이는 목자가 되면 얼마나 굉장할까요?

하사엘이 가지고 간 예물은 약대 40마리 분량에 달할만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런 예물을 받고 그의 죽음을 예언해야 한다면 엘리사 조금 마음이 찝찝했겠지요?  여기서 예물은 희생제물이나 소제, 선물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주로 신에게 제물을 드린다고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물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가 나타납니다. 양이 많을뿐만 아니라 정성도 굉장했다는 말입니다.

아마 벤하닷은 자기의 병세가 너무나 중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아낌없이 풀어서 엘리사에게 물으러 사자를 보낸 것이지요. 벤하닷은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고 엘리사를 확신했기에 이렇게 정성들인 거창한 예물을 나라의 중신의 손에 들려 보낸 것입니다.

40은 동서남북을 나타내는 4의 열배를 나타내는 숫자로 ‘충분히 많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람의 왕은 아마 이전에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을 때 가지고 간 예물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신의 선지자에게 신탁을 구하러 갈때는 그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엄청난 예물을 정성들여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므로 벤하닷은 하나님을 높임과 동시에 정말 자기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벤하닷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능력있는 신임이 증명된 하나님의 신자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면 벤하닷의 신분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아람의 왕이 하나님 신앙으로 개종한다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요. 어쩌면 벤하닷의 지위에서 쫓겨 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개종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엘리사가 행하는 능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를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약대 40마리의 등에 온갖 좋은 것들을 마련해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사엘이 엘리사 앞에 서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비해 강대국이었던 아람의 왕을 아람왕의 신하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낮추어서 겸손을 보입니다.

이는 엘리사의 명성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고, 벤하닷이 얼마나 그를 존중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가끔씩 엘리사를 ‘나의 아버지여’ 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이방의 왕이 엘리사의 아들로 자처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병세를 아람의 왕도 인정하는 엘리사에게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갔다가 하나님의 선지자게에 정녕 죽으리라는 저주를 받고 죽었지요. 그러므로 아하시야나 이스라엘의 영적인 무지와 죄는 멸망이 목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로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라는 말은 단순히 병이 낫겠는지를 묻는게 아니라 ‘내가 다시 살아 나겠느냐, 계속해서 살 수 있겠느냐’는 말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실것인가’하는 뜻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하사엘의 질문에 엘리사의 답변은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글쎄요, 벤하닷은 결코 살아 나지 못했고 지금 앓고 있는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사엘의 손에 죽습니다. 병사가 아니라 살해를 당하는 것이지요.

그럼 엘리사가 거짓을 말한 겁니까? 아니면 하사엘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한글번역이 잘못된 것으로 봅니다. 원문에는 사실 “가서 말하라, 당신이 정녕 살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잡한 원문번역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생략하고 후세의 번역자들이 원문을 이러이렇게 쓰였을 것이라고 추정해서 오늘의 오역이 생긴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원문을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돌아가라, 그 병으로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렇지요. 이렇게 해석되어야 정확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선지자로 결코 거짓을 말하게 하지도 않고 거짓을 고해서 상대를 속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성령이시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도록 종용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선지자가 당연히 그런 거짓을 시킬 수도 없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벤하닷은 그 병으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사엘이 적신 이불로 질식을 시켜서 죽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엘리사가 결코 하사엘에게 거짓말을 시킨 것이 아닙니다.

자 그런데 엘리사는 그 말을 하고 하사엘이 부끄러워하기까지 그를 쏘아보다가 웁니다. 왜 그를 쏘아보았는지 하사엘이 물어 보자 “네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사엘의 뜻이 하나님이 지켜보심, 보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사람이 그를 쏘아봅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하사엘은 여기서 아람의 벤하닷이 되리라는 신탁을 받고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사엘의 장래를 보시고 그에게 하사엘, 하나님이 보다라는 이름을 갖게 하신 것이고 이제 그로 하여금 자기의 일을 이루시기위해 엘리사, 하나님의 사람이 그를 부끄러워할 만큼 쏘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이 회개치 않고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시기 위해 하사엘을 사용하실 것을 알고 그렇게나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 너무 슬퍼서 운 것입니다.

선지자라면 민족의 미래를 보고 회개와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릴만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 엘리사는 그냥 눈물만 흘린정도가 아니라 매우 비통하게 운 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받는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한 운명을 미리 본 선지자는 민족의 고난을 예감하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하사엘의 입장에서는 매우 황당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갑자기 벤하닷의 신병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자기를 쳐다보고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는 엘리사를 보고 하사엘은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칭하는 표현을 봅시다. “당신의 개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그래요 , 하사엘은 중동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는 표현인 개같은 종이라고 자기를 낮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미 벤하닷을 암살하고 왕위를 찬탈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즉 엘리사의 예언이 벤하닷을 죽이도록한 살인교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벤하닷을 죽이고 왕좌를 빼앗을 결심을 엘리사에게 들키자 혹시라도 소문이 날까봐 싶어서 자기를 거짓으로 낮추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자가 거짓을 말하도록 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엘리사의 예언이 살인을 교사했다는 생각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결코 선한 목적을 위해서 악한 수단도 사용하시는 결과론자는 아닙니다. 그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에는 본능적으로 돌진해서 쳐부수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사엘은 계속해서 “이런 큰 일을 행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하사엘이 비록 자기의 본심을 감추기위해 자기를 낮추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가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제가 어떻게 이런 큰일을 행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한 일은 일개 장군이 할 일이 아니라 왕이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는 말은 상대방이 완전히 패전했을 때 포로처리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개 장군이 처리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금 하사엘은 벤하닷의 예물을 가지고 온 기회에 벤하닷의 병세뿐만 아니라 자기의 운명도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하사엘은 돌아가서 벤하닷을 만났을 때 선지자의 말을 전부 전하지 않고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하고는 그 다음날 아침에 이불을 물에 적시어서 왕의 얼굴을 덮어서 질식시켜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만일 하사엘이 엘리사의 예언을 듣고도 왕의 얼굴을 물에 적신 이불로 덮어서 질식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하나님의 예언이라면 하사엘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도 왕이 되어야 할터인데도 그는 스스로 벤하닷을 죽이고 새로운 벤하닷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데는 인간의 범죄하는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되었습니다. 그것도 남이 아니라 예언을 들은 당사자가 왕을 죽여 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세가 아주 복잡해 집니다.

가령 “너는 이다음에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서 남북을 통일한 자가 될 것이다” 이런 기가차게 좋은 예언을 들었다 칩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정치가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니고 그냥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소시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그가 계속해서 회사에 왔다갔다하는 일상적인 삶을 영위해도 결국에는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니까요.

자, 그런데 그 사람이 회사원으로 있는 한 저절로 대통령이 될 일은 없습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고 선거운동을 하고 난 연후에야 그가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물론 모르지요? 그는 그냥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상하게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에게 몰려가서 대통령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애걸해서 선거도 없이 갑자기 대통령이 될 수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런 식의 전개는 일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은 아마 비상적인 상황이어야 될테고 그런 비상상황은 말그대로 헌법이 정지된 국가 비상사태때나 일어나기 때문이며 이러한 비상사태는 그 나라의 국민들을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인간의 노력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 저절로 이루어 질것인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설치면 될 일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손놓고 있자니 도저히 안될 것 같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통의 경우에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 적어도 후보등록을 하고 유세를 하고 선거운동을 할 조직을 만들고 자금을 만들어 공탁금을 걸고 하는 여러 가지의 일이 따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역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개입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놓고 있어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요.
그런데 보통의 경우에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법칙에 따라 일을 하시며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즐겨 하십니다. 그것도 한 사람만에게가 아니라 동시에 역사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엘리사를 통하여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삼으시고 그 아람의 왕을 통하여 북이스라엘을 징치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는데 엘리사가 하사엘을 만날 때 이미 그는 마음 속으로 모반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엘리사의 말이 하사엘을 안심시켰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전에 음모가 발각나거나 의외의 변수로 모반이 실패하면 하사엘과 온가족은 처참하게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로 하사엘은 자기의 모반이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하사엘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더 담대하게 모반을 꾀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더 빨리 모반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모반을 절대로 일으키지 않고 왕에게 끝까지 충성하려는 신하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하실 때 한사람에게만 일방적으로 명령하시지는 않습니다.
엘리사가 하사엘을 노려보고 그에게 왕이 될거라고 이야기해도 하사엘이 왕이 되기 싫었다면 그는 왕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왕을 죽였더라도 왕의 자리를 끝까지 고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실때는 적어도 두사람 이상에게 동시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사명을 받은 사람을 이끌어주거나 계기를 만들어 주도록 또 다른 한명 이상의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한사람이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해도 이걸 증명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리고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야 그 예언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 수 있으니까 미리 말한다는 예언의 기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하사엘을 사용하셔서 북이스라엘을 징치하시려는 계획은 언제부터 세워졌을까요?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네요. 그런데 우리는 하사엘이란 이름의 뜻을 알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하사엘이 태어나서 하사엘이란 이름을 받을 때 우리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었을 것입니다.
넌 언젠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뚫어지게 너를 쳐다볼거야. 그리고는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하게 될거야
너무 억지스럽습니까? 뭐 어쨌든 다 좋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이 기사는 단순히 엘리사의 명성이 얼마나 높은지 그가 얼마나 신통한지를 부여주는 기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예언의 당사자가 그 예언을 믿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꿈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막연히 하나님의 계시니까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당연히 되겠지만 하나님은 그 일이 되도록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용하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꿈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앉아 있다면 하나님은 그 꿈을 이루도록 우리에게 뭔가를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 즉 부름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하사엘의 기사에서 보여진 말씀의 진수입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한갓 인간이 파악하고 정의한다는게 웃깁니다. 그는 비상시국에서는 비상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분의 역사의 방법에 제한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보통의 경우에 자신이 만드신 창조질서속에서 자신이 만드신 인간들을 사용하여 이루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예언을 이룰 준비가 되어 있나요?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 그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만일 준비가 되었다면 어떤 준비가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일은 일조 일석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사엘이 엘리사의 예언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왕의 신임을 얻는 높은 벼슬아치였습니다. 결코 그가 말단 병졸로서 모반을 하여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 그는 당시에 가장 높은 신하들 중에 한명이었을 것이고 왕의 곁에서 머무르며 왕을 독대할 수 있는 지고의 신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불을 물에 적셔서 잠든 벤하닷을 질식시킬 수가 있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예언이 성취되도록 그분의 말을 믿고 그분의 도움을 간구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으로 하여금 반향없는 메아리가 되지 않도록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며 아버지의 계시를 분별하려는 자세를 견지합시다.

지나놓고 보면 모든게 보이지만 우리는 삶가운데서는 인생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아버지가 갖난 아기에게 하사엘이란 이름을 주었을 때 그 아이가 장차 커서 왕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요? 그 아이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비천한 자의 소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중에 보면 우리는 그 아이가 하사엘이란 이름을 얻을 때 이미 하나님이 그아이를 들어 쓰실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어떤 예언을 이루기 위해 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비록 미망 중에 있어도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를 향한 보호와 사랑을 믿고 그가 나를 수많은 사람가운데서 구별하여 지켜보심을 믿고 하루하루 즐겁고 바르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0월 2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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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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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다소 묘한 느낌을 주는 하사엘 이야기 입니다. 이스라엘 징계의 도구로서 악역으로 사용되는 하사엘 이니까요. 종종 성경의 오랜 이야기들이 의심받는 경우가 있어 왔습니다. 구약시대도 B.C.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한참전이고, 게다가 각색되지 않았다는 보장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사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인상을 줍니다. 바로 성경은 구제불능의 인간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 악한 목표를 한 번 정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욕망덩어리 인간을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지요. 우상에 물든 상태가 영 아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 본문의 하사엘이나...

기독교인은 그래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냉철하게 바라본 자신의 모습에 잘못이 있다면, 그 길을 돌이키고 떠나는 용기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부족했기에 결국 화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은 그래서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을 통해서는 희망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믿고, 희망을 한가득 안고서, 지독한 현실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고통의 지옥 같은 현실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즐겁고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하, 쓰고보니 참으로 쉽지않은, 그러니까 생각할수록 어려운 일 같네요. 본디 사람이 별로 없는 좁은 길이고, 인기가 없는 길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예컨대 선하게 사는 것이 쉬웠다면, 효도하는 것이 쉬웠다면, 효자비, 효녀비 같은 게 세워질리가 없었겠지요. 어쩌다가 간혹 효를 행하는 사람이 있어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기에, 그것을 기억하고자 비가 세워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이렇게 작은 희망들이 중요합니다. 없는 길이 아니고, 좁고 어려운 길이라도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그렇게나 패역하고 잘못된 것이 만연한 사회에도, 엘리사 같은 영적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고,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고, 더욱이 악하기 쉬운 인간이지만, 우리가 올바르게 서서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갈 때, 인간을 통해서 어떤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며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 분은 함께 말없이 괴로워 하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돌이켜 올바르게 살아가기를... 겸허하고 소박하게 기도하며, 짧은 코멘트 마쳐야 겠습니다.

작가 엔도 슈사쿠는 지고의 사랑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매력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린다면,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퇴색하고 넝마와 같이 된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않는 일이 사랑이었다" 어찌 감히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 깊이와 넓이를 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표현하고 기록할 수 없겠지요. 비록 하찮게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 없습니다. 고민과 괴로움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힘든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 없습니다. 절망하고 낭비하고 있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아깝고 귀중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지금 우리가 선하고 바른 일을 실천해야 할 때 입니다. 지금 즉시. / 2012.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