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1월 4일 주일 예배
모세와 금송아지 (출애굽기32:1-14)
오늘 저는 출애굽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잠시 호렙산에 올라 하나님의 계명을 받는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이라고 섬긴 금송아지 우상사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금송아지 우상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우리 하나님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특성도 있습니다. 뭐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가령 다른 종교의 신들은 비록 실제로 보이지는 않아도 그 신을 형상화한 신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신상이나 그림을 보고 자기가 섬기는 신의 실체를 상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보는 것만 믿으려고 한다는 거지요. 사람들은 느끼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것을 더 중히 여기고 귀로 듣기만 할 때보다 눈으로 보는 것을 더 중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는 것에는 아무것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절대로 만들거나 새기거나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안보여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처럼 생긴 것도 아닙니다. 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지요? 그건 우리가 온전한 영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의 육의 눈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영이 잠자코 있는 것 뿐입니다. 한번 눈을 감고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해 보세요. 많은 분들이 뭔가를 느낄겁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그 형상은 인간의 외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면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물론 우리의 관념에는 선풍도골의 멋진 할아버지가 연상될 수도 있지만 우리 하나님의 형상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 본문처럼 송아지를 만들고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먼저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모세가 산에서 빨리 내려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간지 40일이 가깝도록 내려오지 않자 사람들은 당황해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노예들입니다. 노예는 스스로 뭔가를 하는데 익숙지 않습니다. 한평생을 남의 명령만 듣다가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 이 자유가 오히려 두렵기 까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그의 지도를 받고 있는데 지도할 사람이 없어지자 불안하고 낙담해 있었습니다. 1절에 ‘모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모세가 너무 오랫동안 산에서 내려 오지 않는 것에 낙담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한사람 두사람 아론에게로 모여 든 것입니다. 이들은 모세를 걱정해서 모인 것은 아닙니다. 걱정되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 백성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제 그들을 지도해줄 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갈 때 있었던 천둥과 불로 인해 모세가 죽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큰 폭음과 불이 있고 난 다음 무려 40일 가까이 내려 오지 않으니 당연히 죽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각은 한발 더 나아갑니다. 모세가 사라짐과 동시에 모세의 하나님도 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백성들은 아직까지 자기들의 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단계까지는 나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들에게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었고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의 400년 전 조상들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을 그들은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어느날 그들 앞에 나타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의 하나님이고 자기들의 조상의 하나님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하지 못하는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의 새로운 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순간이라도 자기들을 보호하고 자기들에게 명령하는 신이 없다는 것 자체가 불안한 것입니다. 단 한번도 자발적으로 뭔가를 해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제 자기들에게 명령을 내려줄 또다른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신기합니다. 왠만하면 모세의 걱정도 할만한데 이들에게서 모세에 대한 걱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기들을 보호하며 인도하던 전능하신 신이 자기들을 모세와 함께 떠났을까봐 두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신상을 만들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무신론자들이 판을 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한시라도 신이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두렵고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모든 족속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하는 신이 있는데 우리만 그런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왜냐면 신의 보호를 받는 부족과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부족이 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과 인간이 싸우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그런식으로 저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아론은 사람들에게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떼어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노예에 불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금고리뿐만 아니라 애굽인들로부터 받은 고리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금고리로점을 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고리가 두 개잖아요, 우림과 둠밈이 두 개의 돌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점을 쳤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하튼 이들은 점도 치고 장신구로도 사용했기에 금고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져오도록 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우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애굽의 모든 신들은 다 신상이 있어서 형상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하거나 적거나 간에 그들은 다 금은동석철의 신상으로 표현되어 집니다. 그래서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모세를 더 의지한 것이고 이제 그 모세가 사라졌으므로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기를 원한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진은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임했기 때문에 그 가운데 계실 하나님을 상상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의 임재를 느꼈는데 이제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고 난 다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시내산으로 올라가 버리자 모세를 따라 모세의 하나님, 모세의 신도 같이 시내산으로 올라갔거나 산에서 사라져 버린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들의 행동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나 신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신이면 되지 그 신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가지게 된 신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으로 칭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한계를 나타낸 가슴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아론은 이에 백성들에게 금고리를 빼어서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원문에서 알 수 있는 분위기는 매우 거친 표현입니다. 즉 ‘빼어’라는 말은 ‘깨뜨리다. 부숴버리다. 찢다. 탈출하다’ 정도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아론은 자기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이 단어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마 아론은 금고리가 백성들이 귀하게 여기고 또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물건이니만큼 빼서 가져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백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와 자녀의 금귀고리를 가져 온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위하여 신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아론이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막아 내지 못하고 그냥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면서 허약한 지도자가 백성들에게 휘둘려서 공동체에 얼마나 큰 위기를 초래하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론이 비록 금송아지를 기뻐하면서 만들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앞장서서 어긴다면 정말로 당황스러운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네 가운데서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거친 요구에 어찌할 줄 몰라 그냥 저들의 요구대로 끌려가는 지도자, 저들의 요구가 분명히 틀렸음에도 그냥 끌려가는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만 우리는 아론의 행태에 실망을 금치 못합니다.
목사 역시 교인들의 잘못된 요구에는 단호히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자기의 생계를 위협하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수호에 있어서는 추상같아야 합니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목사는 더 이상 영적으로 교회를 지도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한 영적 서비스업자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잘못된 일을 하는.
어쨌든 아론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물론 성경 본문처럼 아론이 조각칼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다듬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이건 해석이 잘못되었네요. 단지 금송아지 형태의 거푸집에 금을 녹여 부어서 금송아지를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만든 우상은 수송아지입니다. 이 우상은 아마 나일강 삼각주가 있는 멤피스 지역의 아피스나 모네비스를 본뜬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지역의 애굽신인 것이지요. 그렇게나 문화가 무서운 겁니다. 미워하면서 정든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압제에 괴로워했으면서도 정작 위급할 때 배운게 도독질이라고 그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우상을 여호와의 형상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신을 섬긴게 아닙니다. 그냥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여긴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렇게나 자기의 형상을 만들거나 새겨서 거기에 절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전혀 다릅니다.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믿음이 덜가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을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애굽에 있으면서 본게 그것뿐이니까 결국 자기네 지역신인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4절에 “이는 너희 신이로다”라고 번역된 원문은 실상은 ‘이것들은 너희들의 신들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금송아지 말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른 신들이 더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 자기들의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체험하고도 아직도 우상숭배의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이들은 정면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5절에 ‘아론이 보고’는 시리아 역본에는 ‘아론이 두려워하여’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아론은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열광하는 것을 보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것 같습니다. 이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롭겠다라고 여긴거지요. 그래서 백성들을 꾸짖어야 될 아론은 자기의 본분을 잊고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이 일어나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았다고 합니다. 번제를 ‘드리고’는 번제를 드릴 때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에서 유래하는 말입니다. 이걸 보니까 향의 연기를 타고 신이 하늘로 올라 간다고 여기는 이땅의 제사 의식이 생각납니다.
이들은 여기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음탕한 행위를 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뛰놀더라’는 말이 육체적인 환락을 암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전에 자기들의 가축을 잡아 먹지 못해서 모세에게 고기를 주지 않는다고 원망했지요. 그런데 이제 모세가 없을 때 소와 양을 마음대로 잡아서 우상에게 제물로 드리고 나머지는 갈라서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술과 여자와 음탕한 축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들의 제사는 이와 같습니다. 전혀 거룩하고 구별된 제사가 아닙니다. 그냥 애굽사람들이 하던 풍습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나 우상숭배가 뿌리 뽑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음탕한 매력이 있거든요. 술도 있고 고기도 있고 여자도 있거든요. 환락에 취해서 정신없이 놀 수 있는 이들의 제사와, 여호와에 대한 예배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래서 그렇게나 여호와 하나님의 징벌이 뒤따랐지만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끊어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애굽의 황소 우상은 남성의 힘과 생산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마 금송아지 역시 그런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 역시도 안목의 정욕 때문에 하나님을 끊임없이 형상화 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보고 결코 비웃을 수 없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이것이 여호와라고 그 앞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며 고기와 술로 정신을 못차리는 그들을 한심스럽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은 무엇이든 만들지 말고 새기지 말고 거기에 절하지도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안보고 믿는 것이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 역시 이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든 형상화 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금송아지를 만든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미국 금융가인 월가의 상징이 바로 황소입니다. 황동으로 만든 황소가 월가의 상징입니다. 돈신 중심지에 금송아지가 서 있다는 것은 뭔가 의미심장합니다. 황동도 잘 닦아 놓으니까 누런게 번쩍 번쩍 합디다. 이건 금송아지 우상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이 너희들이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러니 그 앞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음탕한 쾌락을 즐겨라. 여기에 저항 할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 여호와 신앙을 가장 철저하게 수호해야 할 대제사장이란 사람이 오히려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아부하며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의 하나님이 초라하고 작은 건물의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고 거룩해 보이는 것은 인간의 착각입니까? 아니면 안목의 정욕이 주는 마귀의 유혹입니까?
제단을 거룩되게 하는 것이 강대상입니까 아니면 그 위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입니까?
십억도 넘어가는 파이프 오르간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연합된 성가연주는 사람들을 폭풍감동으로 몰아 갑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결코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목사의 검은 가운이 목사의 거룩함과 영성을 더 높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교인들이 밟고 앉아 있는 붉은 카페트는 결코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광경에 감격하며 마치 성령께서 임하는 듯이 생각합니다.
마치 옛날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았을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지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생겼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나 눈을 조심하라는 우리 주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우리는 그럴듯한 걸로 교회를 치장하고는 그 속에 하나님이 더 거룩하고 장엄하며 위대한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맘모니즘, 돈신을 숭배하는 것이며 사탄의 흉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빠지면 사람보다 돈이 더 중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이에 대한 차별이 일어 나게 되며 경쟁이 일어나고 질투와 미움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치가 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금으로 치장을 해도 일치가 깨어진 곳은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서로 싸우며 미워하는 곳에 성령께서 임하실까요?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는 곳을 우리가 거룩한 교회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는 육신적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세미한 음성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위해 더 세밀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하여 열어 놓고 언제든지 그가 우리를 부르시기만 하면 지체 없이 응답할 수 있는 영적인 민감성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것에 더 치중하는 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영적인 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영적 공허함을 감추기위해, 그것을 대체하기위해 더 육적인 것, 보이는 것에 매달리는 지도 모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점치는 도구인 금귀고리를 빼어서 이걸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신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고 나서 북이스라엘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우상은 놀랍게도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돈신 숭배로 살아 남아서 우리를 끊임없이 여호와 신앙에서 유혹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는 재미가 없을까요? 왜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나 자기의 모습과 형상을 우리에게 감추시고 만들지도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알고 싶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을 보고 싶습니다. 여호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들고 설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너무 허전하거든요. 눈에 보이는 저것이라도 없으면 도저히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금과 은과 대리석으로 치장된 번쩍 번쩍하고 거대한 건물이 아니라 자기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법을 지키며 그에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가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본질적인 것에는 눈감고 외형만 화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속은 썩었습니다. 외형이 화려하면 할수록 어쩌면 우리의 썩은 상태가 더 심할 지도 모릅니다. 안이 너무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니까 그걸 감추려고 우리는 더 독한 향수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 모세가 한 40일 가까이 보이지 않자 그만 불안해져서는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어 내라고 아론을 다그칩니다. 대 제사장이란 사람은 대중이 아무리 잘못된 요구를 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상황까지 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의 법을 수호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중에게 굴복하고 그들에게 아부하며 대중의 요구를 알아서 들어 주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저항? 마음속으로는 싫어했다고요? 그런거는 전혀 변명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제일먼저 준행해야 될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한다면 그 누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하겠는지부터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가 여기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상 인간들의 범죄의 대부분은 눈으로부터 오는 유혹 때문입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탐욕이 되고 그것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양심에 눈감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아니 알아도 신경을 쓰지 않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우리의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에게 죄송해서 예배당을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명하고 그 앞에 숭배하고 뛰놀며 즐긴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 역시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찾아 낸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을 결코 바알이나 아세라라고 부른게 아닙니다.
사실상 이것은 인간의 눈에 관련된 인식의 문제입니다. 그렇게나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본게 전부 눈에 보이는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신을 오랫동안 섬겨 오고 있었습니다. 절이니 불상이니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조금만 이상하고 거대한 바위나 나무도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사당이나 신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본게 이것이니까 하나님의 신상 대신에 우리는 거룩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예배당과 성찬기들 그리고 값비싼 악기들과 가운들로 우리의 예배를 치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지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서 영적인 순수함이 더 퇴보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몰아가는 영적인 집중도가 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는 돈이 들어 갑니다. 금송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황금 고리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것은 또다른 우상숭배입니다. 황금숭배의 맘모니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상숭배를 즐겨 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다른 신을 섬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형상을 금송아지라는 형태로 만들어 낸 것 뿐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결코 이방신의 이름을 부른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보지 않고는 믿으려 하지 않고 , 안목의 정욕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나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그래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령은 성령이고 진정은 진리, 곧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거대하고 화려한 오케스트라와 파이프 오르간의 장중한 음악, 게다가 대규모의 합창단과 함께 드려야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예수안에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물신에 대한 의지가 더 커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예배당이 중한지 아니면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자체가 중한지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허전해서 나에게도 금송아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면서도 귀거리로 점치는 이방 문화에 휩쓸려서 나도 모르게 세상 문화에 젖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비록 우리의 눈에는 보이시지 않지만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20장 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1월 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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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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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무슨 코멘트를 덧붙여야 할까. 여러번 고민하고, 코멘트를 썼다 지웠다 반복했음을 고백합니다. 깊은 생각 끝에 도달한 어떤 지점은 바로 "생존"과 관련된 느낌입니다. 왜 뜬금없이 생존이냐고요? 하하, 당시 모세가 부재중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었던 느낌은 바로 "생존의 공포" 였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보이지 않는다면, 대체 여기서 지금 당장 누가 우리를 지켜준단 말인가? 이 느낌은 모든 백성들을 압도하고 있었겠지요.
그랬기에, 그들은 선뜻 내놓기 어려운 귀중한 금귀걸이를 달라는 요구를 받았음에도, 앞장서서 다들 동참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금송아지는 빠른 속도로 완성되어 갑니다. 슬픈 일입니다. 인간의 약함이라고 해야할까요. 혹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해야할까요. 모두가 함께 이루어가는 공동체적인 삶이 있고, 일단 나부터가 생존해야 한다는 삶이 있는 경우에, 인간은 대체적으로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생존의 공포 앞에서 다른 모든 가치들은 뒤로 밀려나기 십상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가 제일 위험하듯이, 사회안전망이 망가진 사회가 제일 위험합니다. 이 곳에서는 도태되어 버리면 삶이 끝없이 추락하는데 잡아줄 것이 없습니다. 한 번 추락한 삶은 좀처럼 다시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사다리는 이미 걷어차 버려서, 지금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먹고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데, 어떻게 결혼을 생각하고,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입니까. 자살율 1위, 출산율 꼴찌인 어느 나라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기에, 그 무엇도 믿지 않으며, 오직 생존만이 화두가 되어 있는 어느 나라가 있습니다. 좋은 삶은 실종되었고, 생존만이 남은 사회, 이제 최후의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생존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존 앞에서 자신의 귀걸이를 팔았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생존만을 추구하고, 남은 시간을 치열하게 쾌락과 함께 보내고자 발버둥 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상숭배의 현주소 입니다. 생존 앞에 압도 되어버린 우리 모두의 삶. 생존 앞에 이웃을 팔아넘기는 우리 모두의 삶. 한편으로는 그 절망 앞에 공동의 좋은 삶을 포기해 버린 우리 모두의 삶.
저는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한 대목을 읽다가,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잠깐동안 시간이,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 "귀 기울여 듣는 공동체"가 사라지고, 이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활동 공동체"이다.] 우리가 귀 기울여 듣는 노력을 중단하면,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 놀고, 쾌락에 탐닉하고, 신바람 납니다, 보기에는 엄청 활동적이지요. 그렇게 환락적인 분위기에서는 귀 기울여서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회는 몰락해 가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야만의 시대를 낳은 것은 평온의 결핍일 수 있습니다. 귀 기울여 듣는 사람, 귀 기울여 듣는 공동체는 서서히 사라져가고, 자기 목소리만 떠들기 급급한, 자기 주장의 시대가 화려하게 막을 연지 오래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여서 들어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목소리를 말하면서, 이웃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떠들고 있는 자기 목소리 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모세와 금송아지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 비수를 꽂는 경고입니다. 생존의 위기 앞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어차피 희망도 없는 세상이라며 평생 돈과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생존의 위기 앞에서 잠시 멈춰 침묵하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이웃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며,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끝으로 덧붙여, 이런 저의 졸필 코멘트가 아무리 떠들어 댄다고 한들,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끄러운 세상에 소음이 되지 않을까, 은사님의 좋은 말씀에 누가 되지 않을까... 이런 것을 솔직히 염려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자기계발서 100권, 1,000권 보다 더 큰 힘이 있는 것은, 올바르게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의 인생 입니다. 감히 우리 모두가 그런 한 사람의 길에 가까이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이웃이 아파하기에, 배고파 하기에,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눠주고, 사람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높은 계급에서 자신을 추방하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바보같다고 비웃을 때 조차, 물러서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사람. 그 작은 돌멩이 하나가 되어봅시다.
...그래봤자, 세상이 변할리가 없잖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조용히, 그러나 엄숙하게 일갈합니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완고한 벽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깜깜한 어둠 속을 달려가 벽에 부딪치는 ‘작은 소리’를 보내옴으로써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를 알리기에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올바른 행동들이 연결되고 모여갈 때,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가혹한 생존 경쟁 앞에서도,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 걸어갈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2012.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