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1월 11일 주일 예배
교회의 사명 (마태복음4:23-25)
요즘 교회들 부흥이 안됩니다. 아니 부흥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 남는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각종 부흥전략들이 판을 칩니다. 부흥전략세미나도 여기저기서 벌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부흥해야 될지를 보기위해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최고의 부흥전략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흥을 못하는 이유는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너무 나빠서입니다. 왜 이미지가 나빠졌냐면 당연히 너무 나쁜일을 많이 해서지요. 왜 나쁜 일을 많이 합니까? 목사와 장로를 포함한 교인들이 성경대로 바로 살지 않아서입니다.
나만 복받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판을 치면 우리의 가치관이 성경중심이 아니라 돈 중심, 나의 이익중심으로 흐르는 겁니다. 성경에서 그렇게나 강조하는 사랑은 온데 간데 없고 모든 것이 나의 이익에만 초점이 맞추어 집니다. 무한 이기주의.
이러한 이기주의는 차차 고치기로 하고 오늘은 성경에 나와있는 부흥전략에 관해서 한번 봅시다. 이게 단순한 부흥전략이 아니거든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글이거든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예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부분입니다. 아주 간단한 본문이지만 갈릴리 사역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시작을 한 이 본문은 나중에는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공적인 교회가 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대로 하기만 하면 성공할 것 같습니다. 성경이 설마 거짓말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본문은 요즘 말로 하면 교회부흥 전략쯤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본문을 약간 다른 각도로 보고 싶습니다. 즉 ‘교회가 부흥하려면’이라는 각도가 아니라 ‘과연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각도로 본문을 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집니다. 아마 각 교회들마다 그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다를 것입니다. 궁극적으로야 각 교회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하늘나라의 확장’이 되겠지만 세부적으로는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게 또 좋은면이 많겠지요.
모든 교회가 똑같다면 이 교회 저교회가 뭔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한 개신교 교회로 통일하고 그냥 가까이에 지점을 세우지. 마치 천주교 성당처럼.
그러나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 교회 역시 큰 틀은 같아도 세부적으로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왜 이 교회를 세웠습니까? 그저 그런 교회의 또 하나를 더하기 위해서? 정관에도 많은 교회들이 총총하게 서 있습니다. 사람은 별로 없는데 교회는 매우 많습니다. 각기 예쁜 자태를 뽐내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런데 건물도 없는 개척교회를 왜 세웠습니까?
하하, 오늘 저는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 알아 보고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함께 설명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1차 갈릴리 사역을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고향은 갈릴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향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상 네 제자를 부르신 전후에 하셨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최초의 시기부터 네 제자를 부르신 즈음의 일이고 다른 8제자는 아직 등장하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초기의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이 본문입니다. “가르치고 전파하며 고치시니”
당시 갈릴리는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이기는 했지만 유대 본토와는 차별되는 이류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행정구역상으로도 다른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헤롯의 아들이 분봉왕으로 다스렸고 유대는 로마의 총독이 다스립니다. 로마의 입장에서 갈릴리는 그저 그런 변방이기 때문에 남의 손에 맡겨두어도 좋았지만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는 가나안지역의 핵심이기 때문에 직접 총독과 군대를 파견해서 다스린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도가 차이가 납니다.
갈릴리는 마치 서울에 뒤처지고 있는 부산 지역 같습니다. 심지어 성경본문에는 “이방의 갈릴리여”라고 까지 불려 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는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하튼 그런데 이 갈릴리에는 당시 약200여개의 성읍과 촌락이 있었고 300만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지역을 두루 다니신 것입니다. 원어적 의미로는 갈릴리 지역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해서 두루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역을 시작한 이래 잠시 동안도 쉬지 않고 중단없이 두루 다녔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1.가르치시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제자단을 만들기 전부터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가르치다’란 말의 뜻은 일반적으로 ‘가르치다, 교훈적인 설교를 하다, 교사가 되다, ~에게 교훈을 주다’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즘말로 하면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교훈적인 설교를 하는 것으로부터 자기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에는 이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옵니다. 이들은 회당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성경의 강해를 듣습니다. 주님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실천적인 설교말씀으로 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함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를 다니시면서 안식일에 가까운 회당에 들러서 성경을 새롭게 재조명하고 해석하는 설교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교훈을 주시면서 이들이 실천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관념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던 사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장로들의 유전, 인간적인 관습으로 변질되고 형식화된 죽은 신앙에 머물러 있던 유대인들에게 실천적인 살아 있는 바른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오늘 우리 교회가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늘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땅에 860만의 신교도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구교도도 540만이 있습니다. 이들을 합치면 이땅의 30% 가까이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비난받습니다.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은 커녕 요소 요소마다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고 형식화된 신앙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의 사명 중에서 가장 먼저 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무슨 설교를 하셨을까요?
우리는 주가 주신 가장 크고 으뜸되는 계명을 이미 받아서 알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바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지상의 것에 너무 염려하지 말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라고 하신 것이지요.
어떤 이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은 모두 사랑이란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고 합니다. 충분히 수긍할 만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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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대전제로 삼고 성경을 역으로 파악한다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사건,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강하를 위한 성경의 오랜 계획과 그에 따른 인간 역사들 선지자의 말들, 그 증거들로 성경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사들이나 교역자들의 성경 실력이다. 오늘날 이단들이 바로 이런 허점을 교묘히 파고 들어와서 기존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목사님 왜 성경에 이렇게 말했을까요?” 라고 물을 때 제대로 대답해 주지 못한다면 한두번은 몰라도 이런 일들이 몇 번이나 계속되어질때 교인들에게 목사의 신뢰도는 형편없이 떨어지게 될 것이고 뭔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는 이단들에게로 쉽게 빠져들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이런 경향은 일반 신자들에 비해 대학생들이나 청년층에서 심한데 이는 이들이 진리에 그만큼 목말라 있다는 반증이고 이들이 그만큼 성경을 중시하며 성경대로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의문도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이러한 성도들의 진리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수 있도록 스스로 성경본문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역을 하신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아무런 의심없이 그렇다고 생각하고 배운대로 행동한 많은 이들에게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근본취지를 생각나게 하셔서 보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주께서는 먼저 가르치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가령 추수감사절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건 성경에도 나와있지 않고 단순히 미국의 절기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일까? 다른 절기는 어떤가? 기껏 절기 헌금 내고 집으로 갈 때 떡 한덩이 받아가는게 절기인가? 과연 절기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기를 주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타성에 젖어서 그러려니 하지 말고 왜 이것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답을 강구해 나가야 한다. 주님이 바로 이런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한때 제자훈련이니 L.T.C니 하는 제자화 운동이 인기를 끈적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사역을 본받은 것이다. 사실 기존 교회에서 여러 가지 사역을 많이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사역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가르치는 사역이다. 그래서 요즘 몇몇 뜻있는 목사님들이 하는 개척교회들에서 성경공부반을 개설해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2.전파하라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난 다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천국복음은 결국 문자적으로는 ‘천국의 좋은 소식’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는 나라가 지상에 임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소식을 전파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전파하다’는 말은 원어적으로는 ‘어떤 메시지를 공적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가르치는’ 사역이 이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나 성경을 아는 자들에게 성경을 더 자세하게 강해하는 방법으로 가르치신 것이고, ‘전파하는’ 것은 천국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회개와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엄연히 다른 사역이다.
요즘 말로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가르치는 사역’은 기존 교인들에게 성경을 자세하게 가르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이들에게 잘못된 신앙관을 바로 잡아 주고 더 열심을 내게 하며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역이다.
그리고 ‘전파하는 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전도의 경우를 포함해서 기존교인들에게도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의 공개적인 선포를 말한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서로 질투하며 분열하고 세상과 적당히 야합하며 사는 반쪽짜리 교인들에게 참된 성도로서 거듭날 것을 주문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역은 서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제대로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참된 성경의 진리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마태가 이 두 가지 사역을 분리한데 반해 누가는 이 두 가지 사역이 회당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지상 대명령을 예로 들면서 교회의 제일되는 사명이 전도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사실 전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전도 역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전도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지 여기에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고 반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제일 처음 외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 내용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다. 원문 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어디에? 이땅에.
그렇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셨는데 바로 이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죄악이 관영한 이땅에 주께서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기위해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전초기지이며 휴식처이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나라 영토도 된다. 주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들의 마음에 있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 못하리니 바로 우리 마음에 있느니라”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리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면서 인간들이 사는 바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경쟁과 미움, 효율과 투쟁만이 판치는 세상의 법칙,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자는 과감하게 짓밟고 가는 사탄의 법칙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자, 약한자를 보호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곳, 더불어 희망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말하는 세상, 성경이 법률의 중심이 되는 세상, 그 모든 이들이 서로 서로 사랑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 많아져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기 위해서 전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과 전파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교회에 앉아만 있는 성도들이 아니라 참된 성도들, 어폐가 있는데 성도, 거룩한 무리들이 많아져야 한다. 교인들이 아니라.
3.고치시니
교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사명은 바로 고치는 것이다. 일체의 악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실천적이며 대외적인 사역이다.
가르치고 전파한 것을 실천하는 사역인 셈이다. 주님은 그의 세가지 사역 중에서 마지막 사역으로 ‘고치’셨는데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셨다. 여기서 ‘고치다’는 말은 원문 상으로는 육체의 치료뿐만 아니라 영혼의 치료까지 행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단순한 의학적 치료뿐만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의 진정한 회복과 치유까지 포함한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데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 통곡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시고 마음에 심히 통분하사 사망권세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사망권세를 몸소 깨뜨리신 것이다.
성경본문에서 ‘약한 것’은 쇠약이나 신체적 연약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모든 질병이나 허약함도 포함한다. 정신과의 치료가 요구되어 지는 질병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 즉 악령에 사로잡힌 것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에서 귀신들을 몰아내는 축사의 이적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영적인 해방, 영적으로 마귀에게서 놓임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 중의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 이유도 있다.
이러한 약한 것과 모든 질병을 고친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로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하루살이 인생인데 이들이 몸의 장애로 인하여 일할 수 없어서 구걸로 연명하는 현실을 깨기위해서는 구걸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서 놓임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빈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구걸로 벌어 들이는 돈이 한계가 있으니까. 병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경제적인 빈곤으로 부터의 자유, 영적으로 귀신으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주님이 하신 세 번째 사역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것들로부터 놓이게 함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온 시리아에서 주님께 몰려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본다면 사탄의 영역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로 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은 영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실질적인 측면이 있다. 오늘 교회가 우리들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지나치게 영적인 부분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육적인 부분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병에 걸린 모든 이들은 병원에 보내고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은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게 한다면 교회는 과연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영적인 문제는 점쟁이나 무당, 그리고 철학관에 맡겨 버린다면 교회의 설자리는 어디가 될까?
일자리가 없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병자들에게 병이 낫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길이다.
우리 교회는 인간들의 삶의 중심에 서기위해 인간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교회와 정치, 교회와 경제가 연결될 때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사회의 제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성도들의 어려움을 보고 단순히 “기도하께요”라는 말밖에 못한다면 교회가 설 자리는 점점 축소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교회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실질적으로 성도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게 된다면 교회는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다가 결국 소멸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단들처럼 세상을 외면하고 은둔한다던지 문명의 이기나 병원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개인구원이나 영적인 구원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병자들과 약한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이들을 고통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셨기 때문에 주님이 임재로 말미암아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기 시작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허황된 구호가 되고 말 것이며 교회는 잘해야 여러 집단의 하나, 즉 사교클럽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런 추세를 방지할 수 있는 사역이 바로 주님의 마지막 사역인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목회자와 교회가 그러한 영적인 축사나 치병을 할 수 없다면 그리고 미래를 예언하고 사람을 지도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세상과의 경쟁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상 옛날에는 목회자에게 만능을 요구했다. 영성과 지성, 그리고 인성 과 기능까지도 요구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역자들은 너무 온실 속에서 보호받았기 때문에 자생력이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사역이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데 그쳤다면 이방의 시리아에서 사람들이 주님에게 몰려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주님이 주님이 된 것은 주님이 베푸신 기적 때문이다. 주님이 새롭게 해석하고 가르치신 말씀이나 진리는 나름대로 신선하고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이방인들을 교회로 나오게 하지 못한다. 사실상 주님이 교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기적,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에 힘입은 바 크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모습들이 바로 기적이다. 사람들은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나 열광적으로 주님을 따르게 된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 엄청나게 의술이 발달해서 많은 병들을 고치고 있지만 아직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질병들이 있다.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암은 말할 것도 없고 중풍이나 간질의 치료에서도 별로 효과가 없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암과 중풍으로 고통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여인들에게 많이 퍼져있다. 어떤 통계에서는 무려 40%이상의 아줌마들이 우울증에 걸려 있다고 한다.
사실상 예수님이 병자들을 적극적으로 고치신 이유는 당시에 의술이 형편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초보수준의 치료조차도 막대한 돈이 없으면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어서 치료받을 수 없었고 병이 걸린 자는 경제적으로 약자가 많았으므로 병을 치료하는 것은 곧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치는 주님의 사역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국한 할 것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문제로까지 확대할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 안에서 살아야할 많은 사람들에게 든든한 울타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자기의 성도들을 품어서 보호하시는 ‘헤세드’ 의 은총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많은 병원이 세워졌지만 여전히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병들이 성행하고 이름도 모를 수많은 질병들로 인간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 치유하시는 사역은 당연히 오늘날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병뿐만 아니라 병든 사람들의 심령도 고침받아야 한다. 왜곡되고 가치가 전도된 사회도 고침받아야 한다.
그렇게 그렇게 세상이 건강해 지는 것이 주님의 고치는 사역이며 우리가 고칠 사역이다. 단순히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도 포함하며 개인뿐만 아니라 병든 사회 역시 고치는 사역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을 위해서는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되는데 이를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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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 주님의 사역은 가르치고 그 다음에 전파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고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이 가장 잘 나타난 구절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이 사역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기도해서 성령의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1월 1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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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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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10일 넘게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이 나올 때까지 고민했습니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 저 나름대로는 여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위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잘 듣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등등. 다 좋게 들리는 말이라, 몇 번 장문을 끄적이다가 지우기도 했습니다.
정말이지 긴 시간을 계속 씨름다하가 마침내 떠오른 영감은 "고통에 민감한 예수님" 이라는 뜻밖의 대답이었지요. 아마 홍 목사님과 식사 중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옷을 화려하게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이 베드로를 잡으러 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 합니다. "아니 교회 지도자라면, 분명 눈에 확 들어올텐데, 베드로는 대체 어디 있는거야!" 베드로는 일반 교인들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던 게지요.
"자기 잘남"을 함부로 자랑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미덕이어야 겠지요. 아마 베드로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겠지요. 내가 지도자로서, 번쩍번쩍 빛나고 좋은 옷을 입는다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잘나보이겠는가? 그래서 스스로 그런 스타대접을 버리고, 겸허한 자세를 취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서 도망치려 하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박해 받는 쪽으로 걸어가는 이상한(?)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박해 받는 백성을 버린다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겠다" 라고 말합니다. 이에 각성한 베드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로 다시 향하지요. 기독교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웃의 고통에 민감한가?" 아니면 "나의 고통에 민감한가?"
그래서,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친히 고치셨다는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산다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민감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취업이 안 되는 앞이 캄캄한 젊은이에게, 기도합시다 라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가 잘 해나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격려하고, 지원하고, 도울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해줄께, 열심히해봐" 여기서 끝낼 것이 아니라, "같이 기도도 하고, 같이 방법도 찾아 보고, 전심으로 돕는 것 -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나에 대한 각별한 관심, 이웃에 대한 무관심 - 이것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의 현주소 였다면, 앞으로는 이웃에 대한 각별한 관심, 나에 대해서는 소박하고 겸손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새를 돌보듯이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친히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걱정 보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를 언제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의해야할 점은 물론 있습니다. 말로서, 글로서, 표현으로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참 쉽고 가벼운 일입니다. 이런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고, 간단하지요. 그러나, 현실은 가혹합니다. 상대방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나의 선의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상처 입히기도 하고, 무거운 짐이 되버리기도 합니다. 게다가 상처 자국은 총알 같아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거기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상대방의 고통에 민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가끔 이토록 아픈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의해야 합니다.
짧은 코멘트를 마치면서 - 교회가, 남을 세심하게 잘 도울 수 있는, 따뜻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힘든 사람들 곁에서 그의 아픔을 슬퍼했으며, 그의 고통을 고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힘든 사람과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고, 먹고 살기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방향을 정해 봅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어려운 사람을 세심하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봅시다. 목마른 나그네에게 필요한 것이 물이 었듯이, 현실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고전적인 멘트를 덧붙이며 줄입니다. 사랑이 식어버린 시대는 위험합니다. 이러한 시대의 키워드는 사랑과 반대지점에 있는 "무관심"이 됩니다. 내가 아픈데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무관심이라는 절망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인간은 약합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힘든 순간, 진심이 담긴 따뜻한 격려, 그 작은 위로에 힘입어 인간은 놀랄 만큼 강인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고자 노력해 나갈 때, 그 때, 우리는 놀라운 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