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12월9일/산 너머 온 도움(사무엘하15:30-3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12. 27. 19:49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9일 주일 예배

산 너머 온 도움 (사무엘하15:30-37)

우리는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즉각적인 응답이 온다면 얼마나 좋울까?
아니 아예 주님 품안에 있다는 것이 세상이 주는 괴로움을 비켜가게 만드는 확실한 보증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오지않고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일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힘써서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괴로운 인생들이 줄을 서서 기독교에 귀의하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만물과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권능과 즐거움만이 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너무 힘이듭니다.

우리에게 닥쳐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날, 몇 주, 때로는 몇 달씩 기도합니다. 겨우 겨우 응답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고나면, 해결의 기쁨도 잠시 얼마있다가 바로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것은 너무나 일정해서 마치 파도와 같습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파도가 조금 뜸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이전보다 더 큰 파도가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기가찹니다.

솔직히 우리는 주님을 믿기 위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신비한 주님만이 주실수 있는 멋지고 가슴두근거리는 신비를 세상의 낙을 포기한 보상으로 맛보아야만 합니다.
솔직히
세상의 쾌락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즉각적인 역사를 맛보는 그런 낙마저 없다면 이건 솔직히 너무 무미건조한 삶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신비가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억울합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러한 삶을 우리에게 몸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오늘 우리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도망가는 행동입니다.

다윗은 지금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황급하게 성을 빠져나와서 도망을 가고있는 중입니다.
대부분의 민심이 압살롬에게 쏠렸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반란군에 비해 너무 작습니다.
무턱대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을 가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황급히 궁전을 빠져나오고 예루살렘성을 나서서 기드론 시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는 따르는 신복들, 백성들과 함께 광야길로 행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다윗이 황망중에 도망쳤는지를 보면
14절에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하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급하게 성을 빠져나온 다윗이 지금 안전한 곳에 당도한 것이 아닌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기드론 시내는 물이 철철 흘러 넘쳐서 건너기 어려운 한강이 아닙니다. 단순한 건천, 와디에 불과합니다. 약간 지체는 할 수 있지만 적들의 진격을 결코 저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론 시내를 건넌 다윗의 행동은 좀 이상합니다

30절에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지금 아들의 반란군은 걸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후일을 기약하며 예루살렘성에서 희희낙낙하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급박하게 자기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입장에서는
언제 적군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서 자기들을 도륙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쉬지않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가야 합니다.
겨우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말 것이 아니라 요단강이라도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맨발로 울면서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은 결코 높거나 험한 산이 아닙니다.

이 산은 해발800M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예루살렘자체가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보다 겨우 80M가 높을 뿐입니다. 네게의 야트막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이 산은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러 가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위로 도망가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더구나 머리를 풀어 눈을 가리우고 맨발로 울면서 올라간다면 이는 거의 적들앞에 자기자신을 포기하고 내어던지는 자살행위입니다.

그런데
도데체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것일까요?
다윗은 왜 도망가지 않고 지금 이러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산마루턱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나 바쁜 중에서도 자기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앞에서 울며 통회하며 겸비한 모습으로 감람산 마루턱을 향해 맨발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가 당하는 환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줄 알았기에 하나님에게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에게서 그 해답을 찾아야 됨을 그는 알고 있었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도움을 구하는 예배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라는 다윗이지만 이 당시에는 모든 민심은 압살롬에게 돌아갔고, 그동안 잠복해 있던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여기 저기 불거져 나오면서 안팎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심지어는 자기의 친 아들에게까지 배신당한 처지의 다윗에게 있어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그는 바로 왕이었기때문입니다.
비록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수많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바라고 그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앞에서가 아니라면 함부로 울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나마 자기를 따르던 백성들도 두려움을느끼고 아니면 실망감을 느끼고는 압살롬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앞에서 울었고 하나님앞에서 겸비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까지 눈물로 발을 적시며 맨발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그의 긍휼한 손길이 자신의 위에 임하기를 바라면서
사람에게 배신당한 그에게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네가 기도할때와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다윗의 사정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감람산 꼭대기를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그 산이 별로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 산너머 무엇이 오고 있는지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감람산의 마루턱은 별로 높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런 비보가 추가로 전해집니다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진짜 맥빠지게 하는 소식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 없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앞에 자비를 구하는 예배행위를 드리는 중입니다. 그러면 뭔가 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소식이 와야 그래도 기도할 맛이 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염원과는 반대되는 오히려 비극적인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정도라면 포기할만 합니다
“그만두고 빨리 말에 올라라
그리고 멀리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하자”
이래야 현명한 판단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참 미련합니다.
그는 포기하는 대신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비록 상황은 더 절망적이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여호와라는 말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앞에 돌아오면,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면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나에게 기회를 주시마 약속하신 내아버지
내가 이제 내죄를 회개하오니 아버지의 약속을 기억하옵소서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을 불렀다는 말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일급참모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일가는 모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들편에 붙어버렸다는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예배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람산 마루턱까지 올라갑니다

마침내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산마루턱에 당도하자 무엇이 보였습니까?
산머너 다윗을 도우기 위하여 수천의 철기병이 올라오고있는 것이 보였습니까?
아니면 엄청난 재물과 무기들이 그와 그의 백성들에게 제공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가 산마루턱에서 본 것은 바로 아렉사람 후새 한사람이었습니다
강력한 무공을 자랑하는 장수가아니라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 한 사람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동족이 아니었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 나오지만 팔레스타인 원주민이었습니다.
그가 맨발로 울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만난 도움은 후새 한사람이었고, 일급 모사인 아히도벨의 배신에 관한 비보였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회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섭섭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의심하며 낙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새에게 자기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기위해 노력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가 무어라고 기도했습니까?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한사람 후새가 자기를 맞으러 나온 것을 보고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것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집니까?
지금 전쟁을 하게 되니까, 모사는 놔두고 당장 눈에 보이는 든든한 군대, 범 같은 믿음직한 장수가 필요해서 다른 것에는 눈을 감습니까?

우리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전혀 우리의 눈에 엉뚱하게 여겨지는 응답을 하셔서 ‘하나님 이게 아니예요, 빨리 응답해 주세요’라고 하나님께 다른 것을 조릅니까?
아니면 역시 그렇지뭐, 기도가 다 그렇지, 결국 우리네 일은 우리가 해야지 하며 포기합니까?

다윗은 그러고 보면 참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그렇지만 목동의 자리에서 빼어 올리셔서 왕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전장터에서 ,죽음앞에 놓여있을때에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도움의 손길로 인하여 살아난 것을 그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거듭되는 비보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의 응답대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후새가 성으로 들어가고 난 다음 다윗에게 온 도움은 뭡니까?
16:1에 다윗의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어떻습니까?
성경에는 장황하게 물건의 내역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귀 두마리에 실을 정도의 물건이 다윗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겨우 심리적인 위로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사랑하고 아꼈던 므비보셋의 배신이라는 또다른 비보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글쎄요, 이정도라면 기도의 응답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한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후에도 다윗에게는 여러가지 환난과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다윗의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후새로 말미암아 아히도벨의 모략이 패하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급하게 12,000명의 용사를 몰아서 다윗왕을 공격하여 죽이자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군대를 더 모으고 다윗이 지칠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자는 후새의 모략 때문에 무위로 돌아가서 결국 아히도벨은 자살하고 압살롬은 후새의 모략을 따르다가 상수리 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 죽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으로 다윗의 기도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응답받았습니다.
그 참담한 상황 가운데서, 자기의 아들에게 조차 배신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도중에 더 악화된 비보를 들은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말에서 내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울며 감람산길로 올라가기 시작할 때 이미 하나님의 섭리는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한 사람 후새를 기다리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큰 역사를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수천의 철기병이 주는 든든함, 산더미 같은 물자가 주는 풍족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미흡한 수준의 응답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 자기의 하나님, 언약의 여호와를 신뢰하였기에 끝까지 감람산을 걸어서 올랐고 하나씩 하나씩 언약의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는 이미 하나님을 너무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에서 하나님과의 동행함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결코 자기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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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설교를 접하면서, 저는 어떤 기도문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하단에 같이 덧붙여 놓으면 좋겠네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결국 선하게 우리의 인생을 이끄신다는 것을 믿고,

주어진 삶에 있어서, 어떤 일을 만나든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일 것입니다.

자주 불평투성이 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수 없이 좌절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만,

그럼에도 인생이란 살 만 한 것이지요.

좌절하는 일이 많았던 중국의 시인 이백은 이런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이 나와 같은 재목을 낸 것은 반드시 쓸 데가 있어서 일지니"

당신의 삶이 어떤 일을 만나던지, 어떤 괴로움을 겪던지, 반드시 이겨내어서, 더 강건해 지기를,

소박하게 기도하며 오늘 코멘트 마칩니다. / 2012. 12. 시북.

어느 무명 용사의 기도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노라

큰 일을 하기 위해 건강을 구했으나,
도리어 몸에 병을 얻어 더 좋은 일을 하게 되었노라

행복하기 위해 부를 간구했으나,
도리어 가난한 자가 됨으로 지혜를 얻었노라

권력을 얻어 만인의 찬사를 얻기 원했으나,
세력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었노라

생을 즐기기 위해 온갖 것을 다 바랬으나,
영생을 얻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노라

내가 간구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은연중 바란 것을 모두 얻었노니
내 자신이 보잘 것 없음에도
나의 구하지 않은 것까지 응답해 주셨도다

나는 만인 중에서
가장 풍성한 축복을 입었노라

-미국 남북전쟁시 어느 무명용사의 기도-

The Prayer of An Unknown Confederate Soldier

I asked God for strength, that I might achieve.
I was made weak, that I might learn humbly to obey.

I asked for health, that I might do greater things.
I was given infirmity, that I might do better things.

I asked for riches, that I might be happy.
I was given poverty, that I might be wise.

I asked for power that I might have the praise of men.
I was given weakness, that I might feel the need of God.

I asked for all things, that I might enjoy life.
I was given life, that I might enjoy all things.

I got nothing that I asked for—but got everything I had hoped for.
Almost despite myself, my unspoken prayers were answered.
I am, among all people, most richly bl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