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2일 주일 예배
역사의 주인공 (에스더2:1-10)
우리가 소설책을 보면 소설책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에 주인공은 이상하게도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립니다. 누가봐도 말이 안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거뜬히 그 상황에서 승리합니다. 당연히 죽지도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자빠져도 금덩이를 줍고 일어나는 것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조연이나 엑스트라는 잘 죽기도 하고 일도 잘 안되고 어려움에 허덕이기도 하는데 주인공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안죽습니다. 왜냐면 주인공이 죽으면 영화가 더 이상 진행이 안되니까요. 그러니까 주인공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내가 주인공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의 주인공은 누구겠습니까? 소시민에 불과한 나는 아닐 것이고 누구지? 글쎄요? 미국의 대통령, 중국의 주석, 아니면 세계의 재벌들, 카를로스 슬림, 빌 게이츠? 혹은 숨어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는 일루미나티, 로스차일드 공작가, 나이트 템플러 이사람들 중에서 과연 누가 이 세상의 주인공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누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냐와는 상관없이 종종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나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거대한 물결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미약한 나는 물결을 타야지 대세를 거스러면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방송과 신문에서 나는 분명히 세상의 중심이 아닙니다. 대통령과 정치가들, 재벌들, 장군들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로 신문일면이 도배가 되어있습니다. 마치 우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배경화면정도, 기껏해야 없으면 섭섭한 엑스트라처럼 여겨집니다. 지나가는 행인1도 아니라 수많은 군중들 중의 하나로 존재감조차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역사책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이야기가 달라 집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나입니다.
몇 년전 흥행한 300이란 영화를 아실겁니다. 그리스군인들이 페르샤의 침입에 맞서서 싸우는 전쟁이야기가 영화300입니다. 남자 배우들이 모두 웃통을 벗었는데 초콜릿복근으로 유명했던 영화입니다. 바로 그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 에스더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지요.
그리스와 페르샤간에는 몇 번이나 전쟁을 치렀습니다. 지금의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페르샤의 입장에서는 그리스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원조하는 그리스의 에게해 너머 있는 아테네나 스팔타 같은 도시국가들이 눈에 가시입니다. 그래서 페르샤의 왕 아하수에로는 그리스를 정복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 다리우스 역시 그리스 정복이 평생 소원이었고 죽으면서 유언으로 자기에게 그리스의 정복을 당부했습니다. 아버지 다리우스가 마라톤만의 전투에서 패해서 그 치욕을 갚으려고 아들에게 유언을 한겁니다. “너는 반드시 그리스본토를 차지해라”
사실 성경에 나와있는 아하수에로 라는 왕의 이름은 실제 역사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하수에로가 역사서에 나와있는 ‘크세르크세스 왕’이라고 주장합니다.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어 ‘크사이아르산’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고 ‘크사이아르산’이 그리스어로 음역되는 과정에서 ‘크세르크세스’로 변형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전쟁준비가 끝이 나서 페르샤의 겨울수도인 수산궁에서 위로잔치가 벌어집니다. 아하수에로는 대단히 현명한 것 같습니다. 전쟁 전에 대규모의 잔치를 열어서 남자들의 사기를 높여 주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감탄을 받고 싶었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아하수에로가 일년에 받는 조공이 황금 500톤에 달했다고 합니다. 아하수에로는 당시 아테네와 에리트리아, 스팔타같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연합해서 페르샤에 대항하는 상황을 보고 그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 제국내의 방백들과 장군들 그리고 신하들을 초청하여 자기의 부를 자랑하고 사람들을 위무하려고 한 것입니다. 무려 반년간의 잔치! 오늘은 잔치의 마지막 날입니다.
6600제곱미터의 대리석 바닥위에 공중에는 각색의 휘장을 치고 사이에 금은으로 장식한 의자에 기대서 금잔을 들고 잔치를 벌이는 이 화려한 잔치자리는 당시 페르샤의 부유함과 아하수에로의 강대한 세력을 잘 포현해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왕의 술이 무한대로 공급된다고합니다. 인간의 쾌락과 부귀와 영화가 극에 달한 모습입니다.
여기1:4절에 무려 180일간 잔치를 벌이고 또 그 후에 수산성의 주민들을 위해서 칠일간의 잔치를 더 베풀었다고 합니다. 수산성은 페르샤 제국의 4대수도중에서 겨울 궁전이 있는 곳입니다. 페르샤는 대제국입니다. 정복왕조이지요. 여기 성경제일 앞부분에 “인도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지방이라는 말은 ‘메디나’라는 말로서 나라를 종족별로 나눈 행정구역입니다. 그러므로 페르샤의 종족은 무려127개나 된다는 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왕은 각도의 제후들과 장군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그리스 정복전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대제국의 신하들을 한꺼번에 다 불러 모을 수가 없으므로 차례차례로 이들을 불러 들입니다. 그리고 설득을 하고 설득이 된 사람들은 돌아가고 이렇게 하다 보니 이 준비과정이 무려 180일이 걸린 겁니다.
다행히 큰 반발 없이 전쟁준비의 설득에 성공한 왕은 너무 기뻐서 수도의 주민들과 남아 있는 신하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일주일의 잔치를 더 베푸는 과정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마지막 날입니다. 그러니까 잔치 187일째 날에 벌어진 일입니다. 잔치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정식으로 그리스에 쳐들어갈 전쟁준비가 시작될 겁니다.
왕은 기뻤습니다. 이제 조상대대로의 숙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거든요. 준비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얼마나 길었든지 생각하면 감회가 깊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뻐서 술을 마구 마신 것 같습니다. 원래 페르샤의 주법은 일단 잔에 따른 술을 한꺼번에 마셔야 되고 만일 단번에 마시지 못하면 다시 잔에 술을 따라서 한번에 마시도록 되어 있었으며 술을 마실 때마다 모든 손님들이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폭주하는 경향이 있었고 일단 술이들어가면 통제가 되지 않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왕은 잔치기간동안 이러한 주법을 따를 필요가 없이 강요하지도 말고 스스로 마음대로 술을 마시도록 한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연을 위해서 왕은 왕궁에서 술을 무한대로 공급한 것입니다. 이렇게 술이 취하자 술꾼 본연의 주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신하들의 술자리에는 아름다운 무희들이 춤을 춥니다. 이걸보고 있던 신하들은 술자리에서 각기 자기 민족의 여인이 아름답다고 자랑합니다. 각 지역의 제후들은 페르샤에 정복은 당했지만 원래 우리나라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우기는 거지요. 아니면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의 여인이 아름답다고 우기는 거지요. 페르샤가 힘은 셀지 몰라도 여자 하나만은 우리민족이 최고다. 뭐 이런 겁니다.
원래 이 지역의 남자들은 술버릇이 아주 나쁩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부인들의 정조에 흠이 갈까 싶어서 아예 남녀가 함께 술자리를 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페르샤에는 인도여인부터 이디오피아 여인까지, 아시아인과 백인과 흑인까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있습니다.
각지역의 제후들은 술김에 자기 지역의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늘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자랑을 하는 거지요. 원래 아무것도 아닌게 묘하게 남자들의 경쟁심을 자극하게 됩니다. 술김에 저지르는 유치한 수작입니다만 술꾼들은 아무도 자기가 그렇게 유치한지 모릅니다.
술에 흠뻑 취했던 왕은 갑자기 아름다운 자기의 아내, 페르샤 여인 왕후 와스디를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술꾼들이 잘 가지는 허영심이지요. 그리고 페르샤여인의 아름다움을 자랑함으로 이민족들의 기를 꺾으려는 생각도 있습니다. 127개의 민족이 모여 있으니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비록 페르샤에게 무력으로 점령을 당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이 더 낫다는 뭔가를 보여 주려는 우스운 짓을 지금 술취한 제후와 관리들이 벌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만 왕궁법도에 어긋나는데도 남자들의 술자리에 왕후를 불렀습니다. 말만해서는 못믿겠고 얼굴을 직접 봐야 될거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페르샤 왕궁에서는 남녀가 함께 술자리를 가지지 못합니다. 술취한 페르샤 남자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지요.
이때 왕후 와스디 역시 따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와스디를 중심으로 모여든 여인들은 왕후의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왕후를 중심으로 모여서 여권신장을 위해서 노력하기로 결심합니다. 흔히 요즘 하는 말로 페미니스트들이 된겁니다. 왜냐면 이 왕후 와스디는 아름답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성질이 표독해서 왕궁의 수많은 관리들이 이 여자의 분노를 사서 목이 잘린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자들도 와스디라면 벌벌 떠는 실정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여권신장을 위해서 왕후를 중심으로 뭉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한참 줏가를 올리고 있는 와스디에게 갑자기 왕의 사자들이 와서 술자리에 관을 정제하고 나오라고 합니다. 아람어 탈굼에 의하면 이때 아하수에로 왕은 술에 취해가지고 그만 왕후에게 옷을 모두 벗고 왕관만을 쓴채로 나오라고 했다고 합니다만....
여하튼 왕후는 왕의 명령을 불쾌하게 여기고 오지 않았습니다. 말이 안되는 거지요. 왕실의 법도에도 어긋나고, 여러 귀부인들이 자기를 높여주고 있어서 지금 자기의 자만심이 하늘을 찌를 판인데 왕이 부른다고 항의 한마디 없이 쪼르르 왕의 잔치 자리에 달려 간다는건 말이 안되는 거지요.
자, 엉터리 명령을 내려놓고 왕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왕후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돌아와서는 왕후가 오지 않겠다고 하는 전갈을 합니다. 술이 떡이 된 왕은 다시금 왕후를 불러 오라는 명령을 하고 일곱명의 내시를 보냅니다.
보통 페르샤왕궁에서 일곱의 내시를 보낼때는 매우 중요한 왕의 명령을 전할때입니다. 아마 이 의미를 왕후 역시 무시한듯합니다. 왕이나 왕후나 잔치의 흥에 겨워 술이 지금 떡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원래 이 나라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폭주하는 경향이 있어서 미리 왕은 누구도 음주를 강권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을 만들어 놓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두 번이나 왕의 명령이 신하들 앞에서 무시되자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겁니다. 왕은 화가 나서 중심이 불붙는 듯 했다고 합니다. 왕후의 미모를 보고 싶어한 남자 짐승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왕후가 못생겨서 왕후가 나오지 않는 것이라는 둥 왕이 평소에도 왕후에게 꼼짝을 못한다는 둥, 이나라의 실세는 왕이 아니라 왕후라는 둥 온갖 험한 소리들이 나옵니다. 이때 신하들은 왕이 왕후에게 꼼짝 못하는 공처가라고 비난합니다. 한마디로 왕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아하수에로 왕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패기만만하고 잔인하며 옹졸한 지도자이며 거대한 제국의 경영자이고 용감한 전사요 질투심 많은 남자’ 왕의 아내에 대한 자랑은 그 아내를 폐위시키는 동기로 바뀌게 됩니다.
왕은 노하여 왕후 와스디를 어떻게 해야 될지를 신하들에게 물어 봅니다. 왕실의 가장 높은 일곱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여기 보면 1:14절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페르샤 최고의 7대 귀족들에게 전례에 대해서 물어 본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왕후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 가지 처벌이 있을 수 있는데 ‘므무간’이란 신하는 왕후의 일을 조금 더 확대 해석을 합니다.
아마 므무간은 7명의 최고신하들 가운데서는 제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서열이 낮기 때문에 위험한 일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거지요. 므무간은 왕후 와스디의 왕명거역사건을 단순히 왕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에서 ‘잘못하면 이번 일로 말이암아 페르샤의 모든 남자들의 귄위가 땅에 떨어 질 수 있다’ 라고 몰아 갑니다.
당시 페르샤에 어떤 문제가 있었느냐 하면 여러 이민족들끼리 결혼을 하고서 자녀를 교육시킬 때 아버지의 언어를 따르느냐 아니면 어머니의 언어를 따르느냐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더구나 전쟁을 하기 위해 남자들이 집을 비우게 되면 여자들이 가장권을 가지고 재산을 정리한다거나 집안의 언어를 여자쪽으로 하는 일이 벌이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일은 귀족들에게서 일어 납니다. 다른 민족의 귀부인들과 결혼한 지방관들 사이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과연 집에서는 누구의 민족을 기준으로 생활하느냐? 그래서 이때 페르샤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힘겨루기가 한창이었습니다.
이 아하수에로 왕은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준비를 했지만 정작 자기 나라안에는 남자와 여자간의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평소에도 와스디가 워낙 성질이 표독해서 걸핏하면 신하들을 죽이는 등의 나쁜 행실 때문에 이런 일을 기회로 왕후의 자리에서 내어 쫓으려는 음로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왕후의 행동은 그만 엄청난 범죄행위, 즉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범죄를 저지르는 국사범의 행위로 둔갑한 것입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와스디는 ‘지하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는 명목으로 14명의 귀족을 생매장했다고 할 만큼 잔인한 인물입니다.
체면이 깎인 왕은 현실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위해 가정이 든든해야 된다는 남자들의 말을 듣고 왕후를 폐위시켜버렸습니다. 남자의 체면이 상한 겁니다. 특히나 전쟁을 앞두고 왕은 남자들을 다둑여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왕후의 폐위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도 남편의 방언을 사용하도록 하는 법령까지 공포가 되었습니다. 시기가 나빴지요. 오랜 잔치의 마지막 날에 그만 술이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부인자랑을 하려던 단순한 왕의 치기어린 행동은 결국 나라의 왕후가 바뀌는 대사건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에스더2:1을 보면 ‘그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그후에. 우리가 생각할때는 ‘잔치가 있은 후’라는 말인 것 같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페르샤 사람들이 잘 아는 ‘페르샤와 그리스의 전쟁 후에’ 라는 말입니다. 이걸 성경은 단순하게 ‘그후에’라고 표현하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한차례만 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제3차, 4차 페르샤 그리스전쟁이 있었고 3차 전쟁에서 스팔타를 격파한 페르샤는 아테네에게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고 플라테이아전투에서도 패배함으로써 결국 철수합니다. 이를 원통하게 생각한 아하수에로는 다시 4차 전쟁을 일으켜서 이번에는 미칼레 전투에서 참패를 함으로 결국 그리스 정복의 꿈을 접습니다. 이 기간이 무려 4년입니다.
세계사적으로도 이 전쟁은 엄청나게 유명합니다. 작은 그리스가 큰 페르샤를 이긴 것이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민주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걸로 소개된 역사적인 전쟁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마라톤전투 역시 그리스와 페르샤 간의 전쟁에서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 전쟁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역사에서 이 전쟁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책에 주인공은 따로 있거든요.
일화 하나 - 6.25 전쟁 때의 일이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군의 한국 전쟁 참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다. 당시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고, 그렇게 되면 유엔은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긴장한 분위기 가운데 회의 날이 나가왔다. 그런데 회의 당일 소련 대표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전쟁에의 참전을 만장일치로 가결했고, 한국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의 대표가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그 대표는 회의 시간을 훨씬 지나 모든 결정이 끝난 두에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것은 기도의 힘이었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함을 만든 사람이 투표함을 완성하고는 안쪽에 이런 기도문을 쓰고 서명을 했던 것이다. "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결정이 되어 인류 역사에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997년 투표함이 낡아서 바꾸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를 들으셨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셨던 것이다.
여러분 어때요? 거짓말 같지요.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습니까? 그러나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 여기 있는 우리들이 잖아요.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세계의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싸우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5대 상임이사국중의 한 나라 라도 반대하면 안건이 통과가 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5개국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게 안전보장 이사회거든요. 그래서 나머지 네나라가 찬성하더라도 한나라 소련의 반대로 유엔군의 참전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유엔군의 참전이 가결된 이면에는 역사의 주인공인 그 누구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사의 흐름을 되돌린 거대한 결정이 강대국들의 정략이 아니라 희한하고 신기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배후의 역사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의 전면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인간의 욕망들 사이에서 자기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세운 주인공의 간구를 들으시고.
왜냐면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해서 주인공으로 삼으신 우리 성도들, 자기의 자녀들인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소원을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 세상의 주인께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뢰는 방식은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시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의 시각으로는 주인공인 것입니다. 주인공이 너무 많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주인공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한에서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하거나 쾌락과 나자신만을 위해서 산다면 우리는 결코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페르샤는 이 전쟁에서 패합니다. 여하튼 전쟁에 패한 왕은 전쟁준비를 축하한 잔치의 마지막 날이 생각났고 자연적으로 와스디의 폐위에 생각이 미칩니다. 전쟁준비 과정에서 술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라서 전쟁을 생각하다보니 와스디가 보고싶어 졌습니다. 아마 전쟁에서 이겼다면 아내의 생각은 나지 않았겠지요. 처음 전쟁에서 패했을때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서 쳐들어 가고자 하는 마음에 외로움도 그리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전쟁에서 지고 할 일이 없어지고 나니까 비로소 아내가 생각이 난 겁니다. 술에 취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 후회가 되고 와스디의 아름다움과 와스디와 함께 지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이 사람이 변덕이 심하다고 했잖아요.
마침내 왕은 왕후를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페르샤를 다스리는 일곱명의 신하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들도 왕후의 폐위에 관계했기 때문에 와스디가 복위되면 자기들은 죽은 목숨입니다. 이 여자가 성격이 잔인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왕의 결심을 돌려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페르샤의 7가문이 아니라 전 영토안에서 누구라도 아름다운 여인이 왕후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제안입니다. 원래 페르샤의 왕후는 7대 가문에서만 뽑기로 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페르샤의 7대 귀족가문에 속하지 않는 에스더는 원칙적으로 왕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와스디의 복위를 막기 위해 왕에게 이 규정을 풀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왕은 신하들의 제안이 너무 기뻐서 와스디를 단념했습니다. 애초에 왕이 와스디가 생각난 이유가 7가문의 여인들 중에서 와스디만큼 예쁜 여자가 없어서입니다. 왕은 예전에 신하들이 각 지역의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게 생각났습니다. 그 예쁜 여자들을 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와스디를 포기합니다.
왕후를 뽑기위해서는 먼저 전국의 미녀들을 후궁에 불러 모은 다음에 왕이 하루씩 같이 자는 거 거든요. 신하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살리기위해 와스디의 복위를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왕후의 자격요건을 완화한 것입니다. 원래 이 신하들은 자기들의 권익을 보호하기위해 자기들의 집안에서 왕후를 독점하려고 그런 규정을 만든건데 이제 자기의 목숨이 위태롭자 그런 규정이 무시됩니다 왕은 미녀들을 품기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왕후를 뽑는 것에 찬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비로소 왕후가 될 자격이 생긴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왕후가 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누구도 에스더를 왕후로 만들려고 생각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모든 이들은 자기들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에스더가 왕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입니까? 에스더가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유대인들을 멸하려는 하만의 계획을 저지해야 하거든요. 하나님의 일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자기들에게 가장 유리한 식으로 일을 꾸미지만 내 하나님은 그러한 욕망들을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리게 하시고는 그 가운데서 자기의 일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눈으로는 그 위대한 의의를 가지는 전쟁도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냥 배경화면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후에’라는 한마디로 넘어갑니다.
에스더1장의 마지막과 2장1절에는 3년의 시간차가 있습니다. 와스디가 포악한 여인이고 어리석은 여인이라는 것, 신하들이 그래서 와스디를 실각시키고자 한 것, 왕의 미인에 대한 욕구... 온갖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들은 모두 다 배경화면에 불과합니다. 다른말로 하면 이들은 엑스트라입니다. 길가던 행인1,2,3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의 눈으로야 왕이니 대신이니 왕후니 하고 큰소리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들의 역할은 주인공을 주인공되게 하는 엑스트라나 조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이세상에서 왕이니 대통령이니 재벌이니 하고 목에 힘주고 있지만 이들 역시 우리를 주인공되게 하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공입니다. 역사가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 갑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정한 역사의 주인편에 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지요. 세상이 주는 거대한 권력, 부, 쾌락 이런걸 보고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생각하고 그쪽에 줄을 서면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나를 들어서 사용하실테니까요.
혹시라도 ‘감히 나같은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스스로를 비하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편에 서있나를 살펴 보십시오. 스스로가 너무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게 무엇이 있나부터 살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한 나는 하나님이 써나가시는 역사책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한 포로 여인이 왕후가 되는 것이 페르샤 그리스 전쟁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 개인의 출세가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한 여인의 성공기를 전쟁보다 더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왜냐면 그녀로 말미암아 해야 될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포로들을 구해내는 일을 하기 위해 에스더가 왕후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에스더는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전쟁준비과정에서 일어난 기념 잔치의 내용에 대해서 너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휘장의 색깔, 장식들, 심지어 돌멩이 재질까지 기록했네요. 그런데 정작 세계사에서 중요한 전쟁의 기록은 한단어가 다입니다. 그 후에.
그리고는 에스더에 관해서 너무 너무 자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시각은 이와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이스라엘의 후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위해 에스더가 필요했기에 그 외의 사건은 모두 생략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고,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좇을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좇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세상의 권력자가 재벌이나,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내 아버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제대로 쓰는 주인의 편에 서야 주인공이 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거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시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존엄을 물질의 화려함과 욕망보다 더 중시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신문과 방송에서 언급되는 것 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록하시는 역사책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역사책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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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첫 느낌? 그저 장엄하지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원고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는 세상이 자랑하는 상향성 가치들, 희소성 가치들이 모두 철폐됩니다. 예를 들면 권력에 대한 욕망, 물질에 대한 집착, 이성에 대한 탐닉, 누구나가 원하는 것들은 그저 배경화면 처리될 뿐이지요. 조금 쉽게 풀어쓸 필요가 있겠네요.
강대국의 왕, 하나 뿐인 최고의 자리지요. 당대 최고 권력자가 나오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땅따먹기를 하려는 욕망의 끝판 모습이 지금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경화면 처리.
자, 그 다음으로는 권력과 미를 두루 갖춘 모두가 부러워 하는 한 왕후가 나옵니다. 부족할 게 없다보니 사람 죽이기를 취미로 삼고, 눈에 거슬리는 인간들을 짓밟을 수 있는 그야말로 인간 권력의 최정점이지요. 역시 배경화면 처리.
어째서 하나님은 이런 일반적 역사적 기술법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개) 을 따르지 않는 것일까요. 권력은 부질 없고, 욕망도 별거 아니라서? 음, 그렇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하나님의 시선은 권력과 욕망이 추구하는 시선과 다른 곳을 향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기간을 무심하게 별 일 아닌 것 처럼 기록하고, 이 권력자들의 추한 모습들을, 단지 에스더 등장을 위한 서론, 배경화면으로 처리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신 것은, 성도가 지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입니다. 결코 누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느냐 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꽤 끈질기게 고민해오고 있던 것이 있는데, 나쁜 사람들을 왜 저렇게 내버려두는가 라고 생각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혹자는 이른바 "인간쓰레기"들은 신이 버렸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저런 사람들처럼 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훈이라고도 말합니다. 더욱 저를 심란하게 했던 것은 나쁜 사람들은 한 번 나빠지면, 더욱 까맣게 변해가는 경우는 있어도, 좀처럼 선한 길로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이 설교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고 갑니다. 나쁜 인간들의 망나니 같은 삶들에 대해서는 신경끄고, 오늘 선한 일을 위해서 노력하고, 오늘 하나님의 뜻한 바대로 살았는지 되돌아 보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뒷배경화면만 신경쓰는 사람은 결코 주인공의 멋진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쓸데 없는 것에 자꾸 신경쓰고 있다보면, 결코 스스로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언젠가 죽기 마련입니다. 그런 가련한 인생을 남들 욕하고 탓하다가 죽는다면 그 얼마나 슬프고 부질없는 일이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삭이고 계십니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라. 너만의 선하고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라. 지금 바로 당신의 삶을 살아가세요. 당신은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 2012. 12. 25. 성탄의 저녁에.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