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월20일/산 너머 온 도움(샤론교회 초청설교)/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 23. 21:57

홍종일 목사님 초청설교문 원고 2013년 1월 20일 주일 예배

산너머 온 도움 (사무엘하15:30-)

예전에 대선 후보 중에 한 분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살림살이 좀 나아 지셨습니까?
다사다난했던 2012년을 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의 삶이 작년보다 좀 나아졌습니까? 이번 년도는 뭔가 잘 될 것 같은 희망이 보입니까?

새해도 벌써 삼주가 지났는데 어때요 뭔가 좀 될 것 같습니까?
그런데요, 안타깝게도 우리네 삶은 작년이나 별로 다른게 없습니다. 오히려 더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빠질 조짐이 보입니다. 기도는 안하냐고요?

안하기는 왜 안합니까? 앉으나 서나 기도하고 걱정될 때마다 기도하고 항상 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요.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까? 그 기도의 응답이 있었다면 왜 이렇지요?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성도들이 가진 고민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마다 즉각적인 응답이 온다면 얼마나 좋울까?
아니 아예 주님 품안에 있다는 것이 세상이 주는 괴로움을 비켜가게 만드는 확실한 보증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대한 폭풍과 산더미 같은 파도가 육지를 때리는 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한마디로 대자연의 장관 일 따름이지만 직접 파도 속에서 싸우는 사람은 죽을 지경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하나님의 품안에서 그런 세상을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단지 안됐다 그래도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오지 않고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일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말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됩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살기 어려울 수록 예수쟁이들의 혜택이 더 드러납니다. 소위 차별화입니다. 역시 예수를 믿으니까 이 풍진 세상에서도 저렇게 걱정 없이 살 수 있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힘써서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괴로운 인생들이 줄을 서서 기독교에 귀의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만물과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권능과 즐거움만이 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척척 해결되어야 하고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너무 힘이듭니다. 하루 하루 , 한달 한달, 한해 한해를 살아 내기가 너무나 버겁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겁이날 정도입니다. 누구가 어디서 자살을 했네, 50대 가장이, 일가족이 죽어 나갑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를 숯으로 때리자 아내는 자는 남편의 머리를 돌맹이로 내리쳐서 죽입니다. 가정도 해체되고 가족도 해체됩니다. 사랑이 아니라 증오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원에는 돈이 있습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 가가 아니라 얼마나 돈을 많이 가져다 주는가로 대접받습니다.

누구가 고독사를 했네, 몇 달간 보이지 않아서 문을따고 들어가 보니 미라가 되어있네....이땅의 수많은 목숨들이 생으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래 죽고 저래 죽고 ,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저항한 그들을 보면 참.......그들이 가기 전에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다른건 아닙니다만 삶을 포기한 이들에게는 삶이 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라도 할 수 있지만 기도도 할 수 없는 이들은 자기의 심정을 유서 한장에 호소하고는 채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삶을 마감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혹여 그런 사연이 신문에 나기라도 하면 조금 떠들다 말지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다시금 자기들의 일상으로 관심을 옮겨버립니다. 거창하게 남의 죽음을 가지고 몇일씩 고민하는게 우리네 삶에서는 사치거든요.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역시나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날, 몇 주, 때로는 몇 달씩 기도합니다. 겨우 겨우 응답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고나면, 해결의 기쁨도 잠시 얼마 있다가 바로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것은 너무나 일정해서 마치 파도와 같습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파도가 조금 뜸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이전보다 더 큰 파도가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기가 찹니다.

옛사람들은 이야기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가지의 수를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삼포세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출산율은 사상최저를 기록하고 있고 결혼을 포기한 독신자들은 남한 인구의 10%에 달하고 있습니다. 요행히 결혼한 사람들도 너무 쉽게 이혼을 합니다. 그래서 이혼율 역시 세계1위를 기록 중입니다.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사람들도 애를 낳지 않습니다. 애를 낳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거든요. 출산율 역시 밑에서 일, 이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한민족의 인구 수가 몇 년 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생성 된지 5000년 만에 생물학적인 종말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실로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 개의 민족이 사라져 가는 순간이거든요.
제가 이정도로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은 우리네 삶이, 현실적으로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일반인들은 그렇다치고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주님을 믿기 위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시간을 바칩니다. 십일조를 바칩니다. 하라 하지마라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하지마라는 것은 대개 하고 싶은 아주 재미있는 것들입니다. 하라는 것은 힘들고 하기 싫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가 성도들에게는 부과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네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재미가 없고 딱딱하며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신비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멋지고 가슴 두근거리는 신비를 세상의 낙을 포기한 보상으로 맛보아야만 합니다.

솔직히 세상의 쾌락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즉각적인 역사를 맛보는 그런 낙마저 없다면, 이건 솔직히 너무 무미건조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신비가, 하나님의 은총이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억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도망가는 행동입니다.
다윗은 지금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황급하게 성을 빠져나와서 도망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대부분의 민심이 압살롬에게 쏠렸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반란군에 비해 너무 작습니다.
무턱대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을 가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황급히 궁전을 빠져나오고 예루살렘 성을 나서서 기드론 시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는 따르는 신복들, 백성들과 함께 광야길로 행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다윗이 황망 중에 도망쳤는지를 보면
14절에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급하게 성을 빠져나온 다윗이 지금 안전한 곳에 당도한 것이 아닌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기드론 시내는 물이 철철 흘러 넘쳐서 건너기 어려운 한강이 아닙니다. 단순한 건천, 와디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홍수가 날 때나 비가 올 때는 물이 흐르지만 사막기후의 특성상 일년의 대부분은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드론 시내라고 하기 보다는 기드론 계곡이라고 부르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곳을 건넜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약간 지체는 할 수 있지만 적들의 진격을 결코 저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론 시내를 건넌 다윗의 행동은 좀 이상합니다

30절에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지금 아들의 반란군은 걸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후일을 기약하며 예루살렘성에서 희희낙낙하고 쉬고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급박하게 자기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입장에서는
언제 적군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서 자기들을 도륙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쉬지않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가야 합니다.
겨우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말 것이 아니라 요단강이라도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울면서 맨발로 걸어서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과 함께 도망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은 결코 높거나 험한 산이 아닙니다.
이 산은 해발800M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예루살렘자체가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보다 겨우 80M가 높을 뿐입니다. 네게의 야트막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이 산은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러 가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입니다.

금정산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얕고 작은 산입니다. 한마디로 나무가 조금 있는 야트막한 언덕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위로 도망가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이 산위로 도망갔다가 잡혀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유다왕국이 멸망할 때 유다의 왕시드기야가 감람산으로 도망갔다가 바벨론 군대에 잡혀서 눈이 뽑힌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더구나 머리를 풀어 눈을 가리우고 맨발로 울면서 올라간다면 이는 거의 적들 앞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내어던지는 자살행위입니다.

그런데
도데체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것일까요?
다윗은 왜 도망가지 않고 지금 이러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산마루턱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나 바쁜 중에서도 자기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울며 통회하며 겸비한 모습으로 감람산 마루턱을 향해 맨발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가 당하는 환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줄 알았기에 하나님에게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에게서 그 해답을 찾아야 됨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도움을 구하는 예배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라는 다윗이지만 이 당시에는 모든 민심은 압살롬에게 돌아갔고 , 그동안 잠복해 있던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여기 저기 불거져 나오면서 안팎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심지어는 자기의 친 아들에게까지 배신당한 처지의 다윗에게 있어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그는 바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수많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바라고 그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면 함부로 울 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나마 자기를 따르던 백성들도 두려움을느끼고 아니면 실망감을 느끼고는 압살롬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울었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까지 눈물로 발을 적시며 맨발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그의 긍휼한 손길이 자신의 위에 임하기를 바라면서
사람에게 배신당한 그에게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네가 기도할 때와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다윗의 사정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감람산 꼭대기를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그 산이 별로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 산너머 무엇이 오고 있는지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마루턱까지 올라 가기만 하면, 이렇게 겸손하게 예배하기만 하면 뭔가 일의 해결책이 생기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감람산의 마루턱은 별로 높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런 비보가 추가로 전해집니다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진짜 맥빠지게 하는 소식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 없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자비를 구하는 예배행위를 드리는 중입니다. 그러면 뭔가 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소식이 와야 그래도 기도할 맛이 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염원과는 반대되는 오히려 비극적인 소식만 들려 옵니다.

이 정도라면 포기 할만 합니다
“그만두고 빨리 말에 올라라
그리고 멀리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하자”
이래야 현명한 판단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참 미련합니다.
그는 포기하는 대신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비록 상황은 더 절망적이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여호와라는 말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돌아오면,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면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나에게 기회를 주시마 약속하신 내아버지, 내가 이제 내 죄를 회개하오니 아버지의 약속을 기억하옵소서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을 불렀다는 말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일급참모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일가는 모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들 편에 붙어버렸다는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예배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기도하다가 더 상황이 나빠졌는데도 그는 끝끝내 하나님을 버리지 못하고 포기하지 않고 감람산 마루턱까지 올라간 겁니다.
그래서 예배처소가 있는 감람산 마루턱까지 올라갑니다.

마침내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산마루턱에 당도하자 무엇이 보였습니까?
산머너 다윗을 도우기 위하여 수천의 철기병이 올라오고있는 것이 보였습니까?
아니면 엄청난 재물과 무기들이 그와 그의 백성들에게 제공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가 산마루턱에서 본 것은 바로 아렉사람 후새 한사람이었습니다
강력한 무공을 자랑하는 장수가아니라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 한 사람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동족이 아니었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 나오지만 팔레스타인 원주민이었습니다.
그가 맨발로 울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만난 도움은 후새 한사람이었고, 일급 모사인 아히도벨의 배신에 관한 비보였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회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섭섭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의심하며 낙망할 수 있습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게 인간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새에게 자기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기위해 노력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가 무어라고 기도했습니까?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한사람 후새가 자기를 맞으러 나온 것을 보고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것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집니까? 비가 오지 않는 가뭄에 하늘도 햇볓이 쨍쨍해서 도저히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은데도 내가 비를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나는 비가 올걸 믿고 우산을 챙겨서 집을 나섭니까?
지금 전쟁을 하게 되니까, 모사는 놔두고 당장 눈에 보이는 든든한 군대, 범 같은 믿음직한 장수가 필요해서 다른 것에는 눈을 감습니까?

우리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전혀 우리의 눈에 엉뚱하게 여겨지는 응답을 하셔서 ‘하나님 이게 아니예요, 빨리 응답해 주세요’라고 하나님께 다른 것을 조릅니까?
아니면 역시 그렇지뭐, 기도가 다 그렇지, 결국 우리네 일은 우리가 해야지 하며 포기합니까?

다윗은 그러고 보면 참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그렇지만 목동의 자리에서 빼어 올리셔서 왕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전장터에서 ,죽음 앞에 놓여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도움의 손길로 인하여 살아난 것을 그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거듭되는 비보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의 응답대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후새가 성으로 들어가고 난 다음 다윗에게 온 도움은 뭡니까?
16:1에 다윗의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어떻습니까?
성경에는 장황하게 물건의 내역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귀 두마리에 실을 정도의 물건이 다윗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겨우 심리적인 위로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사랑하고 아꼈던 므비보셋의 배신이라는 또다른 비보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글쎄요, 이정도라면 기도의 응답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한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후에도 다윗에게는 여러가지 환난과 어려움이 닥칩니다. 피난길에 시므이가 나와서 먼지를 뿌리며 저주를 하기도 하고... 그러나 궁극적으로 다윗의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후새로 말미암아 아히도벨의 모략이 패하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급하게 12000명의 용사를 몰아서 다윗왕을 공격하여 죽이자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군대를 더 모으고 다윗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자는 후새의 모략 때문에 무위로 돌아가서 결국 아히도벨은 자살하고 압살롬은 후새의 모략을 따르다가 상수리 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 죽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으로 다윗의 기도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응답받았습니다.

그 참담한 상황가운데서 , 자기의 아들에게 조차 배신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도중에 더 악화된 비보를 들은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말에서 내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울며 감람산 길로 올라가기 시작할 때 이미 하나님의 섭리는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한사람 후새를 기다리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큰 역사를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수천의 철기병이 주는 든든함, 산더미 같은 물자가 주는 풍족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미흡한 수준의 응답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 자기의 하나님, 언약의 여호와를 신뢰하였기에 끝까지 감람산을 걸어서 올랐고 하나씩 하나씩 언약의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는 이미 하나님을 너무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에서 하나님과의 동행함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결코 자기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도하다가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고 하나님을 의심하며 기도를 그만두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나가지는 않습니까?
‘기도가 그렇지 뭐,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야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의 능력을 의심하며 세상으로 나가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면서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입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것과 모자라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도 많습니다. 이루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들어 주셔야 할 기도의 제목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여건이 어떻게 변하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심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무 어렵습니까? 삶이 너무 팍팍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그분만이 현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풍족하고 잘 풀립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혹시라도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영원히 내 아버지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깨어나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오늘 하루의 일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집을 나서기 전 오늘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먼저 기도합시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합시다.

올 한해 기도로 시작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월 20일 주일 (샤론교회 초청설교 중에서)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오늘은 조금 독특한 관점에서 코멘트를 달아보려고 합니다. 실은, 두어번 올렸던 원고이기도 하고요. 이번 원고는 약간의 다른 버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시 지혜로운 방법 + 실천적인 행동이 함께 있을 때, 어려움이 풀려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해 내는 순간, 우리는 더욱 성장해 있을테고요.

흔히 하늘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실 다윗이니까 저렇게 담대하게 끝까지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지, 확실히 보통 사람들에게 비슷한 경우가 생긴다면, 도중에 절망으로 포기해버릴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이런 난감한 일들은 우리에게 실제로도 종종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표현하는 단어도 굉장히 많습니다. 사면초가니, 설상가상이니, 엎친데 덮친격이니, 산넘어 산이니, 믿는 도끼에 발등이니... 등등. 그리고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하지요. 열심히 했는데, 이럴수가... 라는 억울함이랄까요.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것은 이 지점에 있습니다. "나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이지요. 가령 몇 년전에, 저는 늦게나마 가고자 했던 대학에 예비합격후보 1번인 상태로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또, 누구누구는 1차 합격을 기껏 잘해놓고, 최종 문턱에서 아깝게 떨어졌더라 하는 사람도 적잖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랬을테고, 신앙심이 있는 사람은 분명 기도도 열심히 했을터인데, 결과가 이렇게 나온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합니까.

저는 이 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주 작은 믿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은 말로 풀어 쓰면 이렇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실이 힘들더라도, 지금 눈앞이 절망스러워 보일지라도, 앞이 캄캄한 비참한 기분이 될지라도, 설령 스스로가 스스로를 못났다고 공격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이 냉정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작은 믿음이고, 출발점이 되어야 겠지요. 기도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나간다면, 분명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 2013.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