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일 목사님 초청설교문 원고 2013년 1월 27일 주일 예배
다윗과 골리앗 (사무엘상17:41-49)
오늘은 제가 너무 너무 유명한 주제를 설교하려고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뭐 이정도면 설명이 아예 필요가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셋을 꼽는다면 아브라함과 요셉과 다윗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을 꼽는다면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들어 가겠지요.
그러므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우리가 적어도 예수믿는 경력 1년만 되어도 충분히 잘 아는 내용입니다. 아니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세상사람들도 다윗과 골리앗에 대해서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성경에서 나왔지만 이미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소수나 개인을 지칭하는 사회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보면 아이들을 위한 설교일 것 같기도 합니다. 설교가 쉬워야 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애들용 설교를 주일낮예배에 하다니!
거인과 아이가 싸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연극의 단골 메뉴입니다. 저도 어릴 때 다윗과 골리앗 연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다윗역도 아니고 골리앗 역도 아니고 아마 병사1,2,3이나 행인 1,2중의 한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옷입고 서 있었던 기억은 있는데 특별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저는 오늘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매우 친숙한 주제를 가지고 조금더 본문을 자세히 살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을 떠올리면 작은 소년과 거대한 거인과의 대결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인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작은 소년! 세상의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다윗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로망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싸움에서 당당히 승리하는 다윗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꿈꾸는 영웅의 모습입니다. 서양에서는 이 다윗의 조각상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특히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윗상은 오늘날도 유명합니다. 근데 대리석으로 만든 이 상은 살짝 민망한 모습이기는 합니다만.
예전에 제가 부산대학교에 다닐 때 미술대학교 건물 앞에 바로 이 다윗 상을 세워놓았습니다. 다비드상이라고 하죠. 미국사람들은 데이빗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근데 미술대학교 건물앞에 세워놓은 것은 석고상에다가 청동의 색을 칠한 겁니다. 그런데 조금 보기가 민망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다시 살펴볼 다윗과 골리앗은 이제까지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해 온 것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냥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성장한 사람입니다.
과연 다윗은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겼다고요?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행동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우리가 항상 승리하고 무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를 봐도 우리는 세상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도, 고민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다윗이 이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단순히 말하는 기는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이 이겼으므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그렇게 이야기 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에베스담밈’에 진쳤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왕 사울이 백성들을 이끌고 이에 대항하기위해 맞은편인 ‘엘라’골짜기에 진을 칩니다.
보통 쳐들어 온 쪽이 침략을 받는 쪽에 비해 힘이 셉니다. 자신이 있으니까 쳐들어 온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여기서는 약세입니다.
중간에 골짜기가 있고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양쪽 산지에 진을 치고 마주보며 맞서고 있습니다. 전면전이 일어나기는 좀 어려운 지형입니다. 중간에 골짜기가 있거든요. ‘엘라’는 ‘상수리 나무’란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골짜기는 건천을 뜻하는 ‘와디’입니다. 그러니까 비가 오면 하천이 되지만 평소에는 물이 말라버린 골짜기란 말입니다. 여하튼 양측은 산지에서 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맞서고 있습니다.
지형상 전면전이 어려워서 블레셋에서는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자기의 군대를 대표하여 상대방 군대와 싸워 승패를 결정짓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챔피온’이라고 표현했네요. 한마디로 블레셋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본문에서 주연은 누구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다윗이지요. 그리고 다윗의 상대역은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이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주인공과 거의 비슷한 비중을 가집니다. 보통 영화에서 주인공과 악당이 서로 싸웁니다. 악당은 엄청나게 힘이 세고 무시무시하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결국 주인공에게 죽지만 출연횟수는 주인공과 거의 비슷합니다. 사실 엄청나게 힘센 악당이 죽으면서 주인공의 이름을 높여주고 그리고 바로 이야기가 끝이나쟎아요.
오늘 본문에도 다윗과 골리앗이란 두 인물이 대결을 펼칩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정말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있습니다. 막연히 생각한 골리앗의 이름이 본문17장에는 딱 두 번만 나옵니다. 나머지는 ‘골리앗’이라고 부르지 않고‘블레셋사람’ 또는 ‘그 블레셋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이란 이름이 무려30번이나 나오는데 비해서 너무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에서 이름은 단순히 부르는 호칭을 넘어서 그 사람의 내면이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악당 골리앗의 이름이 겨우 두 번 언급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골리앗의 인격을 무시하고 있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는 거대한 육체와 완벽한 무장을 갖춘 챔피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두 번만 이름을 부르고 나머지는 그냥 “블레셋 사람” 또는 “그 블레세 사람”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거든요.
골리앗의 뜻은 ‘방랑자’입니다. 그는 ‘가드’사람으로서 이 가드지역은 거인족인 ‘아낙’자손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골리앗이 아낙 자손의 피를 이어받았으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골리앗의 이름은 두 번만 언급한 대신 그의 무장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의 신장, 키는 여섯 규빗 한뼘 이랍니다. 한 규빗이 보통45.6cm를 말하기 때문에 그의 키는 대략290cm이상이라는 말입니다. 4절에 골리앗의 고향하고 키를 기록한 다음 성경은 무려 7절에 걸쳐서 그의 무장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차려입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웠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주로 외모지상주의 쟎아요. 그 외모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놋투구를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습니다. 이 어린갑은 물고기 비늘처럼 쇠를 만들어서 이어붙인 갑옷입니다. 무심코 넘길 수 있는 이 부분에서 우리는 골리앗이 철기 문명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놋투구와 놋단창에다 쇠로 된 어린갑의 갑옷과 쇠로 된 창을 가진 자로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가 놋투구를 썼다고 강조하는 것은 마치 고대의 전쟁영웅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듯이 보입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우승하고 받은 부상이 바로 코린트식 청동 놋투구였거든요. 코린트는 고린도 교회할 때 바고 그 고린도를 말하는 겁니다. 마치 위대한 영웅에게는 놋투구를 씌운다는 듯이 말입니다.
골리앗의 갑옷 무게는 57kg 이었답니다. 웬만한 어른무게만큼이나 나가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그의 무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라고 기록합니다. 아마 이 시대는 철기가 막 사용되기 시작한 시대같습니다.
골리앗은 또 놋단창말고 쇠로 된 장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날의 무게가 무려 7kg이고 창자루는 베틀채같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골리앗의 앞에 따로 방패를 든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방패는 ‘친나’라고 하는 전신을 다 가려주는 방패를 말합니다. 이 방패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방패병이 따로 있어서 용사의 전신을 가리고 앞서서 걸어가는데 전투시 시야확보를 위해서 보통 사람의 눈 바로 아래까지 온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가히 완벽한 방어태세입니다. 스스로도 완벽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는데 ‘친나’를 든 방패병까지 앞세우고 나오니 누가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방패가 되시고” 할 때 바로 그 방패가 친나를 말합니다. 다윗에게 이 방패가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 방패가 여호와의 보호처럼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골리앗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의 중간에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들 중에 한명을 뽑아서 나와 싸우게 보내라 그리고 그 사람이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고 그가 지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라”고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너무 답답해서 엄청난 부상과 높은 지위, 심지어 자기의 딸까지 내걸었는데도 나설 사람이 없습니다. 지위도 좋고 공주도 좋지만 그것도 살아있고서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이 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골리앗이 한 말의 서두에 자기를 블레셋사람이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복이란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원어적 의미는 ‘노예’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가드의 ‘자유민’이지만 너희는 사울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나는 자유민으로 자발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너희는 사울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축처럼 취급됩니다. “나는 사람이고 너희는 가축이다” 이런 말입니까?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을 모욕하고 나아가서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보세요. 어차피 너희는 노예다. 사울의 노예나 블레셋의 노예나 다를게 없다. 상대도 안되는데 괜히 덤비다가 죽지 말고 차라리 노예로라도 목숨을 부지해라. 뭐, 이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실제로는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다 같이 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노예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화를 내게 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용합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소리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상징이 바로 다비드의 별입니다. 그것만 봐도 이스라엘사람들이 다윗을 얼마나 위대하게 생각하는지가 답이 나옵니다.
그래요, 그런데 처음부터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어떤 불가능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입니다.
처음부터 그냥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성장한 사람입니다.
골리앗이 거대한 놋투구와 놋으로 된 갑옷 그리고 단창과 쇠로된 거대한 창을 가지고 자기의 앞에 친나를 든 방패병을 앞세운 것과 달리 다윗의 무장은 형편없었습니다.
더구나 다윗의 나이는 골리앗과 싸울 때 얼마였을까요? 그는 8형제중 막내였는데 세명의 형만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당시 20세가 넘은 남자는 의무적으로 전쟁에 참여해야 했으므로 다윗위에 적어도4명은 20세가 안되었다는 말입니다. 일년에 한명씩 낳았다면 다윗의 나이는 글쎄 한 15에서16세 정도? 만으로 15세면 중3에서 고1정도? 다윗은 아직 채 자라지 못했습니다.
군대에 갈 나이가 되지 않은 다윗은 형들을 위해 위문품을 가지고 전장터에 나갑니다. 물론 싸우러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이 가지고 간 것은 단순 위문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가지고 간 것이 식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나라에서 양식을 지급받지 못하고 자기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전쟁을 친 것으로 나옵니다.
즉 자급자족해야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주 원시적인 상태이고 나라의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세련된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자랑하던 블레셋에 비해 열세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에서 철검을 가진 사람은 왕과 태자 딱 두사람뿐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왕과 왕자 압살롬뿐입니다. 도망칠 때 다윗은 검을 구할 수 없어서 성막에서 보관하던 골리앗의 검을 가져가쟎아요. 다른이들은 글쎄요, 청동기나 아니면 몽둥이, 나무창, 물매같은 걸로 싸우겠지요.
골리앗이란 거인 때문이 아니라도 이스라엘은 분명히 약세입니다. 게다가 블레셋에서 나온 골리앗은 지금 40일이나 연속해서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40은 보통 어떤 일이 극에 달한 상태를 나타낸답니다. 40일간의 금식기도, 40년간의 식민통치, 40년의 광야 생활 등등,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아무 대응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의 등장이지요.
다윗은 형들에게 양식과 위문품을 주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욕하고 여호와를 모욕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는 화를 내며 마주 싸워야 되는데 사람들은 두려워서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군대에 복무하고 있는 다윗의 큰형 엘리압은 다윗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화를 내는 거지요. 여기에 싸움 구경하러 왔느냐?
네가 치던 양은 어찌하고 여기에 왔느냐?
참나, 엘리압은 지금 골리앗에게 화를 내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두려움을 가지고 만만한 자기 동생에게만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까지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엘리압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다윗을 상당히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이 전쟁터에 오니까 걱정스러워서 화를 내는게 아니라 원래 다윗을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사무엘이 엘리압에게 기름을 붓지 않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다윗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윗에게 “양은 어쩌고 왔느냐?”고 묻지 않고 “몇 양”은 이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즉 너는 양치기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능력이 안되서 겨우 몇 마리의 양만을 치는 보잘 것 없는 목동이라는 말이지요.
엘리압은 사무엘이 자기가 아니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으려는 것을 보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압이 보기에 다윗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꼬맹이였거든요. “하는 일도 겨우 몇 마리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한 아이에게 왕을 삼기위한 기름을 붓다니, 아마 사무엘이 맛이 갔나봐!”이게 솔직한 엘리압의 생각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출전을 허락해 달라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서 다윗에게 이야기 합니다.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소년”과 “어려서부터”는 똑같은 말입니다. “너는 아직 어리다. 그리고 골리앗은 너만 할 때 부터도 싸움의 전문가였다. 그러니 너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씨가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는 정도일까요? 여하튼 다윗은 그 정도로 형편없다고 여겨졌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허락을 얻고 골리앗과 싸우기위해 전쟁터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골리앗이 요청한 것은 대전사 전투입니다. 즉 양군의 대표를 뽑아서 이기는 쪽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걸로 하고 지는 쪽의 군대는 모두 종이 되자고 하는 조건입니다. 즉 다윗하나 죽는 걸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다윗을 이스라엘 군대의 대표로 내보낸 사울도 어지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의 결과를 잘 압니다. 다윗의 승리, 골리앗의 죽음
이 일로 인해 다윗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고 일약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우리가 너무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제 설교의 요지가 나옵니다.
과연 다윗은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응, 그것도 몰라, 당연히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했잖아”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순진한 분은 안계시겠지요.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행동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우리가 항상 승리하고 우리가 무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를 봐도 우리는 세상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걱정이 끊일날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도 많고 , 고민도 많고, 산넘어 산입니다.
바다에서 보면 파도가 계속해서 철썩 철썩 몰려옵니다. 그런데 약간 뜸할때가 있다면 그 다음에는 어김없이 이전보다 더 큰 파도가 몰려옵니다. 애들이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습니다. 보통은 파도가 치는 부분보다 약간 높이 쌓습니다. 그래서 파도가 철썩 철썩 밀려올 때 든든한 방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번 큰 파도가 몰려오면 모래성을 뒤덮고 그러면 그만 모래성은 허물어져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열심해 해도 세상이 주는 시련을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일 하나님과 함께해서 승리했다고 한다면 성도들에게 세상은 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세상은 우리의 밥이 아닙니다.
또 악인이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면 세상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악당들의 성공신화는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 너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자세하게 성경을 살펴봅시다.
48,49절에"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로 걸어 옵니다. 아마 앞에 친나를 앞세운 방패병의 보호를 받기위해 천천히 걸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 다가와서 단창을 날릴 겁니다.
한편 다윗은 골리앗 쪽으로 빨리 달려갑니다. 그냥 빨리 달려간게 아니고 달리면서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서 물매에 재어서는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던집니다. 돌을 발사한 것입니다. 이마를 맞고 골리앗이 쓰러집니다.
돌맹이를 맞아서 사람이 치명적으로 부상을 입으려면 투구와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에 맞아야 합니다. 게다가 급소부위는 정해져 있습니다. 골리앗은 지금 놋투구와 방패에 의해서 이마와 눈 정도만 노출되어 있지 나머지는 모두 보호받고 있습니다. 거기에 전신을 가리는 거대한 방패까지. 여기에 돌맹이가 맞아봐야 충격 정도지 상처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 다 움직입니다. 특히 다윗은 아주 빨리 움직입니다. 왜냐면 느리게 움직이면 골리앗이 던질 단창에 맞을 수 있거든요. 이 말은 물매로 맞히기가 매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약점인 이마에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사무엘상17장은 무려 58절이나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장면에 할말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국민적인 영웅의 무용담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년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290cm에 달하는 거인 장군을 쓰러뜨리는 소년 용사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한폭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용담이면 싸우는 과정이 묘사가 많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싸우는 과정은 겨우 단 두절입니다. 나머지는 다 배경화면입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게도 배경화면을 설명하는데 무려56절이나 사용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기름부음받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각이 있습니다. 왕은 백성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선택받은 자입니다.
그는 골리앗과 싸우기위해 엘라 계곡으로 가면서 시내바닥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왜 물매를 손에 들고 돌 다섯개만 골랐을까요?
그것은 그가 물매를 날리는데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 날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돌맹이를 다섯 개만 골랐지요.
사실 물매는 생활무기입니다. 전장터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들이 양을 몰 때 사용합니다. 즉 양무리 중에서 이탈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양들의 옆으로 물맷돌을 날려서 양들이 진로를 바꾸고 떼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도구로 잘 사용됩니다. 뿐만 아니라 양떼를 칠 때에 사자나 곰, 여우같은 것이 나타나면 물맷돌을 던져서 이를 물리치는데 사용합니다.
35절에 보세요.“내가 따라가서 그 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괴력입니다. 이런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갈려고 했고, 어떤 형식으로든 왕이 다윗의 이런 실력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군의 대표로 다윗을 보낸 것입니다. 그것도 기분이 좋아서 자기의 갑옷과 무기까지 하사하면서요.
다윗은 종종 어린 소년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스라엘 평균보다 어깨 하나가 더 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갑옷은 보통 이스라엘 사람이 입어도 매우 컸을 겁니다. 그런데도 사울왕이 자기의 갑옷과 투구를 내려 준 이유는 그 갑옷이 다윗에게 맞을 것 같아서입니다. 즉 다윗의 덩치 역시 만만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무리 다윗이 커도 골리앗과 비견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골리앗은 거인이니까요. 그래도 보통의 이스라엘군인들 보다는 확실히 컸기 때문에 사울이 자기의 갑옷을 내린겁니다. 이에 대해서 다윗은 갑옷과 투구가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지 크다거나 헐렁하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만일 소년이 말로만 자기가 사자와 곰을 때려죽였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당연히 안믿지요. 보기에도 근육이 멋지게 울룩불룩하게 잘 짜여졌기 때문에 다윗의 말을 믿는 겁니다. 설마 무협지처럼 기생오래비처럼 허여멀숙하고 호리낭창하게 생겼는데 내공의 힘으로 괴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척 보기에도 곰과 사자와 싸울 정도의 용사로 보일 몸을 소유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의 말을 믿기는커녕 오히려 왕을 능욕했다고 끌려 나가서 죽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다윗을 왕에게 소개한 이도 다윗의 실력이 확인이 되니까 그를 사울왕에게로 데리고 간 겁니다.
보십시오. 다윗은 맨손으로 사자와 곰을 쳐 죽이는 괴력의 소유자였고 양을 물고 도망가는 사자와 곰을 물매로 쳐 죽일 만큼의 물매실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표적인 골리앗의 이마를 자기도 빠르게 움직이면서 맞힌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윗은 골리앗의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대표로 싸울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가 더해진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의 손에 여호와의 은혜가 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얼마든지 철부지 아이의 손으로도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오랜기간 동안 물매를 돌리며 연습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맡은 몇 마리 양떼를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도 내어놓고 싸울 수 있는 용기와 힘과 실력을 겸비한 그는 골리앗 앞에 서기 전에 이미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해야 할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고 생각하고 평소에 자기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완성된 영웅을 꿈꿉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의분으로 세상에 나가서 기적적인 성공을 이뤄내는 영웅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 영웅은요, 미안하지만 일조일석에 그냥 이뤄진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아 왔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나를 건지시리라는 체험적 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 평소에 하나님을 위하여 나설 실력을 쌓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용사로 세상을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지금 당장 생각을 중단하고 먼저 노력하십시오. 실력을 쌓으십시오.
그런 연후에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십시오.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 한방을 위해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빈들에서 그는 수많은 물맷돌 날리기 연습을 한 것입니다. 그 물맷돌에 힘을 더하기위해 근육을 늘리고 힘을 배양하는 훈련을 한 겁니다. 그는 수많은 노력과 오랜 세월의 기다림 끝에 멋진 영웅으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들의 생활태도가 이와 같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실력을 기르고 있어야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잡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내가 큰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이가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아버지께서 기회를 언젠가는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회가 왔을 때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그때를 대비해서 실력을 기르십시오.
하나님의 싸움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는 자각이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세우신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빈들에서 수없이 물맷돌을 날렸던 다윗은 결국 그 물맷돌로 세상을 이깁니다.
오늘 우리 역시 세상이 알아 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적인 싸움의 주인공으로 서기위해 묵묵히 물맷돌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그 한방의 물맷돌을 성공시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사람들 앞에서 성실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보호자로 세우실 때 갈고 닦은 실력으로 세상의 거대한 악과 불의를 물리치며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월 27일 주일 (샤론교회 초청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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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그저 솔직하게 덧붙이고 싶은 밤입니다. 저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 같은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간다면 가는",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요셉은 일찍이 아버지 심부름이라는 작은 일을 맡았을 때, 끝까지 해냅니다. 다윗도 형들을 위한 심부름을 충실히 해낼 뿐만 아니라, 평소에 양을 칠 때 조차도 성실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따랐습니다. 오늘날은 이상하리만큼 다윗과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과격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이 흡사 골리앗 같지는 않은지 되물어 보고 싶을 정도 입니다. 너무나 "허세"병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쉽게 깨고, 자신의 입장부터 생각하고, 손해보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가 실종되었습니다. 내가 주인이다, 내가 왕이다 하는 의식. 게다가 나는 자유민이고, 너희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차등적인 시선까지, 오늘날은 정녕 골리앗들의 세상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다윗처럼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미 비슷한 버전으로 몇 번 올린 이 설교가 어쩐지 매우 불편하게 들리는 밤이었습니다. 그 불편함을 차분하게 살펴보면, 역시 이 설교는 우리에게 다윗처럼 각성하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욱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설교란 어쩌면 이렇게 불편한 설교가 아닐까요. 안주하기가 불편해서 우리가 자리를 박차고, 더 힘차게 살아간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우리의 삶을 크게 응원하며. / 2013.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