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2월3일/잃어버린 땅 거라샤 2 (샤론교회 초청설교)/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2. 6. 16:22

홍종일 목사님 초청설교문 원고 2013년 2월 3일 주일 예배

잃어버린 땅 거라사 (마가복음5:1-)

한때 영적인 전쟁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좀 뜸한 것 같지만 한때는 이 말의 파급력이 굉장했었습니다. 이 말이 유행하든 안하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도 우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둘러싼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음주는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날입니다. 저는 오늘까지만 설교를 하고 다음주는 원로목사님께서 하실 것인데 제가 샤론교회에서 떠나기 전에 제사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사하면 아무래도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자연적으로 영적인 전투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오늘 거라사 인의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거라사 지경은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호수를 건넌 곳으로 예수님 당시에는 데가볼리지역으로 불렸습니다. 데가볼리(데카 폴리스)는 ‘열 개의 도시’란 말이고 ‘폴리스’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곳입니다.  알렉산더의 정복 이후부터 그리스의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하스모니안왕조의 영토이기도 했지만 예수님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돼지떼가 나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먹지 않기 때문에 성밖에서 돼지를 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이야 말로 사탄과 하나님간의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누구의 영토냐?

당연히 그리스 도시답게 성곽과 대리석 회랑과 중심부의 거대한 광장 그리고 그 가운데 거대한 그리스의 신상이 서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곳은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영토였고 하나님을 섬기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잃어버린 땅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도시들은 도시마다 수호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호신상을 광장 중앙에 세워둡니다. 마치 “이곳은 나의 영토다”하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에서 하신 사역의 주 내용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한사람의 몸에 있던 귀신을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거라사로 들어가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와서 배에서 내리자 마자 멀리서 무덤사이에서 귀신들린 자가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에게 청합니다.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의 이름은 ‘군대’인데 이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애걸합니다. 그리고는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들어간 돼지떼가 즉시로 비탈로 내리달아 물에 빠져 몰사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거라사의 성문을 넘어서지 못하고 다시금 바다를 건너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1.귀신과 무덤의 상관관계
우리는 이 성경본문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많은 의문점을 가지게 됩니다.
처음 의문점은 왜 하필이면 귀신이 무덤가운데 사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 귀신이 무덤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인식을 줍니다.

귀신과 무덤?
마치 우리나라의 납량특집을 연상시킵니다. 무덤이 열리면서 귀신이 땅에서 올라오고..........역시 우리나라나 근동이나 사람들의 생각은 똑 같습니까?

우리나라의 오랜 관념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 땅에서 남아 귀신이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이나 공동묘지는 뭔가 무시무시한 느낌을 줍니다. 망자의 집 무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설날에 지내는 차례 역시 여기서 출발합니다. 조상신을 섬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회는 이러한 사상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귀신은 단지 마귀의 졸개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죽은자의 영혼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리고 귀신은 ‘미혹의 영’이라서 죽은이의 영혼으로 위장했을 뿐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우리를 속이기위해서 무덤주위에서 배회한 것일 뿐 전혀 죽은 사람의 영혼과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자말자 곧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사이에서 나왔다고 말합니까?

그런데 원문 상으로 보면 몇가지 다른 점이 눈에 뜨입니다.
무언고하니 바로 본문의 ‘무덤 사이’란 말이 ‘그 무덤들 안에서’로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한결 이해하기 편합니다.

왜냐면 살아있는 사람이 무덤안에 사는건 이상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우리나라의 무덤과 팔레스틴의 무덤은 그 구조가 다릅니다.

그 지방의 무덤은 암석을 옆으로 파서 만든 일종의 굴의 형태로 그 안에 시체를 넣고 문 대신 돌로 굴 입구를 막아 놓는 형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연히 빈무덤은 집으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극빈자들이나 핍박받는 자들의 거처로 이용되기도 했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일반인들과 더불어 동네에서 살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교외의 석굴에서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즉 마을에 있는 집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쫓겨서 마을 밖의 빈무덤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비록 귀신들린 자라도 결국은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든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은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순한 거주지의 문제이지 귀신과 무덤과는 전혀 이상한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 귀신도 죽는가?
첫 번째 의문을 풀고나서 다시금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정말 진짜 너무너무 이상한 대목을 만납니다.
귀신이 자기가 사람에게서 나와서는 돼지떼에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애걸하는 장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셨고 이제 즉시로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떼에게 들어가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귀신들이 들어가자마자 바로 거의 이천마리 되는 떼가 바다로 향하여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답니다. 기껏 들어간 돼지떼를 왜 죽이는 거지요?

아니 귀신이 설마 자살하려고? 이 세상에서 떠도는 영혼이 너무 너무 지겨워서 저승으로 가려고 돼지떼를 물속으로 몰아간 것입니까? 도데체 귀신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겠고, 이게 뭘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성경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 대한 궁금증이 풀립니다.
본문의 병행기사인 마태복음8:32에 보면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내리달아”와 “몰사하거늘”입니다. 한글로는 구분이 안되지만 그리스어로는 “내리달아”란 단어는 단수로 “몰사하거늘”이란 단어는 복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어에는 단어 자체에 단수와 복수를 알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나의 문장에서 단수와 복수가 같이 사용된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어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단수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단수지 복수로 변하지 않습니다. 즉 돼지들이 비탈을 내리달려 갈때는 단수였는데 죽어서 시체가 물에 둥둥떴을  때는 복수가 되었습니다.

이상합니다. 2000마리의 돼지떼가 ‘내리달아’ 가니까 분명히 복수입니다. 돼지들이 여러마리 쟎아요? 그런데 왜 마태는 이걸 단수로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돼지떼가 비록 2000마리였지만 마태는 귀신이 하나의 집합체로 돼지떼에게 들어간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군대 귀신이 들렸지만 귀신은 한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군대 귀신”을 이야기할 때 쓰인 ‘군대’는 ‘레기온’이라고 합니다.

이 레기온은 로마군단을 말합니다. 약6000명의 군사로 이루어진 군대가 바로 레기온이고 로마군대의 최고단위입니다. 즉 로마 군대는 군단을 주축으로 하고 1군단부터 번호를 매깁니다. 제8군단이란 영화도 있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영국을 방어하는 군대라고 하는데.......이것은 귀신의 숫자가 수천을 헤아릴 만큼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야기 하고 있는 귀신은 어쩌면 귀신들의 우두머리 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2000마리의 돼지떼로 나뉘었지만 귀신을 하나의 집합체로 본 것입니다. 한사람의 몸속에서 나온 귀신이므로. 그래서 단수로 기록합니다. 아니라면 그 2000마리의 돼지떼에게 들어간 귀신들이 한 개의 군단을 이루므로 단수로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수로 볼 수 있도록 한 개의 군대처럼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고 난 다음, 돼지떼들이 몰사하고 난 다음에는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미 귀신이 돼지떼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00마리의 돼지떼들이 죽어서 시체가 되어 있는 모습, 즉 복수로 기록한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귀신들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돼지떼들을 죽이기위해 돼지떼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돼지떼도 짐승이므로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헤엄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순간에 죽어버린 것은 돼지떼 속에 들어있는 귀신들이 물속 깊숙히 돼지를 몰고 가서 돼지가 숨이 막혀 죽고 나서야 비로소 돼지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혹시라도 돼지들을 사람들이 건질까봐서 물속 깊숙이 몰아 넣어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죽은 시체가 되자 귀신들은 돼지 떼에게서 나옵니다.

정말 이상한 귀신들이지요. ‘군대 귀신’이라고 불릴 만큼 수도 많고 강력한 귀신이 겨우 한사람의 몸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도 이상하고 또 금방 죽어서 쓸모없어질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 것도 이상합니다. 희한한 귀신들입니다.

3.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당연히 귀신들렸던 자는 나았습니다. 귀신이 나왔으니까. 그런데 대신에 2000마리의 돼지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그 돼지떼는 귀신들린 자의 재산도 아니고, 그가 치고 있던 돼지도 아니고 공연히 근처에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귀신들렸던 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무고한(?) 돼지떼입니다.

한사람을 고치기 위해 2000마리의 무고한 돼지떼를 희생시킨 주님의 처사도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돼지2000마리면 돈이 얼맙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귀신들과 주님의 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뇌싸움? 아니면 영적인 전쟁?

우선적으로 예수님은 한사람의 영혼이 돼지 2000마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의 재산도 아니고 전혀 귀신들린 자와는 상관없는 돼지떼지만 재산이 결코 한사람의 영혼보다는 귀하지 않다는 예수님 자신의 명제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쟎아요. 그걸 실천한데 불과합니다. 음,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는 됩니다. 조금 심한 면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좋습니다.

4.NO,내 목숨만 천하보다 귀하다
그럼 귀신은 왜 오래 사용하지 않을 돼지떼의 몸을 필요로 했을까요? 그것은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돼지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역시 귀신입니까? 악마의 생각은 항상 악합니까?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악마는, 사탄은 훨씬 더 머리가 좋습니다. 그리고 생각이 깊습니다.
악마 역시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명제를 가지고 이렇게 요구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얼핏 듣게 되면 참 좋은말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따지고 보면 전혀 좋은 말이 아닙니다. 한 생명을 구하기위해서는 엄청난 재물의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아주 위험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자기의 목숨다음으로 소중히 여기는 인간들에게 엄청난 재물의 손실은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왜 내 귀한 돈을 저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에 써야 되지? 나의 목숨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 좋습니다. 내 가족의 목숨을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 좋습니다. 친척, 친구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왜 이웃을 위해 돈을 써야 하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돈을 써야 합니까? 나는 절대로 동의하지 못합니다.
뭐를요? 예수님의 말을요.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을요.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내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래요, 이래야 말이 되지요.
사탄은 예수님의 명제에 도전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멋있지만 절대로 아니야, 잘못하면 너희의 재산이 다 날라가? 그러니 계속해서 나를 믿는게 좋을걸. 이게 지금 사탄이 하고 있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저 양반 따라다니다간 인생 종치겠다”는 생각이 확 듭니까?
사탄은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에게 돼지떼에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5.거절당한 예수님
돼지떼가 몰사하는 것을 본 돼지치기들은 놀라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14절에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읍내는 헬라어로 폴리스입니다. 보통은 성벽을 갖춘 그리스의 도시. 촌은 거라사 인근의 마을들을 말합니다.

일단 예수님은 아직 거라사 성문을 넘지 못한 상태입니다. 배에서 내리자 마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성내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 2000마리의 돼지떼는 어떤 돼지일까요?

솔직히 대도시 인근에서 2000마리의 돼지떼를 한 사람이 소유하기는 좀 많은 것 같습니다.  거라사는 베뢰아 지역의 수도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도청소재지 정도 되겠네요. 그래요. 여기 돼지는 거라사 성내의 사람들이 돼지치기들을 고용하여 풀밭에서 돌보게한 돼지들입니다. 주인이 여러명입니다.

이렇게 치던 돼지떼가 몰사하자 돼지치기들은 놀라서 성안으로 들어가서 주인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아마 삽시간에 돼지몰살사건의 소문이 온 성내에 퍼졌을 것입니다. 이제 돼지 주인들하고 도시의 유력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현장으로 몰려나왔습니다. 아마 돼지치기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재산이 없어진 소식을 듣고는 놀라서 달려왔을 것입니다.

와서 보니 귀신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거라사 사람들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자가 나은 것을 기뻐하거나 축사의 놀라운 이적에 놀란 것이 아니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솔직히 나은 사람이 내 가족도 아니고 내 친구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나는 내가 손해본 재물이 아까울 뿐입니다.

이 사실을 본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여기 두렵다는 말은 신적수동태의 일종입니다. 즉 재산상의 손실 때문에 두려워한 것은 아니고 신이 행한 일과 그 힘에 대한 경외감으로 두려워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적 두려움은 거라사인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배척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재물을 주는 풍요의 신이 아니거든요.
한생명 때문에 2000마리의 돼지를 죽여버리는 신이거든요. 그래서 두렵습니다.

16절에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돼지 치던 자들이 일의 모든 사정을 다 사람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돼지치기들은 자신들이 치던 돼지가 죽었으므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책임을 모면하기위해 모든 책임을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당연히 좋은 이야기를 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거라사에서 떠나기를 간구합니다. 원문에는 “그 지경” 대신에 “그들의 지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라사 지역이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들의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우두머리도 그랬습니다. 자기들을 이 지경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기지 않는 이상한 신의 사자가 와서 엄청난 이적과 손실을 보이는 것에 놀랐습니다. 혹여라도 예수님이 거라사 성내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낫게 한답시고 재산상의 손실을 계속해서 입힐지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돼지 2000마리도 아깝지만 그가 거대한 이적을 행하는 신인이므로 그들은 두려워서 돼지값을 물어내라는 말도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지역에서 제발 떠나 주십시오” 귀신은 그 지역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지역에서 귀신들을 내몰고 영적으로 거라사를 회복하기를 원하셔서 온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지역에서 쫓겨난 것은 이방의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나요? 아니요 , 오히려 더 놀라운 신적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거부당한 것입니다.

6.잃어버린 땅 거라사
사실 사탄은 이걸 노린 겁니다. “이 거라사가 이전에는 하나님을 섬기던 도시였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엄연히 나를 섬기는 나의 지역이다. 그런데 왜 아직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나를 나가게 하려 하느냐?”
거라사에는 그리스의 온갖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도시들마다 섬기는 수호신의 신상이 도시의 중심 광장에 굉장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봐라, 여기가 나의 도시라는 사실이 저기 보이는 거대한 신상으로도 증명되지 않느냐, 그러니 여기는 나의 도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거라사에 들어가시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도시가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머리를 쓴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당신이 말했지요. 그러면 이제 그것을 증명해 보이십시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거라사로 들어가시기 위해 배에서 나오시매 사탄의 세력은 무덤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요? 한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거라사를 지키기 위해서지요.
돼지떼에게 귀신이 들어가면 그 돼지떼가 죽고 당연히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주님의 복음사역이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자신의 말을 실천해 보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세운 규례를 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넘어지게 하는자, 거짓말 장이, 그리고 참소자라고 부릅니다. 말을 이리저리 가져다 붙이고 부풀려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쟤가 이런저런 나쁜 일을 했어요”

만일 주님이 사탄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사탄은 뭐라고 했을까요? “돼지 2000마리가 사람의 영혼보다 귀합니까? 당신이 한 말은 모두 거짓입니까? ”이렇게 물어 보겠지요. 주님은 자기의 말을 지키기 위해 ‘거라사’ 로의 입성이 어려울 것을 아시고도 차마 거절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거라사 성문을 넘지도 못하고 그렇게 어렵게 도착하신 거라사 땅에서 단 한영혼 만을 구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것입니다. 주님이 거라사에 도착하기위해 제자들은 밤새 파도와 싸웠고 난파의 위험까지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한사람의 영혼을 구하기위해서 한도시를 포기한다는 건 솔직히 말이 안됩니다. 영혼들끼리도 귀하고 덜 귀하고의 차별이 있을까요? 한사람을 온전케 하기위해 거라사 성 전체를 포기한 주님은 과연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7.다시 한사람이 중요하다.
이제 주님은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땅 거라사를 해방시키지 못하고 다시금 배를 타고 되돌아 가야합니다. 그때 귀신들렸던 자가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의 요청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네 친속에게 고하라” 뭘 고하라고요?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고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거라사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은 귀신들렸다가 온전해 진 사람을 남기셔서 그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거라사인이 거라사의 복음화를 책임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거라사 지역 복음화 추진위원장’을 임명하신 것이네요.

사실 이 도시 거라사는 왕의 대로상에 위치한 중동지역의 교통의 요지로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에는 매우 적합한 지역입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이 산지사방으로 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의 사명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를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후에 결국 기독교 지역이 됩니다. 거라사에서는 거대한 그리스의 신상 말고도 비잔틴시대의 교회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라사 지역을 둘러싼 영적인 전투를 봅니다. 한때 하나님을 섬기던 이 지역은 사탄의 점령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도 , 주민들도 주님이 이 지역에 들어오셔서 복음 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섬기는 지역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홀로 남아서 주님의 사명을 준행하게 됩니다.

과연 한 영혼의 가치가 한 개의 도시, 한지방보다 더 클 수 있을까요? 귀신들림으로부터 고침 받은 그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망극한 것이겠지만 2000마리의 돼지떼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거라사 사람들은 주님의 영적인 능력을 목도하고는 그를  두려워합니다. 그 지경에서 나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분은 자기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자기들을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봅시다. ‘잃어버린 땅 거라사’
제가 단순히 거라사가 이스라엘이 빼앗긴 영토라서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이스라엘 자체도 로마의 식민지인데 빼앗기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부 로마땅인데. 제가 말한 것은 영적으로 잃어버린 곳이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곳에 헬라화한 사람들이 살고 도시의 중앙에는 거대한 신전들이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곳을 영적으로 잃어버린 곳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곳을 다시금 회복하시기를 원했지만 결국 한사람을 구원하고자 그 성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안에서 아직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어서 설에 차례를 고집합니까? 그런 집안의 며느리된 죄로 제사에 참예해야 합니까?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의 가족 친지에게로 가서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큰일을 하셨는지를 고하라. 그래서 너의 집안에 하나님의 도를 전파하라.

다음주는 설입니다. 중국인들은 이때를 춘절이라고 합니다. 아마 중국사람들은 음력1월부터 봄이 시작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원래 설은 태양신을 제사하던 날입니다. 추석이 달신을 제사하는 날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설이 봄맞이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태양신을 섬기는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태양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대신 우리는 설과 추석에 제사를 지냅니다. 차례라고 하지요

제가 말을 간단하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제사는 조상숭배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아니라 우상숭배이며 사탄숭배의 의식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조상님들은 결코 죽고 난 다음에 이땅에 남아서 귀신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저세상으로 갔고 천국과 지옥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전통적 정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영혼을 끌고 가는 저승사자와 염라부의 재판에 따라 천당과 지옥으로 나뉜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러면 솔직히 저승에 간 우리 조상들의 영혼이 제사음식을 먹으러 이승으로 온다는 말입니까? 마치 군대에서 휴가를 주듯이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제사가 없는 다른 나라의 귀신들하고의 차별은 어쩝니까? 누구 귀신은 지옥에서 열심히 고통받고 있는데 누구는 제삿밥먹는다고 이승으로 휴가를 간다면 이게 과연 말이 됩니까?

또 하나 제사는 결코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원래 주자가례라고 해서 남송시대 주자, 주희의 집안에서 행해지던 예식입니다. 이것이 고려말에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17세기까지는 우리나라의 양반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림파라고 하는 일부 사대부들만 집안에서 행했지요. 많은 양반들이 주자가례를 잘 몰랐고 그래서 책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제사는 언제 대중적으로 퍼졌을까요? 놀랍게도 제사가 대중화 된 것은 19세기 후반입니다. 조선이 멸망하기 직전에야 제사가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제사는 양반만이 지내는 것이거든요.

제사를 지낼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사당에서 조상의 신위를 꺼집어 내는 것입니다. 평민들이 사당이 어딨습니까? 그리고 제사의식중에 헌다라는게 있습니다. 차를 바친다. 그래서 제사의 이름이 차례쟎아요. 차를 드리는 의식이란 말입니다. 즉 조상에게 이러저러한 음식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차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제사 지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헌다라고 해서 우리 제사에서 차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이때는 밥에 다가 물을 말아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입니까?

조선에서 차를 제대로 마시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차는 엄청나게 귀한 물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예식의 이름이 헌다, 차를 바친다이지만 사람들은 차 대신에 숭늉을 드린 것이지요. 원래 주희가 중국 복건성의 무이산에서 차를 마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사람이 무지하게 차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헌다가 있고 차례가 된 겁니다. 한국 사람하고는 상관없는 중국 사람의 예식이고 그것도 조선이 멸망할 때가 거의 되어서야 비로소 민간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왜 조선말에 퍼졌을까요?
제사가 양반만 드리는 거니까요. 양반이 되고 싶었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두가진데 족보하고 제사입니다. 족보는 사실 엄청나게 돈이 많이 드는 것입니다. 대량으로 찍어 낼 수 없는 책을 일일이 손으로 가계도를 그려넣고 조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양반인양 하며 흉내를 낸게 바로 제사입니다.

그런데 양반이 아니면 제사를 지낼 수 없는데 조선말기에 1896년 갑오경장이 일어나면서 양반과 상민의 차별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자기네가 양반이라고 우기기위해 너도 나도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제사의 기원이나 유래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고 그냥 어깨너머 본대로 지내는 겁니다. 뭐 툭하면 홍동백서나 찾고..........

어때요?
오늘날에도 가장 널리 쓰이는 제사의식의 책이 바로 이때부터 나옵니다. 왜냐면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르는데 수요는 많기 때문에 책을 간행할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심지어 사례증보편람이란 가장 인기있는 책은 1900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대중에게 소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제사는 결코 조상대대로의 유구한 전통을 지닌 미풍양속이 아닙니다.

양반이 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탐욕이 부채질한 추악한 인간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제사에 고시례라고 있습니다. 제사 음식을 조금 떼어서 길거리나 집앞에 놔두는 거지요. 왜 그럴까요?
제사가 없는 떠돌이 귀신이 먹는다고요? 천만에 말씀 . 고시례는 원래 불을 발명한 고조선의 고시장군을 기리기위해 행해진 것입니다.

돌도끼로 사냥을 하던 고시장군이 돌도끼를 던졌는데 이게 바위에 맞아서 불이 번쩍이게 된 것을 보고 부싯돌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지요. 이걸 나중에 부소라는 고조선의 왕자가 개량을 하고 부싯돌이라고 한 겁니다. 즉 고시례는 귀신하고 전혀 상관이 없이 단순히 불을 쉽게 이용하게 해 준 고시장군을 기리는 예인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제사는 정말 짬뽕입니다. 뒤죽박죽이지요.

원래 제사를 지내는 목적이 조상신들의 가호로 후손들이 복을 받기위해서입니다. 그런데요 안타깝게도 전국적으로 제사가 퍼지자말자 이 나라를 멸망하고 맙니다. 조상신들이 후손들을 위해준다고 하는 제사가 아무런 효험은 고사하고 오히려 악몽이 된 겁니다. 지금도 제사지내다가 이혼하는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설마 제사를 지내주어서 너무 고맙다. 너 이제 이혼해라 이렇게 이야기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설과 추석에 모인 친척들이나 가족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귀신에게 전국적으로 경배하는 제사를 폐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땅은 이 한반도는 이제 귀신의 땅이 아니라 사탄의 영역이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영적인 전투는 그 옛날 거라사에서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이콘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들이 사탄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이며 사탄에게 승리를 주는 행위입니다.

이제 주님은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여기에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가족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하게 하셨습니다. 이번 설에 그리운 가족들과 친척들을 만납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그런 놀라운 일들을 감당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2월 3일 주일 (샤론교회 초청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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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작년에 올렸던 거라샤 설교의 설날 버전 입니다. 홍 목사님은 설날과 추석 등 제사에 관해서는 일관되게 반대하고 계시니까요. 저로서는 이제 꽤 익숙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역시 한 사람의 중요성이고, 한 인생의 중요성이겠지요. 최근 본 영화에서 아주 매력적인 비유가 있어서 덧붙이면 좋겠네요. 자, 우리가 죽어서 천국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입구에서 두 가지의 질문을 받습니다. 인생을 기쁘게 살았는가? 저라면 이 정도 질문쯤이야 물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역시 산다는 것은 괴로움 투성이지만, 기쁜 일도 충분히 있으니까요.

 두 번째 질문은 그런데 갑자기 이렇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는가? 저는 이 질문 앞에서 지금까지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내 기쁨과 즐거움을 채울 줄 알았지만, 다른 사람의 기쁨은 생각도 못해볼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합니다.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신앙에서 정말 중요한 게 있다면, 나의 기쁨만큼 타인의 기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가 않는데, 악마는 똑똑하고 현명하다, 그는 나이 들었기 때문이다 라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즉, 악마는 노련합니다. 유혹의 기술도 언제나 매력적이고, 우리의 약점을 잘 파고듭니다.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이렇게 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즐거움과 기쁨에 갇혀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마다 이 거라샤 이야기를 기억해보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진정 다른 사람의 기쁨에 전혀 무관심하게 살아왔다면, 천국의 문 앞에 서서 우리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날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을 소중하게, 이웃에게 친절하게, 우리가 가장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