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2월10일/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마가복음9:1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2. 12. 22:21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2월 10일 주일 예배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가9:14-)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이튿날 내려오셨는데 큰무리가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추궁하면서 논쟁하고 있는 광경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세명의 제자들만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오르셨기 때문에 나머지 9명의 제자들은 산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서기관들하고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를 재미있다고 군중들이 둘러 싸서 보고 있습니다. 원문의 표현을 보면 아마 서기관들이 일방적으로 제자들을 추궁하면서 뭔가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듯합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논쟁이 벌어 졌을까요?
그런데 서기관들과의 논쟁에서 궁지에 몰려있던 제자들은 갑자기 주님이 나타나자 매우 놀라고 또 반가웠습니다. 이제는 궁지에서 놓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시니까 뭔가 기발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실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논쟁에 휘말렸고 궁지에 몰렸을까요?

1.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한 사람이 벙어리귀신 들린 소년을 데리고 왔는데 치유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지금 궁지에 몰려 있는 겁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지금 마구 떠들고 있습니다. 뭐라고 떠드는고 하니 귀신들린 아이를 제자들에게로 데리고 왔는데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더라는 거지요.

원래 그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안계시고 9명의 제자만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아 달라고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일전에 예수님의 권세를 받아 귀신을 쫓아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실상을 알게 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리고는 자기에로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원문에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는 말앞에 “오”라는 감탄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 주님의 탄식과 비통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뒷구절입니다.

2.귀신은 사람이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20절에 보면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원문에는 귀신이 예수를 본 것이 아니라 그 소년이 예수를 보자 귀신이 그 아이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귀신은 아이가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고 땅에 뒹굴게 해서 아이로 하여금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 이라는 말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겠기에 귀신은 그것을 방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귀신에 사로잡힌 이 세상은 사탄의 세력 하에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이지 여기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것을 귀신은 두려워합니다. 왜입니까?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 귀신이 쫓겨 나가고 우리의 믿음이 굳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소년이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자 마자 소년으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고 땅에 뒹굴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귀신이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그 소년은 우리 주님 앞에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 앞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 소년의 아버지가 바라는 소원,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경련하며 땅을 뒹굴며 거품을 물고 있는 소년을 보시며 주님은 묻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글쎄요,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능력의 주님께서 애가 지금 거품 물고 뒹굴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데 당장 고쳐주실 수 있을 터인데 왜 물었을까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가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솔직히 소년이 아픈걸 보고 그냥 고쳐줘도 될 것 같은데..........

3.인간의 마음속에는 원초적인 의심이 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이 미적거리고 있자 아이의 아버지는 속이 탑니다. 그래서 이렇게 간청합니다.“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 말은 원문 상으로는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애가 지금 쓰러져서 거품을 물고 뒹굴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태연하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같은 태평한 이야기만 하시는 걸 보고 아이의 아버지는 주님 역시 제자들처럼 자기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아닐까라는 짙은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상태와 같습니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을 듣고 왔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라는 의심이 한편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제자라고 하는 우리들이 제대로 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주님마저도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적인 시각으로 우리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물고 뒹굴고 있는 아이를 보고 우리들은 어찌해야 할 지를 알지 못합니다. 병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아이가 안고 있는 병은 각자로도 고치기가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귀신들림, 간질병. 어마어마한 병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그마한 아이의 몸에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모두 귀신 때문에 일어난 질병들입니다. 그러나 그 귀신을 어떻게 내어 쫓을 수 있지요?

주님이 안계실 때 우리가 세상의 의뢰를 받고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그런 일들을 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된 거지요?

이전에 그들이 능력을 행했을 때는 예수의 권세를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세상으로 전도대를 보내시면서 그런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산에 올라가고 산아래서 기다리던 제자들에게 그때의 경험과 지식은 존재하지만 권세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권세의 원천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 믿음이 적은 세대여”라고 한탄하시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더 너희와 함께 있어야 겠느냐?” 이렇게 탄식하시는 겁니다. 주께서는 하늘로 돌아 가시고 이제 세상에는 제자들만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지상에 이미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그 사이에도 제자들은 능력을 잃고 허둥대고 있습니다.

4.기적은 논리가 아니라 믿음이다
제자들이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함으로 오히려 서기관들에게 약점을 잡혀 논쟁만 일으키고 그것도 지금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는 논쟁이 아니라 능력이고 행함인데 그 능력도 행함도 나타나지 않고 있거든요. 그러니 논쟁이 될 리가 있습니까? 말발이 안먹히는 거지요.

세상의 법칙,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 기적인데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니까 우리는 법칙과 이성과 경험의 틀을 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논쟁에서 질 수 밖에요. 체험이 없는 신앙은 언젠가는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 이성과 논리라는 함정에 걸리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체험이 없을 때 우리는 의심하고 번뇌하며 결국은 어쩔줄 몰라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조롱거리로 만듭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의심과 불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앞 절에서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이라고 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말에 대한 즉각적이며 단호한 주님의 응답입니다.

굉장하지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언제 들어도 가슴떨리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너희가 귀신을 쫓아 내지 못했니?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야.
우리는 항상 믿음에 대해서 요구받습니다. 더 큰 믿음, 더 확실한 믿음, 더 완전한 믿음, 조금치도 의심하지 않고 인간적인 불가능의 의심을 버리고 전적으로 그리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 말로는 참 쉽기도 하고 간단해 보이지만 믿음이 요구하는 것은 실로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응답에 아이의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믿기만 하면 아이가 나을 수 있다는데 아버지의 의심으로 아이가 나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한글 번역본에는 빠져 있지만 원문에는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 사람은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사람의 주님에 대한 생각이 확 바뀐 겁니다 인간의 선생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못하실 일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답은 오늘 인간들의 기본적인 상태입니다. 믿어야 복을 받는 다는 것을 알기에 믿나이다라고 외치면서도 우리는 아직 인간 이성과 경험과 지식으로 그것이 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의심이 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축사 명령이 떨어집니다.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
여기서 주님이 하신 첫 번째가 바로 귀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것입니다. 이 귀신은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이거든요. 거라사 지방의 귀신은 ‘군대’라고 이름했지만 이 귀신은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입니다. 주께서 이름을 부르며 명령하실 때 귀신은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내가 네게 명하노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내가’ 는 ‘에고’라는 단어입니다. 에고, 뭔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 즉 여기서 말하는 “내가 ”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인 내가  명하노니’ 인 겁니다.

귀신을 쫓아 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 주님의 권세가 필요합니다. 기적을 일으키기를 원합니까? 기도하십시오. 기적이 임하기를 원합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불가능은 우리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5.우리는 왜 못합니까?
귀신이 나가고 그 아이가 정상으로 돌아 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 말은 미완료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즉 한두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제자들이 주님에게 이렇게 물었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안될까요?

우리 역시 마찬가집니다. 주님의 제자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귀신을 내어 쫓고 기적을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안될까요? 성경에는 믿기만 하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되어 있는데 왜 안됩니까? 안되는게 왜 이렇게 많습니까?

제자들은 이전에 전도대로 파송받을 때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받았고 그동안 여러번 귀신을 쫓아내 봤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될 줄 알고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왜 안됐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의 답이 그 유명한 말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 외에는 능력이 나갈 수 없다. 이 말은 기도 외의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전처럼 귀신을 쉽게 쫓아 낼 수 있을 줄 알고 시도했다가 안되자 기도 외에 다른 이교적인 방법까지 동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기도를 강조하신걸 보면 아마 이 당시에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의 실천사항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도 이 기사의 병행기사가 있는데 여기서는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이 적은 것’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말이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6.믿음 그리고 기도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한다는 것은 이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어서 현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결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하지 않는자들’을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간다면 믿음이 적은 것은 믿음의 양이 적다는 말도 되지만 믿음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희한한 논리같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그 정도로 순도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그 위급한 순간에 소리 질러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외쳤겠습니까?

모순입니다. 믿는다고 소리쳐 놓고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니?
믿고는 싶은데 인간인고로 때로는 믿음이 없어질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의심이 들고 회의와 불신의 두려운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가슴에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왜 이랬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 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논리가 궁해진 제자들이 서기관들의 무차별적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제자들의 참상이 생각나면서 주님에게까지 불신의 마음이 자꾸 불쑥 불쑥 드는 것입니다.

그래요 믿음을 논외로 치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 낼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지식으로는 안되는 겁니다. 앞뒤가 맞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말로 해서 제자들이 지금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님은 “너희는 결코 내가 준 능력을 사용할 수 없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우리는 마귀를 쫓아내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우리의 주,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만을 믿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 능력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실히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적은 두뇌와 경험과 이성과 논리가 소위 말하는 ‘과학적’이라는 말이 우리의 사고가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의 존재를 불가능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이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주님이 세명의 수제자들과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천상의 신비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이에 산밑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해서 서기관들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우리의 주님을 의심합니다. 할 수도 있지만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반신반의 상태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사역을 시작하고 얼마 있다가 산기도를 자주 갔습니다. 산기도를 다니는 중에 뭔가 굉장한 체험을 한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저그런상태입니다. 나의 기도가 하늘보좌에 상달되었는지 아닌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밋밋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게 쌓이고 쌓여서 어느 정도가 되자 그때부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을 제가 똑똑히 보았고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에는 수많은 성도들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산기도만이 기도는 아닙니다.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세상과 단절하고 하나님과만 영교하기위해 산에 그것도 밤에 올라간 것 뿐입니다.

누구는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산위에서 산아래를 지향’합니다. 神仙할 때 仙자는 ‘산에 사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산아래 계곡은 俗이란 말입니다. ‘계곡에 사는 사람’ 속세를 말합니다. 우리가 산위에서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하나님과 영교하는 것은 산위에서 그냥 우리만 행복하고 말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산 아래 비참한 현실에 처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참된 평안과 행복을 주기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남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그 속에 속해야 할 우리에게도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면 인간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기쁘고 즐거운 것은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을 교회밖으로 퍼져나가게 해야 할 당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고 즐거운 기쁨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걸 먼저 보여 주어야 세상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믿습니다. 아, 그렇구나!

주님을 따라 올라갔던 세 제자는 변화산 위의 광경이 너무 좋아서 여기서 초막셋을 짓고 영원히 살자고 말했습니다. 산 아래서는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서기관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려있음은 알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믿음이 적어지고 믿음이 적어졌다는 것은 그 안에 , 믿음이란 단어 안에 불신, 의심이라는 불순물이 끼어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곧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순도 100%가 안되면 그게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어느 때는 믿어 졌다가도 어느 때는 믿어지지 않아? 그렇다면 그건 당연히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가 소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의 행위에는 어떠한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게 이상한게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의심과 불신이라는게 발목을 잡기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네 믿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합니다. 예수가 별거냐고 공공연하게 외칩니다. 이때를 틈타 마귀는 성도와 교회를 공격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제자된 우리가, 자녀 된 우리가 이 땅에서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들린 귀신의 형태는 귀먹고 벙어리된 귀신입니다. 게다가 이 아이는 간질에도 걸려 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재앙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오늘날 세상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모습입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으면서 툭하면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땅을 뒹굴며 거품을 내뿜고 경련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평소에도 귀먹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게 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들려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땅을 뒹굴며 발작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존엄이 모욕받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몸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귀신들린 소년이 예수님을 쳐다보자 귀신은 예수님을 더 쳐다보지 못하게 바로 발작을 일으켜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며 귀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주여 내가 믿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

우리는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도저히 손을 쓸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은 너무나 부족하고 우리의 능력은 너무 적습니다. 이런 굉장한 질병과 귀신들림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왜냐면 사람안에 있는 귀신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놔두지를 않거든요.

주님이 없을 때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귀신들린 자의 아버지가 청했을 때 그들은 흔쾌히 수락하고 축사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서기관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입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적은 것은 믿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지 않고 기도외의 다른 방법으로 귀신을 내보낼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것과 믿음이 없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심한다면 그건 안믿는다는 말이쟎아요.

우리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땅에,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빈자리에 세상의 의심과 불신과 염려와 불안이 스며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함으로 능력있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보고 세상은 우리 주님을 판단합니다. ‘네가 능력이 없으니까 스승도 별 볼일 없을 수 있어’라고 판단하도록 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능력을 나타내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됩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주님의 사명을 띠고 세상에 나올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발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유지하려면 기도하십시오. 나의 의심과 불신을 없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어느순간에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반신불수의 비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또 기도하십시오.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2월 10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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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조용히 기도합니다. 반신불수의 비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기를 조용히 기도합니다. 결단하고,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하나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라면 "사랑"이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라면 "믿음"이겠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한 장면으로 잠시 가봅니다. 대심문관이 예수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제가 압축한 것입니다.

대심문관 ::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네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준다고 사람들이 외칠 때에, 너는 끝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지. 너는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지. 기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믿음을 너는 원했던 거야.

좋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기적적인 모습이 당장 눈앞에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어도 산밑에 남아 있던 아홉 제자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교적인 방법을 동원한다거나, 기도하지 않고, 자포자기 해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무기력한 모습이 될테니까요. 그러면 정확히 이와 반대로 한다면 되지 않을까요. 오직 기도만이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믿음을 구하며, 노력해 나가는 것. 그래서 마침내 기적 없이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게 될 때, 그 인생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조건을 걸고 내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신다면, 더욱 신뢰할께요. 라는 식이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미약한 믿음과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순간에서라도 선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있어야 할 곳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며, 괴로운 일을 겪을지라도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주실 것이라는 작은 믿음입니다. 찬란하고 신비한 기적을 갈구하는 것 대신에 우리가 겸손하게 기도를 먼저 해나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삶에서 아름다운 기적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요즘 제발 도와달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이렇게 힘든 순간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을 뜰 때마다 무능하게 밥벌이에 시달리는 모습 앞에서, 실망감에 머리를 흔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간신히 버텨가는 시간을 통해서도, 어떤 계획하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가 함부로 삶을 못났다고 자학하지 말아야 할 중요할 근거이기도 합니다.

할 수 없다고 자꾸만 생각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까닭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야말로 하나님과의 소통이며, 연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놀라운 일들을 해나가지 못하고, 현실 앞에서 맥없이 쓰러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인생은 그 어떤 인생보다도 아름답고 귀중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믿음이며, 기도일 것입니다. 힘내세요. / 2013.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