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에는 통렬히 가슴을 뒤흔든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흔들리는 마음 안에서 떠오르는 장문이 있었습니다. 작가 루쉰의 글,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 입니다. 글 속의 그녀, 노라처럼 용기를 내어서, 어려운 결정을 하고, 홀로서기를 결심하였을 때, 과연 그녀는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이지요. 그리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권이라고 루쉰은 못박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굶어죽는다는 의미 입니다.

 

 용기만으로는 세상의 틀을 바꿀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기존의 가치관은 견고하며, 자신은 그 앞에서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지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주인공 우마이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결단하고, 홀로서기를 결심한 여인입니다. 그녀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랜기간 고민해왔던 인간의 홀로서기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야기 출발합니다.

 

 

 우마이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가 못합니다. 남편은 손찌검을 하고, 아이한테도 상냥하지 못합니다. 더욱 압권인 것은 이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식으로 치면, 시댁살이를 하고 있는 우마이는 지옥의 시월드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 편은 어디에도 없고, 마침내 그녀는 용기를 냅니다. 비행기 티켓을 끊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호합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리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빠른 전개와 몰입감을 보여줍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어쩌면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혼하면 되지!" 하지만 가족의 결속을 중요시 여기고,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터키계 독일가정 (이슬람권의 가정) 에서는 이혼이란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어지간하면 참고 살라고 달래며, 돌아온 친정에서는 우마이를 설득합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꿈은 포기하고, 가정에 충실하라고 말이지요. 우마이는 단호합니다. 나는 불행해요.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에요. 이제부터, 우마이는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이방인"으로 낙인찍혀가는 과정이 밀도 높게 펼쳐집니다.

 

  이 영화 내내 가슴 아픈 장면은, 가족과의 불화 입니다. 우마이는 아무리 가족을 사랑하고, 소통하려고 해도, 점점 가족과 조금씩 멀어져 갑니다. 그녀는 가족에게 문을 두드릴 때마다, 깨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처럼, 자신의 마음이 쩍쩍 갈라지는 참혹한 경험을 합니다. 그나마 자신의 편이라고 믿어왔던, 엄마도, 여동생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고, 나중에는 우마이가 귀저기를 갈아가면서 키웠던 남동생 마저도, 자신에게 차갑게 등을 돌립니다.

 

 철학 박사의 데뷔작, 젊은 페오 알라다그 감독의 두 키워드를 빌려오면, "관용과 이해"가 없어지면, 한 인간은 어디까지 추락하게 되는지 무섭게 보여줍니다. 우마이는 결격 사유를 가진 인간이 되어서, 정처 없이 고향 독일의 거리를 방황하게 됩니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론에 써 있듯이, 이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녀에게는 지금 사랑하는 아들까지 있으니까요. 다행히도 그녀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묵을 곳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대목은 이제부터 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자유를 얻었음에도, 이 불완전하고, 소통 없는 자유는 그녀를 조여옵니다. 천진난만한 아들은 묻습니다. "왜 우리는 식구가 없어요?" 우마이는 차마 자신들이 버려졌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이토록 냉혹하기 때문에, 우마이는 거의 웃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괴로움은 어떤 느낌일까요?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고독과 슬픔" 입니다. 우마이가 가족과의 관계를 쉽사리 끊어버리지 못한 것도, 어떻게든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정확히 이 희망은, 그 자체로 고문이 됩니다. 우마이는 용기 있는 여성이었지만, 동시에 섬세하고 마음 약한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우마이 역을 맡아서 열연한 시벨 케킬리의 연기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합니다.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도 좀처럼 감상에 젖어들지 않는 우마이, 이렇듯 상처받은 가슴을 여실히 표현하는 장면은 여운이 강하게 맴돕니다.

 

 가슴에 먹먹한 응어리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토록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광경을 봐도, 아무리 재밌는 영화를 보고, 좋은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해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응어리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원인이 될 때, 그녀에게 펼쳐져 있는 세계는...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느낌입니다. 나무는 서 있고, 풀잎들이 나뭇가지에 간신히 붙어있지만, 불어닥치는 강풍에 쉼없이 흔들리고, 불안에 파르르르 떨리고 있습니다.

 

 우마이의 인생이 지금 그러합니다. 그녀는 간신히 생을 지탱해 나가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인생입니다. 사회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어떤 특정한 축을 중심으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구조 속에서 약자가 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어느날 우마이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의미이기도 합니다. 용기를 내어서 결정을 했는데, 이방인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요.

 

 이런 의미에서 개인과 공동체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아마도 개인을 버리고 공동체를 선택할 것이라는, 영화 속의 통찰력 넘치는 대사는 놀랍게까지 들립니다.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직시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을 구하고자, 공동체를 뛰쳐나오는 행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마이 아버지의 마지막 대사는 심금을 울립니다. "미안하다." 공동체를 위해서, 딸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자책감이 묻어나는 대사는, 오늘날 많은 가장들의 대사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공동체를 떠남으로서, 많은 것들이 뒤틀어졌습니다. 한 마디로 깨끗하고 남보기 좋던 집안이, 먹칠에 콩가루 집안이 되어 버렸지요. 우마이도 불행했고, 식구까지도 불행해집니다. 그리고, 끝끝내 소통하지 못하면서, 영화는 무겁게 막을 내립니다. 또 다시 감독의 키워드를 빌려와야 겠습니다. "상호 존중과 화해의 기회" 이것이 없다면, 그 누구도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최근에 자주 쓰는듯 한데) 서로 잘났다고 으르렁 대면, 행복해 질까요? 전혀요. 서로 싸우고 꼴도 보기 싫다면서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사람 치고,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던 것 같습니다.

 

 비극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조금만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줬더라면 어땠을까요. 좀 더 일찍 미안하다고 말하고, 조금씩 그녀의 생활을 도와줬더라면 어땠을까요.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너는 소중한 내 딸이다 라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요. 저는 문득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무슨 나쁜 짓을 한 적 없고, 아무도 나에게 무슨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물론, 영화 속에서는 새로운 남자친구가 우마이를 도와주려는 장면과, 또 우마이의 친구도 그녀를 세심하게 잘 챙겨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녀가 좋아했던 가족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우마이가 했던 일들이 정말 나쁜 짓이었을까요? 또 한 가지 더. 가족이 공동체를 내던지고, 우마이를 도와야 했을까요? 여기까지 오게 되면,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나쁜 인간은 없다, 인간을 나쁘게 만들어 버리는 사회 구조가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 구조를 그대로 놔두면, 영원히 상처받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그렇게 멍들어 갈 것이다. 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영화의 주연배우 시벨 케킬리는 이슬람 여성의 인권을 위한 기구를 실제로도 후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잘못된 현실을 방치하면, 좋은 사람들 조차도, 피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 그녀가 떠날 때 였습니다. 언제나 좋은 영화를 잘 권해주는 따뜻한 지인분께 감사를 소박하게 전하며. / 2013. 02. 리뷰어 시북.



by 시북 2013.02.08 1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