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말이지 않을까요. 알려져 있듯이, 우리 몸은 정말 신기합니다. 뇌를 다쳐서 기억에 손상을 입어도, 몸은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있어서, 자전거를 탈 수 있고, 심지어 운전까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이 비밀을 정말 그대로 재현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억을 다치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했던 추억들은 몸 속 깊은 곳 어딘가에, 혹은 몸의 세포 하나 하나에 새겨져 있어서, 우리는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매력적인 스토리가 돋보이는 이터널 선샤인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묘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도 참 좋지요. 아니, 이 영화는 우리의 환상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 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상처 주고, 상처 받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행복하게 이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라는 감정 말입니다. 깨끗하게 잊을 수가 없어서, 미련이 자꾸만 남아서... 영화에서 이 두 사람은 기억을 없애버리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고 싶어했습니다. 그리하여 짐 캐리(조엘)의 새로운 하루는 시작됩니다.
이건 꽤 놀라운 일인데 (※과장을 한 것이 없음을 꼭 밝혀두고 싶습니다), 분명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대략 8년전 쯤 어느 날, 극장에서 봤었습니다. 그래서 스토리라인을 어느 정도 이미 알고 있었고, 짐 캐리의 열연과 케이트 윈슬렛의 미모, 눈밭에 누워있는 유명한 장면들도 충분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여기서부터입니다.
14일 새벽4시45분부터, 맨유와 레알의 챔스16강 경기가 있었습니다. 화제를 모으고 있었고, 그래도 이 경기는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가급적 보려고 마음 먹고 있었지요. 밥벌이를 겨우 다 끝마치고, 시간은 14일 새벽 2시쯤을 향해가고 었습니다. 2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밥을 챙겨 먹고, 오랜만에 추억의 명작을 다시 챙겨보자 하고 고른 것이 이터널 선샤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부터 큰 충격을 받았지요 (...)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발렌타인데이 이야기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였고, 이 영화가 이와 관련이 있었는지, 저는 정말로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8년전에 한 번 본 영화의 시작이 어떻게 되는지 기억한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14일날 새벽에, 많고 많은 영화 중에, 신기하게도, 발렌타인데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영화를 골랐습니다. 아마 무의식 깊은 곳에는 남아 있었겠지요. 이 영화의 도입부가 말이지요. 몸은 정말로 기억하고 있나 봅니다. 아니면 혹시 운명인지도요? (웃음)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들은 몸 어딘가에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운전을 한 번 익히면, 죽을 때까지 감각이 몸에 남듯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10년 넘게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는 중년의 사장님 한 분 계셨었는데, 며칠 정도 다시 운전해 보더니, 그 뒤로는 누구보다 안정감 있게 운전 잘 하시더라고요.) 좋은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들도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참 놀랍습니다. (반대로 PPL 같은 드라마의 간접광고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면, 무서운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하하.)
어서 영화로 들어가서, 남자주인공 조엘은 착하고, 성실하며, 바른 생활을 좋아하는, 즉 사람 좋은 인물입니다. 차가 긁혀있어도 땡큐라며 화낼줄 아는 진정한 멋쟁이지요. 그런 그가 갑자기 무엇인가에 강하게 끌린 듯, 특정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는 이렇게 충동적인 여행을 하는 타입이 아님에도, 몸이 저절로 그렇게 이끄는 것 처럼, 그는 기차에 몸을 싣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조엘은 그와 정반대의 인물, 클레멘타인을 만나지요. 화려하고, 적극적이며, 감정적인 그녀는 매력적이고, 달콤한 솜사탕 같습니다.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한 느낌도 가지고 있지요. 그 느낌을 참 잘 살린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리하여 서로 강하게 끌린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연인이 되어갑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은 기차에서 만나기 훨씬 전에도 연인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장점으로 보였던 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콩깍지가 사라져 가면서, 단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걷잡을 수 없는 충돌로 변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깨지고 만 것입니다. 홧김에(?) 이들은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에 찾아가서 기억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어쩐답니까. 기억을 지워봐도, 사랑하는 마음은 지워지지 않아서, 두 사람은 그렇게 기차에서 다시 만나고, 또 끌리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쯤에서 로맨틱한 한마디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운명적인 사랑"
이터널 선샤인에서 재밌었던 부분을 생각해 본다면, 바로 짝퉁 조엘의 등장입니다. 이 짝퉁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환심을 얻고자, 마치 조엘처럼 행동합니다. 대사도 완전히 똑같이 따라해보고, 선물도 그녀가 딱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줍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짝퉁을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밥이나 한끼 하자고 말해준다면 그 식사가 무엇이 되었던 즐겁지 않을까요?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사줘도, 저라면 그거 먹다가 얹힐 것 (체할 것) 같습니다 (웃음)
결국 대사보다,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인 것입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밥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것이 행복인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겠지만, 전문적 연애기술을 압도해버리는 것이 "그 사람이 좋다"라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입니다. 내가 평소에 싫어하는 행동인데도, 그 사람이 하면 어쩐지 용납이 되고, 괜찮은데 라고 생각되면, 사랑에 눈먼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게 필요합니다!
마지막까지도 영화는 가슴 먹먹한 감동을 줍니다. 두 사람은 이제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연인이 되고, 좋은 시간을 보낼지 모르나... 시간이 흐르면, 또 싸우고, 또 상처받고, 또 깨질텐데... 라는 진실 앞에 두 사람이 섰습니다. 그 때,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합니다. "괜찮아" 라고... 그리고, 이 순간이야 말로 영화 제목처럼 "영원한 햇살"이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나중에 잘해줄께, 예전에 우리 좋았었잖아..." 어쩌면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좋았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좋아야 합니까? 글쎄요, 그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일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을 내 뜻대로 해야 한다는 이기심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잘해줄께 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상처받을 때가 언제일까요? "지금은 바빠. 알잖아 일이 많아." 이러면서 상대방에게 희생을 강요하기 시작할 때,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로가 이해심을 가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대방의 감정도 충분히 헤아릴 것, 그래서 충분히 서로 공감을 얻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만난지 10년이 넘어가도, 그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통은 그렇게나 중요한 것입니다.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기억을 지워도, 우리는 결국 같은 상황에 서면, 똑같이 행동하고 맙니다. 무서우리만큼 잔인한 진실이지요. 그래서 고통 앞에서, 힘들더라도 마주하고, 이겨내고,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조엘처럼, "괜찮아" 라고 말하며 좀 더 노력하는 방향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이것을 고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영화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누군가는 불륜에 빠지고 크게 상처받고, 또 다시 불륜에 마음이 가게 됩니다. 이번에는 다르고 특별할꺼야 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크게 상처 받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현실을 볼 것입니다.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직시할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다른 노력을 해볼 것이며,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고, 그 의식이 선명하게 있다면, 우리는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며, 따라서 잊어버리고 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위험합니다. 망각은 축복일 수 있지만, 동시에 덮어놓고 망각해 버리는 것에 취하기 시작하면 저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상처받고, 속상하는 일을 겪고, 때로는 처참한 실패를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발판 삼아서, 더 멋진 일들을 도전하고, 경험하고, 노력해 나갈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뷰를 마치며, 우리 모두의 인생에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괜찮아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요, 다시 또 노력해 보면 되는거니까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 되는거니까요. 두 번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멜로 영화, 이터널 선샤인 입니다. / 2013. 0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