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2월24일/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요한복음1:4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2. 26. 23:56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2월 24일 주일 예배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 (요한1:43-)

오늘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다는게 매우 어렵습니다. 한때는 교회를 세우기만 해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대부분의 교회가 부흥하는 놀라운 부흥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이러한 부흥의 역사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부흥한다고 큰소리치는 교회는 부흥이 아니라 남의 교인들이 옮겨온 것 뿐입니다. 이를 우리는 수평이동이라고 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교인쟁탈전?
본래 한몸인 교회가 여기 저기 사람들의 편의와 목회의 효율을 위하여 흩어진 것 뿐이므로 한 몸안에서 여기 저기로 교인들이 옮겨가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요즘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새롭게 예수를 믿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만 어려운게 아닙니다. 옛날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처음 교회를 세우실 때에도 마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이미 기존의 유대교가 부패해서 백성들보다 자기들의 개인 욕심을 위해서 종교를 파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라는 거대한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었지 새로운 주님의 가르침이 제대로 퍼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실 때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 두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그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와 요한은 이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서 안드레와 요한은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의 형제를 데리고 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입니다. 이들에게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이들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제자는 모두 네명이 된 겁니다. 두 집안의 형제들이 주님을 따르게 된 겁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주님을 약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좌우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걸로 기대했기 때문에 주를 따른 겁니다. 첨언하자면 야고보와 요한 역시 예수님의 친척입니다. 이종사촌.

가난한 갈릴리에서 도저히 날 수 없는 ,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난 듯한 예수님을 따르면 부귀와 영화가 끝이 없을 것 같기에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주님을 따른 겁니다. 가문의 영광이지요.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우리 주님이 만드신 교회는 처음부터 약간 불순한 동기로 이루어진 겁니다.

그런데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입니다. 그리고 처음 두 제자의 형제들이 가세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교회를 세울때의 순서는 친척들입니다. 혈연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출세의 개념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를 도왔는데 정작 예수님의 친형제들은 주님을 외면했다는 겁니다. 뭐라고 할까요 앞에 표현대로 한다면 예수님은 개천에서 난 용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나중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의 형제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고 승천하실 때 까지는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예수님이 집회하시는 곳에 찾아 와서 그를 잡아 가려고까지 했습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참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데 집에서 그를 잡으러 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합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형제들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 형제 아무개가 살짝 맛이 가서 집을 가출해서 속을 썩이니 집에 데리고 가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겠다.” 만일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설교가 믿어 질까요? 아니지요. “괜히 속을뻔 했네!” 하면서 모두 돌아 설겁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이 들으면 황당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제정신으로는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할 리가 없지!”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을까요?

원래 형제들 사이에서는 이렇게나 믿기 어려운 겁니다. 왜냐면 그는 분명히 자기의 형제고 내가 그의 어릴 때와 인간적인 모습을 다 알고 있는데 거룩한척 한다고 생각할거 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생판 남인 사람보다 믿기가 더 어려운 겁니다. 더구나 그 형제가 형이나 오빠가 아니라 동생이라면 더 믿기 어렵습니다. 서열을 중시하는 가족 간에 자기의 아랫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형인지 동생인지를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히브리어는 단순히 형제라는 말만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큰형인 것 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저와 몇몇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래도 동생이지 않나 하는 겁니다. 막내 동생? 뭐 그건 오늘 다룰 부분은 아닙니다. 더 연구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본문은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란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마치 갈릴리 바닷가에 바람쐬러 집을 나서다가 우연히 빌립을 만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원문을 자세히 살피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언고 하니 이제 큰일을 하려고 자기의 근거지를 옮길 결심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큰 결심을 하고 자기의 근거지를 옮길 결심을 했을 때 주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결심을 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큰물로 가려고 한게 아닙니다. 그는 갈릴리로 자기의 근거지를 옮길 결심을 한 겁니다. 요즘말로 하면 ‘빈민들을 위하여 살 것을 결심하고 빈민가로 들어간다’쯤 될까요?

예수님은 사역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행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건너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셨지요.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버나움이나 가이사랴 빌립보같은 지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는 공생애기간에는 겨우 유월절 기간에만 올라 가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주님의 행보는 정말 이상합니다.

한나라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키기위해서는 수도를 먼저 장악해야 할 터인데 주님은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시고는 수도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죽으시기전에 계속해서 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내가 죽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인간들의 상리에 어긋납니다.

실제로 갈릴리는 유대지역과는 달리 분봉왕 헤롯의 지배를 받는 곳으로 로마의 총독이 직접 다스리는 유대지역에 비해 이류지역입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도 유대가 중요하니까 총독을 파견해서 직접 다스리는 거지요.

여하튼 갈릴리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며 대다수가 어업과 목축업에 종사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지역에서 주님은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려 결심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이 이곳에 오신 목적이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이제 네명의 제자를 거느리신 주님께서 초기 교회형성을 위한 준비를 마치시고 본격적으로 갈릴리에서 사역에 나서기로 결심하셨을 때, 바로 그즈음에 주님은 빌립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때 주님은 다섯 번째 제자가되는 빌립을 보시고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베드로와 한동네 사람입니다. 벳세다 사람인 거지요. 자 주님의 전도사역이 처음 ‘친척의 소개’, 소개받은 ‘제자들의 형제’, 그리고 이제는 ‘기존교인들과 같은 마을 사람’으로 점점 폭이 넓어 집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우리 주님이 마치 길을 가다가 누구를 우연히 보고 그에게 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사람들이 즉시 모든걸 버려두고 주를 좇은 걸로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이건 상당히 문학적이거나 극적인 표현입니다. 실제로는 전도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임에도 불구하고 전도는 그렇게나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도 몇 번이나 주님의 제자가 되는걸 포기하고 뛰쳐나갔다가 물고기 이적을 보고서야 비로소 주를 좇은 걸 알 수 있는데 이제 비로소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직접 우리 주님께서 빌립을 전도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것도 성경에서 멋있게 간략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그냥 단순히 길거리 전도가 아닙니다. 빌립이란 이름은 ‘말을 사랑하는 자’란 뜻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빌립 역시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것이고 베드로와 안드레와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을 걸로 추정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는 같은 마을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주님을 따르게 된 다섯 번째의 제자 역시 소위 말하는 관계 전도인 셈이고 기존 교인들과 연결고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다음입니다. 이렇게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난 다음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그의 친구를 찾아가서 전도를 한 일입니다.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가서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비로소 제자들은 형제가 아니라 친구를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따지고 보면 복음의 확산이 그렇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도 자기의 형제에게 예수님을 전한 것이지요. 내가 만난 예수님, 우리가 고대하던 바로 그 메시야를 만나 감격을 도저히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서 자기하고 가장 가까운 이에게 나누기를 원하는게 바로 전도의 시작입니다.

나다나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다나엘은 바돌로매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본명이고 바돌로매는 별명인거지요. ‘바’는 ‘~의 아들’이란 말이기 때문에 ‘돌로매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붙이면 돌로매이 아들 나다나엘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이런 식이지요.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가서 뭐라고 했을까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어때요? 단순하지요? 성경에 기록된 그이를 만났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겁니다. 교회에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교인들의 입장에서도 진실된 목회자와 교회를 만나기가 참으로 어려워서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믿고 싶은데, 교회는 가고 싶은데 도데체 어느 곳에 나의 영적인 면을 맡길지 확신하지 못해서 안절 부절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 둘이 만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주님이 네명의 제자단을 만드시고 갈리리 사역을 결심한 그때 빌립을 만났고 빌립은 주님을 만나자 마자 자기의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와서 그가 메시야라고 소개하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를 따르면 부귀와 영화가 따라온다. 아니면 예수를 따르면 출세를 한다. 아니면 예수를 따르면 병이 낫고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다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나다나엘이 바로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함으로 그의 전도를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 역시 내가 정말 진실된 목회자를 만났다. 내가 정말 천상의 공동체 같은 교회를 만났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출신지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출신이란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첫마디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당시 나사렛은 로마군의 주둔지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일종의 외국인 기지촌입니다.

그래서 당시 나사렛의 여인들은 12~3세에 조혼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군의 행패를 피하기위해서. 당시 나사렛인이라는 것은 멸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의 입장에서는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난다는 사실은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일언지하에 빌립의 전도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때 빌립의 대응은 간단합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단 한마디 “와 보라”

사실 이 본문은 안드레와 요한이 주님이 어디에서 사시는지를 물었을 때와 비슷합니다. 이때 주님은 “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빌립도 주님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나다나엘을 말로써 설득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와 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기독교인의 삶, 교회의 행동에 자신이 있어야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와 보라
그래요, 이러니 저러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곧 전도가 될터이니까요.

일단 경험해보고 판단해 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빌립이 예수님을 보여 주기만 하면 나다나엘의 마음이 저절로 움직일 걸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로 나가는 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사실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정말로 순수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착한 사람임을 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 뒤에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까지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깜짝놀라며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여기에 주님이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는 말로 답하십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았다’는 말은 일종의 관용어구입니다.

옛날 유대에서는 무화과 나무가 유대의 번성을 상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게다가 무화과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무더운 유대에서 햇볕을 피해 율법을 배우고 기도하는것이 경건한 유대인들의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았다는 말은 그 역시 메시야를 소망하면서 무화과 나무 아래서 율법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자 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처음 빌립의 전도를 받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말로 시작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는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왜냐면 자기가 평소에도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기도하고 말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잘 아는 신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보고 나다나엘을 바로 그가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빌립의 전도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습니다.

백마디 말보다 그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체험한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말로 뭐라고 우리 주님과 기독교를 전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선입견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모든 나사렛 사람이 다 천하고 비루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다나엘의 첫마디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였습니다. 그런 상대방에게 예수님이 어떻고 저떻고 해봐야 먹혀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고 보아야 자기의 생각을 바꾸고 주를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말씀으로 끝을 맺으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그래요,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의 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주님을 소개할 때 우리는 당당하게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일단 우리 주님의 거대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체험하게 되면 어떠한 사람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거든요.

51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에서 진실로 는 아멘을 번역한 말입니다. “아멘 아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을 보통 우리의 기도 끝에 그대로 이루어지이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멘이 앞에 쓰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이 진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거든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봅니까? 전도방법? 아니면 예수님의 능력? 우리를 다 알고 계시는 그분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감탄? 바돌로매가 나다나엘이라는 사실? 글쎄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와 보라”

우리가 똑똑하고 지혜가 많을수록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 상대방과 논쟁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에서 이길 자신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자신감으로 논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압도한다고 해서 예수를 믿게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예수의 제자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믿는 수동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해야 하는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믿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체험해야 합니다. 그가 직접 그리스도의 향기를 체험하고 느껴야 하며 그 향기속에 자신을 온전히 내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안믿는 자에게 자신있게 소개할만큼 그렇게 당당합니까? 세상의 어떤 모임보다 공동체 보다 더 멋있고 필요할 곳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저도 요즘 고민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다르다고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과연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나?”스스로 돌아보며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목사라면 조롱하고 싫어하는 세상사람들도 많지만 반대로 아주 거룩해서 전혀 인간적인 냄새도 없는 성자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과연 제가 그런 목사인지를 스스로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지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요 옛날에는 교회에 갈 때 성경찬송을 들고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뭐 이걸 자랑하려고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떳떳할 자신이 있어서 들고 다니는 겁니다.

이런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예수믿는 사람이오. 내가 목사요 이렇게 하고서 자기의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세상사람들하고 피터지게 싸우기가 곤란하겠지요? 이기적이거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가 곤란하겠지요? 혹시라도 십자가를 드러내면 사람들이 나에게 손해를 강요하고 희생과 양보를 강요하고 또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것에 따를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게 싫어서 십자가와 성경을 꼭꼭 숨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또 이런 고민도 있습니다. 빌립의 말처럼 와보라고 자신있게 소개할 수가 있을까하는 걱정 다음으로는 내가 주님 앞에서 과연 나다나엘같은 후한 평가를 받을 수가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이는 참 한국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 이런 평가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어때요? 자신있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보게” 된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싶고 신비를 경험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쉬운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그 속에 간사가 없으면 됩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상고하며 기도하면 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됩니다.

우리 모두 오늘 설교 후에 나 자신을 한번 둘러 봅시다. 내가 자신이 있나?
내가 믿는 그 예수님을 소개할 자신이 있느냐?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을 욕하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느냐?
나 때문에 사람들이 그 예수 나도 좀 믿자고 말하게 할 자신이 있느냐?

어떻습니까? 여러분
저는 우리가 정신없이 생존을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는 가운데서도 이런 질문을 한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와 보라”라는 말은 기독교의 실체를 가장 잘 나타낸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다는 것이 건물이나 외양을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분은 3000억짜리 교회를 지어서는 사람들에게 ‘와 보라’라고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지금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대신에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을 보여주려고 했거든요.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을 보여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말이지요. 아무런 장식이나 화려함이 없어도, 심지어 인간적인 면으로는 초라해 보이는 건물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해지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 주라는 말이지요.

어때요? 자신 있습니까?
없다면 와 보라고 하기 전에 나를 먼저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리고 와 보라고 외치면 됩니다.
있다면 자신있게 친구에게 소개합시다. 내가 믿는 예수, 내가 속한 교회를 자신있게 보여줍시다. 사실 아직까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 중에 무려 9%나 가정에서 동료와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와 보라고 자신있게 공개할만한 교회와 목사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다시 한번 이땅에 풀뿌리 교회와 풀뿌리 신앙운동을 시작합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내가 이미 내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그리고 기도했다면 이제 내가 만난 그 예수, 내가 속한 그 교회를 힘차게 전합시다. “와 보라”

모든 인간의 논리와 선입견을 파괴하고 스스로 체험하고 느끼게 만드는 ‘와 보라’라는 말을 자신있게 이야기합시다. 그래서 이땅에 다시 한번 초기의 신앙을 회복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하고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와 보라”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2월 2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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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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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10년은 더 지난, 아주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내 봅니다. 제가 야학에 있던 시절에, 제가 무진장 좋아하던 신모 선생님은 유독 종교에 호의적이었습니다. 불교신자임에도,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기독교방송도 한 번씩 본다고 말하던 하이브리드형(!) 종교인이었지요. 물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독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케이스라고 생각됩니다. 이후에도 야학 시절에는 무교임에도, 야고보서 같은 언행일치의 내용을 좋아하는 선생님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유심히 되짚어보면, 결국 이 땅의 교인들은 성경을 보지 않고, 성경을 지키지 않으며, 별로 언행일치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괜히 교인이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당하기 싫어서 였는지도 모릅니다. 지나치게 착해서, 오히려 속고, 피해보는 사람들도 저는 가끔 보게 됩니다. 왜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 그 신모 선생님은 어느 날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좋은 말 아무리 떠들어도 뭐하겠니, 결국 그 행동에 자신의 신념이 묻어나야, 그게 교인이라 할 수 있는거 아닐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말, 앞으로도 잊지 못할 그 말, 신앙을 자신의 몸으로 증명해야지, 말로 증명하는 게 아니라는 그 이야기는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겸손한 태도가 말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온화한 태도가 말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가령, 최근 본 어느 영화에서 처럼, 난 멀쩡하고, 제정신이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물건을 냅다 던진다면? 이처럼 말은 때때로 전혀 부질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훨씬 어려운 요구가 되겠지만, 교인이라면 결국 행동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다 불법에 손을 묻히면서 좀 더 편안한 길을 갈 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도 안 하는 태도. 정말 아니다 싶은 일들 앞에서는 아니라고 말하는 태도 (쉬운 예로는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 말하는 험담에 대해서 이 이야기 그만하자고 하는 행동) 이렇게 작은 부분에서부터 올바른 선택들이 모여갈 때, 우리는 마침내 "와 보라"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거 아니겠어요.

제가 조금 비판적으로 썼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많은 따뜻한 교인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회라는 곳이 결코 나쁜 사람들만 있는 모임은 아닙니다 (...) 다만, 좀 더 행동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로서 계속 떠든다고 해서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키지도 못할 달콤한 말들을 열심히 하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 다르게 행동하는 이상한 행태에 모든 사람이 지금 질려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시대에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다듬어 나가는, 더 멋진 교인들이 가득한, 그런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행동들이 조금씩 모이다보면, 변화는 분명 시작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 2013. 02. 시북.